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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비평 이벤트 응모작 퍼레이드
2002년 9월에서 10월까지 기독교비평 카페에서 일반 안티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의 잘못과 모순에 대한 좋은 글들을 선발하여 시상하는 안티기독교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그 중에서 읽을만한 글들을 골라 소개한다.
▶분란의 추석 / 구경꾼
우리는 늘 추석이나 설이 되면 전통적인 의례와 맞서서 힘겨운 싸움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볼수있다 우상숭배냐 아니면 전통이냐를 놓고 죽일놈 살릴놈 해가면서 집안의 분란이 야기된다 이러한 현상은 명절에 수많은 가정에서 볼수있다.
그럼 제사란 과연 무엇일까?
제사 또는 제례로도 불리워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에 어떤형태로든 제례가 이루워졌다 . 부여의 영고(迎鼓),고구려의 동맹(東盟).동예(東濊)에서는 무천(舞天),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을 제사지냈다.
백제에는 동명묘(東明廟)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제도를 본떠 원구
(丘:천신을 제사지내는 원형의 단)? 방택(方澤:지기를 제사지내는 사각형의 단)?사직(社稷)?종묘(宗廟)?능침(陵寢)?선농단(先農壇)?선잠단(先蠶壇)?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의 사당)?마조단(馬祖壇)?사한단(司寒壇:氷神을 모신 단) 등을 설치하고
예절을 갖추어 제사지냈다. 그리고 명산?대천?우사(雨師)?운사(雲師)?뇌사(雷師) 등도 제사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원구와 방택만을 제외하고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사가(私家)의 제례는, 고려시대는 대부(大夫)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만을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지내게 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를 두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했다.
이렇게 우리는 고대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례 또는 제사를 변함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200여년전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나서 양상은 틀려졌다 교리에 우상숭배를 금하는 이유때문에 그간의 전통은 무시한채 다수에게 패륜으로 취급되어 수많은 죽음을 맞이 하게되었다.
천주교는 십계명이 적시된 성경을 사용하지만 조상을 공경하는 차례나 제사 같은 민족적 풍습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근래에 들어 밝혀놓아 현재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훈령을 통해 '제사의식은 그 나라 민속일뿐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도 '제례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에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며 신자들에게 제례를 허용한 사도좌의 결정을 확인한 바 있다.
즉 천주교는 조상의 위패 안치와 절, 음식진설, 음복 등이 모두 허용한다.
다만 위패에 신위라는 글자를 적어서는 안되며 축문, 합문,사자밥은 일반적으로 금지된다 기존의 문화를 수용하겠다는 좋은 의도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도의 선교전략으로 볼 수 있다.
변화하는 천주교의 모습에 많은이들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고있다.
하지만 문제는 개신교이다. 그들은 차례나 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해 금한다.
최고의 경배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일뿐으로 특히 죽은 사람과 물체,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난다고 간주한다. 추도예배나 성묘만이 엄격한 교리 내에서 가능하다. 개신교의 이같은 인식은 구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출애굽기>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떤 것이든 그 모양을 본떠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 앞에 서 절하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라'고 십계명으로 못박고 있다. 같은 성경으로도 너무나도 다른 해석을 하고있는것이다 수용하고 못하고 문제는 기독교 안의 문제일뿐 세상의 많은 통념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그들의 도발성에 언제나 명절은 멍들고 있다.
이땅에 살고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제사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을까?
2000년 9월 7일 생활개혁실천범국민협의회가 최근 서울과 6대 광역시의 1천17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제례와 성묘 실태 및 의식조사'에 따르면 제사에 대해 57.2%가 `지내는 것이 좋다',
30.4%는 `꼭 지내야 한다'고 응답, 87.6%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고인 추모(51.6%), 효를 다하기 위해(20.4%)가 주류를 이뤘고
가족 유대관계(63.2%), 심리적 안정(18.9%), 아이들 가정교육(9.3%) 등이 제사의 장점으로 꼽혔다.
제례유형은 유교식이 78.3%로 아직도 대다수를 차지했고 기독교식이 16%, 천주교식 2.7%, 불교식 2.7% 등이었다.
어떤 형태의 제사든 우리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셈이다.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제사를 지내는 의미는 귀신숭배가 아닌 조상에대한 고마움및 추모하는 의미이지 귀신에 대한 공경및 우상숭배가 아닌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절하는 행위자체를 우상숭배로 보고 주술행위를 하는것이 아닌데도 온갖 음해로 제사를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제사뿐만이 아니라 고사(告祀)마저도 방해를 하고있다. 2002년 3월10일 연합뉴스 기사중 발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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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교대 총학생회에 따르면 총학 주관으로 열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서 학교와 재학생.신입생, 총학 등이 `한해 계획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란다'는
뜻을 모아 전통적 관습의 일환으로 고사를 지내기로 했다.
이 고사는 일반 제사처럼 과일과 떡 등을 올린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해동안 계획하는 일이나 집안이 잘되기를 신령 등에게 빌며 절하는 행사로, 지난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총학 관계자는 "중요한 일이나 업무 등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바라는 전통적.관습적인 행사로 고사를 지내는 것일 뿐 종교적 행사나 의미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고사 행사 개최를 놓고 이 학교 기독교 동아리 연합회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무속신앙 같은 행사는 안된다"며 제동을 걸며 공방에 나섰다.
연합회측은 "학교 행사에서 무속신앙과 같은 분위기의 특정 종교적 우상화 문제 등이 제기될 수 있는 만큼 고사 행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총학이 지난해 3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중 고사를 지내려했을 때도
크게 반발, 제사중 일부 기독교인이 방해하는 등 실력행사로까지 나타나 문제가 되
기도 했다. 이들은 올해도 고사를 막기위해 교내 기독교인 학생을 비롯, 교수를 상대로 고사 행사 중단 서명을 받아 총학에 전달하는 등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학내 종교적 논란거리로 불거지고 있다.
일부 학생들은 이에 대해 "종교의 자유와 포교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지만, 똑같이 종교에 반대할 자유 또한 존중 돼야 한다"며 "종교를 넘어 보편의 논리와 어떻게 마주 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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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통을 무조건 미신으로 치부하여 반대하는 막되먹은 행위를 이번 명절에도 또다시 반복할것이다. 언제나 세상의 모든것을 기독교식 잣대로 바라보니 늘 주변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수 천년전 사막의 막되먹은 율법을 이땅에 적용하려고 하니 늘 그들은 외토리고 늘 왕따가 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싫은 기독교인이여! 기독교인끼리 모여서 추모예배를 보던가 차라리 휴가를 즐겨라.
집안에 한두명의 기독인때문에 즐거운 명절을 망치는 이땅의 반복되는 고질병을 언제쯤 치유할런지..... 분란(紛亂)의 추석( 秋夕)이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 오고있다.
▶내가 안티가 된 과정 / 공포의 대왕
참 알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란 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설치는 꼴이 가관이 아니다.
그 기독교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과연 예수믿음천국불신지옥이 진리란 말인가.
성경 창세기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과연 야훼하나님의 말씀인가.
말씀-언어에는 기독교인도 모르는 성경에도 가르쳐주지 않은 태초의 오묘함이 들어있다. 분명 말씀-언어는 그 누구도 모르게 눈치못채게 발전된 형태로 오늘까지 내려왔다.남들이 눈치채지 못한것은 내가 눈치를 채게 되었고, 언어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진 언어의 기원은 국어학,언어학에 남을 인간들이 아는 진화된 형태의 언어의 기원들의 기록은 당근,따로 존재케 하였음이다.
