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4:7-10 태풍 매미가 한국을 강타하면서 100여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을 하였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내었다고 합니다. 마산지방에는 특별히 해일이 겹쳐서 더 큰 피해를 냈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들은 마치 폭격 맞은 전쟁터의 모습같이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친지가운데에는 피해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일년 내내 애쓰다가 추수 때를 눈앞에 놓고 큰 아픔을 당한 농부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추석명절을 맞아 온 식구들이 모여앉아 송편을 빚으면서 추수할 곡식들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송편 먹을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그들의 당혹감은 말로서 도저히 표현 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그 폭풍치는 속에서 논물 보러 나갔다가 물에 휩쓸려서 떠 내려 갔다고 합니다. 논에 물이 넘치면 다 익은 벼가 그냥 쓰레기 더미로 변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 같이 보이지만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이 졸였으면 그런 속에서도 논물을 보러 나갔겠습니까.
우리가 이곳 미국땅에서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은 없다 할지라도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기도 합시다. 특히 너도 나도 잘 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수선한 조국 땅에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 하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 생각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외치고 과학의 발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 같이 보여도 결국은 약하디 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우리를 질그릇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이란 흙으로 빚어서 구운 그릇입니다.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떨어트리거나 조금만 압력을 가하면 쉽게 깨지고 맙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만히 보면 정말 질그릇 같이 약한 존재들입니다. 몸도 마음도 연약합니다. 독감 하나 들어도 우리는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만사가 다 귀찮아지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저에게 지독한 치통이 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신경이 어떻게 하여 건들여진 모양입니다. 왼쪽이었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왼쪽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고 귀도 아프고 머리끝까지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산해진미가 눈 앞에 있어도 거뜰어 보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진통제를 안 먹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알 먹어야 하는 독한 진통제를 듣지를 않으니까 두 알씩 먹었더니 정신도 멍 해지고 입도 뻣뻣해 지는데 혼이 났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제가 거울을 보고 뭐가 보이나 싶어 아픈데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짜증나는 것 있죠.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눈에도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작고 가느다란 신경하나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꼼짝 달싹 못하다니.....
제가 옛날에 신학공부 할 때 신장에 돌이 생겨서 고생한 일이 있습니다. 가끔씩 심한 통증이 올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중에는 집에다가 아예 진통주사를 갖다놓고 통증이 생기면 주사를 맞곤 하였는데 한번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통증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심한 통증은 주로 새벽에 있는데 그 날은 낮에 찾아 왔습니다. 교실에서 뛰쳐 나와서 집으로 갈 수도 없고 두리번 거리다가 학교교정에 있는 조그마한 기도실로 들어갔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심하게 아팠던지 강댓상 앞에서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보이는 것도 없고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때는 기도도 안 됩니다. “아이구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이구 아버지 살려주세요” 이 소리 외에는 나오는게 없었습니다.
그 순간에 누가 저보고 육체의 가시를 감사 하십시오 뭐 이런 소리 했다면 한방 때렸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심하게 아프니까 육체의 가시까지 갈 정신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좀 덜 아파야 생각이 나는게 아니가 싶습니다. 조금 지나서 통증이 가라 앉고 가만히 생각 해보니 얼마나 한심한지.........그 조그만 돌 조각 하나 때문에 이 벌건 대 낮에 이런 모습으로 뒹굴었다니.....연약한 저의 육신을 들킨 것 같아서 기도실문을 열고 나오는데 혹시 누가 안 봤나 두리번 거리며 나왔습니다.
여러분들 예배 드리고 찬송 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면 할렐루야 감사합시다. 아침에 눈뜨게 해 주시면 감사하고 밤에 눈 감게 해주신 것......... 이게 벌써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또 연약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건드려 지면 상처 받고 깨져 버립니다. 조금만 눌림을 당해도 폭발해 버립니다.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분해 합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깨지고 폭발하는 상태를 가리켜 “뚜껑 열린다”고 그럽디다. 이게 혹시 조폭들이 쓰는 말 아닙니까? 얼마 전에 설교준비를 하는데 한 페이지 정도를 type를 쳐 놓았는데 아 컴퓨터가 저 혼자서 block이 되고는 꼼짝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장을 안 한 상태라서 할 수 없이 껏다가 다시 켰는데 쳐 놓은 것이 다 날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양이 많지를 않아서 제가 농담삼아 야! 뚜껑 열리네 해 봤더니 꼭 조폭같은 느낌이 들던데...... 양이 많았으면 진짜 저도 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들 뚜껑 쉽게 열리는 것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 나름대로는 열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뚜껑 열리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하는 미숙함을 들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뚜껑 열리면 일단 얼른 눌러서 덮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압력밥솥 폭발하여 뚜껑 열린 것 보셨습니까? 뚜껑 날아가서 사람치고 유리창 깨고 솥안에 있던 밥 다 날아가서 천장 벽 할 것 없이 사방 팔방에 터져서 더덕 더덕 붙어 있습니다. 밥알이 붙으면 쉽게 떨어지기를 합니까? 다 마른 다음에 주걱으로 긁어 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일 납니다.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폭발하고 싶을때 여러분! 이 광경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압력밥솥 위에 보면 김 빼는 꼭지 있죠? 뜨거운 김은 그쪽으로 빼는 것입니다.
