|
출처: 김해김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죽산
1.金寧君遺蹟 금녕군(김목경) 유적 상주 화북면 장암리
2. 高麗三重大匡金寧君金海金公神道碑銘 고려 삼중대광 금녕군 김해김공(김목경)
신도비명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3. 高麗三重大匡金寧君墓碑銘 幷序 고려 삼중대광 김녕군(김목경) 묘비명 병서
高麗三重大匡金寧君金海金公神道碑銘
고려 삼중대광 금녕군 김해김공(김목경) 신도비명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原文 ; 1991年刊 京派統合譜
解釋 ; 2006. 11. 3. 金順大
金海金氏之爲駕洛王苗裔者族姓之繁甲於國中布列全域足稱不億之麗而惟其世代邈遠統緖難明故自新羅太大角干興武王以下數世之後不能著代而各起自中世爲分派之祖高麗三重大匡金寧君諱牧卿爲諸派祖之一也
김해 김씨로서 가락왕의 후손이 되는 사람은 그 일족의 번성함이 나라 안에서 제일로서, 전국에 널리 퍼져 족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오직 그 세대가 너무나 멀어 계통을 밝히기 어려우므로, 신라의 태대각간 흥무왕(김유신) 이하 몇 대 후로는 능히 대수를 나타내지 못하여, 각각 중세로부터 시작하여 분파의 시조(중조)를 삼으니 고려 삼중대광 금녕군 휘 목경은 여러 파조(중조) 중의 한분이다.
按麗史公爲忠烈王時人早擢科第歷官至三重大匡忠惠王壬午曺頔之亂奉命討平之靖難後封金寧君
고려사를 살펴보면 공은 충렬왕(1274.6~1308.7)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을 지냈고, 충혜왕 임오년(1342년)에 조적의 난 때에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여 난을 평정한 뒤 금녕군에 봉해졌다.[1]
[1]조적의 난은 1339년에 있었고, 이를 논공한 때가 1342년이다. 보첩의 내용만 옮겨 쓰니 이런 오류가 생긴 것 같다.
時群壬秉政國勢日危與政堂文學梅雲李公兆年深懷憂難累進忠言期欲匡救而知其終不可回則乃浩然去國遯跡於保齡縣俗離山深處與世無聞自世於木石麋鹿之居以是自然人莫不高其遐擧之志
그 당시에 아첨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 나라의 형편이 나날이 위태하여, 정당문학 매운 이공 조년과 더불어 깊이 근심하고 한탄하며 여러 번 충직한 말을 올려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이에 홀연히 국사를 버리고 보령현 속리산의 깊은 곳에 종적을 숨기어 세상일은 듣지 않으면서 스스로 나무와 돌과 사슴 등과 더불어 살다가 이로서 세상을 마치니, 그 뛰어난 의지를 높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其葬在俗離山華山乾坐原其生卒之歲無傳配亦未詳{配安東郡夫人權氏}子普官三重大匡門下府都僉議左侍中諡忠簡其次曰著曰暘曰秀曰蘭孫曾以下不煩盡記
그 묘소는 속리산의 화산 건좌의 언덕에 있으나 그의 생졸연도는 전해지지 않고 부인 역시 미상이다.{부인은 안동군 부인 권씨이다}[1]. 아들인 보(普)는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부[2] 도첨의 좌시중[3]이고 시호는 충간이며, 그 다음 아들은 저, 양, 수, 란이며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1] 신도비에는 배위 역시(配亦) 미상(未詳)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보첩에는 안동군부인 권씨(安東郡夫人權氏)로 추록되어 있다.
[2]문하부; 고려 국가행정의 총괄 관청. 공민왕 5년(1356)에 중서문하성, 동 11년(1362)에 도첨의부, 동 18년(1369)에 비로소 문하부로 하였다.
[3]문하시중; 고려 문하성 최고 관리 종 1품, 공민왕 18년에 문하좌시중이었으나 문하시중으로 고쳐 씀.
公沒後年代己邈而滄桑累遷公墓之失於護守己久而尙有居人之傳頌爲政丞墓者矣往在光復後丙午後孫瓚玉與顯玉諸人(後孫顯鳳燦玉諸宗人)搜尋於其指點處而掘地得誌石之驗
공은 돌아가신 후 연대가 이미 멀어졌고 세상이 여러 번 변천하여 공의 묘소를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으나, 오히려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기를 정승묘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지난 광복 후 병오(1966년)에 후손 찬옥과 현옥이 여러 사람들과 같이(후손 현봉, 찬옥이가 여러 종친들과 같이)[1] <지역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곳을 찾아가서 땅을 파고 지석(誌石)의 근거를 얻었다.
[1] 碑에는 “後孫瓚玉與顯玉諸人”으로 새겨져 있고, 譜牒에는 “後孫顯鳳燦玉諸宗人”으로 기록, 斗巖祠誌수록 1979년 작성문에는 “後孫顯鳳與炫郁諸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乃遍告京鄕諸宗而更加修治歲薦亨如儀夫麗代卿宰之墓莫守者何限而公之墓乃得驗於數百年沈晦之後而復享子孫之芬苾者豈非其厚德餘蔭久猶不泯而黙誘於冥冥者耶
이에 서울과 지방의 여러 종친에게 알리고 다시 봉분을 수리하고 해마다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대체 고려시대 정승들의 무덤을 수호하지 못한 것이 아주 많을 것이나, 공의 묘소는 수백년 동안 분명하지 않았으나 증거를 얻어서 다시 자손이 올리는 제사를 흠향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분의 후한 덕과 남은 음덕이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면서 묵묵히 인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鳴乎異哉惟其墓儀之舊者旣莫保而新者且未備則諸後孫咸以爲慨乃謀伐石竪大碑於神道以具其儀冑孫榮鳳謁余以文余人微矣且耄甚矣非其所敢而累辭不獲
아! 기이하구나. 묘소의 옛 석물을 보존도 하지 못하였는데 새 것을 또 갖추지 못하였으니 여러 후손들이 모두 개탄하여, 이에 돌을 다듬어 신도에 큰 비석을 세워서 의를 갖추고자 주손 영봉이 <현구와 같이> 나를 찾아와서 글을 청하기에, 내가 보잘 것 없고 또 늙어서 감당할 수 없다고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竊惟孟子曰君子創業垂統爲可繼也公爲一家中起之派祖則有創業垂統之象而其爲國靖難之功立朝諫諍之風勇退介石之志俱無愧於古之君子而爲後人之可繼
가만히 생각해보면 맹자가 말씀하기를 ‘군자는 나라를 세우고 자손에게 계통을 전하여 후대에 이어지게 한다.’ 하였다. 공은 한 가문을 일으킨 파조(중조)가 되어 기틀을 세우고 자손에게 이어준 형상이 있고, 그가 나라를 위하여 난을 평정한 공적과 조정에 나아가 간하며 논쟁한 태도와 용감하게 물러나 절개를 굳게 지킨 지조는 모두 옛 군자에 비하여 부끄럼이 없고 후세 사람들에게 계승할 만한 것이 되었다.
