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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9년 봄호.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 특별 대담
【신동엽 시인과 인병선 집풀문화학자․시인】
일시 : 2019년 2월 8일
장소 : 신좌섭 교수 연구실
맹문재 : 안녕하세요.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를 맞이해 시인의 아드님과 대담을 갖게 되어 매우 의미가 깊네요. 신동엽 시인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분이므로 한 번에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 이번에는 인병선 선생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씀을 들을까 해요. 인병선 선생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시는데, 어떠신지요?
신좌섭 : 연세 탓인지 기력이 약해지셔서 긴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은 힘듭니다. 금년에 85세입니다만, 비슷한 연세의 분들 중에 아직 활동적인 분들도 많은데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신 탓인지 약해지셨네요. 기억력도 다소 떨어지시고. 금년 아버님 50주기 행사가 여러 곳에서 있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만 가려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맹문재 : 내내 건강하셔야 할 텐데요. 저는 언젠가 청담동에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에 가서 인병선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 뒤 뵐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어느 때부턴가 뵐 수 없어 궁금해 하고 있었어요.
자료에 따르면 인병선 선생님은 1935년 평안남도 룡강군에서 태어나 보통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동안 오빠가 의용군에 끌려가고 아버지는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아버지는 농업경제학의 권위자인 인정식 동국대학교 교수였지요. 그 상황에 대해 말씀을 들은 것이 있는지요?
신좌섭 : 어머님은 당신의 오빠(저에게는 외삼촌)에 대해서도 특별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갖고 계십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어머님은 외삼촌(인병완, 1930년생)이 본인을 대신해서 의용군에 들어갔다고 기억하고 계세요. 어머님이 1935년생이니까 11살이던 1946년에 일가족이 북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는데, 아직 국민학교를 마치지 않아 혜화국민학교에 들어갑니다. 혜화국민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중에 들어갔는데, 1950년 6월말~9월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이화여중(당시에는 6년제 여자중학교) 운동장에서 의용군 모집 선동 연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어머님이 손을 들었답니다. 그런데 “너는 아직 어려서 의용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지요. 집에 돌아와 이 말을 하자 오빠가 “너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나서야 하면 내가 나선다.”고 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삼촌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억이 아주 깊은 미안함으로 남아 있지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일제강점기 농촌경제학자였던 외할아버님에 대해서는 그리움과 섭섭함이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여자들만 서울에 남겨놓고 북으로 가신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겠지요. 외할아버님은 납북이 아니라 월북이었습니다. 원래 사회주의자였고 당시 정국에서 신념을 따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념과는 별도로 여자들은 서울에 남겨두고 싶었겠지요. 남쪽에 남은 외할머님과 어머니는 1.4 후퇴 때 제주도로 피란을 가게 됩니다.
외할아버님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리지요. 10여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남기셨는데, 농촌경제학자,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수차례 투옥되고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을 중시하는 견해, 어떤 이유에서든 일제 말기에 친일 성향의 글들을 쓴 것 때문에 친일학자로 지탄하는 견해가 공존합니다. 때문에 외할아버님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 고향을 떠난 것은 친가가 지주 집안이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막상 남한에 내려와서는 ‘빨갱이의 딸’이라고 피해를 볼까봐 아버지를 숨기고 살아야 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아버지가 ‘전향 지식인’으로 낙인찍혀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굴레를 좀 덜어낸 것이 1992년입니다. 『인정식 전집』(1~5)을 펴낸 것인데, 어머니로서는 큰 용기였지요.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외할아버님의 저서, 논문을 전국 헌책방을 뒤져 찾아내 영인본으로 묶었습니다. 전집에는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이 발문을 쓰셨지요. 어머니에게 『인정식 전집』의 발간은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었던 외할아버님을 한 발 떨어져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은 1·4 후퇴 직전 어머니와 단 둘이 제주도로 피란 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는데,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눈에 선하네요. 그곳 생활에 대해 들으신 것이 있는지요?
신좌섭 : 제주도에는 3년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원래 목적지는 부산이었답니다.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을 보면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 사람들이 운항하는 전차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으나 넘쳐드는 피란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갑자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려 버렸답니다.
외삼촌은 1950년 여름 무렵 의용군에 들어갔고 외할아버님도 월북한 상태였습니다. 『인정식 전집』의 연보를 보면 1953년 월북한 것으로 나오는데, 어머니 기록에 의하면 1․4 후퇴 이전에 북에 가신 것입니다. 곧 돌아온다고 말씀하셨다니까 실제로 1․4 후퇴 이후에 서울에 다시 오셨을 가능성도 있지요. 1953년은 최종 월북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궁핍했을 것이야 익히 짐작할 수 있지요. 먹고 살려고 엿장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하셨습니다. 외할머님이 엿이라도 떼다가 팔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워낙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셨겠지요. 그런데 아침에 시장에서 엿을 떼어 엿판에 들고 제주 읍내를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팔리지 않아 저녁에는 엿에 까맣게 때가 타서 팔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하셨지요. 외할머님이 기독교를 믿으신 것은 그때였습니다. 기댈 곳이 없었겠지요.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돈암동의 한 교회를 다니셨는데,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셨지요.
