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에서 천하사 하는 사람입니다.
위에 좋은 이야기들이 많은거 같은데, 한 마디 더 보탭니다.
아래 말을 한번 음미해 보셨으면 합니다.
"마음이란 귀신이 왕래하는 길이니 마음속에 성현을 생각하면 성현의 신이 와서 응하고 마음속에 영웅을 생각하고 있으면 영웅의 신이 와서 응하며 마음속에 장사를 생각하고 있으면 장사의 신이 와서 응하고 마음속에 도적을 생각하고 있으면 도적의 신이 찾아와 응하느니라.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일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스스로의 정성과 구하는 바에 따라서얻어지는 것이니라." [도전 89: 7~12]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의도된다는 것입니다. 야한 꿈을 꾸는 현상이나 몽정같은 현상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의학적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마음의 문제에서 접근하면 바른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도기 134년 11월 17일 수요일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P.S. 추가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도 상상으로는 강간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하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 욕망이 있다고 보통은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기 보다 인간이 성적 욕망을 상상하게끔 만드는 주변적 환경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곧 요가 순에게 양위를 물려 주기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위해 주겠다고 한 사람에게 이야기 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고 냇가에서 귀를 씻었습니다. 그러자 소를 끌고 온 한 사람이 왜 그러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자, 소를 끌고온 사람은 그런 더러운 이야기를 들은 물로 씻은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하고 소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사람에게 음란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음란의 마음을 스스로 일으키게끔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였을 뿐더러, 스스로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재할 수 있는 의지가 있으며, 이것을 스스로 자제함으로서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복마 중 색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음란을 생각하려 하면, 음란의 복마가 마음속을 헤졌고 다닙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음란을 생각하다가 그것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차츰 그것이 사람의 정신작용 곧 마음에서 머물지만,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은 마음의 자취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 곧 말로 말이 다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욕망의 바다를 잠재우는 것으로 부터 모든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에서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곧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유일신에게의 귀의를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어내고, 다시 정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인도에서 유학을 하셨을 무렵 동양의 仙지식과 佛道의 설법을 깊이 깨우치신 까닭이지만 말입니다.
곧 질문주신 야한 꿈을 꾸는 것은 스스로 마음속에서 갈망하는 것이 꿈에서 재현된 까닭입니다.
꿈과 관련된 『道典』 말씀을 모아 보았습니다. 증산 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께서는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道典 2편 99장]
상말에 강가를 개라 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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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하루는 태인 백암리(泰仁 白岩里)에 사는 김경학(金京學)이 와 뵙거늘 상제님께서 명하시어 김자선(金子善)의 집에 유숙케 하시니라. |
2 |
이튿날 상제님께서 자선의 집에 이르시어 경학에게 “간밤에 꿈에서 본 것을 말하라.” 하시니 |
3 |
경학이 아뢰기를 “꿈에 개 한 마리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죽을까 염려하여 달려가 보니, 그 개가 다시 우물에서 뛰어나와 다른 곳으로 가더이다.” 하거늘 |
4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상말에 강가를 개라 하나니 네가 꿈을 옳게 꾸었다.”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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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 백암리. 현재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마을 곳곳에 흰바위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삼태, 칠성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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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 김자선(金子善, 1858~?). 본관 안동(安東). 족보명 창회(昌會), 자선은 자(字). 구릿골에서 출생. 부인 최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
[道典 5편 266장]
지구촌 인구조사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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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하루는 구릿골에 계실 때 한공숙(韓公淑)이 이르거늘 공숙에게 친히 술을 따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
2 |
“내 일을 많이 하였으니 술을 마시라.” 하시니라. |
3 |
공숙이 대하여 아뢰기를 “당신님의 일을 한 바가 없나이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한 일이 있느니라.” 하시거늘 |
4 |
공숙이 어리둥절하여 술을 받아 등을 돌려 마시고 한참 앉아 있다가 여쭈기를 “간밤 꿈에는 한 일이 있었나이다.” 하매 |