故在子而有忠簡公之克繼厥業爲國盡忠自後又多名德之相承而至今數百年子孫繁衍不隕聲聞有愈久愈昌者則豈非由公垂統之正種德之厚有以啓之耶
따라서 아들인 충간공(휘보)이 그 유업을 이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함이 있었고 그 후로도 유명하고 덕망이 있는 분이 서로 이어져 지금까지 수백년간 자손이 번성하여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될수록 더욱 더 번창하니, 어찌 공의 계통을 전한 것이 바르고 음덕이 후하고 계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惟其靖難之謀猷措畫諫諍之論議章奏必有可稱可傳而史錄闕略有未得盡考爲可恨然大者旣著則細者之未著固無加損也故據而叙之系以銘曰
오직 그가 난을 평정한 계략과 조치와 충언으로 간하여 다툰 논의와 상소가 반드시 칭송할 만하고 전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역사의 기록에서 빠지고 간략하여 다 상고할 수 없어 한탄스러운 일이나, 큰 것이 이미 나타났으니 세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여 진실로 보탬이 되거나 손해가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이어서 새기니,
駕洛之裔源遠流廣起自中世諸派各張顯允金寧一派攸宗如泰山下重起一峰
가락의 후손은 근원이 멀고 흐름이 넓다. 중세부터 일어나 여러 파로 각각 벌어졌는데 현명하고 진실한 금녕군이 한 파의 중조로서 태산의 아래 다시 솟은 한 봉우리라.
早擢科第位至大匡懷抱利器何施不當際値麗季國勢危傾賊臣煽亂群壬竊柄外患內蠹交作幷攖公奮厥力賊亂討平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광에 이르렀으니 마음속에 품은 뛰어난 재능은 어디에 베푼들 당연치 않겠는가. 고려말에 나라의 형세가 위태하게 기울어 역적이 반란을 선동하고, 간신들이 권력을 몰래 훔쳐 안팎의 환란과 해침이 섞어 일어나 함께 혼란하니 공은 힘을 분발하여 적란을 쳐서 평정했다.
胙士受封功孰與京外患雖際內蠹猶{食+息}時有李公與之同德幷心協力期欲匡救忠言直論苦口不止君心莫回奈終邈邈
이 공으로 봉군을 받았으니 공적이 누가 더 클 수 있겠는가. 밖의 환란은 비록 제거했으나 내부의 해침은 아직 숨 쉬는데 이때에 이공(이조년, 1269~1343)과 덕을 같이 하였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바로 잡으려 작정하고 충언과 곧은 말을 입이 아프도록 그치지 않았으나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는데 끝내 번민한들 어찌 하겠는가.
不可則去古訓有迪不侯終日其志介石俗離深處遠遁其跡沈晦沒世奚悶奚慽遯世高風與山俱卓
옳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 옛 교훈에도 행함이 있으니, 죽을 때까지 그 뜻을 기다리지 않았다. 속리산 깊은 곳에 종적을 감추어 어둠 속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무엇을 번민하고 걱정하겠는가. 속세를 피해서 살아간 고상한 기풍은 산과 같이 우뚝 하다.
盖公始終岡非可則宜其垂統以永啓迪衣舃之藏華山之陽閱數百載幽誌露光豈非餘蔭發於久長莫曰久晦愈遠彌章來者千秋可挹遺芳大刻豊碑昭示茫茫
대체로 공의 시작과 끝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님이 없네. 그러니 마땅히 그의 전한 계통이 영원히 계도한 까닭이네. 그의 무덤은 화산의 남쪽인데 몇 백년을 지냈음에도 지석이 빛을 드러냈으니 어찌 그의 끼친 공덕이 영원토록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래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더 멀어질수록 더욱 밝아져서 앞으로 먼 장래까지 빛나는 명예를 떨치겠기에 큰 비석에 크게 새겨서 한이 없도록 똑똑히 보이게 하노라.
駕洛紀元一千九百三十八年己未六月 花山 權龍鉉 謹撰
가락기원 1938년 기미(서기1979년) 6월 화산 권용현 삼가지음
※실제 새겨진 신도비에는 찬술(撰述)년월일이 생략되어 있고, 斗巖祠誌(두암사지)에 수록되어 있는 최초비문에는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91년간 경파통합보(京派統合譜)에는 光復四十年甲子(1984)九月 로 기록되어 있다.
檀紀四千三百十九年丙寅八月 日 哲學博士 康津 安浩相 謹書
단기 4319년(병인,서기1986년) 8월 철학박사 간진 안호상 삼가 씀
※신도비에는 위와 같이 새겨져 있다. 1991年刊 京派統合譜에는 西紀一九八五年乙丑十月(서기 1985년 을축 10월)로 기록되어 있다.
駕洛紀元一千九百四十四年 社團法人 金寧君 宗中會 謹建
가락기원1944년(서기1985년) 사단법인 금녕군 종중회 삼가 세움
※신도비에는 위와 같이 새겨져 있으나 1986년(丙寅) 10월에 완공되었다고 화산약사에 기록되어 있다.
高麗三重大匡金寧君墓碑銘 幷序
고려 삼중대광 김녕군 묘비명(휘목경) 병서
原文 : 1987年刊 參議公派譜, 2000年刊 安敬公派譜
解釋 : 2006. 11. 3. 金順大
夫顯晦數也剝復理也數或有舛銘理未嘗不復今觀金寧君幽堂之始晦終顯益信必復之理也
대체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은 정해진 운수이고, 음이 극도로 성하면 양이 차츰 회복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운수는 간혹 어기어 뒤섞일 수 있으나 자연의 이치는 일찍이 회복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오늘날 금녕군의 묘소가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나중에 드러나게 된 것을 보니, 반드시 회복되는 이치를 더욱 믿게 된다.
