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잠깐! 어째 틈만 나면 하자고 하냐?"
"…어머. 싫다."
"아니, 싫다 좋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사랑하면 내 몸도 생각해줘야 돼는 거 아냐? 이것저것 다 바치느라고 빈사상태라고. 나 말라죽으면 좋아?"
"그런거 아닌데…."
"아니면 내 허리 생각도 해줘!"
막 셔츠 아래로 들어오던 손이 내 호소에 멈칫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불만이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과 삐죽대는 입술, 실룩이는 볼을 애써 외면하니 제느는 제자리로 돌아가 자켓을 주워 입고 고개를 돌렸다. 휴우. 다행이 포기하는군. 오늘은 그럭저럭 넘어갈 것 같다. 이거야 여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손에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니 그동안 몸 축난거 보신하려면 끝도 없겠다.
"칫. 언제는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해놓고선…."
"누, 누가 언제?!"
"흥이다!"
제느가 순식간에 내 위로 덮쳐들더니 목을 팔로 꽉 껴안았다. 그리고 몸부림도 치지 못하게 꾹 누르며 득의에 찬 웃음을 흘린다. 깜짝 놀라서 당황한 채 반항도 못하고 그렇게 잡혀버려선 그녀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 걸 그대로 느껴야만 했다. 이래서 방심하는게 아닌데 괜히 긴장 풀었잖아!
"후우우. 내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줄 알았어?"
"크윽. 아, 알았어. 좀, 내려와. 숨막혀."
50kg의 몸무게에 깔려 버둥대는 내가 재밌냐? 온몸으로 덮쳐 누르던 제느가 조금 몸을 떼니 그제야 숨쉬기 편해졌다. 이러니 내가 몸이 축나지. 무슨 고집이 저리 생 고집이람?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심줄인데다가 끝끝내는 해결하고 보니 정말 무섭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던 제느는, 내가 좀 안정된 기색을 느끼고는 다시 덮쳐들었다.
"우윽…."
심술이라도 났는지, 난폭하게 입술을 합친 그녀가 혀를 밀어 넣더니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입술을 물어온다. 그러고나니 몸이 축나는 거고 뭐고, 일단 즐기고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서로 좋으면 되는 거 몸 좀 축나면 어떠냐. 어차피 죽어라 해도 임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이 축난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축나는 것도 아니니 그냥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제느가 저리 원하는데 마냥 싫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3만년 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렇게 몸 부비기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임신이 안 되는 게 정말 다행이지.
"근데 애들이 정말 모를까?"
자켓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끄르면서 물으니 제느는 원피스의 어깨 끈을 내리며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아는 것도 없이 배터리니 믿어야겠지만, 어째 좀 불안하다. 그 영악한 애들이 이런 거에 완전히 속아넘어갈 리가 없는데?
"괜찮다니까 그렇대두. 생명석 조각만 찾으면 다 해결될 거야."
"으음."
피자 두 판과 콜라 2.5리터가 어떻게 들어가는지 의뭉스러운 가느다란 허리를 팔로 감싸고 그게 다 모였는지 의심가는 보드라운 가슴을 느끼며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금새 얼굴에 피가 몰리며 가슴이 두방망이 쳐진다. 솔직히 이제 만난지 5달 정도 밖에 안된지라 정말 이런 미녀가 날 열렬히 사랑하는 게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맨살끼리 뭉그적거리면 정신도 못 차린다. 이렇게 몸을 포개고 키스하고 있으면,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다.
"당신을 잃기 전에는 이런 걸 몰랐었어."
"으음...사람은 한번 잃고 나야 후회하는 거야."
뜬금없는 말에 대답하니까 제느가 쿡쿡 웃어대며 주먹으로 내 가슴을 콩콩 쳐댔다. 뭐 아무런 악의도 없는 애교어린 몸짓이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예전에는 이런 걸 몰랐다니 무슨 말이지?