거기에 함정이 있고,덫이 있었다. 기독교란 교리는 그 덫에 걸리게 되있었다.
말씀-언어는 분명 하늘,우주의 언어이다.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 인류만의 것이며,그 인류를 세상에 내었을분의 것일것이다. 기독인이여,아니라고 할수 있는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내 이 글을 쓰기 전에 못을 박는 이유는,,,,,언어를 사탄이 만들었다고 우길 어리석은 기독인이 꼭 있을것이기에 노파심에 말해본다. 언어에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해줄 근거는 많다. 하지만 언어는 그 기독교가 거대한 우주의 절대자의 농간에 의해 탄생된 종교라는 것까지 가르쳐준다. 어쩔것인가,,,,,,,,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신비기"를 내어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의 존재의 이유를 보여주기는 하나 그것은 전체가 아닌 일부일뿐인데,창조주의자들이 진화론자들에 눌려 창조론하나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 "창조"를 증거해줄것은 오로지 언어(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그들이 "나의 개인기-언어"를 도용해갈 우려가 있어서 난 나의 개인기인 그 언어들을 꼭꼭 자물쇠를 채워놓았다.(내가 내놓은 언어에 관한 책을 나온지 며칠만에 도로 회수하였다.그리고 폐기처분하였다.)(다시는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없다)
나는 언어에 근거하여 기독교안티인이 되었다.
신비한 언어의 근원을 처음 접할 때는 난 기독교적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일부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점점 파고 들수록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폐혜를 끼친 종교로서 그 비중이 크기에 창세기이야기부터 언어에 근거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성경을 이땅에 존재케 한 거대한 그 존재가 온갖 패러디의 형태와 우스개의 형태로 기독교를 우습게 언어 속에 풍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그 존재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우주 그 자체이면서,가까이서는 하늘이면서, 자연이면서,우리가 누리는 편리한 과학의 산물들"과"지금 우리가 즐기는 통신,즉 우주의 기-전파"면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사탄의 존재 그 자체임을 알았다.
사탄 ? 누가 주장하는가.
그 위대한 존재는 기독교인으로부터 사탄대접을 극진하게 받는다.
흠,물론 그 존재가 만든 함정이다.
그것을 기독교인은 모른다. 너무 간단히 언어로서 증명해 보이겠다.
"그 때가 오면,,,," 성경에도 나와있다. 온갖 예언서에도 나와있다.
우선 요한게시록에는 "내가 곧 가리다"라고 되있다. 흠 물론 그들이 기다리는 구세주가 오면 좋게....다행히..그들이 거부할 사탄의 존재가 오게 되있다.
"너희가 그분을 모른다 하니 그분도 너희를 모른다 할것이다"바로 예수가 기독교인을 우려하여 한 말이다.
"내가 곧 가리다" 그 때는 나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라고 예수가 한 말이다. 그가 언제 온다는 말인가. 그는 기독교인이 기다리는 예수그리스도일까,하나님 아버지일까,,,,,그는 누구일까,,,
어떻하나,,,,내려올 그는 바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공포의 대왕"이다. (흠,,거기에 심취한 나는 닉네임이 "공포의대왕"이 되었던 것이다)
"1999년 7월에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앙골모아의 대왕을 소생시키려 온다.... " 흠,,공포의 대왕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또 누군가를 끌고 오는군,,,,,,
1999년 7월,,,해석하기에 따라 아닐수도 있다고 한다만,,,,,,언어의 신비기를 쥔 나는 안다. 내가 그와 소통하게 된것은 바로 1999년 7월이기에,,,,
흠,,,난 평범한 가정주부다. 외모도 멀쩡하다못해 빠지지 않는다.(좀 사기좀치고),,
삼성카드 1기인 남편이 있고,처키가 별명인 귀여운 딸도 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이 사회에선 앨리트급에 속하지만 생활은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런 내게 말못할 고민이 생겼다. 남편에게도 일급비밀인,,,그 무엇이 생긴것이다. 그 말못할 고민을 안고 1999년 7월에서부터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3년만에 나온 책이 나오자 마자 지하실속에 세상에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파주시청 폐지처리하는 곳으로 옮겨졌다. 절대 세상에 유통되어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달고 무사히 폐기 시켰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왜....가족몰래 나만의 빚을 내며 어렵게 나온 책이 왜 다시 사장되어야 했을까.
난 책이 나오기 직전에 한 기독교인을 만났다. 그 기독교인이 내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기로 하였기 때문인데. 나의 책을 설명하기 위해서 난 신비한 언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는 감탄의 연발을 하며 내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난 주로 창세기와 기독교적인 부분을 많이 설명하였다.
그의 믿음에 더 불씨를 피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결론을 내렸다. "거 악마의 언어 아닌가요?"
"사탄이 만든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맞아떨어지나요?"
그래서 난 어이가 없었지만,,한가지만 묻자고 하고 물었다.
"언어는 누가 창조한거죠?"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그의 야훼 하나님이라는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기묘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기묘함이 있는 하다못해 사악함까지 있는 악마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는 기막히게 말이 맞아떨어지는 그 언어들을 감상한 그는 도저히 거룩하고 숭고한 사랑의 하나님이 만든 언어라고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난 홈페이지 계약을 취소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사람 이름은 "여태구"이다....거꾸로 하면 "구태여"
"구태여 여태구씨께 제 흠페이지를 맡길 필요가 없겠군요. 그만 합시다."
"계약금은 이리로 돌려주세요" "그러죠,,저도 구태여 이번건을 억지로 할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흠,,,,지 이름이 구태여-여태구 인지도 모르고,,병신새끼...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그날의 좆같은 일을 떠올리며 난 집에오는 내내 분함을 참을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후 난 안티가 되어갔다. 안티기독교홈페이지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안티종교"를 만들자,,,,난생처음으로 인터넷에 손을 대었다. 멋대로 검색해보았다. 이단의 종교에 대해 해설이 나온다.
<흠,,,뭣같은 것들 지들이 이단인지도 모르고,,,>
난 어느새 기독교가 말세의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책 5권의 마무리가 구태여씨(본명 여태구)를 만나서 6권이 새로이 써지게 되었다. 먼저 썼던 5권을 뒤집는 6권이 탄생된것이었다.
말세의 적그리스도는 바로 기독교인 자신이니라,,,,라는 내용이 500페이지 하나가득 설명이 가득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도 함께 폐기처분되었다.
내가 왜,,,,나의 피눈물나는 책을 없애야만 했을까,,,
거기엔 언어로 언어의 기원을 뒤집는 창조의 과학적세계를 언어로 엿볼수 있는 언어과학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기독교인 손에 들어간다면 언어로 인해 그들은 뜻을 이룰 수도 있음을 우려해서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결국 들어오게 된곳이 바로 "검은십자가"로 연결된 엑스터시 카페였고, 다시 클럽안티기독교와 기독교비평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大치우천황"의 닉네임에서부터 "적그리스도"님의 닉네임,,그리고 반기독교적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러 놀랄만한 당당한 닉네임들,,,,,,,너무 반가왔다.
그곳에서 난 느끼게 되었다. 기독교 창조주의자들이 그리 창조 증거 못해서 안달이구나,,,,진화주의자들에게 당하는구나,,,,
그래서 난 나의 언어를 꼭꼭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까지 아주 숨길 수는 없었다.