외할머님은 이북 출신 특유의 생활력으로 가난한 딸과 사위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도 하셨습니다. 당시 대개의 여성이 그랬듯이 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아주 비상한 기억력과 총기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우리 삼남매가 “할머니 학교 다녔으면 맨날 우등했겠다”고 놀리곤 했지요.
맹문재 : 그 외할머니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요? 외할머니의 다른 친척은 없는지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신좌섭 : 제가 예과 2학년이던 197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964년경 정릉 흥천사 인근에서 회갑연을 한 것으로 기억이 남아있으니까 75세쯤 되셨을 때 돌아가신 것이지요.
이북에서 함께 내려온 친척이 몇 분 계셨어요. 외할머님과는 종종 왕래가 있었는데, 이분들만 만나면 전형적인 이북 말씨가 튀어나오곤 했지요. 외할머님은 워낙 부지런하고 검약한 분이라서 시장에서 상인들이 버린 우거지를 주워 오시곤 하셨어요. 그것으로 우리들 된장국을 끓여주셨지요. 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셔서 늘 스스로 ‘독일제’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독일제’가 튼튼함의 대명사였지요.
맹문재 : 참으로 대단한 어른이셨네요. 인병선 선생님은 나중에 서울로 전학 와서 고등학교 3학년을 다녔고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곧 신동엽 시인과 결혼하게 되어 학교도 그만두고 시인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어요. 엄청난 결심을 하신 것인데,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신동엽 시인의 미발표 산문집인 『젊은 시인의 사랑』에 실린 편지들을 보니 1953년부터 교제한 것으로 보이네요.
신좌섭 : 이화여고 졸업반이던 1953년부터 교제를 하셨지요. 아버님이 그해 봄 대전에서 전시연합대학으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친구 소유의 서점(돈암동 사거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책을 사러 왔던 어머님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당시 외할머님은 돈암시장에서 작은 포목상을 하던 때이고 집도 근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46년 북쪽에서 서울로 내려왔을 때에도 혜화국민학교를 다녔으니까 내내 혜화동, 돈암동 일대에 사셨던 셈입니다.
아버님도 돈암동 집 근처 서점에서 어머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서점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돈암동 사거리에 서점이 있었을 만한 곳은 현재 성신여대 사거리 국민은행 길 건너 정도(아리랑 고개 방향)였을 거예요. 그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아침저녁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길 건너 국민은행 쪽보다 소규모 상점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처음 만나고 이듬해 195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입학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배우는 사변적인 서양철학을 아버님의 독특한 세계관이 뒤덮어버린 셈이었지요. 또 1954년 여름방학 때 아버님을 따라 부여에 처음 다녀오고 공부에 대한 생각이 점점 멀어져 간 것 같아요. 그해 가을 아버님이 동두천에서 육군 6사단 정훈부 군복무를 시작했는데, 2대 독자라는 이유로 이듬해 의가사 제대를 했어요. 그 뒤 1955년 가을 약혼을 하고, 1956년 결혼식을 올렸지요. 여러 연보에 1957년 결혼으로 되어 있는데, 문학관에도 남아 있는 청첩장을 보면 1956년이 맞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사랑이 첫째 이유였겠지만, 부여를 다녀오면서 당시 한반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점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회의가 들었겠지요. 전쟁 중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오빠와 월북으로 헤어진 부친에 대한 그리움을 아버님에게서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외삼촌과 1930년 생으로 동갑입니다. 외삼촌은 어머니나 외할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엄청나게 똑똑하고 지적인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고요. 또 주위에서는 어머니를 ‘빨갱이 딸’이라고 백안시하는 분위기였으나, 아버지가 외할아버님을 진심으로 존경한 것도 호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친정 쪽에서는 두 분의 결혼에 반대가 심했습니다. 월남민들이라서 친척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타향살이니 서로 뭉쳐 살아야 하는 입장이었는데도, 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한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도록 소원하게 지내셨습니다. 친척들이 반대한 것은 신랑 집안이 너무 가난하고 당시까지도 아버님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의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을 보면 부여 시댁살림이 너무 어려워서 한동안 ‘이화양장점’을 운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양장점 자리를 기억하는 친척 분이 있는데, 그분에 따르면 부여터미널 맞은편 현재 백마약국 자리(구아리 254)라고 합니다. 양장점을 생각해낸 것은 외할머님이 포목상을 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맹문재 : 두 분의 결혼 시기를 바로잡아주셔서 다행이네요. 지금까지 인병선 선생님의 23세 때(1957년)로 알려져 있거든요. 결혼한 뒤 신동엽 시인은 맏딸을 얻었고, 충남 보령군에 있는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어요. 그런데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인병선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서울 돈암동으로 올라가 한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어요. 1959년 1월 28일까지의 편지들을 읽어보니 그 사정이 그지없이 애절해요.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제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는 누이입니다. 2살 무렵이었겠지요. 결혼해서 첫딸을 낳은 뒤 떨어져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당시 아버님 편지를 보면 그리움이 절절합니다.