公諱牧卿姓金氏卽駕洛王苗裔而新羅興武王之世也按麗史公爲忠烈王時人博學能文章又有忠孝大節早擢嵬科累官至三重大匡
공의 휘는 목경이고 성은 김씨로서 가락왕의 후손으로 신라 흥무왕(김유신)의 계통이다. 고려사를 살펴보니 공은 충렬왕(1274.6~1308.7)때의 사람으로 학문이 매우 넓어 문장에 능하였고 또 충효대절이 있었으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올라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忠惠王壬午曺頔夜襲王宮射王中肩公與二三大臣奉命射殺尸于巡軍南橋下靖難後封金寧君爲派分中祖
충혜왕 임오년(1342년)에 조적이 밤에 왕궁을 습격하여 왕을 쏘아 어깨를 맞추었는데 공이 2~3명의 대신들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조적을 사살하여 순군부의 남쪽 다리 밑에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였다[1]. 반란을 평정한 뒤 금녕군에 봉함을 받아 분파의 중조가 되었다.
[1]조적의 난은 1339년에 일어남
時則群少秉政國勢傾危公與我從先祖梅雲堂先生文烈公諱兆年深懷憂憤累進忠讜之言天聽邁邁知其終不可回乃嘆曰不去必尺於禍且數諫而不納責有所歸
이때에 여러 소인들이 정권을 잡아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하게 기울어지는 시기라 공은 나의 종선조인 매운당선생 문열공 휘 조년(이조년,1269~1343)과 같이 깊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여러 번 충직한 말을 올렸으나 왕이 듣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끝내 돌이키지 못할 줄 알고서 이에 탄식하기를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며 또 자주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할 일은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遂匹馬還鄕隱於保齡縣俗離山中不交人間事木石與居麋鹿與友沉晦以歿世其葬之在俗離山華山乾坐原盖以此歟其生卒配位幷无傳[1]
드디어 말을 타고 시골에 내려와 보령현 속리산 속에 숨어서 세상의 일에는 접촉하지 않고 자연과 생활하면서 사슴을 벗 삼아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니, 그의 장례는 속리산의 화산 건좌의 묘지에 하였다. 생졸연도와 배위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1]1799년간 기미보에는 配未詳, 1802년간 임술보 등에는 配貞烈夫人安東權氏父吉昌君晋墓松岳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1986년에 세워진 신도비에는 배위미상(配亦未詳)으로 각자(刻字)되어 있고, 1991년간 경파통합보 등에는 배위 안동군부인 권씨(配安東郡夫人權氏)로 기록되어 있다.
子普三重大匡都僉議左侍中諡忠簡次曰著都僉議侍中諡文簡曰暘左侍中曰秀知密直諡忠節曰蘭平章事
아들인 휘 보(普)는 벼슬이 삼중대광 도첨의 좌시중으로 시호가 충간이고, 다음 휘 저(著)는 도첨의 시중이며, 다음 휘 양(暘)은 좌시중이고, 다음 휘 수(秀)는 지밀직으로 시호는 충절이며, 다음 휘 난(蘭)은 평장사이다.
普男到門李朝三司副使次達門密直使顯門副使昌門密直使著男慶門博士舘敎授暘男漢守 門下侍郞漢寬監察秀男思儉判書思彦版圖郞蘭男琚璵琪
보의 아들에 휘 도문(到門)은 조선에 들어와 벼슬이 삼사부사이고, 다음 휘 달문(達門)은 밀직사고, 현문(顯門)은 부사이고, 창문(昌門)은 밀직사이다. 저(著)의 아들에 휘 경문(慶門)이 박사관 교수이다. 양(暘)의 아들에 휘 한수(漢守)는 문하시랑이고, 한관(漢寬)은 감찰이다. 수(秀)의 아들에 휘 사검(思儉)은 판서이고, 사언(思彦)은 판도랑이다. 난(蘭)의 아들은 거(琚)와 여(璵)와 기(琪)이다
到門曾孫震孫校理震叙 戶曺參議(參議公派譜;到門曾孫震叙戶曹參判震孫校理震叙男永錫永暮)震孫男永堅吏曺參判永瑞縣監永貞知敦寧府事諡安敬永純縣監餘不盡錄
도문(到門)의 증손에 휘 진손(震孫)은 교리이고 진서(震叙)는 호조참의이다.(참의공 파보; 도문의 증손인 진서는 호조참판이고, 진손은 교리이다. 진서의 아들은 영석과 영모이다.)[1] 진손(震孫)의 아들에 휘 영견(永堅)은 이조참판이고, 영서(永瑞)는 현감이고, 영정(永貞)은 지돈녕부사로 시호는 안경이고, 영순(永純)은 현감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1] 1754년 갑술보(甲戌譜), 1771년 신묘보(辛卯譜), 1802년 임술보(壬戌譜), 1858년 무오보(戊午譜 )등에는 진서(震叙)가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卿)의 장현손(長玄孫) 참의(參議) 효원(孝源)의 자(子)로 기록되어 있다.
嗚呼公之世己數百祠矣屢經兵火堂斧之封莫徵於深目然尙有政丞墓之居人傳說
아! 공의 시대가 이미 수 백년이 되었고 또 여러 번 난리를 겪어서 묘소를 눈여겨 본 사람도 증거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정승의 묘라고 거주하는 사람의 전하는 말이 있었다.
光復後丙午後孫顯玉燦玉諸宗人搜尋其處掘地得誌石之驗遍告京鄕諸宗大加修治築華山齋於山下爲霜露齋宿之所竪神道碑於齋前而將欲幷治墓碑震叙后孫至誠物擔
광복 후 병오(1966년)에 후손인 현옥과 찬옥과 여러 종친들이 그 곳을 찾아가서 땅을 파고 지석을 얻었는데, 그 증거를 두루 서울과 지방의 여러 일가에게 알려 크게 묘를 손보고 산 아래 화산재를 세워 춘추 향사 때 제계하면서 지내는 곳을 만들고, 신도비를 재실 앞에 세우면서 장차 아울러 묘비를 다듬으려 하여 진서의 후손이 성의를 다해 석물을 담당하였다.
而雲孫敎育學博士鍾玉泓泰與冑孫榮鳳訪相達於丹邱之陋請刻石之銘余瞿然曰
이에 먼 후손인 교육학박사 종옥과 홍태가 종손 영봉 <찬배와>과 같이 언덕배기의 누추한 곳에 있는 상달(이 글을 쓴 사람)을 찾아와 돌에 새길 비명을 청하니 내가 놀래서 말하기를
其靖難之功謇諤之風恬退之節登底國史又有諸賢叙述且夫績德種仁澤流无窮本支百世其麗不億而名公科甲連世繼承蔚然爲三韓大族吁其盛矣藐玆眇末後生安敢泚筆於閣老事行哉累己之而不得謹叙如右系以銘曰
“그의 난을 평정한 공로와 바른 말을 한 풍채와 벼슬을 사양한 절개가 나라의 역사에 올려 있고, 또 현인들이 서술하였으며 또 덕을 쌓고 어진 일을 심어 혜택을 유전(세상에 퍼져서 전함)한 것이 끝이 없어서, 종파와 지파의 오랜 세대에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명성 높은 재상과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분이 대를 이어 연달아 나와서 우리나라의 문벌 높은 집안이 되었으니 아 번성하도다. 멀어서 미치지 못하는 이 미소한 후생이 어찌 감히 재상의 활동에 대하여 붓에 먹물을 찍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그만 두려 하였으나 마지못하여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비명을 쓴다.