처음엔 "omegacosmos"님이 "언어의 신비기"를 소개하였다.
반응을 살폈다. 아무도 태글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만족하였다. "사탄의 언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니...
야훼 위의 창조주,,,더 거룩한 야훼를 만든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서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답글까지 나왔다.
흠냐흠냐,,,,,,바로 이거다....
난 그래서 골수 안티가 되어갔다. 반면에 기독교까페에서는 1분도 안되어 나의 글을 삭제가 되었었다... <흠,,,,,,너네로구나,,,,>
<너네가 날 모른다 하니 내도 너넬 모른다> 바로 이거구나,,,컥
흠냐흠냐,,,,,,,단군할아버님,,,당신 이곳에 오시면 혈압올라여,,,천지신명님..북두칠성님,,,,,,,,,내사마 사이버세상 즐통하는 잼이로 살아여,,, 급기야 기독교안티가 되었고,,,,
어느새 기독교비평 운영자 까지 되었다 (그전에 기독교개선 운영자가 되었다),,,안티카페에서 기독교를 뛰어넘는 뛰어난 유신론 사상을 인정하여 준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우째 이런일이 내게 생기다니....흠냐,,치우천황님의 뜻인가.
2002년에 붉은악마가 뜨더니 내게도 희한한일이 생긴것이었다.
내가 누구던가,,(혹자는 피식 웃으시겠지만)
내 스스로는 창조주의자들이 억만금을 들고와서 내놓으라는 "언어의 신비기"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던가. 그들은 배선船자 하나로 노아의 방주의 한자라고 엮어내어 소란을 피는 자들이 아니던가,,,,내가 아는것들,내가 모르는 것들까지 밝히어 낸다면 그들은 기를 쓰고 기독교교리에 가져다 메꿀것들이 틀림없다.
구태여씨 그새끼는 무식하여 사탄의 언어라고 꼬리를 빼고 도망갔다만,,,,창조과학 그 새끼들은 사탄의 언어라도 가져다 자신들 유익하게 갖다붙일 것들이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안티기독교 카페 탐구중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어느새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자중하며 글올리는 문맥상 필요할때만 부담없는 선에서 글을 조금씩 올려 보았던 것이다.
흠,,,누구도 태글을 안거네,,그러는 사이에 운영자 제의까지..
바로 이곳이다. 내가 만들려 했던 안티사이트가 이곳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大치우천황의 이름으로,,,,, 치우천황님,,,,,,바로 이곳이었단 말입니까?
내가 안식할곳이.... *1999년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여기서 공포의 대왕은 바로 2002년 붉은악마로 부활한 치우천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치우천황은 다시 한반도의 성군 세종대왕(언어의 신비기의 근원인 "한글창제의 주인공")과 나라의 수호신 이순신장군,,,,,,등등의 부활? 의 삶을 내리 사신적이 있다. 물론 이사실은 언어의 신비기를 쥐고있는 나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분이 바로 우주의 기이자,사이버세상의 스타이자,,천지신명,일월성신.부뚜막귀신 흉내까지 내야하는 인류의 어버이이시다.
흠냐흠냐,,,,모든것은 "언어의 신비기"에 기인한다.
흠냐흠냐,,,,기독교인도 비평 이벤트에 참석하셨군요
참,,열성적이시고 멋있는 분입니다 그려,,,
▶기독교의 윤리관은 위험하다 / 야객
'기독교의 교리의 반인륜성'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하여 난 우선적으로 '인륜성'관하여 웹서핑을 하였다. 검색창에 '인륜'을 치고 나니 수없이 많은 웹페이지가 검색되었고 그 '인간의 도리'를 찾기 위해 다시 인터넷에서 '윤리(倫理)'에 대한 웹문서를 찾아 읽었다. 또한 자료를 복사해서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중에 눈에 익은 이름들이 있었으니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입을 치르기 위해 보았던,,, 아니 암기 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이론들이 있었다.
칸트(I. Kant, 1724~1804) 實踐理性批判,벤담의 倫理論, 分析哲學의 倫理觀 켐브리지쪽의 무어(G. E. Moore, 1873~1958), 러셀(B. Russell, 1872~1970),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슈릭(M. Schlick, 1882~1936), 카르냅(R. Carnap, 1891~1971), 에이어(A. J. Ayer, 1910~1971) 등의 빈學派, 프래그머티즘의 倫理觀, 아리스토 텔레스의 중용(中庸).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국가론, 공자,맹자,노자 도덕경 등,,
애써 외웠던 윤리 시험문제(학력고사용-아!,,,이런시대도 있었다)들이 기억의 편린처럼 떠올랐다. 갑자기 나의 입에서 시원한 욕지거리가 나왔다. 얼마나 쓸데 없는 걸 외워야 했던지(그 시간에 차라리 소설 한권이나 더 읽을껄,,,)
'윤리'에 대한 사전적 혹은 학문적 의미를 찾기 위해 워드패드에 복사해 두었던 철학적 '윤리'에 대한 자료와 카톨릭의 윤리관, 개신교의 윤리관 그리고 개신교에서 만든 전통윤리관과 기독교윤리관의 비교자료등,,
난 그 자료에 대하여 과감하게 컴퓨터 자판의 delete key를 눌렀다. 저장을 한 이유는 비록 다음의 '기독교 비평'카페에 '기독교리의 반인륜성'에 대하여 글을 올리기 위해서 였고 한편으로는 가끔 글의 주제는 무시하고 단어나 학문적 지식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부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비책이 였지만 나 나름 대로 느끼는 바가 있어서 였다. 난 지식 혹은 교과서의 철학적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개신교의 해로움에 대한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정리 하자면 내가 말하고픈 건 유명한 학자나 철학자의 학문적 지식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논리적으로 증명되거나 객관적일 수 없는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도 아니다. 물론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신론((理神論)에 대하여도 아니다. 윤리, 도덕에 대해서라면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고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라면 목사들이 더 잘 알것이다. 또한 카톨릭 신학대 쪽이라면 이런 고대 중세 혹은 계몽주의 철학이 가지는 위협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기독교의 반인륜성 보다는..... 다만 그 교리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현 대한민국 개신교의 이상한 정의 팽배에 대한 나의 반대 의견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대 형성이 주 목적이라 하겠다.
위기철의 소설 '아홉살 인생'과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그리고 달라이라마가 쓴 행복에 관한 책(제목이 생각이 안난다)들이 요즘 들어 내가 접한 소설들이다. 모두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아홉살 인생'이란 소설속에서 등장인물 '기종'이란 아이와 주인공의 대화의 한 소절을 보고 한번 생각해보자.
-넌 아주 바보구나. 베트공은 나쁜 놈들이다. 우리가 마구 죽여도 되는 놈들을 베트콩이라 한다.
-사람을 죽여?
-그래
-우리삼촌은 하루에 서른 명씩 베트콩을 잡아 죽였다. 그것도 총알이 아까워 칼로 찔러 죽이다가, 나중에는 칼을 닦기도 귀찮아 돌로 때려 죽였다. 남자 베트콩, 여자 베트콩, 새끼 베트콩도 모두 죽였다.