어머니의 산문집 『벼랑 끝에 하늘』에도 나오지만 당시에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폐디스토마를 폐결핵으로 오인한 탓일 겁니다. 아버님의 지병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51년 국민방위군 대구수용소를 빠져나와 귀향할 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민물 가재를 잡아먹어 간디스토마에 걸렸고, 이것이 나중에 간암의 원인이 되었다”는 글들이 있습니다만, 붕어나 잉어 같은 민물 생선은 주로 간디스토마, 민물 가재나 게는 주로 폐디스토마의 원인이 되지요. 아버님이 아침상 앞에서 종종 언급하신 것은 민물 가재이고, 따라서 1958년 각혈의 원인인 폐디스토마가 그때 생긴 것일 거예요. 돌아가실 때의 사망 원인인 간암은 별도의 지병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30세(1959년)에 필명 석림(石林)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을 했어요. 입선 작품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였어요. 작품이 게재된 신문을 받아든 인병선 선생님께서는 뒷산으로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우셨다고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니외다」라는 산문에서 밝히셨어요. 왜 그렇게 기쁘셨을까요? 남편이 시인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요?
신좌섭 : 시인으로 세상에 인정받게 되었다는 기쁨이 무엇보다도 컸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버님과 결혼하고 나서 친정 친척들로부터 서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드디어 내 남편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의 아호가 추경(秋憬)이에요. 신동엽 시인이 편지를 쓸 때 부르던 이름인데, 어떤 의미인지요?
신좌섭 : 가을 추, 그리워할 경인데, 글쎄요.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아호로서는 다소 쓸쓸한 느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만난 것이 1953년 무렵이니까 10대 후반, 20대 초반 어머님의 상황이나 정서가 그랬을 거예요. 당시 어머님의 사진들을 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지요.
맹문재 : 인병선 선생님께서 신동엽 시인의 작품들 중에서 어떤 작품을 애송하셨는지요?
신좌섭 : 주위에서는 으레 「껍데기는 가라」나 「산에 언덕에」를 낭송해달라고 했겠지요. 많은 문인들이 두 가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마도 예언자적인 면모를 보이는 「빛나는 눈동자」에 가장 공감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 시는 일종의 자화상으로도 파악됩니다. 선지자, 예언자적인 이런 모습에 사실 반하신 것이고요. 제가 전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 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맹문재 : 첫 시집 『아사녀』(문학사, 1963)에 수록된 작품이지요. 다시 읽어보니 어두운 시대에 맞서고자 하는 시인의 지사적인 정신이 느껴지네요. 신동엽 시인은 등단한 해에 맏아들 좌섭도 얻어 집안의 경사가 겹쳤어요. 신동엽 시인은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교육평론사에 취직했고, 그 이듬해에 명성여고의 교사 생활을 하셨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경제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여요. 명성여고 교사 생활과 관련해서 들은 말씀이 있는지요?