顯允金寧應運嶽降駕洛華冑麗代巨棟討賊平亂胙土受封國勢日潰如人病癰于時文烈合心同德忠言雖勤天聽愈邈色斯遐擧其介如石
현명하고 성신한 금녕군이 운명에 따라 태어나셨다. 가락왕의 먼 후손이요 고려시대의 큰 재목이다. 반역자를 토벌하여 난을 평정하니 그 보답으로 봉군되었다. 나라의 형세가 날로 궤란(썩어 문드러짐)하여 사람의 등창병(등에 나는 병)과 같았는데 그 때에 문렬공 이조년과 함께 힘을 합하고 덕을 같이 하여, 충직한 말을 비록 많이 하였으나 왕이 듣기를 더욱 멀리하므로 기미를 보고서 원대하게 행동하니 그 굳은 결심은 돌과 같았다.
遠遁俗離盟徒友鹿潦齋在天奚庸憫慽宛宛遺風水水高長有崇五尺華山之陽始焉或悶久而彌章伐石揚辭昭示無疆有往必復爲善獲福凡百君子請徵斯刻
멀리 속리산에 종적을 숨기어 자연속의 짐승들과 벗하여 지내니, 장마와 날이 갬은 하늘의 이치인데 무엇 때문에 가엽게 여기고 걱정하겠는가. 마치 남아 있는 명성은 높은 산과 깊은 물과 같이 후세에 한없이 전하리라. 다섯자 높이의 무덤이 화산의 양지에 있는데 처음에는 혹시 으슥하게 감춰졌으나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나도다. 돌을 다듬어 드러내어 말하였으니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끝없을 것이다. 지나가면 반드시 회복함이 있고 착한 일을 하면 복을 얻을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여 청컨대 여기에 새긴 것을 증거하여라.
光復後丙寅歲處暑節 星州 李相達 謹撰
광복후 병인년(1986년)처서절(7월)에 성주 이상달 삼가 지음
檀紀四三一九年八月 日 後孫 金顯九 謹書
단기4319년(1986) 8월 일 후손 김현구 삼가 씀
※묘비(墓碑)에는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으나 보첩에는 “西紀一九八六年丙寅九月 日”로 기록되어 있다.
駕洛紀元一九一四五年十月 日 社團法人 金寧君 宗中會 建竪
가락기원1945년(서기1986년) 10월 사단법인 금녕군 종중회 세움
*묘비(墓碑)에는 위와 같이 새겨져 있으나, 화산재 약사에는 1988년(무진) 10월에 완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 三重大匡 金寧君 神道碑銘
고려 삼중대광 금녕군 신도비명(휘목경) [1]
[1] 본 비문(碑文)은 두암사지(斗巖祠誌)에 실려있는 것으로, 1979년 6월에 화산 권용현 선생께서 찬술하고 이학용선생께서 쓰신 최초 비문으로 추정된다. 본 비문을 비석에 새겨 세우기로 하였으나 보계(譜系) 등의 논란으로 지연되어 1984년 9월 비문중 논란이 되는 자손록 대부분을 삭제하고 1985년 10월 안호상박사께서 다시 쓰신 것을 단기 4319년(병인,서기1986년) 8월 일자로 비석에 새기고, 동년 10월에 경북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 금녕군 묘소에 올라가는 길 입구에 건립하였다.
原文 ; 1996年刊 斗巖祠誌
解釋 ; 2006. 11. 3. 金順大
金海金氏之爲駕洛太祖王苗裔者族姓之蕃甲於國中布列全域足稱不億之麗而惟其世代邈遠統緖難明故自新羅太大角干興武王曾孫以下不能著代而各起自中世爲分派之祖高麗三重大匡金寧君諱牧卿爲諸派祖之一也
김해김씨는 가락의 태조왕의 후예로서 종족의 성으로서는 나라 안에 으뜸이고 전국에 분포되어 그 수를 셀 수 없다하나 오직 세대가 오래되어 계통을 밝히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신라 태대각간 흥무왕(김유신)의 증손 이후로 대수를 잘 알지 못하여 각각 중간의 세대를 세워 분파의 중조로 삼으니 고려 삼중대광 금녕군 휘목경이 그 한분이다.
按麗史公爲忠烈王時人早擢科第歷官至三重大匡忠惠王壬午曺頔之亂公奉命討平之以靖難功封金寧君時群壬秉政國勢日危與政堂文學李公兆年累進忠言期欲匡救人皆想望風彩有柱石之望而知其終不可回
고려사를 살펴보면 공(휘목경)은 충렬왕(1274.6~1308.7)때 사람으로 일찍이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렀고, 충혜왕 임오(1342년)에 조적의 난[1] 때 공이 명령을 받들어 이를 평정한 공으로 금녕군에 봉해졌다. 이때 소인배들이 국권을 장악하여 형세가 나날이 위태로워 공이 정당문학 이조년(1269~1343)과 같이 여러 번 충언을 올려 나라를 구하고자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풍채를 바라보고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으나 국권이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1]조적의 난은 1339년에 있었고, 이를 논공한 때가 1342년이다. 보첩의 내용만 옮겨 쓰니 이런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則乃浩然去國遯跡於保齡縣俗離山深處與世相忘自甘於木石麋鹿之居以是自然人莫不高其遐擧之志其葬在俗離山華山乾坐原其生卒之歲無傳配舊譜云未詳
이에 홀연히 나라를 버리고 보령현 속리산의 깊은 곳에 은둔하여 세상일을 다 잊어버리고 나무와 돌과 사슴을 벗하여 살다 떠나시니, 사람들이 그 높은 뜻을 찬양하지 않음이 없었다. 속리산 화산의 건좌 언덕에 장사지내었고, 그의 생졸년과 배위는 옛 족보에서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1]
[1][1]1799년간 기미보에는 配未詳, 1802년간 임술보 등에는 配貞烈夫人安東權氏父吉昌君晋墓松岳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1986년에 세워진 신도비에는 배위미상(配亦未詳)으로 각자(刻字)되어 있고, 1991년간 경파통합보 등에는 배위 안동군부인 권씨(配安東郡夫人權氏)로 기록되어 있다.