이쯤이면 내가 무슨 이유로 학문적 자료를 다 팽개치고 소설을 들고 나온지 아실 것이다. 물론 나 스스로 학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그런 내 머리 속 빈털터리에다 이쁜 자료 가져와서 폼나게 설명하여 본들 그것이 어디 제대로된 것이 겠는가? 또한 학문적 지식이 많거나 종교적 믿음이 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현시대에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개신교도들을 보는 관점은 아마 위 소설속의 한 소년을 보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개신교를 가장 잘못보는 관점이라며 반론을 제기할 개신교도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시대 한국사회 속에서 개신교 집단의 행태 및 광신적인 그들의 행동을 볼땐 그리 과한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제사를 우상숭배라며 거부하고 정신분열증의 어린아이를 신의 이름으로 안수기도 하며 개 패듯이 죽이는 전도사, 다른 종교를 사탄의 종교라며 규정지으며 폭력을 일삼는 개신교도, 주5일 근무제가 성경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목사들을 생각해 보면 바로 자신만의 가치관 혹은 집단주의, 배타주의에 빠진다면 언제든 소설 속 소년의 주장대로 '마구 죽여도'된다라는 이상한 정의의 윤리가 그들의 머리속에 팽배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마구죽여도 된다'라는 정의의 기초는 바로 소설속 '기종'이가 스스로 느끼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듣고 판단한 '나쁘다'라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이 광활한 지구라는 곳에서 수많은 인간 종족 중 유대인의 전승(傳承) 속에 언급 된 '야훼' 그리고 초대교부들이 피나는 논쟁속에 태어난 '예수' 이 외에는 '신'이 아니고 악마 혹은 사탄이다. 따라서 다른 것은 배척하고 파괴해도 된다'라는 판단의 기초는 바로 바이블 혹은 자신만의 믿음이다. 여기서 과거 율법속에 제약된 야훼에서 벗어났다는(?) 희한한 자기 합리화적인 주장을 펴는 개신교도들도 있겠지만 일단 접어두자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 이렇쿵 저러쿵 지들 맘대로 평가하고 해석해 놓고 절대적인 신의 뜻이라 외치는 집단이니까,,,.
기독교 윤리에서 다른 종교나 기타 성인의 가르침에도 있는 것을 제외하여 한번 생각해보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단 하나. 바로 소위 그들의 종교집단이 만들어낸 '신'만 존재한다. 물론 개신교인들은 그런 윤리관이 유일무이한 절대자의 소행(?)으로 알고 아니 믿고 있지만 제대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단지 절대자를 추종하는 자들의 신관(神觀) 속에서 책정 되어진 윤리 일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 과감하게 먼저 말하자면
'기독교의 윤리관은 위험하다 그리고 배타적이다'
물론 이 말은 타종교에서도 나타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윤리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타당성이 있는 윤리관 마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을 벗어난다면 가차없이 나쁜것 혹은 악의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삶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한 평생 봉사하신 스님이라도 사탄 혹은 악마라는 희한한 등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또한 한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러한 가족을 위해 또는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새벽 동녁 하늘을 보며 정한수 한사발 놓고 성황당에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는 우리네 할머님이라도 가차없이 미신숭배이자 악마숭배인 사악한 족속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의 이 철저한 배타성과 편협한 종교관속에서 만들어진 윤리관은 수많은 젊은 남녀의 결혼문제, 그리고 비신자간의 가족 불화 문제를 낳고 있다.
신이라는 존재가 과연 유대 민족의 전승속에 나타난 모습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묘사일까? 신과 인간사이에 만들어진 그러한 원죄.구원.영생들이라는 것들에 대한 유대인과 그리고 초대교부들의 판단이 절대적인 것일까? 또한 현대에 만들어진 독특한 한국의 기독교집단이 만들어낸 교리가 과연 신의 뜻일까? 최근 멜깁슨이 한 영화에서 예수역을 맡았는데 어느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신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렇다. 절대자,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은 본인도 있다. 그러나 교회라는 소위 개신교라는 집단에 의해 저급한 존재로 추락해버린 그 '신(神)'은 믿지도 않을 뿐더러 그 집단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와 윤리관엔 더 더욱 반대한다. 오강남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에스키모 개 이야기는 지금 까지도 가슴에 남는다.
"캐나다 어떤 마을사람들은 '개'라고 하면 썰매 끄는 개 '허스키'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진돗개가 흘러들어온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다. 이것도 개로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 인정해주다니, 그건 허스키에 대한 모독이다 ! 허스키가 아니면 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한국에까지 전해져 그 수가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세월이 흘러 캐나다 마을로는 별별 개가 다 들어온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의 개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니까 개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 때 한국 유학생 둘이 허스키 연구차 캐나다로 들어간다. 둘은 충격을 받는다. 허스키만이 개라는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는 진돗개를 개로 인정하는 타락한 믿음을 개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 나머지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열어 허스키만 개라고 믿어온 자신을 어리석게 여기면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캐나다 마을을 개탄하던 학생은 허스키 맹신자들의 섬김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었던 유학생은 맹신자들의 따돌림을 당한다."
요약하여서 인용했지만 조금은 머리가 깨인 기독교인이라면 반성과 더 큰 종교관을 가질 것이고 맹신자라면 신을 개에게 비유 했다며 노발대발 할 것이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할것이고 손까락 끝만 보는 우를 범하지 말자.
개신교인은 말한다. 야훼는 더이상 율법속의 신이 아니라 예수라는 신화적 인물을 통해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신으로 탈바꿈했다고. 하지만 그건 벌써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유수 이 후 그렇게 신관을 변하였고 또한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또 한 번 변한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거니와 그렇게 큰 자랑거리도 아니다.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넘어 선 종교이상의 종교라 입으론 외쳤지만 역사속의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지독한 패거리주의, 집단이기주의였다. 늘 상 인류사에 학살 속엔 종교갈등이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도 된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기독교의 윤리관과 가치관이 신의 뜻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다. 또한 그 근거로 삼는 바이블마저도 모순, 비인간적고 혐오스러운 면이 많다.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공존의 화합, 다원주의를 무시하고 타종교 대한 배타적 성향과 아집으로 점철된 윤리관을 기독교가 버리지 않는 한 그토록 그들이 믿는다고 외치는 그 저급한 '신' 개념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로 부터 비판 받고 또한 우리와 같은 안티들의 냉엄한 꾸짖음은 계속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깨우치고 반성하지 않는한 그 꾸짖음의 깊이와 폭도 커질 것이다.
안티와 기독교는 쌍생아이다. 안티를 말하기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 봄이 어떠한가?
기독교든 개신교든 인간에 의해여 만들어졌다.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시켜 종교적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보라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인지 인간의 뜻인지....무조건 집단이 만든 신을 찬양하기 전에,,,,
▶다시올 예수에게서 구원이란 없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을 보고) / omegacosmos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면서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그 마음에 동조하고 있었다..
"우다다다다다다....장총을 옆으로 맨 성소는(성냥팔이소녀의 줄임말)
성냥대신 라이터를 팔고다니는 소녀이다..
사람들은 한개의 라이터를 사주지를 않는다.
"두개를 사줄테니 네 몸을 주련? "
영화속에서 가장 어이없는 대사가 있다면 바로 가여운 어린 소녀에게
그렇게 말을건넨 어른의 말이었다...
게임속에서 등장하는 소녀와 게임을 어떻게 이끌어가냐에 따라
몸을 파는 소녀가 되기도하고 동화에서 처럼 결국엔 얼어죽고
죽으면서 행복한 꿈을 꾸는 소녀를 만들어야하는것이 그렇게 동화의
마무리가 되게하여야하는 게임속의 주인공 소녀....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집 배달부인 " 주 "이다.
