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조선시대 사회·문화적 배경
1. 남존여비 (男尊女卑)
2. 교육의 불균등 (不均等)
3. 기생제도 (妓生制度)
Ⅲ. 본 론
1. 여류문학 개관 (女流文學 槪觀)
1) 조선 이전 사회
2) 조선 시대
2. 신분계층별 작가·작품 세계
1) 규수 (閨秀)
2) 소실 (小室)
3) 기생 (妓生)
Ⅳ. 결 론
Ⅰ. 서 론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칠거지악(七去之惡), 삼종지도(三從之道) 등 엄격한 유교적 도덕관에 의해 자신들의 자유를 구속받고 있었다. 조선이 생기고 성리학을 수입하여 새로운 왕조의 제반 질서를 정비해 나가던 중, 고려말 부터 여성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판단하여 유교적인 여성의 화립에 역점을 두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독서(讀書) 강의(講義)는 장부(丈夫)의 일이다. 부인은 조석(朝夕)과 한서(寒暑)에 따라 가족을 공양하고 손님을 받들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어느 곁에 책을 대하여 풍송(諷誦)할 수 있으리요. 고금의 역사에 통하고 예의를 논하는 부인들이 반드시 몸으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그 폐해가 무궁하였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여성들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엄격하였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사(詩詞)를 하는 것은 장부가 아니면 기생이 하는것으로 여겨 당시 여성들간에도 계층이 확실히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여성의 작품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지만, 이것들 대부분이 익명의 여성들의 것이고, 실제 작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 부터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궁중의 여성, 사대부가의 여성, 사대부가의 첩실, 기녀 등 네 계층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들의 신분 계층과 이들이 생산한 작품 사이에는 장르면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궁중의 여인들은 주로 산문문학- 주로 수필 문학-을 남겼고, 사대부가의 여성들은 산문과 한시를, 그리고 사대부가의 첩실 및 기생들은 시조 및 한시를 많이 남겼다. 그리고 장르별 주제의식은 산문류가 주로 당대의 사회의 유교 윤리관과 도덕의식을 다루고 있는 데 대해서 운문류는 이러한 유교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인간의 성정의 문제를 그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조선시대의 여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과 또 위의 내용처럼 계층별로 나누어져 있는 여인들의 문학-한시 중심-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덧붙여 어느 한계층의 작품을 대할 때 그 계층이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하나의 관점으로 설정해 두고 읽어야 할 것임을 밝힌다.
Ⅱ. 조선시대 사회·문화적 배경
우리는 어떤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그 작품이 탄생된 시대를 먼저 살펴본다. 곧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알아야 그 작품을 좀 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류문학 또한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남존여비 (男尊女卑)
원시 샤머니즘 사회에서 사제자로서 여무(女巫)의 위치라든가 - 모권사회(母權社會)의 일은 뒤로 하더라도 - 신라시대만 하더라도 여왕이 세 분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도고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그다지 보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에 내려와서도 신라만큼은 못되더라도 조선시대보다는 나았다. 애정이 자유로왔고, 왕실에서조차 재가가 가능할 정도로 인간 본연의 권리에 남녀는 철저한 제도적 차별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부터 여성들의 지위는 완전히 제도적·윤리적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남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천(貴賤)이 달라져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은 한 가정 내에서 '부내천(夫乃天)' 의 사상으로 연장되는 것이며, 남편을 '소천(所天)'이라 부르고 '손님같이 공손히 받드는 것'이 아내의 도였다. 이것은 곧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유교 논리로 여성을 갇아두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여자의 음성이 중문 밖을 나가면 그 집은 망한다'라든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등의 속담을 자연스럽게 만들게 되었다.
또한 남편뿐 아니라 출가 전에는 부모를 좇고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좇는 소위 삼종(三從)의 길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일생 중문 안에 갇히어 바깥 세상을 모르고 조상을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고, 아이를 기르며, 형제들 간의 우애와 노복을 거느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여섯가지 의무로 되어 있었다.
2. 교육의 불균등
조선조 여인들은 대가족제도아래 있었다. 그런 여성들에게는 항상 근면과 검박(儉朴)과 공경이 첫째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무식함은 오히려 덕이 된다는 왜곡된 역설이 사회적 관념 속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은 내훈(內訓)의 한구절이다.
"정자(程子)의 모친(母親)은 호학(好學)이로되 불사장(不辭章)하였다."