5 |
말씀하시기를 “꿈에 한 일도 일이니라.” 하시니라. |
6 |
여러 사람이 공숙에게 그 꿈을 물으니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어 ‘천하호구(天下戶口)를 성책(成冊)하여 오라.’ 명하시므로 |
7 |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불러 호구조사를 하여 올리니 선생님께서 받으시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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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천하호구를 성책. 개벽기에 살아남을 지구촌의 인구를 조사하여 그 수를 놓아 보신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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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7 오방신장.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아 각 방위의 창조성과 변화성을 다스리는 신장. 우주 공간은 텅빈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 원리를 다스리는 신도로 꽉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
[道典 1편 16장]
성부께서 꾸신 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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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경오(庚午 : 道紀前 1, 1870)년 9월에 성모께서 근친(覲親)하러 홀로 서산리에 가 계실 때 |
2 |
하루는 성부께서 본댁에서 곤히 주무시는데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품으로 들어오거늘 |
3 |
깜짝 놀라 일어나 ‘옳다. 이것은 필시 하늘에서 큰 자식을 내려 주시는 꿈이로다.’ 하고 그 길로 서산리에 계신 성모를 찾아가 동침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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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께서 꾸신 태몽 |
4 |
그 무렵 성모께서 하루는 밭에 나가셨다가 오한을 느껴 집으로 돌아와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드셨는데 |
5 |
꿈에 홀연히 검은 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뇌성이 진동하고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성모의 앞으로 내려오거늘 |
6 |
유심히 보니 마치 호박(琥珀)과 같은 것이 황금색의 신비한 광채를 발하는지라 성모께서 품에 안으시매 순간 온 세상이 광명하여지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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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석 달 만에 태어나심 |
7 |
이로부터 성령을 잉태하여 열석 달 만에 상제님을 낳으시니, 이 때 성모 권씨의 존령(尊齡) 22세이시더라. |
8 |
상제님께서 열석 달 만에 탄생하심은 황극수(皇極數)인 384수에 맞추어 인간으로 오심이니, 우주의 조화주로서 천지 변화의 조화 기틀을 품고 강세하심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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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 객망리에 거주하던 유봉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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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황극수. 우주 운동의 본체인 황극이 음양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수. 구체적으로 64괘의 총 효수인 384수를 말한다. [64(괘)×6(효)=384(효)] 경오년 9월 19일부터 신미년 9월 19일까지는 윤달이 포함돼 있어 384일이다. |
[道典 1편 50장]
광구천하의 큰 뜻을 품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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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증산께서 천하가 날로 그릇되어 감을 깊이 근심하시고 이 해에 의연히 광구창생(匡救蒼生)의 큰 뜻을 품으시니라. |
2 |
이 해 5월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천지 현기(玄機)와 세계 대세를 비밀히 논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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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천지 현기. 천지조화의 현묘한 기틀. |
[道典 1편 68장]
김일부를 만나 천지대세를 논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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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충청도 강경을 지나 연산(連山)에 이르러 향적산(香積山) 국사봉(國師峯)에 있는 김일부를 찾으시니라. |
2 |
지난밤 일부의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명을 전하거늘 |
3 |
일부가 천사를 따라 올라가 ‘요운전(曜雲殿)’이라는 편액이 걸린 장려한 금궐에 들어가 상제님을 뵙고 내려왔는데 |
4 |
이제 맞이한 증산을 뵈니 간밤 꿈에 뵌 상제님과 그 형모가 같은지라 |
5 |
그 일을 아뢴 뒤에 ‘요운(曜雲)’이란 도호를 드리며 심히 경대하되 증산께서는 그 호를 받지 않으시니라. |
6 |
증산께서 그곳에 머무르시며 영가무도의 교법을 관찰하시고 일부와 후천개벽의 천지대세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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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 김일부를 만나신 장소. 상제님께서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다오개 마을에 사는 그의 생질 최종열의 집에서 만나셨다는 주장도 있다. |
[道典 2편 47장]
화공에게 새 운수를 열어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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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상제님께서 임인년 가을에 부안(扶安) 대초말 앞 주막에서 이갑수(李甲洙)를 만나시니라. |
2 |
상제님께서 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고윤동의 둘째 딸과 그대 아들의 혼사를 정하러 왔으나 그 규수는 인연이 아니니라. |
3 |
내가 좋은 혼처를 정해 주리라.” 하시고 백련동(白蓮洞)에 사는 화공의 오빠 안광희(安光熙)를 소개하시니라. |