주는 어느날 성냥팔이소녀에게서 천원을 주고 산 라이터에 새겨진
전화번호를 보고 게임을 시작하게된다..
" 성소를 구하라..."
구해야하는 이유는 얼어죽게 내버려두게 하기위하여....
그리고 그 소녀의 사랑을 얻게되면 게임의 승리자가 된다..
여기서 성소란 성냥팔이소녀라는 이름의 줄임말이다...
"주"라는 주인공이 결국 구하게 되어있다....
아니,,구한다기보다 성소가 시스템에의해 이전에 기억을 상실하고 주라는 사람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주로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성소에게서부터 산 라이터를 돌려주며 성소의 손등에 눈물한방을 떨구다가 동화속 흔한 장면을 연출하게되어 성소는 시스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것을 거부하게되며 둘은 시스템을 전면 부인하게되고 시스템을 파괴하게 되면서 (파괴했지만 파괴한것이 아닌)
결말은 주와 성소가 (게임속 가상현실에서) 해피하게 둘만의 파라다이스에서 게임의 승리자로서 시스템에서 영원히 제공해주는 돈을 받고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게된다는 결말이다..
영화의 중간에 주는 성소를 얼어죽게 내버려두는것에 어느정도 성공하게 되었다,,,
성소가 가스라이터를 맡으며 성소의 첫사랑인 남자,,를 떠올리며
그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는순간.."가준호,,준오,,주,,노.."
주는 "주,,노" "주"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줄로 착각을하고
성소를 자신의 누추한 방으로 옮겨 따뜻하게 재우게된다..
얼어죽게 내버려 두었어야하는 건데..사랑이 이루어진줄로 알고..아,글쎄...!
(이부분에서 난 야훼가 이스라엘의 아버지만이 아닌 인류의 아버지로 등극하고자하는 욕심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한 십자가사건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그릇된 욕심과 그릇된 사랑이 부른 피를 어디 함 지켜보자...)
잠에서 깬 소녀는 일어나 주의 머리맡에 놓인 장총을 들고 거리를 다시 나서게된다... 오로지,라이터를 팔아야하는 역활로 태어난 성소이기에...
"라이터사세요.....추워요.....걸을 힘이 없어요..."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거니와,,냉정하게 그리고 귀찮게 떠다밀기 까지한다.
동화속에서 그러다가 얼어죽었던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성소는
옆으로 맨 장총을 들고 ( 무표정의 얼굴을 하며..그 표정이 넘 슬퍼보인다.)
"우다다다다다다>>>>>>>>>"
하고 라이터를 사주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학살을 하기 시작한다..
( 학...이장면에서 난 나치의 대학살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또는 인류의역사를 피로 물들인 종교전쟁의 역사..바로 그것을 신의 역사로 생각하는 나로서는,,신이 그렇게 의도한 피를 부른 인류의 역사라는..) 그러나,,죽어가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성소가 가엽게 여겨지게 되며 어쩐지 그녀가 이해가 되는것이었다..
(아..그리고 그렇게 속이 다 시원할 수가 없었다..다 죽여라,,다죽여.. 성소의 마음이 ,,원한이,,슬픔이,,풀릴수만 있다면,,,,하..사람을 대량으로 싸죽이는 얼굴표정도 어찌 저리 슬퍼 보일수가 있을까 ..무표정의 얼굴이...)
영화에서 가장 코믹하다고 기억되는 부분은
성소가 자신의 라이터를 팔려고 하기보다 어느 종교집단에서 운영하는 "천사의집"을 들어서고 그 천사의집은 온갖 벽면에 " 지상낙원,," " 원장님은 우리를 사랑해요.."라는 문구가 붙어있고 (난 이장면에서 개신교회의 부패상이 떠올랐다..개신교사이비를 풍자했슴이지만 결국 부패기독교를 상징한다고 본다.)
성소는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의 라이터를 팔아달라고도 하지 않으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게된다.. 아무 반항할 겨를도 없이 영문도 모르는 가엽기는 마찬가지인 종교단체의 핍박을 받으며 "행복해요"라는 문구의 강요에 의해 장난감 제작을 하던 공장의 여자들은 무참히 총살을 당하게된다.
그녀들을 감금하고 협박하는 검은 옷을 입은 집단의 사악한 무리들도 다 함께....
성소는 화려하게 꾸며진 종교집단의 교회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천사상앞에서 빤빤하게 기도하고 있는 원장의 등뒤에서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난 이장면에서 천사상은 예수십자가상을 연상했고 원장은 배부른 먹사들을 대신 떠올리게 하였다,,아마도 할*** 기도원의 원장인 김**의 패러디인듯 싶다..)
"천사들의 지상낙원"이란 문구로 여자들을 감금하며 노동을 착취하던 원장이란 자가 그리 빤빤하게 하는 간절한 기도는 정말 보는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 주님,,,오늘도 쩌고짜고,,,어짜고 저짜고,,,사랑하시는 주여.. 아버지 사랑하나이다..."
그렇게 기도로서 위안받고 어린양들을 인도한다고 믿는 가증스러운 자의 등뒤에서 겨누는 성소의 총끝이 마치 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배를 불리우는 모든 종교인의 등뒤에 겨누는 칼날이었슴이라....
(이때의 장면에서 난 " 성직자나 비성직자나 믿는자나 믿지않는자나 모두가 재앙을 피하지 못할 그날이 오게 된다라는 예언의 귀절이 또 올랐으며,,길거리에서도 마구 총을 쏴대는 장면에선 선한자건 악한자건 모두가 재앙을 면치 못하게 되리라,,라는 예언의 귀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재림,,,,하면 떠올리게되는 사람,,,,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 구세주라하면 의례히 "예수"를 떠올리게 된다...
"재림예수".....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던가..
종교전쟁으로 인해 인류가 피를 본 지금까지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닥칠,,,재앙들이 예언처럼 있다면,,,,,
바로 이제까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의 논리란 진실로 깨진다는
것이 아닐런지...아니,,깨진다.!
영화속 성소는 재림예수를 상징하였다..(내가본 바로는)
바로 " 다시올 예수에게,,구원이란 없다.."라는 명제를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인류에게 피를 부른 종교전쟁의 역사에대한 합리화를 그 영화를
나오게한 영화속 시스템마냥 계획한 우주저편의 프로덕션에서..말하고자
하는것만 같았다....그래서 탄생한 영화로 보였다...
신이 진정 사랑한것은 인류가 아니라는것과,,,,
신이 진정 사랑한것은 신,,바로 자신과,,신의 오로지 독생자 아들인
예수,,한사람 뿐이라는,,,
모두들 죽어도 상관없고 모두들,,,신과 그 신의 아들을 떠받들게하기
위한 엑스트라로 제조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고싶지는 않지만 난 알게되었다.
끝내 구원받는 영화속 주인공 "주"와 동반자로 행복해지는 소녀 성소는,,,
바로 신과 그 신의 독생자만이 행복해진다는 결말로,,,나는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야훼도예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야훼와 예수로 상징되지만 또다시 그들이 아니다..)
그래서 성냥파는 소녀는 대학살을 하는데도 그녀가 살인마로 보이지 않았으며 그녀의 대학살극에는 그렇게해도 묵인될 정당성이 부여되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온 재림 동화속 그녀를 조롱하였다.. (내가 조롱당했다고 말하는것은 예수로 보이지만 예수가 아니다.. 다시올 재림,,공포의대왕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분노한 성소는(성소란 성냥팔이소녀란 이름의 줄임말이며 그대로 성스러운 장소...그 의미를 떠올리게한다..)