"당신은 30억년을 넘게 살아왔으니까, 내가 모르던 걸 많이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중에는 우리가 사랑할때 완벽히 결합하는 법도 알고 있었지. 단지 몸을 하나되게 하는 것을 넘어 마음까지 하나되게 하는 법 말이야. 그건 아주 비밀스러워서,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밖에 공유하지 못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거야..."
"으응?"
대체 못 알아먹을 말이라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대답이 나가자 제느의 얼굴이 김샜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뭐 기억이 있어야지 대답을 해주지.
"우리 남편씨는 옛날부터 이렇게 눈치가 없었다니까. 내가 이렇게 귀엽게 속삭여도 엉뚱한 말만하고. 앗. 하앙."
눈치 없어 미안해요. 부드러운 맨살에 곧게 패여있는 등골을 손으로 만져가자 제느가 신음을 내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부드럽게 키스하니 그녀가 어지러운 듯 몸이 풀려 내 몸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 흐읏. 자기야아."
"이제…들어가도 돼지?"
"응. 으으응."
"에, 엣취!"
엣...취? 순간 뜨겁던 몸이 영하 80도 남극에 내놓은 물동이 마냥 차갑게 얼어붙고 위에서 나를 몸 안에 받아들이려던 제느의 몸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하체를 붙잡은 채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꺄악!"
"로자스 이 바부팅아!"
"수, 수수수 숨어 언니들!"
"…."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깨끈을 올리며 원피스자락을 정리하는 제느의 몸을 껴안고 등을 토닥여 달래며 만일의 발작을 대비해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안긴 채로 부들부들 떨던 그녀의 입에서 낮게 깔린 음습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내 이놈들을 당장…!"
"지, 진정해!"
몸을 달굴 때보다 세배는 빨개진 그녀를 다독이며 일어나니 침대 위에 갑자기 생겨난 동산 세 개가 움찔 놀라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은발소녀로 변신해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댔다.
"와, 와아악! 죄,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도로 집에 갈게요!"
"로, 로자스 이것아 너 때문에!"
"그, 그. 그!"
오른쪽에서부터 하얗게 질려서 버벅거리고 있는 로자스, 눈물을 줄줄 뽑으며 화를 내고 있는 아렌이, 정신 없이 아무데나 대고 빌고 있는 카렌이까지...완전히 궁지에 몰린 쥐꼴로 울며불며 난리도 아니었다.
"입 다물어라."
"흡!"
"네!"
"사, 살려주세요오..."
그러나 간신히 화를 억누른 제느가 한마디하자 즉각 모든 소리가 끊겼다. 크게 말한 것도 아니고 들릴락 말락하게 한 말에 반응이 이쯤되면 코미디라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분노를 억누르는 표정을 지으며 한발자국 다가서니 애들이 죄다 사색이 되어서는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었다. 불쌍해 보이긴 하다만 제느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으니 이정도 벌은 받아야지.
"누가 따라오라 그랬냐?"
"저, 저요..."
역시 맏이인 아렌이가 모든 일을 주도했다. 우연히 만난 줄만 알았던 카렌이도 계획의 일부였고 우리가 언제나 움직이나 치밀하게 감시하며 기다리던 차에 부모님도 여행을 떠나버려 낌새를 채자마자 자매 전부가 총 출동해 버렸다. 꼬맹이와 아기인 지들 남동생들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나 참. 너네 나랑 제느를 감시하고 있었냐? 그렇게 일상 탈출이 하고 싶었어?"
"엄마 아빠는 무조건 집에 있으래요. 어디 나가면 큰일나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그냥 집에 있으라고 우겨요. 그건 근거 없이 우리를 핍박하는 거라구요! 우리도 좋은데 구경하고 싶고 신기한 것도 보고 싶은데! 왜 안된다는 거예요?!"