4 |
이에 갑수가 자신의 속사정을 낱낱이 아시는 상제님의 신이하심에 놀라 백련동에 가서 화공을 보니 마음에 흡족하거늘 그 자리에서 바로 정혼하니라. |
5 |
전날 밤 화공과 그 어머니의 꿈에 한 선관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내일 구혼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때를 놓치지 말라.”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거늘 |
6 |
그 어머니는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기나 화공은 그 선관이 곧 상제님이심을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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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대초말. 현재 전북 부안군 행안면 대초리(幸安面 大草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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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백련동.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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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장 이는 비구니 한 사람을 시집 보내신 것이 아니라 후천 정음정양 질서에 의해 불자들이 가정을 이루도록 하신 공사로 이해해야 한다. |
[道典 3편 8장]
죽어서라도 선생님 뒤를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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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형렬이 상제님과의 친면(親面)을 잊지 못하고 항시 상제님의 거동이 마음 가운데 은은하던 중에 |
2 |
수년이 지난 뒤 ‘대원사에서 도를 통하셨다.’는 풍문을 들은 후로는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니라. |
3 |
그러던 차에 임인년 4월 4일 원평 장날에 양식이 떨어져 돈 한 냥을 주선하여 시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마침 꿈에 그리던 상제님을 상봉한지라 |
4 |
형렬이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쌀을 팔아서 가족들을 살릴 마음은 간데없고 |
5 |
문득 생각하기를 ‘이 돈을 노자로 드린다면 가솔(家率)들이 굶을 것이요, 만일 드리지 아니하면 서로 친한 사이에 의리가 아니라.’ 하고 돈 한 냥을 상제님께 노자 하시라고 드리니 |
6 |
상제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노자가 있으니 걱정 말고 배고파하는 가족에게 어서 쌀을 팔아 돌아가게.” 하시니라. |
7 |
이에 형렬이 더욱 간곡히 돈을 올리며 “만일 선생님께서 이 돈을 받지 않으시면 저는 이대로 집이고 뭐고 죽어서라도 선생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굳게 맹세하니라. |
8 |
그제야 상제님께서 웃으시며 “자네가 가족을 남겨 두고 죽겠으니 불가불 받겠네. 그러나 쌀 팔아 오기를 기다리는 자네 가족들은 어쩌겠는가?” 하시니 |
9 |
형렬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예, 선생님이 돈 한 냥을 받으시면 제 마음이 좋아 생기가 나서 열 냥이 당장에 생기겠습니다.” 하거늘 |
10 |
상제님께서 “허허, 그렇다면 받겠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돈인데….” 하고 받으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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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로 떠나신 상제님 |
11 |
형렬이 돈을 올리고는 “저의 집이 누추하나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하룻밤 모시고자 하나이다.” 하니 |
12 |
상제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돈 주고 밥조차 주려는가. 참 고마운 일이로고. |
13 |
내가 지금은 충청도에 볼일이 있어 가니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를 참이네. 안심하고 어서 쌀 팔 꾀나 내게.” 하시거늘 |
14 |
형렬이 반가이 여쭈기를 “꼭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그리 하게.” 하시고 길을 떠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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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典 3편 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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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
1 |
잠시 후 남편이 돌아와 상제님을 반가이 맞으며 방 하나를 내어 드리니 |
2 |
이는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온 집안이 근심하던 차에 집주인이 상제님의 신이하심을 듣고 그 연유를 여쭙고자 상제님을 청한 것이더라. |
3 |
상제님께서 물으시기를 “네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시니 “저는 죄지은 일이 없습니다.” 하거늘 |
4 |
“네가 네 죄를 모르는 것이라.” 하시니 “전생은 몰라도 이생에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라. |
5 |
이에 상제님께서 “네가 스물두 해 전에 논에 다녀오다가 큰 짐승을 두 도막 내지 않았느냐?” 하시매 그제야 무릎을 치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거늘 |
6 |
다시 “그 달부터 태기가 있지 않았더냐?” 하시니 “예, 있었습니다. 그 때 낳은 아이가 제 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
7 |
이에 상제님께서 “네 며느리를 데려오라.” 하시어 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코가 잘 생겼거늘 |
8 |
며느리에게 “어떻게 하여 네 남편을 살렸는지 말해 보아라.” 하시니 며느리의 대답이 이러하니라. |
9 |
첫날밤에 신랑이 족두리도 벗겨 주지 않고 소변을 보러 나가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거늘 |
10 |
각시가 나가 보니 대밭에서 큰 구렁이가 신랑의 목을 감아 죽이려는 위급한 상황인지라 |
11 |
묘안을 내어 ‘신랑의 목숨을 앗아가려거든 먹고살 것을 달라.’ 하니 |
12 |
구렁이가 무엇이든 이루게 해주는 관자(貫子) 하나를 주매 그것으로 구렁이를 죽이고 신랑을 구하였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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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그 주인의 꿈에 나타나시어 |