男普左侍中諡忠簡著都僉議諡文簡秀知蜜直蘭平章事普男到門三司副使達門副使顯門副使昌門蜜直使著男慶門博士應門承門彰門秀男思儉版圖判書思彦版圖郞蘭男琚璵琪光門曾玄以不盡錄到門玄孫有永堅吏曺參判永瑞橫城縣監永貞知敦寧諡安敬永純石城縣監永錫大提學永禧進士永모參奉
아드님인 보(普)는 좌시중이며 시호는 충간이고, 저(著)는 도첨의이며 시호는 문간이고, 수(秀)는 지밀직이고, 란(蘭)은 평장사이었다. 보(普)의 아드님은 도문(到門)이 삼사부사이고, 달문(達門)이 부사이고, 현문(顯門)이 부사이고, 창문(昌門)이 밀직사이었다. 저(著)의 아드님은 경문(慶門)이 박사이고, 응문(應門), 승문(承門), 창문(彰門) 이다. 수(秀)의 아드님은 사검(思儉)이 판도판서이고, 사언(思彦)이 판도랑이다. 란(蘭)의 아드님은 거(琚)와 여(璵)와 기(琪)와 광문(光門)이다. 증손과 현손이하는 다 기록을 못한다. 도문(到門)의 현손에 영견(永堅)은 이조참판, 영서(永瑞)는 횡성현감, 영정(永貞)은 지돈녕부사 안경공, 영순(永純)은 석성현감이고, 또 영석(永錫)은 대제학, 영희(永禧)는 진사, 영모(永모)는 참봉이다.[1]
[1] 1754년 갑술보(甲戌譜), 1771년 신묘보(辛卯譜), 1802년 임술보(壬戌譜), 1858년 무오보(戊午譜 )등에는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卿)의 장현손(長玄孫) 참의(參議) 효원(孝源)의 자(子)는 진서(震叙), 진광(震光), 진화(震華)로 진서(震叙)의 자로 영석(永錫)이, 진광(震光)의 자로 영모(永모)가 기록되어 있고, 휘효분(孝芬)의 자(子)는 진손(震孫)으로, 진손(震孫)의 자로 영견(永堅) 영서(永瑞) 영정(永貞) 영순(永純)으로 기록되어 있다.
公歿後世代己邈而滄桑累遷公墓之失護守久矣而尙有居人之傳誦爲金丞相墓者矣往在光復後乙巳後孫顯鳳與炫旭諸人搜尋於其指点處掘地得誌石以驗之乃遍告京鄕諸宗而更加修治歲薦亨如儀
공이 돌아가신 후에 세대는 멀어지고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 묘를 수호하지 못한지 오래되었으나 오히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김승상의 묘라고 구전되었다. 지난 광복 후 을사(1965년)에 후손 현봉이 현욱과 여러 친척들과 같이 사람들이 가르쳐 준 곳을 조사하여 그 땅을 파보니 지석이 발견되고 고증이 있자 서울과 지방의 여러 종친들에게 통고하여, 다시 수리하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夫麗朝卿宰之丘墓莫守者何限而公之墓乃得驗於數百年沈晦之後復享子孫之芬苾者豈非其厚德餘蔭久猶不泯而黙誘於冥冥者耶
대개 고려 때 재상들의 묘를 수호하지 못한 분이 셀 수 없이 많지만, 공의 묘는 수백년동안 아무도 몰랐다가 증거를 얻어 다시 자손들이 제향을 올리게 된 것은 公의 덕과 음덕이 오랫동안 소멸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데서 도와준 것이 아니겠는가.
鳴乎異哉惟其墓儀之舊者旣莫保而新者且未備則諸後孫咸以爲慨乃謀伐石竪大碑於神道以具其儀自安養有獻石者冑孫榮鳳謀於諸族謁余以文余人微矣且耄甚矣累辭以非所敢而終不獲
아! 기이하지 않는가. 묘표의 옛것은 이미 보존치 못했고 새 것은 준비가 되지 않아 모든 후손들이 개탄하였다.. 이에 돌을 갈아 신도비를 세우려 하자 안양문중이 돌을 마련하고, 여러 후손들이 주손 영봉을 나에게 보내어 글을 청하였다. 내가 인격이 변변치 못하고 늙은 나이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어찌할 수 없었다.
竊惟孟子曰君子創業垂統爲可繼也公爲一家中起之派祖則有創業垂統之象而其威國靖難之功立朝諫諍之風勇退介石之志俱無愧於古之君子而爲後人之可繼
생각하여 보니 맹자말씀에 「군자는 큰일을 이룩하면 그 전통을 남겨 후세에 계속 이어야 한다.」 하였으니 공이 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조상이 되니 ‘큰일을 이룩하여 전통을 남기는 것’에 해당되고, 위험에 빠진 나라의 난을 평정한 공적과 조정에 들어가 충성으로 간쟁(諫諍)하신 기풍과 용감하게 퇴거한 금석같은 뜻이 옛 군자에 부끄럽지 않고 후세 사람들에게 계승이 될 만하다.
故在子而有忠簡文簡蜜直平章諸公之克繼厥業威國盡忠自後又多名德之相承而至今數百年子孫繁衍不隕聲聞有愈久愈昌者則豈非由公垂統之正種德之厚有以啓之耶
그래서 아들로서 밀직사를 지낸 충간(忠簡,김보)과 평장사를 지낸 문간(文簡,김저) 및 여러분이 이것을 계승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그 후에도 또 많은 이름난 덕있는 분들이 서로 계승되어, 지금 수백년이 지나 많은 자손들이 명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래도록 창성한 것은 어찌 공의 전통이 올바르고 그 덕이 두터워 이를 계도한 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惟其靖難之謀猷措畫諫諍之章奏論議必有蜜勿直截之可稱可傳者而史綠闕略有未得盡考爲可恨然大者旣著則細者之未著固無加損也故據而叙之繼以銘曰
오직 그가 난을 평정한 계략과 조치와 충언으로 간하여 다툰 상소와 논의가 반드시 많이 있어서 바로 끊지는 못했을 것이며 칭송할 만하고 전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역사의 기록에서 빠지고 간략하여 다 상고할 수 없어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큰 것이 이미 나타났으니 세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여 진실로 더하고 덜함이 없을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이어서 새기니,
駕洛之裔源遠流廣起自中世別爲以張顯顯金寧一派攸宗如泰山麓重起崇峰早擢科第位至大匡懷抱利器何施不當際値
가락의 후예들은 근원이 멀고 파는 넓구나. 중세에 다시 일어나 여러 파로 확장되었도다. 거룩하고 빛나도다! 금녕이여, 한 파의 중조이었네. 태산의 기슭과 같이 다시 높은 봉우리가 일어났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대광(大匡)의 지위에 이르셨네. 마음속의 생각과 재능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麗季國勢危傾賊臣煽亂群壬竊柄外患內蠹交作並攖公奮厥力戰亂討平胙士受封功孰與京外患雖際內蠹猶蝕
고려 말에 나라가 위급하였네. 적신들이 선동하고 여러 소인배들이 아첨을 떨었네. 외환과 내우가 서로 치열하였었네. 공이 힘을 다하여 전란을 토벌했네. 이 공으로 봉군을 받았으니 누가 공이 더 크겠는가. 외환은 비록 없어져도 안에서 좀 먹는 것은 여전하였네.