포부도 당당하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더니 다시 목소리가 커지는 아렌이였다. 그러니 자매들 모두 서로 껴안고 펑펑 서럽게 울어 제끼기 시작했다. 으아.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그때 뒤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제느가 잔뜩 달아오른 새빨간 얼굴을 하고 씩씩댔다.
"너 이놈들! 집에 있으라면 얌전히 앉아있을 것이지 왜 따라오냐! 너희들 이제야 1000살도 못 넘겼지? 아무튼 오늘 일은 모조리 사랑의 여신님한테 죄다 말해 드릴테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아주 좋아서 춤을 추실거다."
제느가 눈에 불을 켜고 겁주니 세 여자애들은 겁에 질려서 더욱 더 청승맞게 울어댔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가 내게 와서는 팔짱을 끼고 끌었다.
"쟤들은?"
"냅둬. 알게 뭐야? 정말 기분 다 잡쳐서 할 생각도 안 나네."
30분 후에 비행기는 이름 모를 숲 속에 내려앉았다. 동네나 수학여행 때 가본 설악산의 나무들과는 그 크기도, 종도 다른 나무들로 이뤄진 숲이었는데 멀리에 도시가 보여 그리 깊은 숲은 아닌 듯 했다. 거기서 제느는 비행기를 다시 집어넣고 낙엽을 밟으며 도시 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느껴진다. 정말 희미해. 인간의 의지에 봉인되어 있긴 하지만 분명 내 생명석...자. 아렌아. 너희들은 다시 돌아가. 처음부터 너희가 따라와선 안되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가렴. 여기서부터는 이모와 이모부만이 갈 수 있는 거야."
몇 번의 키스와 다독임 끝에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제느가 그리 말하니 세 소녀 모두 쭈뼛거리며 울상만 지었다. 저걸 보니 아직도 돌아갈 마음이 안 생겼나보네. 하기사 이미 미주알고주알 부모님 귀에 다 들어가게 생겼는데 자포자기 심정이겠지.
머뭇거리는 걸 본 제느가 주먹을 쥐며 다시 으르렁거렸다.
"지금 너희들이 날 시험하는 거냐? 당장 돌아가지 못해? 너희 같이 날개도 가지지 못한 녀석들이 뭘 하겠다는 거야?! 아직 새장 속의 새인 녀석들이 깊은 뜻도 모르고…어서 돌아가."
"히이익! 아, 알았어요…."
그제서야 겁에 질린 아이들은 재빨리 길을 열더니 가버렸다. 그리고 제느는 그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팔짱을 끼고 있다가 표정을 풀고 내 팔을 끌어안았다. 하여튼 이렇게 뒤통수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밀짚모자를 눌러쓰며 투덜거린 제느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는 도시와도 멀리 떨어진 깊은 숲속이었는데 여기저기 낙엽이 쌓인 땅에는 길도 없었다. 하지만 제느는 신기하게도 방향을 딱 잡아서 가더니 금방 사람들이 다니는 듯한 길을 찾아서 그 길을 따라 30분쯤 걸으니 숲에서 나올 수 있었다.
멀리에는 빌딩 숲이 보였지만 숲에 접한 거리에는 주택들이 죽 늘어선 조용한 교외의 출퇴근지였다.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출퇴근 시간대는 아닌 모양인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지나가거나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뭐, 이런 풍경 자체가 이국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진짜 이탈리아야?"
미모는 세계 공통이라, 여기에서도 집 밖에 나왔다가 넋을 잃고 멍청히 서서 지켜보는 사람 하며 길가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던 일도 멈추고 구경했다. 나는 뒷통수가 따가워 죽겠는데 제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내 질문에 답했다.
"이탈리아지. 되는데로 온줄 알아? 당신도 참. 왜 그렇게 신기한 얼굴이야?"
"나야 뭐 여태 해외여행은 커녕 제주도에도 가본 적이 없어서...이런데는 TV에서 밖에 못봤어. 그런데 사람사는 데는 다 똑같네."
"하기사 그렇겠구나."
