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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여성>, 2001-돌로레 마라 |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
낙태한 임부를 비난할 뿐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이 사회는 임부의 임신 종결 결정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리 형법의 낙태죄 보호법익은 태아의 생명을 주법익으로, 임부의 생명과 신체를 부차적 법익으로 한다. 낙태(즉, 출산 여부)에 걸린 여성의 이익과 낙태를 하지 않아서 당할 여성의 불이익을 그저 임부의 생명·신체라고 보는 법의 태도에서 볼 때, 여성의 법익에 대한 법리가 얼마나 미진한지, 모성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절감한다.
나는 한국 여성의 대다수 임신 종결 결정은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감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청소녀, 미혼·이혼 여성 등 법적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출산하지 않도록 규율되고 있다. 이 여성이 출산했을 경우, 그 아이는 ‘사생아’(私生兒)로서 한 국가의 정상적 성원에서 배제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생아 지위를 주면서까지 그 어려운 출산과 양육의 길을 가려 할 것인가.
비혼 여성에게조차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임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성관계를 하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인정하듯이, 어떤 피임 방법도 100%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 규제는 여성의 낙태와 출산 선택권의 규제 이전에 성생활의 규제이자 훈육이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비혼 여성은 성교 때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과 여성의 성을 가부장적 결혼에 종속시키는 것인가.
한국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말하려면 그 전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 즉 성교 결정 자유와 권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태하는 것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여태아로 판명되어 낙태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캐서린 매키넌의 말을 빌리자면, 무쇠 주먹에 씌워진 벨벳 장갑처럼 현실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대다수 낙태의 현실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곳에 있다.
게다가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사적 가족’(친밀성 집단)에 맡겨진 상황에서 국가, 종교단체 혹은 의사회 등 어떤 제3자도 친밀성 집단에 아이 출산과 낙태에 대해 명령할 권한이 없다.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하는 공적 주체가 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제10조), 양성평등(헌법 제11조 제1항, 제36조), 사생활의 권리(제17조) 등에 반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법의 낙태 금지는 단지 선택권의 제한일 뿐 아니라 신체통합권과 운명통제권, 시민권의 제한이다.
일각에서는 낙태 선택권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낙태한 여성도 불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이다. 한국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 정책의 목적은 그저 낙태를 줄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성과 재생산 자유, 즉 낳고 싶은 자는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유와 책임, 낳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의미하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에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인간의 재생산을 뜻하고, ‘재생산 권리’란 성교·임신·출산·양육에 이어지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통합하는 인권의 틀이다. 국가 인구정책 관점에서 좌우되던 재생산 문제를 이제 시민인 여성과 남성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
요청하는 바는, 첫째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모자보건법의 큰 틀을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 방식에서 기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비춰 24주까지는 낙태 가능 시기로 하고, 12주까지 낙태는 임부의 의사에 기초해 합법적 의사로 이루어졌다면 처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미성년의 임신과 사회·경제적 사유(빈곤, 기존 자녀 수 등)의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외국 사례에서 볼 때, 낙태의 범죄화와 낙태 빈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법률적 규제 때문이 아니라, 피임의 실천, 민주적 성관계, 자녀 양육의 호조건, 다양한 가족 형태 인정, 또 이것들을 위한 교육 등 여러 조건에서 가능하다.
둘째,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이 낙태 감소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교육과 피임교육의 현실화뿐 아니라, 성관계의 의미를 단지 남녀 간 성교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피임 실패를 예견할 때, 사후 피임약의 쉬운 보급도 요청된다.
셋째, 미혼·동거·동성애 관계 등도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법률혼 가족에 비해 차별받지 않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요청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낙태는 그리 미스터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교육, 민주적 성관계, 피임 보급처럼 낙태를 줄이는 문화가 없기에, 낙태는 최종 혹은 유일의 여성의 자기방어 수단이 돼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는 여성의 낙태 권리 실현을 나타내는 정도보다 한국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출산권의 제약을 나타내는 정도가 강하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한국 여성의 높은 낙태율은 남성 성 자유의 귀결인 셈이다.
차별 없는 민주적 성관계를
원치 않은 임신에 따른 낙태는 대다수 불가피한 결정이며, 국가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부에게 긴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체험이다. 국가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해놓는다면 낙태는 임부에게 깊은 죄의식을 남길 것이고, 그 체험은 침묵 아래 짓눌린 채, 태아는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불가피한 낙태를 허용하는 등 관련 법을 합리화해 태아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글•양현아
한국젠더법학회 회장. 법사회학과 법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 박사로서 사회문화이론, 가족법, 일본 군위안부, 구술 증언, 재생산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변동은 지식과 이성뿐 아니라 정서와 미감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