이것은 여자는 글을 알아도 함부로 이를 쓰지 아니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글을 가르치고 딸들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 조선사회의 전반인 경향이 되었고, 가르친다 해도 『여자소학(女子小學)』,『내훈(內訓)』『열녀전(烈女傳)』같은 기초적인 교양 - 조선 시대 여성들이 갇추어야 할 기본적인 교양 - 에 그쳤던 것이다.
사실상 여자의 식자우환(識字憂患)을 뒷받침 해주는 타부로는 '여자가 너무 유식하면 절명한다'느니, '후세의 편시를 받는다'느니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여자의 글은 가문 밖에 내어가지 않았고, 또 세초(洗草)라 하여 태워버리거나 물에 글씨를 빨아버리기도 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죽기 전 한 칸 방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켜다 하며, 지금 전하는 것은 그 오라비 허균이 그녀의 죽은 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누이의 유작을 중국 사신에게 자랑삼아 건네주고 다시 그가 본국에 가져가서 출판한 것이 역수입된 것이다.
이렇듯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펼 수도 없고, 아무리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더라도 여자인 까닭에 글을 배울 수 없었던 사회 풍토에서 , 딸을 낳으면 '지나가는 새우젓 장수도 섭섭해하는' 시정인심(市井人心)이 되었고 기를 때도 아들 딸을 차별하는 연유도 된 것이다.
3. 기생제도 (妓生制度)
기생은 남성들의 조흥(助興)을 위해 주석에 참여하는 소의 해어화(解語花)로, 조선 시대에 그 수요는 현(縣)에 20명, 군(郡)에 40명, 목(牧)·부(府)에 각각 60-80명, 감영(監營)에 100-200명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그 인구가 약 3만정도에 이르는 거대한 것이었다.
기녀들 중에는 뭇남성들의 등골을 뽑는 전형적인 간능한 기생도 많지만, 선비들과의 수작에서 얻은 풍월(風月)로 풍류(風流)를 알기도 하고 원래 문재(文才)에 뛰어난 명인도 많아 국문학에 끼친 그들의 공로는 엄청난 것이다.
이 기생의 존재가 조선시대의 여인들의 한의 요소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사회의 독버섯 같은 존재로 웃음을 파는 특수 직업여성들 때문에 주부들이 입는 피해와도 상통하지만, 이들은 본질적으로 금석(今昔)의 차가 컸다. 오늘날의 그들과 조선시대의 기생은 공직의 성격이 구별이 뚜렸하였고 또 제도적으로 신분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의 합리주의는 사대부의 처신을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 출발한다고 보았으므로 결혼을 인륜대사(人倫大事)하여 '천정배필설(天定配匹說)'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내를 맞이한다기보다 가문의 며느리를 얻어 들이는 것이니, 여기에 본인의 의사라든가 이상은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효사상(孝思想)이 결부되어 절대적으로 가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한집에 살면서도 말한번 안하는 부부가 생기고 때로는 5,6세 연상의 누님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고, 가문끼리의 언약으로 어릴때의 결혼이라든가, 심할 때는 태중결혼(胎中結婚)도 있었다. 결혼도 대체로 15·6세 혹 이를 때는 10세의 내외의 조혼(早婚)이었다. 이런 부조화의 결혼의 부작용은 후일 남성들의 기방출입으로 발산되는 수가 많았다. 기생은 바로 이런 제도의 모순에 기대서 존재하였던 것이다.