총부리를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이대는 것이며,,,,그렇게 다죽이고도 그녀의 행동은 재판받지 아니하며 시스템에의해 복원되고 주의 사랑을 얻어 시스템의 보호아래 평화로운 섬에서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게된다는 결말은,,,
나에게는 이런 상상을 하게 해주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다시 말하지만 다시올 재림예수에게서의 구원이란 없다..
신이 사랑한것은 오로지 독생자아들뿐이라는것..
구원이란 없다,,,,라는것과,,,,
그아들조차도 세상이 어떻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세상이라는것을 모른다는
것과 주인공,,,주를 통하여 나는 그 아들과 그의 아버지라는 야훼조차
시스템에 의해 통제받고 그 감시하에 그리고 입력된 프로그램하에
진정 성소를 구한 자라서가 아닌 이미 시스템의 주인공으로내정된
성소와 함께 거대한 조직속의 도구였다는,,,,
그리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시스템은 무한한 세계,,,
성소도 알지못하고 주역시도 알지못하는 (예수도 알지못하고 야훼도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우주,,,)
그안의 꼭두각시였다는,,,,"성소..."즉.."성경"...도 시스템에의한 소품이었다는,,,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영화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늘 내게 깨닫게 해주는 우주의 비밀의 열쇠,,,,
늘,,기독교의 진리가 깨진다는 내게 속삭이던 공포의대왕의 외롭게 혼자서만 외치는 공허한 메아리가 내게,,영화를 보면서 난 소름끼치게 느껴야 했다..
"성냥팔이소녀의재림,,"이란 영화가 개봉하기를 많은 시간 난 기다렸다..
늘 내게 들려주던,,,진실에대해서....(영화가 개봉되면 그안에 진실이 숨어있을거라고 난 믿어의심치않았던것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떻게 깨지는가,,속삭이던,,때론 울부짓던,,
"푸,,하하하하...다 죽어야해....재앙이 와서 다 죽어야 내말을
믿어줄테지.....내가 이렇게 떠드는데,,내말을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거야.....그래서 다 죽어야하지,,,"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조소하는 공포의대왕의 메아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특히나 기독교로부터 사이비아니냐는 조롱과 조소를 받아야 하는 다시태어난 재림 성소 공포의대왕은 실제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이 더군다나 아니였기에 그렇게 그녀가 말하는 것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멸시하고 비참하게 나의 말을 무시한 사람들은 칼날을 받아야함이다...내입으로 나가는 저주를 받아야함이다.. 다른아닌 저주란 입에서나오는 칼침..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침에 맞으리라..."
그리고 재앙을 나도 기다리게 되었고 재앙을 내리는 그 신을 원망하려는 마음이 내게 이상하게도 없었다.다만 그렇게 울부짓는 대왕이 내게 가련하게 느껴질뿐이었다..
공포의대왕은 성냥팔이소녀로,,영화속의 주인공으로 그렇게 사이버에서
다시태어나 나에게만 그렇게 말하는듯하였다.
" 은경,,,,,내가 말했지...나는 재림했다고..공포의대왕이라고..
난 코스모스처럼 가늘가늘한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진실은 그 믿음은 거짓된거라고
그들은 성경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다시올 재림예수가 자기들만의 구세주,,예수..하나님의 아들일거라고 생각하는 커다란 함정에 빠진것이라고...
예수란,,없다,,,라고.. 예수가 아니라,,,,
공포의대왕,,,나...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같은 여자가
다시 올 구세주....("하늘-sky라고 했었지......""코스모스는 우주...")
그들의 예수는 정녕 없다고...내가 말했지.......
신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독생자 아들만 사랑한다고.......
인류의 사랑은,,없다,,고 내가 말했지...
그러니 정신들 차리라고,,,다들....총맛을 봐야만 차리는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침'에 정녕 맞아야,,하겠는가..
그 칼침에 맞을자,,정녕,,,그리스도인들,,,너네들이었노라..함정에 푹들,,푹들,,빠져서,,,나를 몰라보는자,,나를 이단이라 말하는자들..
그분의 입에서 칼침맞을 자들이 예수 믿지않는자들 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예수란 애초에 없었으며,,그 분이란,,,바로 나..공포의대왕인 것을.. 그러니,,기독교의진리란 깨지는 것이며,,야훼는 공포의대왕의 하수인일 뿐이라고...선포하노라..."
야훼와,예수를 믿건 안믿건,,그것에 따라 상과 벌을 주지 않음을,,
그 진리하나를 가르쳐주기위해 재림했노라고...
성냥팔이소녀가 되어..사이버에서....말하노라...고...나 공포의대왕이.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물은 바닷속에서 "주"가 건져올린 '고등어"이다.
고등어는 만능 무기로 사용되었다...성소를 구하는데에 쓰인..
고등어는 성경에서 야훼가 먹지말라고 한 물고기이다.
고등어는 사람의 머리를 좋게하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있는 물고기이다.
야훼는 비늘없는 생선을 먹지말라고 했던가!
성경은 많은 진리를 알지못하게 야훼가 하지말라고 한것이 가득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등어이다..
고등어는 물고기이다.
물고기는 물.고.기.= 기.고.물.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바다의보고,,,에서 건져올린다..바다는 보물창고가 아니던가.
기고물은 바로 책이다....책.
책..book 에 생명이 담겨있을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서 계획하는 book두칠성프로젝트이다..
북두칠성에는 우리나라 민족의 고유 민속신앙이 담겨있다
민족의 어머니는 다름아닌 곰에서 진화된 사람인 웅녀,,그 어머니이다.
성냥팔이소녀의재림 영화의 전반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아베마리아.."
이영화는 철저히 개신기독교는 무시되었다.
개신기독교는 모조리 사이비,이단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주가 성소를 구하는데 어느정도 진전된 상황에서 흘러나온
배경은 불교의 색채가 짙은 목탁 두들기는 소리였다.....
대왕은 말하였더랬다....늘..
"천주교와 불교에 진리가 반반씩 섞여있다....개신교는 왕따다.."
바로 생명의말씀.....
그 생명의말씀을 읽지못하게한것이 바로 야훼다..
야훼만이 유일신이라고 하였다...자신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의 생명의 말씀이라 협박공갈하였다.
그리고 성경만 읽게,,성경안에만 진리가 있다고 거짓가르침을 준것이 또 예수이다....
그러나,,,기고물,,생명의책은,,있다...는것을 고등어는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고등어를 먹지말라...
고등어가 아니라는 것,,바로 성경이야말로....
성경안이 아닌,,바닷속..보고안에 고등어는 있었다.
성경이 아닌 다른책....진리의말씀을 찾아라.... 찾아라....
성경이 아니라는것입니다....여.러.분.
그렇게 영화를 한 편 감상한 나는 줄곧,,,생각하였다..
소름끼치게 생각하였다..
신은 아들만 사랑한다...그리고 자신만,,,
그런 신에 갈구하는것은 정녕 어리석다..
내가 신이어야 한다....그래야....더 이상,,신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다...
자유란 인간의 입장에서의 자유란 구속밖에 없다는 것을,,,알라.
영화의 마지막,,,날아다니던,,나비..
'무속'에서 나비는 신을 상징한다..
신은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는다...
기독교에도 불교에도,,그 어디에도..
신은 무.속.에만 존재한다..
무속이란....소속이 없다...