부부 문제나 자녀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부야 그래도 말도 잘 되고 살아온 문화도 비슷하니 그나마 덜하지만 미국에 계신분들 보니까 특히 자녀들 때문에 의외로 큰 스트레스 받으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는 communication의 문제들입니다. 아이들은 한국말이 서툴고 부모님은 영어도 서툴고 하다보니 언어로서 서로 깊이 이해도 안 됩니다. 또 자라온 문화의 환경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모던시대에 살던 사람들이고 우리의 자녀들은 포스트 모던 탈 현대시대 후기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입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가치의 기준이 이미 다르게 형성이 되어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 그런건 아니지만 이 쪽 입장에서 보면 이 쪽이 맞고 저 쪽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맞는 일 들이 허다합니다. 그것도 어릴때부터 꾸준히 대화를 해 왔으면 얼굴만 보고도 그런데로 통 할터인데 평소에는 별 대화 없다 문제가 생기면 대화를 시작을 하니 자칫하면 벽만 깊어지게 됩니다. 벌써 문제가 생겼는데 곱게 나갈수가 없습니다. 말 시작하는 부모님의 말투나 표정부터가 벌써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갖는 문제 입니다.
자녀와 부모문제뿐만 아니라 세대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 한번은 영국에서 막 박사학위를 마치고 온 젊은 강사의 강의를 수강 한 일이 있습니다. 클래스에 들어갔는데 젋은 사람하나가 탁자위에서 Hi!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미국교수들은 탁자위에 보통 잘 앉아 있으니까 저도 Hi 하며 들어가는데 뭐가 좀 이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신고 다리 까딱 까딱하면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수가 하나도 없었는데 당황했습니다. 속으로 얼른 “인간이 글러먹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강의를 계속 들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지내고 보니까 이 분이 얼마나 사람이 좋고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지...... 오해한채로 그 수업 Drop 했으면 제가 큰 손해 볼뻔 했습니다.
새들백 처치 아시죠? 세계에서 지금 가장 주목 받고 있는 교회중의 하나입니다. 이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반바지 입고 티 셔츠 입고 재미있게 설교 합니다. 그런가 하면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한국교회 목사님들 같이 거창한 까운 입고 위엄있게 설교 합니다. 서로가 완전히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 불편해 하거나 뭐라 하지 않습니다. 가치의 기준이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닐때는 서로간에 이해와 용납이 있어야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니 이 녀석이 누구한테 감히!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면 압력 밥솟 꼭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김부터 차근차근히 빼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해 볼려고 노력하면 분명히 합일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라고 화 나지말고 폭발 하지 말란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부모이기에 참아야 하고 그것 때문에 가슴에 큰 상처가 남게 됩니다. 나의 주장을 강압으로 누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릴때는 강압으로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크면 다릅니다. 한국에서 자란 애들도 요즈음에는 강압으로 절대로 먹히질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자란 아이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강압보다는 논리적인 설득과 encourage 함으로 이해를 시킨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나갔는데 이런 모든 문제들은 이게 다 인간이 질그릇 같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이죠. 몸도 마음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저 쉽게 넘어지고 쉽게 깨지고 쉽게 폭발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실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어떤 질그릇이라고 합니까?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말 합니다. 7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깨지기 쉽고 우리는 폭발하기 쉽고 우리는 연약한데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보배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보배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으니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치면 부서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예수는 나의 힘이요 생명이신데 힘이 없어 연약할 때라도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요, 마음의 갈등과 상처와 아픔이 있다 할 지라도 그것 때문에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질 그릇이 아닌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때 소련선교사이신 최 목사님 간증 듣지 않았습니까? 그날 못 오신 분을 위해서 제가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원래 평신도 전문인선교사이셨습니다. 독일에 사시는 분이셨는데 51세 때에 3개월 단기선교로 봉사하러 오셨다가 그곳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선교에 헌신도 못하고 그렇다고 발을 빼지도 못하고 몇 년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지내셨습니다. 쏘련에 있으면 배 고프고 힘드니 그만하고 집으로 가야지 했다가 막상 집에 가면 쏘련 생각나고 그래서 다시 오고........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쏘련에서 과로로 인하여 그만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 당시 쏘련 병원에는 장비도 없고 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 하고는 이틀 동안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냥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틀후에 신기하게도 입술을 달싹이게 됐고 마침 어떻게 가까스로 그분의 가족이 있는 독일로 연락이 됐는데 마침 그전에 선교사님의 아들이 아버지이름으로 여행자 보험들은 것을 기억을 했습니다. 그래서 보험 회사에 연락 했더니 그곳에서 쏘련병원으로 연락을 했고 비행기와 의사간호원을 급파해서 소련으로 보냈고 독일로 후송을 해서 수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쏘련에서는 외국과 국제통화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고 전화통화가 돼도 서로 다른 언어 때문에 communication이 불가능 했는데 보험회사와 병원 선교사님이 계시던 신학교 이 3군데가 척척 연결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은 새롭게 그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서 덤으로 사는 인생 그곳에서 뼈를 묻으리라 작정하시고 독일살림 정리하고 사모님도 함께 들어가서 본격적인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주의 일 열심히 하고 있고 교회를 5개나 개척하고 그중에서 2개교회는 직접 설계하고 인부를 사서 직접 공사하여 아름답게 건축을 하였습니다. 