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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보
1804년 7월 4일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Salem)에서 너새니얼 헤이손(Nathaniel Hathorne)과 엘리자베스 클라크 메닝(Elizabeth Clarke Manning) 부부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너새니얼 헤이손(Nathaniel Hathorne).
1808년 아버지가 선장으로 일하던 중 황열병에 걸려 사망하자 어머니는 두 딸과 호손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가 생활했다.
1813년 4월 학교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발을 다쳐 거의 2년 동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이 기간에 폭넓은 독서를 했다.
1818년 가족이 메인 주(Maine) 레이먼드(Raymond)로 이사했다. 호손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사냥하고 낚시 등을 했다.
1819년 대학 준비를 위해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1821년(17세) 메인 주 브런즈윅(Brunswick)에 있는 보딘 대학(Bowdoin College)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훗날 시인이 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여행가 호레이쇼 브리지(Horatio Bridge), 제14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등과 친구가 된다. 호손은 그의 성에 ‘w’(Hawthorne)를 붙인다. 영국에서 이주한 호손의 선조는 판사를 포함한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혹한 판결로 악명이 높아 호손은 자신을 조상들과 분리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다는 견해가 있다.
1825년 보딘 대학을 졸업하고 세일럼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살았다.
1828년 보딘 대학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팬쇼(Fanshawe)』를 자비로 출판했다. 대학 시절에 쓰기 시작한 단편 소설집 『내 고향 이야기 7편(Seven Tales of My Native Land)』을 출판하지 못하자 원고를 불태웠다.
1830년 세일럼에서 발행하는 『세일럼 가제트(The Salem Gazette)』에 5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1834년 몇 편의 단편을 『뉴잉글랜드 잡지(New England Magazine)』에 발표했다.
1836년 『유용하고 재미있는 지식의 미국 잡지(The American Magazine of Useful and Entertaining Knowledge)』의 편집자로 일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잡지는 단명했다.
1837년 『케케묵은 이야기들(Twice-Told Tales)』을 출판했다. 훗날 아내가 되는 소피아 아멜리아 피바디(Sophia Amelia Peabody)를 만났다.
1839~1940년 결혼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보스턴 세관에서 소금과 석탄 측정자로 일했다.
1841년 유토피아 공간인 ‘브룩 농장(Brook Farm)’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모험에 동의했다기보다 결혼 비용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1842년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하고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있는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에게 빌린 ‘옛 목사관(Old Manse)’으로 이사했다.
1844년 3월 첫딸 우나(Una)가 태어났다.
1845년 가족을 데리고 세일럼으로 이사했다.
1846년 두 번째 단편소설집 『옛 목사관 이끼(Mosses from a Old Manse)』를 출간했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제임스 포크(James Knox Polk) 대통령에 의해 세일럼 세관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첫째 아들 줄리안(Julian)이 태어났다.
1849년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민주당원인 호손은 해고의 억울함을 글로 발표해 뉴잉글랜드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와 『세관(The Custom-House)』을 쓰기 시작했다.
1850년 3월 『주홍 글씨』를 출판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레녹스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소설가이자 시인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1851년 장편소설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을 출판했다. 매사추세츠 주의 웨스트 뉴턴으로 이사했다. 둘째 딸 로즈(Rose)가 태어났다.
1852년 장편소설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를 출간했다. 콩코드에 있는 집을 사서 ‘웨이사이드(Wayside)’라고 이름을 지었다. 동창생인 프랭클린 피어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그의 선거용 자서전을 썼다. 피어스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1853년 피어스 대통령이 호손을 영국 리버풀의 영사로 임명했다. 호손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
1857년 피어스 대통령이 퇴임하자 호손은 영사직을 사직했다.
1858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의 로마로 여행 가서 그곳에서 거주했다. 나중에는 피렌체에서 거주했다. 이탈리아에서의 관찰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59년 영국으로 돌아와 소설을 계속 썼다.