그런데 제대로 가고 있기나 한건지 모르겠네. 자기 입으로 오차가 엄청 난다고 해놓고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시간만 가는 거 아니야? 벌써 출발한지 1시간은 족히 넘었으니 집에 가든 학교에 가든 난 죽었다. 이럴바에 어디 도피생활이라도 해야지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래도 자신있게 어디론가 이끄는 걸 보니 어떻게 아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뭐 느껴져?"
"아니. 하지만 500m 이내에 있다고 하는 걸? 아, 저기다."
"성이네?"
다시 1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높다란 담장 너머로 커다란 저택이 세워져있는 외딴 강가였다. 저택의 한쪽 끝이 강에 접해있는데 외관은 엽서에 등장하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이었지만 불길한 기운이 하늘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놀랍게도 제느와 같은 느낌의 힘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악마의 계약 문이 열려있는 거지? 아. 그런거군."
"뭐? 뭔데?"
어쩐지 공중에만 머물고 있다 싶더니만 무언가의 힘이 밀려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있는 거였다. 제느는 중얼거리다가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역시. 내 생명석을 쓸만한 이유가 있었어. 누군가 악마에게 혼을 판 사람의 혼이 지옥으로 넘어가려는 걸 막으려는 거야. 저 기운 보이지? 하늘 위에 맴도는 거. 계약의 완성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가져가려는 악마의 힘이야. 하지만 내 생명석이 있는 통에 가져갈 방법은 커녕 접근도 하지 못하고 저렇게 대기하고 있는 거지. 분명 누군가 아주 소중한 자신의 사람을 위해 할 수 밖에 없는 것. 그걸 한거야. 그리고..."
보고 있는 불길한 기운이 검게 뭉쳐 형상화된 구름이 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아앗!"
순식간에 황금빛 거창을 손에 든 제느가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소리를 질렀다. 공기가 쿵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로 먼지가 피어오르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잡은 창대가 솟아오르며 황금빛 도끼날과 검은 구름이 맞닿았다.
콰아아아악!
제대로 된 형체도 없이 뭉실뭉실한 구름과 도끼날이 맞닿았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이 고막을 때리더니 디디고 서 있는 바닥이 살아있는 것처럼 부르르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악마?!
'크아아아…!!'
차차차차창!
지옥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뭉치 표면을 하얀 균열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100장의 유리가 한번에 박살나는 듯한 끔찍한 소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내가 귀를 막을 때 제느는 구름에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 휘둘러 어깨에 걸쳤다. 족히 건물 2층 높이는 되는 길이의 가느다란 창대 위에서 커다란 도끼날이 환하게 빛났다.
"중상 정도 되는 악마야. 왜 정상적인 계약을 방해하냐고 원성인데? 참나. 지가 먼저 노리고 공격해놓고 뭔 소리야?"
"어떻게 악마가…."
창으로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제느가 그걸 집어넣고 저택의 두터운 철문에 손을 대니 철컹하고 문이 저절로 열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히 잠겨져 있을 문인데 저렇게 쉽게 열리다니?
"자아. 그럼 빚 받으러 가볼까요. 낭군님?"
"근데 이렇게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거야?"
"무슨 소릴? 우린 열어줬으니까 들어가는 거야."
내 질문에 찔리는 것 하나 없이 그렇게 정당화한 제느는 다시 내 팔을 끌어안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은 보통 TV에서 보던 것처럼 별 다를 것이 없는 정원이었다. 물론 한쪽에 커다란 분수대가 있고 강에 접한 곳에는 수영장이, 저택까지 나 있는 길은 아스팔트로 죽 포장되어 있고 그 외에는 관목 등이나 잘 정리된 잔디가 깔려있는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정원이긴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이 비싸서 이렇게 만들려면 돈 꽤나 들텐데 외국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누, 누구냐! 너희들은!"