13 |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며느리에게 “그만 나가거라.” 이르시고 주인에게 말씀하시기를 |
14 |
“이는 예전에 네가 죽인 구렁이의 원혼이니라. 네가 그런 며느리를 이상하게 보느냐? |
15 |
하늘에서 명을 정했으니 그런 며느리를 얻은 것이니라. |
16 |
내가 연전에 동쪽에서 혼처가 나서거든 그 규수를 며느리로 정해야 네 자식이 산다 하지 않았느냐?” 하시니 |
17 |
그 주인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절을 하며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아뢰니라. |
18 |
대저 수년 전 어느 날 꿈에 한 선관이 나타나 “자식을 살리려면 동쪽에서 며느리를 얻으라.” 하므로 명을 좇아 동쪽에서 며느리를 얻었는데 |
19 |
이제 말씀을 듣고 그 선관이 바로 상제님이심을 깨달으니라. |
20 |
이에 크게 감복한 주인이 며느리의 친정에도 알려 양가에서 사례금을 올리니 돈 꾸러미가 네 뭉치나 되거늘 |
21 |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사람을 보내 오라.” 하고 기별하시어 통영으로 보내신 뒤에 통영에서 다시 전주로 보내게 하시는데 |
22 |
통영에서는 돈을 가만히 놓아두어도 저절로 집까지 옮겨졌다 하더라. |
23 |
함열에 계실 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장어회를 상추와 함께 가져다 드리니 잘 드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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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2 관자.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 신분에 따라 금, 옥 , 호박, 뿔, 뼈 등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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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8 꿈에 한 선관이 나타나. 증산 상제님은 삼신상제님이시다. 상제님이 우주의 삼신성령을 주재하여 축복을 내리실 때는 반드시 몽시(夢示)를 주시는데 신원일, 김경학, 안내성 성도의 입도 과정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 |
[道典 3편 174장]
동학 신앙 때 천상보좌의 상제님을 알현한 김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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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김경학(金京學)은 태인 사람으로 대부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학문에 열중하더니 |
2 |
동학 접주였던 셋째 형 경은(景恩)을 따라 동학을 신앙하니라. |
3 |
그 후 칠보산 줄기인 태자봉 아래 백암리(白岩里)로 이거하여 훈장을 하다가 47세에 상제님을 뵙고 따르게 되니라. |
4 |
일찍이 경학이 석 달 동안 시천주주(侍天主呪) 수련을 하던 중 꿈에 천상에 올라가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뵈온 일이 있었는데 |
5 |
하루는 상제님께서 이르시어 “네 평생에 제일 좋은 꿈을 꾼 것을 기억하느냐?” 하고 물으시거늘 |
6 |
경학이 일찍이 상제님을 뵙던 꿈을 아뢰며 “선생님의 형모가 곧 그때 뵌 상제님의 형모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아뢰니 |
7 |
증산 상제님께서 여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로 옥황상제니라.” 하시니라. |
8 |
경학은 상제님을 만난 후로 오직 상제님께 절을 올릴 뿐 다른 곳에 가서는 절을 하지 않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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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 김경학(金京學, 1862~1947). 본관 김해. 족보명 연상(演相), 자(字) 경학(景學), 호는 시은(市隱). 경학(京學)은 도명(道名)이다. 부 형태(瀅兌)와 모 김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부인 은(殷)씨와의 사이에 용주(龍?) 등 3남 1녀를 두었다. 13대째 원백암 마을에서 살며 어릴 때 김경학 성도를 직접 본 박기만(1927~ )의 증언에 의하면,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며 얼굴 혈색이 좋고 하얀 수염이 길게 난 멋쟁이 노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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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 대부호. 김경학 성도의 맏형은 태인 칠천 석 중 이천 석을 경영하였으며 집도 2,700평으로 태인에서 가장 컸다.(김경학 성도 둘째 형의 손자 김완수(1933~ )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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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 칠보산. 정읍시 칠보면, 북면, 상동에 걸친 산(472m). 일곱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칠보임학(七寶林壑)이라 하여 산세가 수려하고 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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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典 3편 190장]
진주 촉석루에서 임천가를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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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후로 내성이 불경을 염송(念誦)하며 반드시 ‘천 선생님’을 찾고야 말겠노라는 일념으로 전국을 떠돌며 지내더니 |
2 |
하루는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 이르러 설핏 낮잠이 드니라. |
3 |
이 때 홀연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하늘에서 한 선관의 음성이 들리며 |
4 |
“내선(乃善)아, 네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노라. 노래를 받아라.” 하고 낭랑하고 유려한 음률로 임천가(林泉歌)를 들려주는데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선율이더라. |
5 |
이윽고 노래가 그치매 다시 선관이 “석가모니는 지나간 부처니 염불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너는 천 선생을 찾아 모시도록 하라.” 하는 말을 남기고 아득히 하늘로 사라지니라. |
6 |
내성이 문득 깨어 보니 꿈인지라 크게 용기를 얻어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틀림없이 천 선생님을 만나겠다.’ 생각하고 내처 길을 떠나 오매불망 아버지와 천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
7 |