時有李公與之同德並審協力期欲匡救忠言直論苦口不止君審莫回奈終邈邈不可則去古訓有的不俟終日其志介石俗離深處遠遁其跡沈晦沒世奚悶奚戚遯世高風與山俱卓
때마침 이공(이조년,1269~1343)이 공과 같은 덕이었네. 서로 힘을 합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구할 것을 기약하였네. 충언과 직론을 입이 닳도록 알리였네. 임금의 마음은 돌아오지 아니하고 마침내 멀어졌네. 옳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 옛 교훈에도 있었고 끝까지 기다리지 아니하니 그 뜻이 금석(金石)같았네. 속리산 깊은 곳에 그의 자취 감추었네. 일생을 마치셔도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으셨네. 속세를 피해서 살아간 고상한 기풍은 산과 같이 높으셨네.
盖公始終岡非可則宜其垂統以永啓迪衣舃之藏華山之陽閱數百載幽誌露光豈非餘蔭發於久長莫曰久晦愈遠彌章來者千秋可挹遺芳大刻豊碑昭示無疆
대개 공의 시작과 끝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님이 없네. 법이 될 수 있는 것은 후손에게 영원히 가르쳤네. 화산(華山)의 양지바른 곳에 옷과 신을 감추었네. 수백년 지난 뒤에 지석(誌石)의 빛 찬연하네. 어찌 남은 음덕 때문이 아니리오. 오랜만에 나타하였네. 오랜 세월 매몰되었다고 하지마라. 오래 갈수록 더욱 빛난다네. 오는 머나먼 장래까지 남겨진 명성을 흠모 하리니 이에 비를 세워 영원토록 밝히리라.
駕洛紀元一千九百三十八年己未六月
가락기원 1938년 기미(서기1979년) 6월
花山 權龍鉉 謹撰(화산 권용현 지음)
全州 李學庸 謹書(전주 이학용 씀)
金寧君遺蹟(금녕군 유적) 尙州化北面壯岩里(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原文 ; 1991年刊 京派統合譜
解釋 ; 2006. 11. 3. 金順大
金寧君諱牧卿駕洛始祖王之后也高麗忠烈王朝等第歷三朝官至三重大匡忠惠王壬午平定曺頔難以靖難功賞賜封金寧君
금녕군의 휘는 목경이고 가락 시조왕의 후손이다. 고려 충렬왕(1274.6~1308.7)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3조(3분의 임금시대; 충렬-충선-충숙->충혜)를 지내고 벼슬은 삼중대광[1]에 이르렀다. 충혜왕 임오년(1342년)에 조적의 난[2]을 평정한 정난의 공으로 금녕군에 봉하여졌다[3].
[1]삼중대광; 고려 정1품, 원래 벽상산한壁上三韓 혹은 삼중대광이라 하던 것을 공민왕11년(1362) 에 둘을 합하여 벽상삼한 삼중대광이라 하였고 단순히 벽상공신이라 말하기도 한다.
[2]高麗史 36卷 忠惠王조
庚戌夜曹頔等襲王宮衛士射殺之尸于巡軍南橋下.
<1339년 8월> 경술(24일에 해당) 밤에 조적 등이 왕궁을 습격하였으나 위사(대궐이나 관아를 지키는 장교급 무사)가 이를<조적 등을> 사살하여 순군의 남쪽다리 아래에 시체를 두었다.
[3]高麗史 36卷 忠惠王조
六月庚子朔下敎曰賊臣曹頔搆難之後寡人赴都國家虞疑奸臣餘黨捏合虛辭扇亂不已而侍從之臣終始一節夾輔寡躬其功莫大帶礪難忘以海平府院君尹碩政丞蔡河中化平府院君金石堅政丞李凌幹理問洪彬上洛府院君金永旽西河君任子松贊成事金仁沇彦陽君金倫金海君李齊賢星山君李兆年僉議評理韓宗愈三司右使金永煦左使李蒙哥判密直司事李雲開城尹尹莘係前知密直司事李儼前同知密直司事尹桓朴靑前密直副使康允忠安千吉盧英瑞員外郞韓義臣軍簿判書裴佺崔濡知申事黃石奇判宗簿寺事孫守卿判司僕寺事尹元佑大護軍金添壽金善莊護軍南宮信林成等爲一等功臣圖形壁上父母妻超三等封爵一子除七品無子代姪甥女壻除八品給田百結奴婢十口永昌君金承澤鶴城君朴仁壽前軍簿判書安子由上護軍金鏡全允臧前判書雲觀事孫遠大護軍李光遠金莊護軍陳敎化承信李軒孫襲中郞將王碩李冲李元龍李光桂郞將全卿洪買奴等爲二等功臣父母妻超三等封爵一子除八品無子代女壻除九品給田七十結奴婢五口
<1342년> 6월 경자(1일에 해당)의 윗 내용에서 김목경(金牧卿)은 언급이 없다. 물론 나열된 사람들의 이름 뒤에는 등(等)이라고 써있는 것으로 보아 위 명단 외에도 더 있을 수는 있다.
時群壬執柄國事將日傾危與政堂文學李公兆年累進忠言有柱石之望而知其終不可回則遂遠遯于保齡縣之俗離山谷不顧三牲之養友麋鹿飮水餐霞以終墓在華山原今尙州化北面壯岩里城峙谷也
이때에 무리들이 아첨하여 권력을 잡아 나라일이 장차 나날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어, 정당문학 이공 조년[1]과 같이 여러 번 나아가 충언을 드리면서 요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바가 있었으나, 그것이 끝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보령현의 속리산 골짜기로 멀리 피하였다. 자식들이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사슴을 친구삼아 산골짜기의 물을 마시고 노을을 먹으며 살다가 돌아가셨다. 묘는 화산 언덕에 있는데 지금의 상주 화북면 장암리 성치골이다.