들어가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준 건 어느 회사 경호원인 듯 건장하게 생긴 남자 둘과 우락부락하니 나만한 사람 목줄기 물면 바로 초상치를 커다란 개였다. 이런. 무단 가택 침입이니까 할말이 없잖아? 제느에게 눈치를 주니 그녀는 오히려 혀를 내밀며 그들을 도발했다.
"빚 받으러 왔어요!"
그리고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슥 헤쳤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공기를 베어내니 뭔가 이상한 농밀한 향이 순식간에 주위로 배어 나왔고 공기에 실린 냄새에 남자들은 바로 다운되고 송아지만한 개들은 끼잉거리며 발라당 뒤집어졌다. 뭐, 뭐야 이건?
"이성을 넋나가게 만드는 페로몬이란 거지. 우후후. 가자."
"페, 페로몬?"
무슨 페로몬이 냄새가 나는데? 그리고 페로몬이라고 해도 그렇게 강력한 건 아닌데 저렇게 다운시켜 버릴 정도면 대체 정체가 뭐야? 아니, 그전에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도 참 많네.
"인간의 이성은 강한 편이지만 그도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뭔가가 인지되면 기반이 약해져 스스로 흔들려. 대표적인 걸로 유령을 보고 벌벌 떠는 게 있지. 우리는 인간의 일반적인 개념과 관념에 부합되는 신이 아니야. 우주를 아우르는 대차원의 초월적 관념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 그게 우리지. 우주 기원후의 존재들인 신들과 이데아 같은 이상향조차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야. 따라서 우리는 우주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밖, 그 모든 것이 뭉게지는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우주라는 개념을 창조한 자들이야. 기원 후 존재하기 시작한 신들과 관념들, 신앙을 받아 힘을 주는 신들의 위에 있어. 내가 아무리 약하다고 하지만 나라는 관념은 이 우주보다 강해. 그것이 이런 생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유지."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아니 뭐 그것보단…."
허리를 쓱 끌어안으니 제느가 좋다고 안겨온다. 이리저리 설명했지만 결론은 먼치킨이라는 거 아니야. 머리에서 나는 냄새 하나로 저렇게 혼까지 빼놓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지만 그럼 자기는 왜 그렇게 툭하면 여기저기 쑤셔지고 부러지고 하다 날 발전기로 쓰는 지경까지 온 거야? 그렇게 대단한 존재면 나도 간단히 찾을걸 뭐하러 수백억 년씩 돌아다녀? 아. 정말 순 다 뻥이다.
"하여튼간에 마음에 안 들어. 남의 소중한 걸 함부로 다루고 말이야. 그치 자기야."
"그렇긴 해도 악의를 가지고 그런 일 한 건 아닐 것 같은데. 필시 뭔가 이유가 있을거야."
"선의를 가지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악행으로 돌아가는 거야. 엄마가 만든 운명의 그물은 단순한 매듭이 아니니까. 아…!"
"응? 왜 그래?"
돌연 멈춰서 하염없이 저택만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놀라 저택을 바라보니 과연, 안쪽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강력한 생명럭이 느껴졌다. 이건 그 어떤 힘도 아닌 생명이 가진 순수한 생명의 원천. 이데아의 영혼을 구속해 지상에 있게 하는 그 원초적인 생명이다.
"아…아아아…."
허리를 감은 팔로 격하게 떠는 제느의 몸이 느껴졌다. 당연하다. 그녀는 생명의 의지 그 자체이니까. 시크사리사는 그 생명의 의지가 모여든 것이며 그 자체이고 이 모든 땅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원천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라서 그것이 파괴당한 지금 제느가 힘을 잃어가는 것이다. 마치 내가 빛을 잃어 윤회전승에 든 것처럼.
시크사리사가 소멸된다면 그것은 이데아의 해방이며 죽음이고 모든 차원, 모든 우주의 모든 생명이 그 원천을 잃고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생명 그 자체인 제느도 사라진다. 그래서, 생명석이 그리 중요한 거였구나. 제느는 생명석에 발현된 신의 영성이었다.