내외법이 시행되던 사회에서 기생은 그 신분의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사대부들과 자유로이 만날 수 있었으며, 비록 천한 신분으로 대등적 사랑은 못되었다 하더라도 조혼(早婚)과 가문혼(家門婚)으로 자유연애의 장을 찾지 못했던 조선 선비들에게 기방이야 말로 심신양면(心身兩面)의 갈증을 풀어주는 오아시스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Ⅲ. 본 론
1. 여류문학 개관
우리나라의 여류 문학은 양적으로 매우 적은 편인데 그 이유로는 우선 봉건적 생활양식에서 오는 결과로서 여성의 사회적 처우가 극히 억압당하였다는 데 있고, 우리 한글이 너무 늦게 창제되었으며 어려운 한자를 빌어 섰다는데 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는 여류문학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는 여성들이 신라시대 이후로 자유스럽게 살았다. 송인들의 눈에는 신기할 정도로 결혼과 이혼이 손쉽게 이루어 졌으며 재가(再嫁)는 보통이고 남녀의 관계도 자유스러워 일반적으로 풍기가 문란하였던 것은 이미 잘알려 사실이다. 그러기에 고려의 속요가 기록될때 음사(淫辭)라 하여 많이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성리학이 그 건국이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여자들에게 '열녀불사이군(烈女不事二君)'이라 하여 수절(守節)을 강요하고 열녀(烈女)의 생활이 강조되었다. 또 배움에도 강력한 규제를 하여 『내훈(內訓)』의 「언행장(言行章)」에서 '단교남이불교여(但敎男而不敎女)'라 했듯이 조선시대 여성들은 강력한 규제를 당하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류문학은 잉태(孕胎)되고 성장하였는데 규수들은 주로 한시와 내간체 수필문과 가사문학등에 참여했음을 볼 수 있고, 기녀들은 시조와 한시에 능한 자가 있어 한시 분야에 번뜩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 이렇게 성장해온 여류문학을 조선 이전 시대와 조선시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조선 이전 사회
국문역사상 여성으로서 최초로 문헌상 작품을 남긴 사람은 "공후인( 引)"의 작자로 알려진 곽리자고의 처 여옥다. 그 후 삼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신라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고유문화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 백제에 도입된 한문학만 보더라도 무조건 수용한 것에 반하여 신라는 민족문학이자 민족문학인 향가문학을 산출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여류작이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악지(高麗史 樂志)』에 보면 가사는 전하지 않으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백제시대의 '지리산가(智異山歌)', '선운산가(禪雲山歌)', '방등산가(方等山歌)'등이 있다. 그리고 가사가 남아있는 것은 '정읍사(井邑詞)'로 남편이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처가 산에 올라 남편이 밤길에 도둑의 해를 입지 않을까 달을 빌어 노래하는 내용이다.
고려시대에 접어 들면서부터는 민요가 성하여 일반 서민에게 공감을 주었는데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와 문학에 영향을 주어 향가 중에는 승려의 작이 많고 내용도 불교적인 많다.
고려속에 중 가사가 전하는 것으로 내용상 여류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소극적인 여성의 애정표현과 간절한 호소가 구비전승되었던 것이 삼·사백년동안 유통되다가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록되었던 점으로 보아 민중에의 공감은 물론 그 수도 많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남녀 관계도 자유스러웠기에 남녀간의 정이나 이별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내용적으로 여성들이 작자를 밝히기를 꺼려했을 것으로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형에서 변화되고 소멸되었으며 기록될때 많은 작품이 음사라 하여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동동(動動)'을 한 예로 살펴본다면, 『고려사 악지(고려사 악지)』의 기록에, '동동'은 궁중악으로 불려졌으며 나예(儺禮)뒤에는 동동무가 있어 무속적인 송수(頌壽)와 남녀간의 상사(相思)를 노래했다.
고려 때의 기녀로서 동인홍(動人紅)의 '자서(自敍)'와 간돌(干 )의 '기국담(寄國膽)'이 한시로 보한집(補閑集)에 기록되어 비련(悲戀)과 고고(孤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조선 사회
엄격한 유교주의의 질곡 속에서도 여류문학으로 시조를 비롯하여 내방가사(內房歌詞)와 궁중내인들의 한을 그린 수필류와 남자 못지 않은 한시 작가가 있어 양적으로는 적으나마 다채롭게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한시 작가는 약 150여명이 전한다.
성종때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이계생(李桂生), 이옥봉(李玉峰), 그리고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혜경궁 홍씨(惠敬宮 洪氏)등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조선시대의 여류 작가들이다.
그리고 궁녀의 작으로 광해군 5년에 지은『계축일기(계축일기)』는 일기체로 쓴 수필문학이고, 숙종 때 궁중의 비극을 중심으로 한 내간체 문학인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있다.
또한 특색 있는 시단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니 이른바 <삼호정 시단(三湖亭 詩壇)>이다. 삼호정은 서울 용산의 한강변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요, 동시에 김금원(金錦園)이 살고 있던 곳에 5명의 여성이 모여 인생을 의논하고 각각 소실(小室)로서 신세타령도 하면서 여류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처럼 결사(結社)는 아닐망정 여류작가로서 더구나 19세기 중반에 소실끼리의 모임은 시재를 발휘하게 하였으니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2. 신분 계층별 작가·작품 세계
1) 규수 (閨秀)
여기서 규수라 함은 사대부가의 여성 정실부인(正室婦人), 정처(正妻)를 말한다. 즉 한 남자와 정당한 혼인의 절차를 밟아서 한 집안의 안주인이 된 여인을 이른다.
