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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우리 한국 사회의 종교적 기반들의 이반과 반비례되는 문제라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비록 그 역사가 깊지 못하지만 처음부터 복음의 형태는 성경적이며
교회사적으로 지극히 전통적인 라인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선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먼저 말씀이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번역되어 들어 왔다는 점은
성령의 특별한 개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3년 늦게 들어오던 선교사들의 손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손에 들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짧지만 한국 교회는 성경과 역사적 교회의
2000년 실존의 배경과 전통성을 지속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부흥의 환경으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성령의 특별한 개입이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교회의 메인 라인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환경이 조성되어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영향은 세계 교회사적 변질의 직간접적인 정황가운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기독교의 판도는 독일자유주의와 성경비평학적 배경이 일어나
주도하는 환경 아래로 들어갔다.
더욱이 60년대의 기독교 선교 대강령이 변질되어
2000년의 선교의 길이 전적으로 바뀌는 과정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중심으로 하던 개혁주의 위치에서
모든 인간적 삶을 포용한다는 복음주의 울타리로 넘어갔고
그것은 타협과 혼합의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게 된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세계 기독교의 변화로 안으로 종교적 보편성을
구원의 기조로 하면서 한국교회의 변질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하고자 한 악의 성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악의 성질인가?
바로 여기서 일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혔던 사단이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점에
잠시 놓임을 받아 세계를 장악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대로
그러한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악의 성질을 말함이다.
기독교의 힘은 성경 중심과 바른 성경의 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중심신앙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하나님과 말씀이 강조되고 그로부터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만들어 온 기반이었다.
한국 교회 초기와 중기는 이러한 기반이 그대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기독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상태로 떨어지고,
그것은 사회성 또한 잃게 되는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때 거짓된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득세를 하며
부지런히 기독교의 왜곡의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천적 신앙형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 안으로 파괴의 세포들을 투입시켜 교회가 안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구조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 전통적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관하지 말고
오직 신앙을 중심으로 살면 된다고 강조하며 가르치기만 한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종교개혁 정신에 위배되는 방임적 태도였음을 알고
후회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운 기반을 잃어버린 후에 과연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는
이유가 따라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한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역사는 언제나 후대에 교훈이 된다.
잘해던 못했던 후대의 후손들에게 길잡이요, 깨달음을 제공하는
장이라고 한다.
이점에서 임진왜란을 한 번 돌아보자!
일본은 한국에서 잡아갔던 대상들을 교정하고 귀화시켜
특수 훈련을 시킨 다음에 조각배에 태워서 가만히 한국 사회 안에 침투를 시켰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 안에 배반 세력을 길러서 혼란으로 몰기 위한 전술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이조 사회는 정치적으로 언제부터인가 당파 싸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 종교였던 불교는 점차 그 정신을 잃어갔다.
이유는 일본이 거대한 준비 된 군대를 이끌고 들어 와 침략전쟁을 벌렸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 안에 숨어 있었던 민초들의 정신과
불교의 호국정신에 의해서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왜군은 돌아가서 나름대로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고 내린 결론은,
다시 조선을 집어 삼키고자 할 때 먼저 그 사회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무너트려야 한다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아갔던 자들을 끊임없이 교정시키고 훈련해서 조각배로
다시 조선으로 침투를 시켰다는 것이다.
한 부류는 정치적 배경으로,
한 부류는 불교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또아리를 틀고서 자리를 잡아 그 사회 안에서 힘을 기르며 제대로 편입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400년이 흐른 어느 날 다시 한반도를 욕심냈을 때
그대로 적용되어진 것이다.
불교는 우리는 속세의 일에 나설 수 없다하며 산속에 들어 않았고,
정치는 끊임없이 당파싸움에 휩싸이더니
결국 일본에 나라를 팔거나 개화사상이라는 이름아래
일본의 힘을 빌리는 현실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인 정치가나 사업가들의 입은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진실을 말해 주었다 할 수 있겠다.
전 세계에 일본인 스스로 우리에 대해 소개하기를
“조선이 망한 것은 당파 싸움이었다”라는 화두로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우리 한국이나 한국인들과 상대 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눈을 깐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그대로 수용하여 우리 스스로 지들끼리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자인하도록 해 놓을 정도로 교활한 일본식의 여론 활용이 작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본식 여론은 미국 군정에 직접적으로 적용 될 정도의 로비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데 일본이 이런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하게 예의주시했던 점이
바로 호국불교 문제였다고 한다.
조선의 불교를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를 필두로 하여 일어난 불교 의병 때문이었던 것이다.