"나, 내 생명석."
"제느야!"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제느는 벼락 맞은 듯 갑자기 몸을 떨며 힘을 잃었다. 엉겁결에 허리를 안은 팔로 부축하긴 했지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생명석이!
잠깐, 정신을 잃으면 깨우면 되잖아? 왜 여태 몰랐지? 생명석 때문에 갑자기 생각나는 걸까? 하여튼 지금 저 생명석은 제느의 제어 하에 있지 않으면 꽤 위험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느와 이마를 맞대 정신에 직접적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니 철벽처럼 틈 하나 보이지 않는 정신방어망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었어도 이런 방어기제들은 무사하구나. 몇 번의 접속 끝에 나를 인식한 방어망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 방어망은 외부에서 어떤 것이 작용하더라도 반응하지 않고 영혼 고유의 영역, 그 개인의 영역을 지키는 굳건한 성벽이자 빗장이다. 인간이라면 모를까 신의 반열인 그녀라면 그것은 어떤 공격에도 끄덕 않는 완벽한 것. 그러니 이처럼 스스로 열리는 것은 그녀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건 제느가 나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결정적 증거.
다시 안쪽에는 또 하나의 방벽이 있다. 하지만 그 안쪽의 방벽은 여기저기 구멍 뚫린 채 상처 입은 모습이었다. 필시 전에 몸을 뺏겼을 때의 상처와 지금까지 받아온 것들이 누적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열림을 허락한 그 안쪽으로 들어가자 키스를 하고 혀를 섞을 때처럼 그녀와 내가 엉킨다. 형체도 뭐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본질만이 뒤섞이며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예고도 없이 갑자기 강렬한 쾌감이 일어났다.
그래.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건 살을 섞는 것보다 더 농밀하고 친밀한 것이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감싸안고 달래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나는 건 분명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생명석에 의해 유도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저 조각난 생명 그 자체에 내 기억이 뿌리내려 조각난 상태에서도 근원의 생명이 흩어지지 않고 있는 거다!
"아학! 아, 아르벤!!"
"으윽. 으응?"
아, 뭐야? 깨어났어? 눈앞이 어질어질한게 정말 깊숙이 들어 갔나보네. 제느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온통 쾌감에 젖어든 몸을 다스리고 눈을 뜨니 피가 쏟아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는 제느의 얼굴과 극도의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눈동자가 보이고 맞닿은 몸으론 잔뜩 긴장해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푼 몸이 느껴졌다.
"아, 아, 아르…벤. 다, 당신…."
덜덜덜 떨리는 온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던 제느가 끝내 날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도 가뜩이나 몸이 달아올라 있는데 그렇게 접촉해 오니 숨이 가빠져온다. 도, 도대체 이건 뭐야? 그저 정신을 섞은 것 뿐이었는데?
"아, 안 돼! 울면 안 돼!"
으응? 뭐야? 갑자기 제느가 그렇게 소리치며 두 팔로 날 밀어내더니 눈물을 닦고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아니, 아니, 달아올라서 눈물까지 흘리다가 갑자기 왜 그래?
"하아하아하아. 어떻게…누가 볼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런 걸 하는 거야! 누가 봤으면 어떡해! 아이이잉!!"
숨을 고르고 마구 화를 내며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얼굴인데 오히려 내가 알딸딸했다. 아니 옷 벗고 진하게 몸을 포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연인에 지나지 않을터인데? 대체 왜 그래?
"야. 그 뭐시냐…."
"하악, 이익! 놔, 놔아!"
"왜,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가느다란 팔목을 쥐어 잡으니 제느가 한순간 몸을 크게 움찔 떨며 달아오를 데로 달아올라 폭발한 얼굴이 되어서는 휘청 인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래? 나도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지만 정신이 쏙 빠질 정도는 아닌데, 악마도 있는 이상한데에서 이게 지금 뭐하는 거람. 기겁을 하는 그녀를 끌어안으니 움찔거리며 이상하게 몸을 떠는데 그게 또 장난 아니다. 그저 혼을 섞은 것뿐인데 왜 맛이 가?