신좌섭 : 아버지가 가장 존경한다고 한 분이 할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님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어떻게든지 가족을 잘 돌보려고 애쓰셨지요. 특히 중요한 순간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님과 마찬가지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가정을 돌보고 싶어 하셨을 거예요. 어머님이나 누이의 회고에도 나오지만 아버지의 저희 3남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어요.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삶은 용납하기 싫어하셨을 거예요. 그렇지만 결코 넉넉할 수 없었지요. 당시 표현으로 ‘쥐 꼬리만한 봉급’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실 큰 일이 있을 때는 포목상을 하던 외할머님의 도움을 종종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명성여고 교사 생활은 즐겁게 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고 누이가 「대지를 아프게 한 못 하나 아버지 얼굴 가에 그려놓고」라는 글에서 회상했듯이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뭔가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교육을 하셨지요. 국어라서 더 그랬겠지만, 시험문제도 으레 주관식이었고요. 어쩌면 당시 인생 최고의 시기를 누리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난 가을 방송한 팟캐스트 「내 마음 끝까지」에서도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몇몇 제자 분들은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도 집으로 종종 찾아와 우리들과 놀아주곤 했습니다. 주로 문예반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 한분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교류가 있었어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33세(1962년)에 둘째 아들 우섭도 얻어요. 1녀 2남의 자식을 두게 되는데, 정섭 따님과 둘째 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신좌섭 : 누이 정섭은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독일 카셀대학에서 다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화가로 활동하다 1990년대 초 캐나다로 이민 가 살고 있습니다. 사실 누이는 감수성이 예민해서 1970~80년대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어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시대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재능을 잘 발휘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동생 우섭이는 대학을 마치고 조그맣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예술적 재능이 있는 편인데,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타계합니다. 39세의 나이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워요. 인병선 선생님께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겠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잘 이겨내시고 짚풀 문화 연구의 대가가 되셨어요. 짚풀 생활사를 평생 동안 조사하고, 채록하고, 수집하고, 저서를 간행하고, 짚풀생활사박물관까지 세우셨어요. 또한 시인이 되어 『들풀이 되어라』라는 시집도 간행하셨어요. 그와 같은 생활을 곁에서 보셨을 텐데 소개를 부탁드려요.
신좌섭 : 어머님이 짚풀생활사박물관을 개관한 것은 1993년이지만, 짚풀문화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무렵부터입니다. 1969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출판사 교정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등 늘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70년대 초부터 경기도 마석과 대성리 중간쯤에 있는 새터라는 곳에서 음식점을 시작했지요. 이것이 장사가 제법 되어서 1980년경에는 기본적으로 먹고살만한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니까 안에 억눌러놓았던 욕구가 분출하여 선불교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좋은 카메라를 사서 주변의 사물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하셨습니다. 타고난 감각도 있으셨고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물들을 찍으니까 제법 좋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83년 무렵 민학회(民學會) 답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라져가는 농촌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고, 짚으로 만든 농촌 생활 용구들을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지요. 이것들이 어느 정도 축적되자 1993년 청담동에 박물관을 개관했는데, 당시만 해도 작은 규모의 전문박물관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입니다. 그 때문에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고, 다른 소장가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짚풀문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지와 농촌공동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아버지, 농촌경제학자였던 외할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외할아버님은 일제강점기 농촌경제학의 권위자였는데 학문적으로만 농촌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농촌문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속에 내재해 있다가, 좀 여유가 생기니까 치솟아 오른 것이지요.
이런 연구 결과들을 모아서 『짚 문화』, 『풀 문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짚풀문화와 토착 생활사에 대한 관심은 나중에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으로도 옮아갑니다. 1992년 태국 치앙마이와 중국 운남성을 답사해서 그곳에 사는 소수민족의 생활상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추적했지요. 1천 3백여 년 전 동아시아로 흩어진 고구려, 백제 유민(디아스포라)의 흔적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우리 민족 찾아 아시아 대장정』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의 가마니 생산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모아서 『가마니로 본 일제 강점기 농민 수탈사』라는 자료집을 묶어 내기도 했는데, 짚으로 엮은 가마니라는 것이 농촌 수탈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입니다.
맹문재 : 짚풀생활사박물관은 현재 비영리법인으로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병선 선생님의 역사의식 및 공인 인식과 집념이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1982년에는 유족과 창작과비평사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되어 지금도 시행되고 있어요. 소개를 좀 부탁드려요.
신좌섭 : 박물관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소규모의 비영리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박물관, 미술관이 1천 개가 넘지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니면 창립자 사후에 지속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박물관 창립자들은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이익이 창출되는 것도 아니어서 후손들은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염려하신 것이지요.
1982년에 처음 ‘신동엽창작기금’을 제정했어요. 지금은 ‘신동엽문학상’이지만 2003년 21회까지는 ‘창작기금’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아 서사시 「금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 배경이 되었지요. 사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일정 기간 작품에만 전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따라서 아버님이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아서 「금강」을 집필한 것처럼 좋은 기회를 후배 문인들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님과 ‘창작과비평사’가 함께 시작한 일입니다. 금년 2019년이 벌써 37회네요.
맹문재 : 저는 이 세상의 모든 위인들 뒤에는 헌신한 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태일 열사 뒤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고, 헬렌켈러 뒤에는 설러번 교사가 있었듯이 신동엽 시인의 뒤에는 인병선 선생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해요.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 신좌섭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같은 대학원에서 의료역사학 석사를, 한양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공학 박사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갈등 화해와 집단 의사결정을 촉진하는 국제 공인 퍼실리테이터 및 개발도상국의 인적 역량을 강화하는 개발 협력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저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역서 『이타적 유전자』『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