1860년 『대리석 목신상(The Marble Fawn)』을 출판했다. 가족과 함께 콩코드의 웨이사이드로 돌아왔다.
1863년 영국을 관찰한 수상집 『우리의 고향(Our Old Home)』을 출간했다. 건장이 좋지 않아 몇 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1864년 5월 19일 피어스와 함께 여행하던 중 뉴햄프셔 주(New Hampshire)의 플리머스(Plymouth)에서 사망했다.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의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 묘지에 매장되었다.
* 1998년 미국 ‘EMC/Paradigm Publishing’에서 출간한 『주홍 글씨』에 수록된 너새니얼 호손의 연보를 발췌해서 번역했고, 몇 가지 사항은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Nathaniel_Hawthorne)에서 도움 받음. (맹문재)
<앞날개 약력>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미국의 소설가. 1804년 7월 4일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너새니얼 헤이손(Nathaniel Hathorne). 1808년 아버지가 선장으로 일하다가 사망하자 외가에서 자라났다. 1821년 보딘 대학(Bowdoin College)에 입학했다.
1828년 장편소설 『팬쇼(Fanshawe)』를 출간했다. 1837년 『케케묵은 이야기들(Twice-Told Tales)』을 출간했다. 1842년 소피아 아멜리아 피바디(Sophia Amelia Peabody)와 결혼했다. 1844년 첫딸 우나(Una)가 태어났다. 1846년 단편소설집 『옛 목사관 이끼(Mosses from a Old Manse)』를 출간했다. 세일럼 세관 검사관으로 임명되었고, 아들 줄리안(Julian)이 태어났다.
1849년 세관 검사관에서 해임된 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을 쓰기 시작해 이듬해 3월 출간했다. 1851년 장편소설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the Seven Gables)』 출간했다. 둘째 딸 로즈(Rose)가 태어났다. 1852년 장편소설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를 출간했고, 콩코드에 있는 집을 사서 ‘웨이사이드(Wayside)’라고 이름 지었다. 보딘 대학 동창생인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그의 선거용 자서전을 썼다. 1853년 영국 리버풀의 영사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1857년 영사직을 사직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 가서 그곳에서 거주했다.
1860년 『대리석 목신상(The Marble Fawn)』을 출간했다. 1863년 영국을 관찰한 수상집 『우리의 고향(Our Old Home)』을 출간했다. 1864년 5월 19일 피어스와 함께 여행하던 중 뉴햄프셔 주의 플리머스에서 사망했다.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의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 묘지에 매장되었다.
옮긴이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1946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김현경(金顯敬)과 결혼해 두 아들 준(儁)과 우(瑀)를 두었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 번역서 『주홍 글씨』『메멘토 모리』 등이 있다.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주홍 글씨』 재출간 후기
김수영 시인이 너새니얼 호손의 장편소설인 『주홍 글씨』를 번역해서 ‘창우사’에서 출간한 것은 1967년이었다. 세로쓰기로 편집되었고, 책값은 350원이었다. 김수영이 1968년 6월 16일 타계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작업은 그의 번역 활동에서 후기의 산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주홍 글씨』 이후 1968년 3월 뮤리얼 스파크의 장편소설 『메멘토 모리』(신구문화사)를 번역해서 출간하는 것으로 그의 번역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에 제임스 볼드의 장편소설 『또 하나의 나라』(신구문화사)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언제 번역을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수영은 『주홍 글씨』를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죄를 형상화한 심리소설로 높게 평가했다. 심리 묘사뿐만 아니라 상징을 다루는 수법, 풍속과 역사를 담아낸 의식, 빈틈없는 구성 등도 주목했다.
『주홍 글씨』는 간통을 범한 헤스터 프린, 그의 상대인 딤스데일 목사,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펄, 헤스터 프린의 남편이자 의사인 로저 칠링워스 등 네 사람이 7년간 겪은 심리적 갈등을 담고 있다.