호국 불교의 의병들에 의해서 당시의 왜병들은 목표가 언제나 좌절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종교적 정신으로 무장된 의병들이었기에
일반인들보다 정신이 더욱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무섭게 겪은 왜군들로써는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
소상하게 보고하고 그 대책을 충분히 논했던 것이다.
더구나 사명대사의 개인적인 정신과 능력을 접한 왜군들로써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막부시대를 맞이하면서 한국의 불교에 대한 대안을 갖고 시간 벌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은 비록 야설이기는 하지만 비켜 갈 수 없는
우리에게 혜안이 되고도 남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의 불교의 역할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해서 너무 무력해져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3.1 운동과 관련해서 불교 대표로 참석했던 한용운 선생은
불교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3.1절 운동의 현황을 설명하며
기독교와 천도교의 대표자들이 대거로 참석하는데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우리 불교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고 하며 참여를 독려했지만
당시 불교지도자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그 이유를 불교는 속세를 떠난 종교이기에 세속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때의 이유를 한용운 선생은 일본에 이미 포섭되어버린 불교의 현실임을 개탄하였다고
고백한 글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끊임없는 일본의 공작에 의해서
한국 불교는 말 그대로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어떤 역사가는 강조하여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 한국 사회 최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최근의 기독교 신앙기반의 이반현상이다.
전국적으로 전통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분리와 무너짐이 심화되는 반면에
사이비와 이단들이 조직화되고 거대화 되면서
반비례적으로 한국사회 또한 어지러워지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국 종교분쟁의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기반이 스스로 기독교의 진수를 지키지 못할 환경이 펼쳐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회적 환경은 전통적 교회 환경이 주도하기보다는
사이비적 경향의 반교회적 환경이 주도하는 힘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전통교회들이 힘이 모아지지 못하고
이단적 경향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객관의 위치로 올라 설 정도로 강력해 졌다는 사실이다.
객관의 힘이라 함은 정치와 연좌되어
오히려 기독교를 어지럽히는 형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이단과 정치적 배경이 강하게 연결된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기반이 주도하는 환경이 되었을 때
종교적 악은 조직적으로 더욱 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분쟁과 직결되는 조짐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전통적 교회는 그 사회에 거룩한 종교적 본성을 잘 지키고 이행함으로 인해
건강한 인적 자원들을 생성하고 오히려 악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기반의 이반은,
전통적 종교 기반들이 구축해 놓은 신앙의 힘과 바름의 정신적 에너지가
약화내지 무너지도록하는 파괴의 에너지로 작용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점차 이 거짓된 반 기독교적 힘이 교회 구조를 바꾸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를 어지럽히는 종교원리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전통적 교회들을 통해서 온전한 신앙의 기반이 성도들의 인격과 행위에서
녹아 없어지게 하는 과도기적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한국 교회적 환경은
교회 안에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힘들어 지는 환경으로 들어가고 있다.
요즘이 바로 그렇지 않는가!
그러면서 점차 거짓의 힘이 그럴 듯하게 속임수를 펼치며
성도들의 인성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뇌화부동 상태,
즉 영적으로 마비현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인격적인 신앙생활보다는
격렬하거나 감성에 치우치는 체험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바름의 인격이 무너지고 더러움의 기운에 빠지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더러움의 영에 사로잡힌 상태에 몰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앙이 옳다고 하는 착각 현상에
이성이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면 그 누가 바름 말을 해도 듣지 않는 비정상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이러한 힘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나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이반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는 그 어떠한 행동도 서슴치 않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와 교회가 이질적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분쟁의 소지가 일어나게 되는 사회 종교적 환경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파괴적 성질이 적용되어지는 외부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세계화적 성질이 우리 사회 안에 건강한 에너지를 창출해 주는
각 종교의 근본적인 뿌리들을 파괴시키는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중에 기독교가 가장 강력하게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이 파괴적 성질의 세포들의 움직임들로부터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분쟁이 익어가기 시작하면,
붉은 악마나 이슬람이 가세하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리 사회구조가 우리 수중에 있다면 이러한 세력들의 준동은
얼마든지 제압하여 거두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가 주도하는 현재적 구조에서는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 일어나는 불확실성이나 복잡함이 수 겹으로 얽혀서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종교분쟁과 정치적 하수의 주도로 인한
정부 힘의 무력화로 인한 무정부 상태가 일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 사회와 각 종교들이 각골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기독교 또한 더욱 정신을 차리고 교회와 우리의 신앙,
그리고 우리의 사회를 살피는데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