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은 안희정 충남지사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처럼 노 대통령의 비서나 측근 출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시민 대표처럼 노 대통령의 멘토나 책사도 아니었다. 2002년
노 대통령의 동업자로 한배를 타기까지 김두관은 풀뿌리 동지들과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두관에게 민주당 입당을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김두관이 1995년부터 2기에
걸쳐 남해에서 구현한 군정은 전국적 주목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7년 동안 군수로서
열정과 소신, 아이디어를 소진한 김두관이 3선에 도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가오는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할 결심을 굳히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그해 4월
노무현 전 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광역단체장 한 명을 PK권 3개 선거구 중 하나에서 당선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당선은커녕
당장 후보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코너에 몰린 노 후보는 김두관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김두관은 어쩔 수 없이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김 군수는 누구하고 정치하려고 그럽니까?”
김두관이 민주당 입당에 난색을 표하자 노 후보가 목소리를 높이며 질문을 던졌다. 몇 시간에 걸친 간곡한 설득이 이어졌고, 마침내 김두관은 민주당
입당을 약속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그날 노 후보가 마지막으로 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 그대로 함축돼 있다.
“역사의 길에 동행합시다.”
김두관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2002년 5월 14일, 선거일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두관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후보와 함께 지역주의와 금권정치를 혁파하겠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러나 상대 후보 진영에서는 ‘호남당’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집요하게 공격했고,
김두관의 지지율은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22%에서
19%로, 다시 17%로 떨어지더니 마지막엔 16.9%까지 내려갔다. 결국 낙선했다.
영남에서 노 후보와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2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경남선대본부장을 맡아줄 명망가를 찾아야 했는데, 접촉한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거절했다. 노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이회창 후보는 물론이고 정몽준 후보보다도 낮게 나온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지지율은 다시 올라갈 겁니다. 힘을 보태주십시오.”
“노무현은 안 됩니다. 더 늦기 전에 빠져 나오소.”
사람들은 도리어 김두관을 불쌍하게 여겼다. 어쩔 수 없이 젊은 김두관이 선대본부장을 맡아야 했다. 부산과 대구
등 대도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은 문재인, 대구는
권기홍이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노 후보 지지율이 부산 40%, 경남 20% 수준으로 나왔는데, 12월
19일 최종 성적은 부산 29%, 경남 27%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