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과 선교]흩어진 교회 사역으로서 직장사역
일터를 하나님이 역사하는 천국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직장사역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미국의 어느 교회 목회자가 자기교회를 비디오로 소개했는데 그 첫 장면이 아주 이색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역교회를 소개하는 비디오에서 가장 먼저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은 아마도 교회의 건물일 것이다. 대부분이 먼저 교회건물을 비친 후에 그 안으로 들어가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교회를 소개하는데 첫 장면이 월요일 아침에 성도들이 각자의 직장으로 가는 모습이었다. 교사들이 학교로 어떤 이는 사무실로, 또 다른 사람들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그들이 일하는 장면을 스냅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는 월요일부터 이렇게 일터에 가서 일한다는 언급을 했다. 그리고 이 들이 주일에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 사이에 교회를 소개하는 다양한 내용들이 있었지만 내게는 이 첫 장면이 이색적인 정도가 아니라 충격적이었다.
교회를 예배드리는 건물로 이해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예배당 안에 모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과 이렇게 평일에 직장에 흩어져서 일하는 성도들의 삶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난다. 이 둘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지, 어떤 것이 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지는 분명해진다.
흔히 주일 아침에 예배당을 향해 나갈 때는 교회에 가서 주님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때도 별 영적인 동기가 없이 습관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주님의 임재를 기대한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에 직장을 향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임재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있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직장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죄악세상이 되고 직장 일은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세상 일이 되어버리고 직장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로 여기게 되기 쉽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서 우리가 흩어진 교회로 살겠다고 생각만 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직장이 우리가 섬겨야할 사역의 현장이 되며 직장 일은 우리가 주님께 하듯해야 할 주님의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웃이며, 믿지 않는 동료들은 아직은 죄인이지만 후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될 잠재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게 된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성령의 역사로 변화된 평신도들이 살아 움직일 때 교회가 달라지고 우리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이런 비전을 주면서 파송을 하고 직장인들이 파송을 받아 직장으로 나아간다면 그런 교회가 바로 사회의 변화의 핵이 될 것이다.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방선기 목사는 서울대학교 화공과를 졸업,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이후 총신대학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다가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직장사역연구소 소장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은혜와영광교회 담임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방선기의 직장설교>< 크리스천 @ 직장> <설교준비는 즐겁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대중문화도 거룩해질 수 있는가?> 등이 있다.
[방선기목사의 직장선교] 다윗의 리더십
크리스천 지도자의 모범 보여야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부하들의 이야기도 존중해야
성경인물 중에 가장 매력있는 사람을 말하라면 다윗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매력은 특히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십에서 두드러진다. 다윗은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먼저 하나님께 묻고서 시작했다. 전쟁을 할 때면 꼭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삼상 23:2)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삼상 30:8) 그때마다 주님은 다윗에게 분명한 대답을 해주셨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삼상 23:2)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 30:8)
하나님이 그를 향해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특히 이전 왕 사울과 비교해볼 때 너무 대조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다윗에게 지도자로서 위대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아랫사람들의 말도 존중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서 탈취한 것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은 그 전쟁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그런데 부하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들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니이까?”(삼상 23:3)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다윗이 명령대로 그일라를 돕기 위해서 싸우는 일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다윗의 리더십이 돋보인다.
첫째로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반대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상관을 향해서 자기들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자유롭게 자기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은 적어도 “예스맨”들에 둘러싸여 있는 리더는 아니었다. 다윗은 부하들이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었던 지도자이다. 매사 속전속결하고 일사불란하게 이끄는 지도자가 강력한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 지도자로서 다윗의 매력이다.
둘째로 다윗은 부하들이 반대의견을 듣고 받아들였다. 사실 이때 다윗은 그들의 의견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복종시킬 수 있었다. 자기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대답이므로 기도도 하지 않은 부하들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들의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묵살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문제를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다. 다윗은 그 정도로 부하들의 이야기를 존중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마음의 여유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다윗은 부하들의 마음을 얻어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다윗이 다시 물었을때 다행히 하나님은 짜증 내지 않으시고 전번과 똑같이 대답을 해주셨다. 이제 다윗은 부하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명령을 했을 것이다. 이때 부하들이 고집을 피웠다면 그것은 명령불복종이 될 것이다. 부하들은 그 정도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존중해준 리더의 명령에 전심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결국 다윗은 사람들의 몸만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자인 것이다.
크리스천 지도자들이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헌금을 좀 많이 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맡겨진 일을 무작정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크리스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매사를 하나님께 물어서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 정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처럼 부하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방선기 목사 직장선교]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신앙 생활과 일상 분리 될 수 없어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하다가 변호사 개업을 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검사생활하면서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나누다가 조금은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거액의 은행돈을 횡령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횡령한 돈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교회에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분은 그 당시 자신이 그리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조사하는게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얼떨떨해졌다. 은행돈을 횡령한 사람이 어떻게 십일조를 낼 생각을 했으며 십일조를 낼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은행돈을 횡령할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저 남들처럼 십일조를 많이 해보고 싶은 일념에서 그랬을 수도 있다. 횡령을 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해서, 즉 자기가 범한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여 공모하는 심정으로 했을 수 있다. 그랬다면 하나님을 자기 편의에 따라 이용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된다.
어쨌든 횡령죄를 짓는 것과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서로 맞지 않는다. 정상적인 신앙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만히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은행돈을 횡령 하는 손과 하나님께 헌금하는 손은 서로가 완전히 단절되었다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은행돈을 횡령한 것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죄악된 방법을 따른 것이며 그 돈의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교회에서 익숙한 방법을 따른 것이다. 각 영역에 맞는 방법대로 행동했으므로 별다른 갈등을 느끼지 않고 모순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런 모순된 행동을 보고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모순된 행동이 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지 우리 안에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하는 건강치 못한 이원론적인 사고가 깔려있다. 즉 교회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할 때의 자세나 기준과 세상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할 때의 자세나 기준이 완전히 다르게 되는 것이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 속에서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모순된 행동을 쉽게 볼 수 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그런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며 헌금을 드릴 때에는 하나님의 기준을 그런대로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맡겨진 일을 할 때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자세나 기준과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하게 된다. 마치 그 순간, 그 장소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마음속에 깊숙하게 잘못된 생각, 종교활동은 거룩한 일로 일상생활은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해서 세속에 속한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 때문이다. 이런 이원론이 자리를 잡으면 종교활동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대하지만 세속의 일상생활은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세속적으로 대하게 된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존경을 받지도 못한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 데는 교회의 책임도 적지 않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십일조를 강조하는 만큼 직장에서 정직할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 같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직장에서 바르게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에서 맡겨진 일을 주님께 하듯 하는 것처럼 직장에서 맡겨진 일을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 3:23). 그래야 이원론으로 인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장)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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