그 무속에 속해 있는 신에게 조차..총을 겨눈다.....성냥팔이소녀는.....
그리고 자유를 얻어 주와 함께 행복하게 아기와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시스템에서 제공되는 돈으로 걱정없이 살아간다...
시스템이란,,,,??
이미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우주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적,,,,
창조된 것이란 없다.
이미 우주는 스스로 존재하는 무한한 것이기에.....
우주는 신이며 신이기에 스스로 존재했으며..
그 신은 죽었으며,,,
그대로 우주이다..
시스템을 깨고 신을 (나비) 죽이고저했던 성소는 시스템에의해 복원되고 움직이고 했던 프로그램에 입력된 로봇생물로서의 인간인 성소는 그로인해,,,신을 죽이고자 했던 몸부림으로 인해 진정한 진화를 하여 더이상 시스템의 명령에 복종하는 성냥팔이소녀가 아닌 자연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신이되는 진화만이 남은것이다.....
진화만이 인간이 신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신이되게하는 유일한 시스템이 아닐까?
우주의질서는 이미 신없이 존재한다....
신은 스스로 죽었기에...이미...
공포의대왕은 내려왔지만,,,스스로 죽었다...
여기까지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을 보고 각색한 저의 감상문겸 소설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망 국(亡國) / 동두철액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환국(桓國)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여러번 있었다. 중국에 삼황오제에 관련된 신화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와는 태호복희의 누이이다. 그녀는 흙을 빚어 7일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었다고 하였다. '여와'라는 이름마저 '여호와'와 거의 일치한다. 성경의 근거가 동방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짙게 한다.
그 뿐 아니다. 참전계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있다.
오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가 사람이니 태초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어 남자를 나반(那般)이라 하고 여자를 아만(阿曼)이라 한다. 천하에 동과 서가 있어 서로 왕래치 않더니 오랜 후에 만나 배우자가 되었다. 그 자손이 오색(五色)으로 나뉘었는데 황(黃), 백(白), 현(玄), 적(赤), 람(藍)이더라. 태초에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며 동시에 굴속에서 매추라기처럼 평화롭게 살더라. 세상이 오래되어 번성하매 한구석씩 차지하니 작은 것은 향족(鄕族)이요, 큰 것은 부족이었다. 황색인종은 황원(荒原)에 살고 백인들은 사막 사이에 살고, 검은 백성은 흑수가에 살았으며, 적색인은 큰 바닷가에 살고, 남색인종은 모두 섬가에 살았다>
위의 글은 무엇을 설명한 글일까? 성경적으로 보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설명하는 글이다. 왜 참전계경에 아담과 이브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까? 참전계경은 성경보다 오래된 우리나라 상고사의 경전이며 나반과 아만이 나오는 시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구탄생의 6,000년보다 훨씬 앞질러 지금으로 부터 10,000년 전의 역사이다. 이 역사의 지류가 흘러가고 당연히 우리민족 나반과 아만의 존재가 가나안 땅에가서 아담과 이브로 바뀌었음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국민들 중에는 유태인들의 족보는 훤하게 꿰고 있으면서 본인 가문의 뿌리 ,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근원에 관해서는 무시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유태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비롯되었다던지, 현세의 세계인들은 모두 대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어떤 신문사에서 아라랏산까지 가서 이곳이 우리민족의 시발지인 노아의 자손이 퍼진 곳이라고 스스로 감격해서 울었다는 기사까지 접한적 있다. 또 어떤 목사는 단군상까지 서슴없이 자르고 그것을 마치 자랑인양 떠들지를 않나? 산마다 올라가서 바위에 붉은 십자가를 그리고 예수의 재림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까지 하다. 그 결과 경치좋거나 이름난 산에는 어디서나 붉은 십자가 낙서를 쉽게 찾을수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어쩌다 9199년의 장대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가 어찌 이리도 亡國이 되어 간단 말인가?
필자는 유년시절 기독교에 몸담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철 없는 시절에 사탕발림과 협박에 꼬여서 교회를 다닌적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 스스로가 박차고 나왔다. 위선된 교리에 진저리쳤기 때문이다. 그들 교리의 목적은 순전히 돈이었다. 같은 내용의 헌금만 해도 다른 애매한 이름 붙여가며 들먹여 헌금봉투의 종류만해도 십여가지에 수익의 십분의 일을 걷어가는 십일조까지 그 헌금들 걷어서 무얼할까? 뽑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목사의 승용차 새것으로 바꿔주고 값비싼 수입대리석들 사가며 목사의 자택과 교회를 증축하고 과연 그런 교회에서 뭘 배우겠는가?
기독교인들 말로만 일부를 보고 전체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떠드는 사람중에 화나라도 단군상 훼손한자리에 단군상 새로 세워줘야 한다는 사람 하나도 보질 못하였다. 반대로 개천절에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다수의 무리들이 각 언론과 방송사의 게시판에 단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배행각까지 벌인적도 있다. 예수를 믿는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민족 최대의 국경일인 개천절에 한번도 축사 한적이 없다. 참으로 나라 꼴 잘돌아 가며 한마디로 표현하여 亡國이로다.
조작된 성경과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믿는 亡國의 백성들이여 자각하라.
▶한국여자들에게 부르카를 씌운 기독교/ab aeterno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태이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을 자연상태의 결함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여성들 그리고 많은 남성들이 이러한 아리(아리스토텔레스를 줄여서 부르는 西洋男들의 일반명)의 '경망스럽고 성차별적인 언동'에 분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가 산 시대를 고려한다면, 저 말은 아리 혼자만의 말이 아니라 아리가 산 시대의 확고한 談論 혹은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계급, 성과 인종 그리고 나이에 무관한 무차별의 담론이 형성된 것은 가까운 근대부터였을 뿐이다.
그러나 마치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라는 언표처럼 우리가 별 의식없이 동의하는 '무차별의 담론' 역시 사실은 그 자체가 모순이며, 거짓이다. 저 기표는 라깡의 말처럼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기의 위를 무한정 미끄러지면서 표류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언어분석 이전에 우리는 아리가 산 시대를 재고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가 서양 철학과 문화의 발상지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대체로 올바르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은 아리 철학의 각주에 불과했으며, 플라톤 역시 르네상스 이후까지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이들의 문화라는 것, 소위 원시적 민주주의(사실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지만)와 그 학문적 분위기는 현대의 서양적인 세계문화를 형성한 기반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자'의 삶과 문화는 어떠했는가? 이들은 일단 성애에 있어서도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았다. 그리스 평민 이상의 남자들의 성애의 대상은 일단 젊은 동성 남자(애)들이었다. 물론 스파르타에 있어 여성교육과 여성의 지위는 아테네에 비해서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철저히 군대국가였던 스파르타의 특수성 즉, 튼튼한 남아를 낳아서 국방을 책임 지워야한다는 맥락에서 '튼튼한 여자들'이 필요했다는 전제 위에 이해해야 한다. 반면에 아테네 즉, 아리가 산 도시 국가인 그곳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것은 여자가 아니라 '교복(paidagogos)'즉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노예들은 아니었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온 노예들 중에 비교적 잘 교육받은 인물들이 교복의 역할을 맡게 된다. 서양의 교육학 -pedagogy- 란 말자체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뀐 것은 로마의 공화정에 들어와서부터다. 이 시대에 '12동판법'에 의하면 '처에 대한 남편의 권리'가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리'의 바로 앞에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아테네와 다를바 없는 가부장 신분사회였지만, 특별히 학교라는 것이 없었으며, 아테네에 비해 보다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사회분위기가 '가정교육'을 존중케 했다. 이때부터 거의 모성이라는 것이 존중되기 시작된 것이다. 모성이 그제서야 존중되기 시작한다고 볼 때, 모성성도 부과되지 않은 여성이란 개념은 얼마나 박대 받을 수밖에 없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아리의 여성에 대한 저 언표는 그 당시에는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리라.