지금 벌써 63세가 되셨는데 심장의 반만 살아서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로 한 번도 아파서 누워 본 적이 없으시답니다. 연약한 질 그릇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보배가 그 안에 함께 하니 결코 질 그릇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이렇게 보배를 가진 질그릇에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문은 나열을 하고 있습니다. 8절상반절을 함께 읽읍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는 말중에 “우겨쌈을 당한다”는 단어는 원 의미가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입니다. 포도즙을 짜기위해 사방으로 빈틈없이 꽉꽉 짓눌러서 짜는 것입니다. 싸이지 아니하다 할때의 싸이다라는 말은 원래 crush되어서 짜부가 되거나 가루가 된 모습을 모습을 말합니다. 무슨 말 입니까? 아무리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에워 싸고 사방팔방으로 납작하게 눌르고 가루로 만들려고 덤벼도 어떻게?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저 보고 번역 하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요즘 즙 짜는게 믹사기죠? .............”우리가 믹사기로 갈림을 당해도 갈리지 아니하며“ 여러분들! 윙 돌아가는 믹사기 생각하면 조금 겁나시죠? 그런데 여러분 다아아몬드를 믹사기안에 놓고 갈면 다이아가 가루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믹사칼이 부러지겠습니까? 둘다 부러 집니까? 믹사칼이 부서지죠. 우리가 설사 무섭게 돌아가는 믹사기 안에 놓여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세상의 믹사칼도 부서질줄 믿습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시작.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믹사기 칼을 부순 사람들이 답답한 일에 낙심하겠습니까?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치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질그릇은 낙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우리 안에 영롱히 있기 때문에 어떠한 답답한 일이 와도 결코 낙심 않는 여러분 되신줄 믿습니다.
9절 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설사 우리에게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절망하도록 버려지지 않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꾸로 뜨림을 당해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쏘련이 공산화 되고 가장 많은 기독교의 핍박이 있었던 곳이 백 러시아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쏘련 전체 기독교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핍박 받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을때 모든 사람들이 “그곳의 성도들과 교회는 버림을 받았다” 그렇게 말 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마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가? 의아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 였습니다. 핍박을 하면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약한 질 그릇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을때 그들은 절대로 버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망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붙잡고 우리 안에 간직 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망 할 수가 없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 짐은 예수위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 말씀은 고난을 통한 영광과 죽음을 통한 생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죽이고 내 욕망을 죽이고 내 의지를 죽이고 내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보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그릇 같은 모습으로는 도저히 십자가에 우리자신을 못 박을 수 없지만, 그 보배 그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위에 우리자신을 못 박아야 하는 것이고 또 못 박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못만 박고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과 죽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매일 매일 십자가 위에 못 박을때 우리는 비로서 주님과 연합이 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 닮아가는 모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한 걸음씩 다가 갑니다.
우리에게 설사 육신적인 죽음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장막을 벗을때 새 생명이 완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며 승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이 변하여, 우리가 받은 그 생명, 우리 안에 담긴 그 보배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오히려 남은 사람을 위로 할 수 있고 순교의 자리에서조차 넉넉한 웃음을 보여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 안에 있는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예 연약한 질그릇을 그 보배로서 코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옆에서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계십니다. 어떠한 우겨쌈이 있더라도, 어떠한 답답함이 있더라도 주님만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설사 핍박을 받아도, 설사 꺼꾸려 뜨림을 당하여도 성령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생명 되신 예수님! 주님만 의지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 놓습니다. 나의 보배 되신 성령님 나를 도와 주시고 나를 감싸 주시옵소서. 그리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는 더 이상 연약한 질그릇이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깨어지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가 나를 굳건히 싸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쓰러지지 않는다 ! 하늘의 영광이 나에게 있으니 더 이상 슬픔은 나에게 없다 !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비록 질 그릇 같을지라도 우리 자신들이 질그릇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의지 할 때에 나에게 그 생명의 능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