정미년 여름에 이르러 미륵신앙의 본원지인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에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물면서 |
8 |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현신출세 미륵불이신 천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시기를 미륵불께 지성으로 발원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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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촉석루. 경남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하여 순국한 곳으로 유명하다. |
[道典 3편 207장]
경석에게 농바우 장군 도수를 붙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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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0월에 하루는 경석에게 돈 30냥을 마련케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
2 |
“경석아,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니라. 내가 오늘은 너와 함께 순창에 가려 하노라.” 하시며 어떤 법을 베푸시고 |
3 |
溪分洙泗派하고 峯秀武夷山이라 계분수사파 봉수무이산 活計經千卷이요 行藏屋數間이라 활계경천권 행장옥수간 이곳 시내는 수사(洙泗)의 흐름을 갈라 받았고 봉우리는 무이산보다 빼어나구나. 살림이라곤 경서가 천 권이요 몸 둘 집은 몇 칸 뿐이로다. |
4 |
襟懷開霽月하고 談笑止狂瀾이라 금회개제월 담소지광란 小子求聞道하니 非偸半日閒이라 소자구문도 비투반일한 가슴에 품은 뜻은 환히 갠 달 같고 담소는 미친 물결을 그치게 하네. 제가 찾아온 것은 도를 듣고자 함이요 한나절의 한가로움을 뺏으려 함이 아니외다. |
5 |
하고 고시를 외워 주신 후에 경석을 데리고 순창 농바우 박장근의 집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
6 |
“이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의 형세에 붙여 돌리나니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 하시니라. |
7 |
이어 장근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머슴을 불러 어젯밤 무엇을 본 일이 있는지 물어 보라.” 하시거늘 |
8 |
장근이 머슴을 불러 물으니 머슴이 대답하기를 “어젯밤 꿈에 한 백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농바우를 열고 큰칼과 투구와 갑옷을 꺼내는데 |
9 |
장검은 서릿발이 돋은 듯하고 갑옷과 투구는 빛이 나서 눈이 부셨습니다. |
10 |
신선이 칼과 투구와 갑옷을 저에게 주면서 ‘한 장군이 명(命)을 받들고 여기에 올 것이니 이것을 그 장군에게 주라.’ 하므로 제가 그것을 받아서 두었사온데 |
11 |
그 자리가 바로 저 자리입니다.” 하며 경석이 앉은 쪽을 가리키는지라 |
12 |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네가 꿈을 옳게 꾸었도다. 농바우의 전설이 허망한 말이 아니로다.” 하시고 |
13 |
다시 장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공사의 증인이니라.” 하시니라. |
14 |
대저 그 지방에는 농바우 속에 갑옷과 투구와 긴 칼이 들어 있는데 ‘장군이 나면 내어가리라.’는 말이 전하여 오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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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3 이 시는 율곡이 23세 때(1558), 노환으로 와병중인 퇴계를 찾아가 대학자의 풍모를 찬탄한 ‘쇄언(w言)’이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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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3 수사. 중국 산동성 곡부현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공자가 이곳에서 제자를 길렀다. 곧 수사는 공자의 사상과 학통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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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3 무이산. 중국 복건성 숭안현 남쪽에 있는 산. 주자가 이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어 강학했다. 여기서의 무이산은 곧 주자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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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3 행장. 두어 칸의 집을 중심으로 하는 기거동작 전부를 포함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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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6 회문산. 전북 순창군 구림면과 임실군 덕치면에 걸친 산(830m). 다섯 선인이 바둑판을 에워싼 오선위기의 형국이며, 24혈(穴)이 있다. |
[道典 3편 278장]
공우의 얼굴이 상제님의 얼굴처럼 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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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공우가 창조의 집에서 상제님을 모시고 잘 때 |
2 |
꿈에 상제님께서 옷을 벗으시고 큰 바다 한가운데 서시매 바다 한쪽이 터지므로 공우가 막았는데 |
3 |
다음날 아침에 상제님께서 꿈꾼 것을 물으시거늘 그 꿈을 말씀드리니 |
4 |
상제님께서 세수하시고 양치하신 물에 공우로 하여금 세수하고 양치하게 하시고 “정읍에 다녀오라.” 하시니라. |
5 |
이에 공우가 명을 받들어 정읍을 순회하니 가는 곳마다 ‘공우의 얼굴이 상제님과 같다.’고 이르더라. |
[道典 4편 131장]
천상 벼락사자들이 알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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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하루는 박공우가 상제님을 모시고 신경수(申京守)의 집에서 잠을 자는데 |
2 |
꿈에 불빛 같은 사람 수십 명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상제님이 계신 문밖 뜰에서 절하고 뵙거늘 공우가 두려워하여 상제님의 등 뒤로 숨으니라. |
3 |
다음날 상제님께서 “꿈에 무엇을 본 일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공우가 그 일을 아뢰니 |
4 |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곧 천상 벼락사자니라.” 하시니라. |
[道典 5편 89장]