"아, 아아앗!"
그 때 제느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게 굳더니 입을 크게 벌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에…그게 그러니까…설마 그런거야?!
"으악! 뭐하는 거야 도대체?!"
잠시 후 굳어진 몸이 풀리면서 제느가 거의 정신을 잃은 채로 무너졌다. 무슨 눈이 뒤집히도록 느끼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여자가 남자보다 느끼는데 9배는 더 강하다고 하더니만, 그게 맞는 모양이다. 일단 힘없이 축 늘어진 제느를 데리고 저택 아래의 구석탱이로 가서 뉘었다. 나참 살다보니 희안한 꼴도 다 보네.
"야. 제느야! 자기야?"
"아…."
헤벌레하고 누워있던 제느가 몇 번 몸을 흔드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곤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다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도 못 줬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아예 힘이 안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일어나기에 부축해 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기대왔다.
이상한 느낌이 섞은 새침한 눈동자가 날 바라보았다.
"후아. 세상 끝나는 줄 알았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당신 방금 나한테 한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지? 모르겠다고 보지마. 그럴 줄 알았어."
"그, 그냥 쓰러지길래 깨우려고 한 거야. 이건."
내 반박에 제느가 어이없다는 듯 깔깔깔 한참동안 배꼽이 빠질라 웃어제끼더니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으음. 하여튼 이렇게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우리 둘만 있는 곳에서 해야지. 더구나 약한 내 몸에 이런거 큰 무리다? 방금 모아놓은 힘 다 날릴뻔 한거 알아? 깜짝 놀랐다구. 더구나 우리는 아직 이런거 할 단계가 아닌데…대놓고 야한 짓 하면 안되지."
제느가 으응 하고 힘을 주더니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섰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거지만…내 생명석이 깨지고도 아직 괜찮은 이유는 당신의 기억 때문이었어."
"내 기억?"
내가 추측했던게 맞는건가? 하긴 조금이나마 생각난 것들 때문에 이런 일도 할 수 있었던 거니까. 생명석 그 자체만 없었다면 이런거 알 리가 없지. 머릿속에 인터넷이 연결된 것도 아니고.
"그런거 같은데…들어오자마자 뭔가 생각났었어?"
전혀 이해 못할 상황이 이해 됐다는 것부터 이실직고하니 제느의 눈동자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손을 입으로 가져가 덮으며 감격까지 했다.
"아아. 역시. 그때 당신의 기억이 내 생명석에 깃들었구나. 그래.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 왜 여태 생각하질 못했을까? 뭔가 생각나는 거 없어?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던가 기억 같은거. 아니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지식이나 뭐 그런 현상들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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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새 챕터 시작입니다아. 알렉은 아직 용도폐기(..)되지 않았습니다만
당분간 퇴출. 또 다시 러브리 단둘의 뜨뜻므흣 아흥 하아하아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_-Y oo000
엇. 그런데 사이즈와 무게가 공개되었다.(창에 썰린다)
첫댓글 염장질하는것들은 다 주거야해!!!!
오오 므흣한 씬 좋아*-_-*
그런데요 아직까지 le쓰실려고 돈모으시나요? 하는김에 GT하시지...le픽셀렌더링파이프라인 숫자가 작데요 그래서 않좋다고 하던데요
흠...GT는 비싸고 AGP로 살거라 개조의 압박이.......하지만 다 포기하고 LCD모니터랑 모니터 암을 사서 책상을 넓게 쓸까 생각중입니다. 이거 고민이네요. 아니면 공룡36마리랑 바다문 250 두개인데.........
요~~시... 므흣하게 쭈욱 달려주세요... 흠.. 개인적으론 CRT를 선호해서... 선지름 후수습정신을 발휘하셔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