[1]이조년(李兆年, 1269~134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盖俗離之山峻極于天巉岩莫可登攀而人世滄桑之餘不能守護者己久然樵童牧竪尙皆能指點而山下故老亦傳誦賢相金公之墓抑亦公之遯世無悶而修德於躬曉諭愚氓有沒世終不忘之恩也從可驗矣爲子孫者聞之喜懼俱至罔可爲心也
아마 속리산이 험준하고 높아 하늘과 같고 가파른 암벽 때문에 등반을 할 수 없고, 사람 사는 세상이 아주 많이 변한 나머지 묘를 수호하지 못한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땔나무하는 아이와 가축 기르는 더벅머리 총각이 생각과는 달리 모두 그곳을 가르쳐 주고, 산 아래 사는 노인도 역시 현명한 재상 김공의 묘라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역시 공의 은둔 생활은 번민이 없었고 덕을 닦음에 있어서는 몸소 행하였으며,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쳐 주고 돌아가셨으니 그 잊지 못할 은혜를 직접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손된 사람으로서 들은 것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지극히 근심하는 마음이었다.
去乙巳歲後孫顯鳳氏獨不辭而與宗人炫旭及某某馳至其所傳金丞相之墓前試掘傍近尺寸地得一片誌石乃三重大匡金寧君諱牧卿及華山乾坐之題刻完如昨日遂先報於中央親會探査其實蹟廣詢於京鄕諸族以翌年丙午月日改封築莎定時日省掃奉享焉
지난 을사년(1965년)에 후손 현봉씨가 홀로 망설이지 않고 종친인 현욱과 여러 사람들이 김 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시험적으로 파보니 근처 얼마 안되는 곳에서 한조각의 지석(誌石)을 찾았는데, ‘삼중대광 금녕군 휘목경’과 ‘화산 건좌’라 새겨진 글이 완전히 지난 날 들은 것과 같았다. 마침내 먼저 중앙종친회에 보고하고 그 실제 자취를 조사하여 전국의 여러 친족에게 널리 물어보고, 다음해 병오(1966년) 월 일에 봉분을 개축하고 잔디를 심었다. 시일을 정하여 성묘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嗚呼異矣今距公之世五百有餘年惟此數尺斧堂賴神明之保佑典型尙存而得以奉尋於今日雲仍寔繁寔昌榮耀於數百歲者豈非公之積厚而責報於後天耶舊碣燬逸無傳略綴譜中傳記之如是云爾謹識
아! 기이하구나. 지금부터 공이 사셨던 시대가 500여년이 지났으나, 이 초라한 무덤을 다행히 신명이 보호하여 그 형태가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오늘에 와서 받들어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후손들이 진실로 번창하고 빛나기를 수백년이 되었으니 어찌 공이 쌓은 후덕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옛 비문이 훼손되고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대략 보첩에 전하는 기록대로 이와 같이 삼가 글을 쓴다.
後孫 善益
후손 선익
화산재(華山齋) 기문(記文)
俗離之山 磅礡逶迤 中起爲文章臺 臺之下 谷窈而深者曰 莊岩里而中有依山臨野爲五楹四架之屋 迺我先祖金寧君之墓齋也 而扁以華山者取山之名也 위이
속리산이 넓게 둘러 싸여 구불구불한 길을 들어가면 중간에 솟아나 문장대(文章臺)가 되고 대(臺)의 아래 골이 조용하고 깊은 곳을 장암리(壯岩里)라고 한다. 그 가운데 산을 등지고 들을 대하여 사간(四間)집이 있으니 즉 우리 선조(先祖;중조) 금녕군(金寧君)의 재실이라. 화산재(華山齋)라 한 것은 화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취함이었다.
齋之成有年 尙未有記 今年春 諸族請善益爲記 顧善益不才識劣 不足爲是役而擧族有責 不敢終辭也
재실을 건립한지 수년이 되도록 아직 기문이 없었다. 금년 봄에 제족(諸族)이 선익(善益)에게 기문을 청하니 선익 재주도 없고 식견이 적어서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제족(諸族)의 청이 지극함으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謹按譜曰 公在高麗忠惠王朝 官至三重大匡爲金寧君見國事日非 與政堂李公兆年 累進匡救之策而知王心終不可改則 寧潔其身而 遐遯於俗離山深處 歿仍葬于其山下而歲久失傳云矣
삼가 족보를 살펴보니 공(公)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금녕군(金寧君)을 봉하였는데 국사(國事)가 날로 어지러움을 보시고 정당문학이공조년(政堂文學李公兆年)과 같이 나라를 바로 잡기를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왕(王)의 마음이 결국 고쳐지지 못할 줄 알고서 차라리 지조를 깨끗이 하고 속리산에 숨어 계시다가 별세(歿)하시어 그 산하(山下)에 장사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내어 <그 묘소를> 잃어 버렸다 하였다.
往在光復後丙午 夫餘族大父顯鳳氏 因宗人某之夢兆而與顯玉及諸宗人 搜尋於其所指之地 有居人所稱金丞相墓者而 碑表殘缺無可徵之資
지난 광복 후 병오년(1966년)에 부여(夫餘) 족대부(族大父) 현봉(顯鳳)씨가 종인(宗人) 어떤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현옥(顯玉) 종인(宗人) 및 제종(諸宗)과 함께 들은 바에 의하여 찾아가니 그곳 사람의 말처럼 김승상묘(金丞相墓)가 있으나 비(碑)가 파괴되어 일아 볼 자료가 없었다.
遂掘其墓之傍近 得一片誌石 古朴難形而 惟金寧君諱牧卿數字炯然可徵也 於是始信爲公之墓而 遍告於京鄕各處諸族 諸族咸會見之 莫不嗟異 遂治其瑩域 改封築莎 歲薦祀事 旣有祀事 不可無聚族虔齋之所此齋之所以作也
드디어 묘의 옆을 파서 본 즉 지석(誌石)이 있는데 모양은 형언할 수도 없고 다만 금녕군휘목경(金寧君諱牧卿)이라 두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에 공(公)의 묘임을 확신하고 경향(京鄕) 각처 일가들에게 통지하니 제족(諸族)이 모여서 보고 다 놀래었다. 비로소 사초(莎草)를 하고 해마다 향사를 하였으나 다만 제족(諸族)이 모이어 재계(齋戒)하고 잠잘 곳이 없었다. 이것이 재실을 건립한 연유이다.