음양합덕의 지리가 갊아 있는 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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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호남의 명산 마이산(馬耳山)은 용이 서해로 날아 뛰어드는 형국으로 음양합덕(陰陽合德)의 지리(地理)가 갊아 있는 부부산이라. |
2 |
마이산 암봉의 물길은 섬진강(蟾津江)의 발원지요 수봉은 금강(錦江)의 수원지로서 그 물길이 태전(太田)과 계룡산을 돌아 서해로 흘러 수(水)태극을 이루고 |
3 |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마이산으로 해서 대둔산(大屯山), 계룡산(鷄龍山)으로 이어지는 맥은 산(山)태극의 형세를 이루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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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기도 중에 마이산을 계시 받은 이갑룡 |
4 |
임실 사람 이갑룡(李甲龍)은 경신생(庚申生)으로 본명은 경의(敬義)요, 호는 석정(石亭)이라. |
5 |
열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하다가 산의 영기(靈氣)에 크게 감응되어 |
6 |
시묘살이 후 백두에서 한라까지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3·7일 기도를 올리니라. |
7 |
이 때 갑룡이 ‘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러 나온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기도에 정진하더니 |
8 |
하루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기도 드릴 때 혼몽 중에 두 봉우리가 선연하게 보이니라. |
9 |
그 후 마이산에 가 보니 그 기이한 산세가 꿈에 보았던 바로 그곳이거늘 |
10 |
갑룡이 마이산에 자리잡고 공부를 시작하니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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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 마이산.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湧出山)이라 하였으며 조선 초에는 이씨가 목성(木星)에 해당되어 금(金)과는 상극이므로 세상의 ‘금’기운을 묶어 주라는 뜻에서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했다. 마이산은 조선 태종이 산 모양을 보고 마치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또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는데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마이봉(馬耳峰), 겨울에는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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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 이갑룡(李甲龍, 1860~1957). 본관 전주. 본명 경의(敬儀), 갑룡은 도명. 효령대군의 16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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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 이갑룡 처사는 주로 3·7일 기도를 드리고 때때로 100일 기도로 용맹정진을 했다. 그의 제자들은 삼일 기도와 칠일 기도를 주로 했다고 한다. |
[道典 7편 36장]
괴병이 돌 때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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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 뒤에 괴병이 돌 때는 자다가도 죽고 먹다가도 죽고 왕래하다가도 죽어 |
2 |
묶어 낼 자가 없어 쇠스랑으로 찍어 내되 신 돌려 신을 정신도 차리지 못하리라. |
3 |
병이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몰아 올 적에는 ‘골치 아프다.’, ‘배 아프다.’ 하면서 쓰러지나니 |
4 |
여기서 죽고 나면 저기서 죽고, 태풍에 삼대 쓰러지듯 척척 쌓여 죽는단 말이니라. |
5 |
그 때는 문중에 한 사람만 살아도 그 집에 운 터졌다 하리라. |
6 |
산 사람은 꿈에서 깬 것같이 될 것이다. |
[道典 8편 54장]
천지신명이 감동한 왕발의 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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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일은 왕발(王勃)의 일과 꼭 같으니라.” 하시고 |
2 |
이어 말씀하시기를 “하루는 왕발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등왕각(騰王閣) 낙성식에 서문(序文)을 지으라.’ 하므로 |
3 |
왕발이 의연히 배를 타고 등왕각을 향하니 때마침 순풍이 불어 놀랍게도 칠백 리 먼 길을 하루 만에 당도하였느니라. |
4 |
왕발이 얼마나 애를 쓰고 공부를 하였으면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하루에 칠백 리 길을 보내어 등왕각 서문을 쓰게 하고 |
5 |
마침내 그 이름을 만고천추(萬古千秋)에 떨치게 하였겠는가 |
6 |
그 지극한 마음을 잘 생각해 볼지어다.”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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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왕발(王勃, 647~674). 자는 자안(子安). 6세에 글을 짓기 시작하였고 성년이 되기 전에 조산랑(朝散郞)이 되었다. ‘등왕각서’를 지은 것은 부친이 영관(令官)으로 있던 교지(交趾)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당시 당나라의 도독(都督)인 염백서(閻伯嶼)가 등왕각의 낙성연에서 사위의 글 솜씨를 드러나게 하려고 참석자들에게 서문을 부탁했는데, 왕발의 글은 염백서를 무색케 하였을 뿐 아니라 천하의 명문으로 길이 회자되었다. |
[道典 10편 86장]
나도 공부를 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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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경석은 금산사 치성을 모시기 전부터 ‘조용한 방이 있으면 공부를 해 보리라.’ 하고 작정하였더니 |
2 |
8월 1일 치성 후에 경비가 없어 집에 돌아가 한동안 먹을 끼닛거리를 변통하여 마련하고 |
3 |
구릿골에 가서 형렬을 설득하여 함께 금산사로 들어가니라. |
4 |
이로부터 14일간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계실 것으로 알았던 상제님께서 떠나신 이치가 무엇인가.’ 하는 의혹을 풀고자 정진하고 |
5 |
집에 돌아온 뒤로도 가사를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사색에 잠기니라. |
6 |
밤이면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던 집 앞 버드나무 아래에서 날이 새도록 골몰하고 |
7 |
낮이면 일찍이 상제님과 함께 올랐던 대흥리 서쪽 비룡산 상봉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옥황상제님, 옥황상제님!” 하고 부르짖으며 대성통곡을 하더니 |