헤스터 프린은 불륜의 처벌로 ‘A’라는 주홍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했다. ‘A’는 간통(Adultery)의 머리글자를 의미한다. 헤스터 프린은 주홍 글자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경계와 외면당했지만,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 결과 그녀의 ‘A’라는 주홍 글자는 천사(Angel)와 Able(유능)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로저 칠링워스는 두 사람의 불륜 사실을 알고 딤스데일 목사에게 정신적 복수를 실행한다. 그것으로 딤스데일은 죄책감과 신경과민 등으로 시달려 쇠약해진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 헤스터 프린은 딤스데일에게 로저 칠링워스의 정체를 알리고, 배를 타고 두 사람의 신분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지만 딤스데일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뜬다. 소설은 딤스데일 목사의 죄책감과 헤스터 프린의 순결한 마음을 대비시켜 종교와 사랑의 의의와 본질을 묻고 있다.
재출간하는 『주홍 글씨』는 김수영의 번역을 최대한 살리면서 맞춤법,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 등을 현대 맞춤법 규정에 따랐다. 편집상 명백한 오류가 있거나, 문맥상 수정이 필요하거나, 번역에서 빠진 부분은 바로잡거나 보충해 넣었고 그 사항을 밝혔다. 번역문이 평서문으로 되어 있지만 원문이 의문문이나 감탄문인 경우는 물음표나 느낌표로 문장 부호를 바꾸었다. 김수영이 단 각주는 그대로 살리면서 필요한 경우는 보충했다. 편집상의 오류로 각주의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경우는 편집자가 임의로 넣고 그 사항을 밝혔다. 김수영이 단 각주에는 ‘역주’라고 표시했으며, 그 외의 각주는 편집자가 단 것이다. 단행본과 잡지 및 신문의 경우는 『』, 대화는 “ ”, 강조는 ‘ ’ 등으로 표기했다.
『주홍 글씨』는 김수영의 번역 목록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다. 독자들에게 소설의 내용을 정확하게 제공하려고 공을 들인 모습에서 시인 김수영이 대단한 번역가였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주홍 글씨』가 번역 출간된 지 56년 만에 푸른사상사에서 재출간한다. 작업이 만만하지 않았지만, 올해 97세의 김현경 여사님과 함께했기에 매우 기쁘다. 늘 건강하시어 또 다른 작업을 함께하시길 응원한다.
맹문재
■ 책 뒤표지 글
헤스터의 일생을 누빈 고생스러운 시름에 찬 헌신적인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주홍 글자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혐오를 자아내는 낙인이 아니라 그것을 보면 슬픔이 느껴지고 그것을 보면 두려우면서도 존경감이 우러나는 상징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헤스터 프린은 아무런 이기적인 목적이 없고, 또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의 이익과 향락을 위해서 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들 그들의 슬픈 일과 괴로운 일을 그녀에게 갖고 와서 의논을 했다. 커다란 고통을 몸소 뚫고 나온 사람으로서 그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헤스터는 힘자라는 데까지 그들을 위로해주고 의논의 상대를 해주었다. 그녀는 또한 그들에게 자기의 굳센 신념을 말하면서 위로해주기도 했다. 여느 날이고 세상이 좀 더 성숙해지고, 좀 더 밝은 시절이 와서 하나님의 시절이 도래하게 되면, 새로운 진리가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녀 사이의 모든 관계는 상호 간의 행복의 좀 더 확실한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김수영 시인이 『주홍 글씨』를 번역할 때 작품의 여자 주인공이 안쓰러웠는지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오랜 세월을 지나 생각해보니 이러저러한 세상의 일에 시달리는 나를 가엾어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 시인에게 번역하는 일은 돈벌이기 때문에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생계를 위하는 것 이상으로 진지했어요. 영어 사전으로 해결이 안 되면 소공동 국립도서관에 가서 확인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어요. 번역에 매달릴 때는 외출도 하지 않았어요.
― 김현경, 『주홍 글씨』에 대한 회고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