조선조 사회에서 정실의 위치는 거의 제도적으로 보장된 자리였건만 동시인 수신(修身), 진언(眞言), 부행(婦行), 음식(飮食), 의복(衣服), 봉제기(奉祭紀), 접빈객(接賓客), 사부(事夫), 태교(胎敎), 육자(育子)등의 유교적 부덕이 엄격히 요구되는 막중한 자리이다. 따라서 사대부가 부인들의 시에는 저 같은 유교적 질서 소겡 영위되는 평탄한 가정생활의 만족감에서 오는 은은한 감상이 있고, 반대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무거운 의무감과 안 인간 여성으로서의 깊은 자의식을 표출한 것이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 - 1551)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明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耳)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 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렸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올라왔으며, 수진방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요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踰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을 넘으면서 친정을 바라보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어머님은 백발이 되어 임영에 계신데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이몸 홀로 임따라 서울 가는 심정이여
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머리 돌려 북평 땅을 바라보건대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나는 밑에 저녁산만 푸르구나
이 시는 친정 아버지 신명화의 삼년상을 당해 강릉 친정에 가 있다가 서울 시가로 돌아오며 지은 것이다. '思親(사친)'은 서울 시가에 와서 강릉에 홀로 계신 노모를 생각하며 지은 시로서, 이 또한 유교의 실천 덕목인 효정신의 표현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 - 1589(선조 22). 조선 중기 때의 여류시인. 강릉 출생.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 엽( )의 딸이고, 가문은 현상(賢相)공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漢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 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가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 김씨(貞一堂 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閨怨 (第二首)(규원 제이수)
月樓秋盡玉屛空 (월루추진옥병공) 달 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霜打蘆洲下暮鴻 (상타로주하모홍) 서리친 갈밭에는 저녁 기러기 앉네
瑤瑟一彈人不見 (요슬일탄인불견)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아니 오시고
藕花零落野塘中 (우화령락야당중)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이 밖에도 자식을 여의고 남편과는 냉담하고 재주는 많아 불행했던 한과 고독을 여러 작품에서 읽게 된다. 규한이 깊고 큰 나머지 허난설헌은 실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현실적인 것보다 가공의 세계, 즉 신선의 세계와 꿈의 세계 등을 주로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을 난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난초의 맑은 향기로 높은 자긍심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感遇 (第一首) (감우 제일수) 느낀대로 노래함
盈盈窓下蘭 (영영창하란) 하늘하늘 창가의 난초잎들은
枝葉何芬芬 (지엽하분분) 어쩌면 그렇게도 향그러울까
西風一披拂 (서풍일피불) 서풍 한 번 잎새에 스치고 가면
零落悲歌霜 (영락비가상) 그만 찬 서리에 시들어지는데
秀色縱 悴 (수색종주췌) 빼어난 그 모습은 초췌해져도
淸香終不斃 (청향종불폐) 맑고 맑은 향기는 더욱 짙구나
感物傷我心 (감물상아심)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을 슬프게 하네
涕淚沾依缺 (체루첨의결) 자꾸만 옷깃에 눈물이 젖네
허난설헌은 또한 '망산요(望山謠)', '몽작(夢作)', '궁사(宮詞)' 등에서 뛰어난 지혜와 명문 출신의 자긍에서 오는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자의식의 과잉상태를 간접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정부인 송씨(貞夫人 宋氏)
정부인 송씨는 선조(宣祖) 때의 도학(道學)의 거장으로 유명한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이요, 송준(宋駿)의 둘째 따님이다. 『미암일기(미암일기)』의 1567년 11월 11일자의 기사와 1571년 3월 31일자의 기록에 송진(宋震)이 정부인 송씨의 시 38수를 뽑아 책을 매어 미암한테 가져왔다는 글이 있다.