8 |
하루는 비룡산 상봉에 올랐을 때 뜻밖에 등 뒤에서 “경석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늘 급히 돌아보니 꿈에도 그리는 상제님이신지라 |
9 |
경석이 깜짝 놀라 엎드려 절을 하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지 아니하였노라.” 하시고 |
10 |
“내려가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라. 이후에 올 날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홀연히 보이지 않으시니라. |
11 |
이로부터 경석이 상제님의 어천을 의심하지 않고 앞일을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를 생각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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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 1934년 10월 10일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의 일본인 촉탁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과 월곡 차경석 성도가 나눈 대화를 토대로 저술된 『차교주와 촌산지순(村山智順)과의 문답기』에는, 김형렬, 차경석 성도가 금산사에서 조용한 방 한 칸을 빌어 14일간 정진했으나 얻은 바가 전혀 없었다고 전한다. |
[道典 11편 2장]
태모 고수부님의 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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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모님의 존성(尊姓)은 고씨(高氏)요 본관(本貫)은 장택(長澤)이요, 성휘(聖諱)는 판(判) 자 례(禮) 자이시니라. |
2 |
동방 배달국의 신시개천(神市開天) 5778년, 단군기원 4213년, 조선 고종 17년 경진(庚辰 : 道紀 10, 1880)년 음력 3월 26일 축시(丑時)에 전라도 담양도호부 무이동면 도리(潭陽都護府 無伊洞面 道里) 고비산(高飛山) 아래에서 탄강하시니라. |
3 |
부친의 존휘(尊諱)는 덕(德) 자 삼(三) 자요, 모친의 성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시니 |
4 |
태모님의 부친을 성부(聖父)로, 모친을 성모(聖母)로 추존(推尊)하니라. |
5 |
성모님께서 기묘(己卯 : 道紀 9, 1879)년 5월에 어느 절에서 기도하실 때 |
6 |
하루는 꿈에 높은 산에 올라 웅장한 집으로 들어가시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과 누런 책을 한 권씩 주거늘 |
7 |
성모님께서 받으시고 놀라 깨어나시매 이로부터 잉태하여 태모님을 낳으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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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비산. 담양의 주산(462.3m). 비봉산(飛鳳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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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성부님과 성모님. 두 분은 임술(道紀前 9, 1862)년 3월 15일에 혼인하셨다. 성부님의 출생일은 미상이며 을유(道紀 15, 1885)년 9월 27일에 작고하셨다. 성모님은 을사(道紀前 26, 1845)년 8월 17일에 박춘화(朴春化)와 송세녀(宋世女)의 장녀로 태어나 18세에 출가, 18년 만에 태모님을 낳으셨다. 태모님은 제적부에 장녀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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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典 11편 43장]
오장이 곯도록 썩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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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모님께서 여러 달 동안 신도들을 상대하지 못하시고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시더니 |
2 |
무오(戊午 : 道紀 48, 1918)년 정월 9일에 유일태가 대흥리 경석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태모님을 찾아뵙거늘 |
3 |
태모님께서 물으시기를 “간밤 꿈에 일이 없었느냐?” 하시매 |
4 |
일태가 아뢰기를 “상제님께서 새우젓 세 단지를 주시며 ‘한 단지는 천종서(千宗瑞)를 주고, 한 단지는 강사성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하니 |
5 |
말씀하시기를 “새우젓과 같이 오장(五臟)이 곯도록 썩어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
[道典 11편 45장]
대흥리를 떠나 부용역에 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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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모님께서 담뱃대 하나만 들고 걸어서 정읍역에 이르시니 채규일(蔡奎壹), 채규철(蔡奎喆), 채경대(蔡京大)가 쫓아와 돌아가실 것을 간절히 청하거늘 |
2 |
태모님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기차를 타고 부용역(芙容驛)에 내리시니 규철과 경대가 그곳까지 따라왔다가 그냥 돌아가니라. |
3 |
이 날 새벽 종서의 꿈에 태모님께서 부용역에 계시는 것이 생생히 보이거늘 |
4 |
즉시 나가 보니 과연 태모님께서 새벽 공기가 차가운데 역에서 홀로 떨고 계시는지라 |
5 |
종서가 태모님을 업고 집으로 돌아와 머무르시게 하고 각처 성도들에게 연락하매 여러 성도들이 내왕하니라. |
6 |
이 때 태모님께서는 단지 치성을 올리실 뿐이거늘 종서의 장남 병원(柄元)이 미신타파를 운운하며 매우 싫어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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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채규일(蔡奎壹, ?~?). 전남 무안군 비금면 출신으로 아우 채경대와 함께 갑인(道紀 44, 1914)년에 대훙리 교단에 입교하였다. 24방주 중 첫머리에 오른 인물로 후에 보천교 사정방의 화방주(火方主)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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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채경대(蔡京大, 1890~1940). 보천교 사정방의 소한주(小寒主)로 활동하다가 계해(道紀 53, 1923)년 11월에 보천교를 탈퇴하여 객망리에 상제님의 사당을 세우고 포교하였다. |
[道典 11편 331장]
꿈속에서 병을 고쳐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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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옥구군 미면 산북리 임사(臨沙) 마을에 사는 이고산(李高山)의 아내가 복통증(腹痛症)으로 수십 년 동안 고생하다가 |