이러한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공표'는 2000년이 훨씬 지난 시몬느 보봐르의 저 충격적인(사실 충격일 까닭도 없다. 다만 여성에 대한 해묵은 담론이 공표되지 않았을 뿐) 선언을 통해 사실 전혀 변한 바가 없음을 말해준다. "개인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란 S.Beauvior's concepts; one is not born a woman, one becomes one in Le deuxieme sexe(1949, The Second Sex)
그의 말은 레비스트로스가 구축한 구조주의란 강력한 담론의 아우라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서양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서부터 철저히 여성을 타자 즉, 제 2의 성으로 간주했다. 맨(사람)은 남자라는 즉자적 절대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우먼은 맨에 대한 비본질적, 부차적, 우연적인 존재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이러한 즉자와 타자의 갈등, 이원성, 상극성, 대칭성은 '자연의 상태'에서 '문화의 상태'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여성이 단순 타자가 아니라, 남성이란 절대주체의 부속물로 간주될 때 발생한다
다시 아리의 말처럼, 그들은 어떠한 '결함'이라고까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뿌리가 더 깊은 것은 헤브라이즘이다. 사실, 최초의 인간이라고 간주되는 아담의 첫 번째 부인은 이브가 아니라 릴리스 - 요즘 릴리스 페어Lilith fare 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여성 락 페스티벌의 기원이 된 전설적인 여성, 한국에는 여인여락이라는 비슷한 맥락의 축제가 있다- 였다. 그러나 셈족의 전설에서 회자되는 릴리스는 아담으로부터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담의 가부장적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담은 이것이 못마땅했고, 야훼는 그를 모래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직전에 신은 아담의 rib로부터 이브를 창조했다. 그 이후 릴리스는 이들의 관계를 시기하고 훼방놓는 악녀로 묘사된다. 이 전설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있어 정말로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브는 아리의 말대로 아담의 심심풀이 땅콩이며, 어찌보면 부정한 외도의 결과물이었다. 히브리어로 황토색 흙(황토색인지,밤색인지,붉은 색인지, 검은 색인지 무슨 색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란 뜻의 아담은 위대한 인간, 즉 남성이며 야훼가 창조한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며, 신과 통하는 초월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브는 같은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아담을 위한 주문생산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도 바울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들어보면(고린도전서 11장 7절 - 9절)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고,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
우리의 풍속에서도 장옷이니 너울이니로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데 이는 조선후기에나 나타나는 것이고, 따라서 이는 건국신화나 민족설화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온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파생된 악습일 뿐이다. 최근까지도 탈레반 정권 하에 아프간 여성은 '부르카'라는 철저한 베일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서 돌을 죽을때까지 얻어맞는 경우가 있었다. 바울은 교회에 올 때 여성이 반드시 면포로 가리고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여성들은 이러한 악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담론'에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론도 이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프간여성들의 현실을 참으로 동정적으로 지켜보고 화제 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왜 자신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미사포를 써야하는 지 그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 역시 한편으로 '무조적건 동의'의 기제를 통해 그들 속에 무비판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엘리스 월커 원작의 '컬러퍼플'에서는 끈질긴 흑인 여성의 생명력을 과시한 우피 골드버그 Whoopi Goldberg는 시스터 액트란 수녀 코메디 시리즈에서 그 피부색과 대조되는 흰색 면포를 넙적한 얼굴이 조여지도록 뒤집어 쓰고는 그 현란한 가스펠과 힙합댄스로 관객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간 바 있다. 그 역시 그 미사포가 지닌 2000년 이상의 긴 역사, 그 메타포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이것의 불평등을 이유로 들어 이 의식을 폐지해 버렸다. 루터는 누구보다 '여성교육'을 강조한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아동을 위한 초등보통교육도 서양역사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처럼 여성과 아동이라는 노예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인간계급들은 조금씩 그 사회적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이라는 서양식의 화쟁사상 혹은 동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혁명의 결과물인 오늘날의 개신교는 캐톨릭보다도 욕을 더 먹고 있다. 더 웃긴 것은 교회 결혼식의 모습이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때, 웨딩 플레너는 '더 긴 면사포'를 쓰라고 권한다. 훨씬 엘레강스하며 머제스틱하다면서...
북유럽에서는 납치된 신부만이 아무 색으로 된 베일을 썼으며, 기원전 4세기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환히 들여다보이는 베일을 핀이나 리본으로 머리에 고정시켰으며 중세에는 색을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옷감의 질이나 장식을 강조하는 등 시대마다 유행하는 베일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가장 본질적인 사실 즉 여전히 한국 여자들은 페미니스트이건 아니건 베일을 쓰고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흰 색의 베일과 드레스도 이미 서양의 16세기 풍습 그대로이며, 이 색은 여자의 남자를 위한 순결과 정절, 남편과 신에 대한 순종의 상징이다. 신랑이 오른편에 서고 신부가 왼쪽에 서는 것은 3~4세기 북유럽의 어느 종족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보다도 근원적으로 여성은 신에 대해 왼편, 즉 좀 더 부차적이며, 결여되고 덜 중요한 존재라는 히브리즘의 연속적 상징이다.
오늘날의 상징은 그 함축적 의미 즉, 기의를 벗어나 표류하는 것들이 많다. 여성들은 더 이상 오늘 날의 결혼식의 함축적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건당 70에서 1000만원을 벌어들이는 웨딩 스튜디오와 키치성을 만방에 떨치고 있는 중세 성 모양의 결혼식장, 그리고 조선조의 허례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함문화, 부조문화 등과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서 여성들로 하여금 그것의 함의를 따져 물을 여유조차 박탈해 간다.
문제는 여성의 지위를 상승시켰다고 상식적으로 간주되는 '교육의 전당'인 대학에서도 이런 것들을 여성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교육이 여자의 지위를 상승시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여성은 여전히 결혼 시장에 있어서 좋은 조건, 점수를 부여받기 위해 대학을 간다. 여성이 취업이나 학문도야를 목적으로 고학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1950년대 미국 사회학의 연구결과이기도 하다. 신부와 신랑이 신을 대리하는 신부나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성사한다는 것도, 일반 결혼식장에서는 주례의 신분만 다를 뿐 그대로이며, 주례의 뒤에 그림자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이들이 길게 'march'하는 것을 영어로는 'walk in the isle'이라는 관용어로 표현하는 데 , 저 관용어의 뜻이 바로 '결혼하다'란 의미이다. 물론 그 전에 신부는 아버지로부터 신랑에게로 넘겨진다. 철저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의식화 한 형태이다. 게다가 여자는 꽃을 들고, 고개를 조금쯤 숙이고 있다. 아무리 많이 교육받은 여자도 이러한 겸손한, 굴욕적 제스쳐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적, 가부장적 훈습이 양식화 되어 있지 않은 한국식 '혼인식'은 손사래 치며 거부한다. 여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대게 '웨딩드레스와 베일'의 흰색이 그들의 학력과 개성과 무관하게 엄청시리 판타스틱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 세대는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