鳴呼 自公之後 數百年 碩德偉賢繼世而作又其麗寔繁布延於國中 豈非公之積德 厚蔭之所發而 今此墳墓之旣失而復見於世者 人謂得地之吉運而然也 雖然地運之說 誠茫昧不可究測而 惟顯鳳氏追先之誠 神明且感之矣 此其所以 有今日而 其理不可誣也
오호라 금녕군(金寧君)선조 이후로 높은 덕망과 위대한 선비들이 대대로 계속하고 또 그 자손이 많아서 나라 안에 가득하니 어찌 공(公)의 음덕의 소치기 아니겠는가. 이제 분묘를 잃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은 사람들이 지운(地運)이 좋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지운설(地運說)은 참으로 미신의 일이라 믿을 수는 없으나 오직 현봉씨(顯鳳氏)의 성력(誠力)으로 신명(神明)이 감동을 하였으니 이 때문에 오늘의 이 기쁨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속이지 못할 이치이다.
凡爲公之後裔者 因其誠而益篤之 上述祖先心法之懿而 柯則之 下敦花樹團欒之誼而講睦之 歲時省掃惟謹 籩斗蠲潔 久而勿替焉則 吾家當受天之佑 遂昌以大而 齋亦期於永遠而無獘矣 可不勉旃哉
우리 자손들은 이 정성을 본받아 위로 조상의 아름다운 덕을 사모하여 본받고 아래로 화수(花樹)의 단란한 의를 이루어 서로 화목을 도모하고 때때로 성묘를 삼가히 하며 제수를 정결하게 마련하여 오래도록 정성을 다하면 우리집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더욱 번창할 것이요 재실도 영구히 보전하게 될 것이니 가히 힘쓰지 않으면 되겠는가.
西紀一九八八年(戊辰) 十月 上澣 後孫 先益 謹撰(후손 선익 근찬)
(서기1988년 10월 상순;;현판기) 後孫 榮弼 謹書(후손 영필 근서)
三重大匡金寧君崇慕祠記
삼중대광 금녕군 숭모사기(휘목경)[1]
[1] 解釋字註 : 자본기문(記文)은 금녕군 묘소가 발견되기 전에 쓰여진 숭모사 기문(崇慕祠記)으로 어려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原文;2000年刊 安敬公派譜
解釋 ; 2006. 11. 3. 金順大
禮莫重乎祀典祀典莫重乎奉先故先王之於祀典也必以禮節之上自王公下至大夫士其立廟之制隋爵祿而有等別而其盛者遠而及於始祖或先祖焉
예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데에 아주 중요하고, 제사는 선조를 받드는 데에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절을 다하여 지내며,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에 이르기까지는 사당을 세우고 고기로서 제사를 드릴 것이며, 관작과 봉록에 따라 등급으로 구분해야 하며, 그 성대한 예식은 먼 시조와 또는 선조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此倫紀之所以斜也敎化之所以立也風俗之所以厚也降及後世敎弛俗敗祭法不講久矣而人主之於民惟賦歛之而己矣役使之而己矣則雖孝子滋孫其於報本追遠之事豈遑念哉
이 윤리와 기강이 기울어져 가고 있으니 교화하여 바로 세워 풍속을 두터이 해야 한다. 후세에 계승하여 가르쳐 저속한 제사법을 없애 오래도록 이를 익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주인은 백성에 있으니 오로지 의무와 바라는 것도 자기에게 있고 책임도 개인에게 있다. 비록 효자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먼 조성을 추모하고 보답하는 일을 어찌 대충대충 할 수 있겠는가.
至若今日則益復無謂矣父母之喪有不服三年矧遠代哉于斯時也有能念祖先垂裕之美而盡子孫承奉之誠報祀以時則在其人雖曰職事親諸世可不謂出乎衆萬萬者耶
거의 오늘에야 이르게 되었으니 더더욱 또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부모의 상사(喪事)에는 3년 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예법인데 하물며 더 먼 조상에게는 더욱 경건히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 선조들이 베푸신 여유의 아름다움을 명심하여 자손으로서 이를 떠받드는 정성을 다하여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할 때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부모를 섬기는 일이 모든 세대가 다 그렇게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하나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金海金氏諸公爲其先金寧君諱牧卿建祠堂於德治九鳳下佳水院之里扁之以崇慕問託於余鳴呼公之世在高麗忠惠王之時而今六百餘載矣文獻無徵籍所目失傳則其爲裔者之愴感無己固宜然也
금녕군 휘목경을 선조로 하는 김해김씨의 여러 분들이 덕치의 구봉아래 가수원리의 한쪽 편에 숭모의 정성으로 사당을 세우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아! 공이 살던 때는 고려 충혜왕 시대이니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이 흘러 문헌에 증거가 없고 자료도 전해지지 않아 후손된 사람들의 슬퍼하는 감정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而至設歲一度遞相傳祀之規由來己久矧今相地立祠而妥靈之凡厥周旋將事之所無不秩備而其爲制翬革焉所謂誠之不可掩有如是夫金寧君之所以爲金寧君可想仰也文獻非卽此而在功德非卽此而顯耶
사당을 건축하기까지 세월이 한번 바뀌어 정승에게 제사를 드리는 규정에 대해서 전해져 오는 유래도 이미 오래되었다. 하물며 지금의 정승묘의 위치에 사당을 세워 평온한 영령의 주변을 파내는 것이 장차 제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하지 말아야 될 것은 없는지 하여튼 모든 것을 많이 바꾸는 것이다. 소위 정성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덮어버릴 수 없다. 대제로 금녕군은 금녕군으로서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며 문헌이 이와 같지 않고 공덕이 이와 같지 않더라도 그는 우뚝 드러날 것이다.
不獨金海氏爲肯構之也亦非惟親諸也而出乎衆萬萬也將因是而風之頹敗之俗可得而變誠孝之道可得而興先王之敎可得而新則安知不爲一世之倡耶
이 글을 쓰는 것은 김해김씨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오로지 친족만을 위한 것도 아니니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장차 이로 인하여 퇴폐한 풍속을 교화시키고 정성스런 효도의 도리를 변화시키며 선왕의 가르침을 부흥하게 하여,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니 어찌 한세대의 외침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諸公當益勉之矣勉之且何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新其爲崇慕之本歟幹其事者興培相培昌培鍾喜四人也
여러 분께서는 당연히 더욱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시에서 말하기를 ‘조상에 대한 글은 염두에 두지 말고 덕을 닦아 새롭게 하는 것이 조상을 숭모하는 근본이다.’라고 했는데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은 흥배, 상배, 창배 및 종희의 네 사람이다.
歲乙巳梧月下旬(1965년 5월 하순)
順天 金喆熙 謹記並題(순천 김철희 삼가쓰고 제목을 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