2 |
하루는 고춘자에게 치병을 부탁하니 춘자가 이르기를 “본소에 가서 지성으로 기도하면 나으리라.” 하거늘 |
3 |
고산의 아내가 말하기를 “집이 가난하여 혼자서는 치성을 모시지 못하겠으나 기도 비용으로 2원 50전을 보조해 드릴 테니 나를 대신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하니라. |
4 |
며칠 후 고산의 아내가 꿈에 도장에 가니 태모님께서 위로하시기를 “애썼다.” 하시고 “네 병이 나으리라.” 하시더니 그 후에 완쾌되니라. |
[道典 11편 419장]
고민환의 아들 재정을 구해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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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고민환의 큰아들 재정(在廷)이 ‘일본인에게 잡혀서 징용(徵用)가기는 싫다.’며 노무자로 자원하거늘 |
2 |
정축(丁丑 : 道紀 67, 1937)년 섣달 초사흗날에 전쟁 지구(戰爭地區)에 배치되니라. |
3 |
그 후 재정이 치질로 고생하게 되고 전쟁 지구인지라 늘 목숨이 위태로움을 느끼매 시천주주를 읽으며 “저 좀 살려 주십시오.” 하고 태모님께 간절히 기도하니 |
4 |
어느 날 밤 비몽사몽간에 공중에서 태모님의 음성이 들리거늘 |
5 |
“어찌하여 이 위험한 곳에 왔느냐?” 하시고 “너무 걱정 마라. 너는 내가 데려가리니 곧 돌아가게 되리라.” 하시니라. |
6 |
당시 노무자에 지원한 사람은 제대 규정도 없이 무기한 근무하기로 되어 있는데 |
7 |
다음날 아침 일찍 감독관이 재정을 불러 집안 형편과 건강 상태를 묻더니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한 뒤 집으로 돌려보내거늘 |
8 |
집을 떠난 지 석 달 만인 이듬해 삼월 삼짇날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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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에게 출산 소식을 알려 주심 |
9 |
그 후 11년이 지난 무자(戊子 : 道紀 78, 1948)년에 재정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민하더니 |
10 |
마침 정부에서 노역(勞役)할 사람을 모집하매 재정이 마을에서 쌀 두 가마니를 받기로 하고 노역에 자원하여 인천 부평(富平)에 가니라. |
11 |
이 해 2월 25일 경에 태모님께서 재정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딸 낳았다.” 하시고 “딸이지만 아들 못지않다.” 하시거늘 |
12 |
이에 재정이 자신의 아내가 딸을 출산했음을 알게 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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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1 고재정(高在廷, 1912~1978). 태모님께서 고재정을 상당히 귀여워하셨다. 당신께 올린 치성 음식을 벽장에다 넣어 두셨다가 재정이 오면 내놓으셨다. 또 치성 상에 올린 대추를 항상 청수에 담가 놓으셨다가 아이들이 오면 꺼내 주시는데 재정이 자주 먹었다. 또 종종 무릎에 앉히시고 독한 소주에 꿀을 타서 먹이셨는데, 그 후로 재정이 약 한 첩 먹지 않고도 병 없이 건강하였다.(고재정의 아내 김순자 증언), 후주 ‘성도들의 인척 관계’ 참조. |
[道典 11편 423장]
전선필의 꿈에 나타나신 태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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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모님께서 선화하시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해 태모님 성탄절에 8, 9명의 신도들이 참석하여 치성을 올리니라. |
2 |
이 때 한 성도가 교주(敎主)가 될 야망으로, 그 동안 전선필이 성금을 관리해 오면서 그 중 얼마를 유용하여 막걸리 사 먹은 일을 확대하여 |
3 |
치성을 모신 후에 여러 신도들 앞에서 ‘전선필이 치성금을 가로채 먹었다.’고 하며 없는 말까지 덧붙여 인신공격을 하니 |
4 |
선필은 그의 말솜씨와 행패 앞에 그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더라. |
5 |
그날 밤 선필이 꿈 속에서 ‘어머니, 제가 늙도록 천신만고 쌓은 공덕이 이렇게 되다니요!’ 하고 탄식하니 |
6 |
태모님께서 홀연히 나타나 이르시기를 “선천에 하던 살림을 붙들고 나가다가는 남까지 망칠 터이니 새 배포를 꾸미라. |
7 |
나도 여기에 안 올 터이니 너도 여기 오지 마라. 잠이나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가자. 오고 갈 데 없으니….”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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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7 오고 갈 데 없으니. 오성산 도장이 맡은 도수와 한계를 잘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
[道典 11편 425장]
태모님을 친견한 고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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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 해 8월 17일 초저녁에 고민환이 태모님의 산소 일로 홀로 번민하다가 |
2 |
문득 정신이 황홀하고 혼몽한 중에 심신(心神)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함열(咸悅)에 사는 연기종(延基宗)의 집에 도착하니 |
3 |
태모님께서 생존시와 같이 손에 담뱃대를 들고 그 집 마당에 서 계시는지라 |
4 |
민환은 태모님께서 선화하신 후에 어떠한 영적 감화도 주지 않으심에 원망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불경한 언사로 “어찌하여 여기 와 계시오?” 하니 |
5 |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디를 못 가리오.” 하시며 “지명(地名)을 취하여 왔노라.” 하시니라. |
6 |
이에 민환이 심사(心思)가 나서 말하기를 “그러면 저는 태전(太田) 갈라오.” 하니 |
7 |
태모님께서 기뻐하시는 얼굴로 말씀하시기를 “또 올 터인데 무얼.” 하시며 보이지 않으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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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2 연기종(延基宗, 1899~1973). 태모님께서 선화하신 후 성도들로부터 태모님 말씀을 전해 듣고 아내와 함께 신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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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6 태전. 대전의 본래 이름이 한밭 태전이다. 한때 태전에 대한 인식이 있어 “콩밭에 가야 산다.”는 말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무작정 태전으로 이주한 일도 있었다 한다.(태전 지명이 왜곡된 경위는 1편 57장 5절 측주 참조) |
도기 134년 11월 19일 금요일 늦은 11시 30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