題新舍 (제신사) 새 집에 와서
天公爲送三山壽 (천공위송삼산수) 하느님은 우리 위해 삼산의 장수 보내시고
靈鵲來通白世榮 (영작래통백세영) 신령스련 까치는 와서 백년 영화를 알리노라
萬頃良田非我願 (만경량전비아원) 내 원하는 바는 만이랑 옥토가 아니요
鴛鴦和樂過平生 (원앙화악과평생) 다만 금실 좋게 평생을 삶이로다
又題新舍 (우제신사) 다시 새 집에 와서
地廣靑山遠 (지광청산원) 터가 넓고 청산을 멀고
高夏日 (첨고하일량) 처마가 높으니 여름 해도 시원쿠나
南廓成鵲室 (남곽성작실) 남쪽 뜰에 작실을 이루었으니
應報子孫昌 (응보자손창) 마땅히 자손이 번창하리
두 시 모두 부부 화락(和樂)하고 가화번성(家和繁盛)함을 자락(自樂)하는 내용으로서 득세한 사대부가의 안정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만이랑 좋은 전답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송부인이 남편과 다복한 세월을 자축할 정도의 여유는 안정된 현실에서 오는 여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기생(妓生)
기생은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천민(賤民)으로 속칭팔천(俗稱八賤)에 속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詩文이 곡진(曲盡)한 사람의 정양(靜養)의 발로라 할 때 이 세 가지 부류 중에서 가장 한과 원이 많은 부류가 기생이고 다음이 첩실(妾室)들이다. 사족(士族)의 부녀자(婦女子)들도 남존여비의 사회풍조 속에서 그 나름의 정회(情懷)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앞의 두 계급에 비하면 여자로서의 원과 한이 덜한 부류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과 원, 억울함이 많은 부류의 부녀자의 시일수록 정회가 곡진하여 士族婦女의 시보다 妾室의 시가 낫고 妾室의 시보다 기생의 시가 낫다고 했다. 기생에는 黃眞伊, 梅窓등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기생문학을 황진이를 중심으로 알아보겠다.
① 황진이의 작품세계
황진이(黃眞伊)의 文學을 학자들은 '여류문학(妓流文學)'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妓女들은 身分的으로나 社會的으로나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이신복씨는 "妓流文學의 特質"에서 '妓女들은 男尊女卑의 ,z制下에서 男性이 느낄 수 없었던 恨을 안고 살아야 했던 女性인 동시에 그 本質이 사치노비(奢侈奴婢)인 賤人階級에 속하는 存在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宮中의 女人이나 民間의 一般女子들보다 훨씬 切切한 恨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한편으로 妓女는 다른 部類의 女子들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活動이 可能했던 特異한 存在였다. 특히 男女間의 접촉(接觸)면에서 그러했다.' 妓流文學의 특징을 한마디로 定義한다면 恨과 멋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黃眞伊도 妓女였기에 그 恨과 멋을 句句絶絶 작품 속에 쏟아 부었다. 여기에서는 妓流文學에서 공통적으로 散見되는 恨과 멋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② '恨' 을 主調로 한 作品
許英子씨는 "黃眞伊의 情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흔히 東洋의 정서(情緖)나 한국의 정서를 논할 때 '한'이라는 것에서 根源을 찾는다. '한'의 감정은 적극적, 動的, 저돌적인 것과는 달리 소극적이며 橫的, 체념적인 것이다. 이것은 쟁취나 성취가 아닌 未完, 미흡의 서운함과 애절함이 쌓이고 쌓여서 이룩되는 정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긴밀히 연결되는 '한'의 정서는 우리 문학 작품 속에 비애와 애수의 체념이라는 회청(灰靑)빛 음영(陰影)을 어쩔 수 없이 던져 주고 있다. 우리 문학사 가운데 나타난 모든 女流의 작품 속에서 '恨'의 情緖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특히 黃眞伊의 작품은 다른 妓女들의 詩歌와는 달리 멋의 표출에 탁월하고 한을 적당히 숨기고 내비치지 않아 그 구별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하여 고충을 겪게 된다. 그러면 '恨'을 주제로 한 작품을 소개해 보겠다.
誰 斷 崑 崙 玉 (구기곤륜산) 昆倫山 맑은 玉을 그 누가 끊어내어
裁 成 織 女 梳 (재성직녀소) 織女의 얼레빗을 마름질해 만들었나
牽 牛 一 去 後 (견우일거후) 牽牛 떠나간 후
愁 擲 碧 空 虛 (수척벽공허) 虛空 중에 愁心겨워 던졌구나.
☞ 〈영반월(詠半月)〉이라는 五言絶句의 시이다. 宋稶은 이 시를 '神話와 傳說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작별한 여인의 심정을 탁월한 心象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별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詩想을 펼친 것은 여성의 이별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이렇게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효과적으로 숨기면서도 충분한 傳達力을 갖는 것은 黃眞伊의 詩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질이기도 하다. 이 시의 촛점은 '척(擲)' 이라는 행위에 있다. 직녀(직女)의 '던지는'행위에는 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가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恨을 잉태(孕胎)하고 있는 것은 이 '던짐'의 행위 즉 結句에 있다. 또, '수척벽공허(愁擲碧空虛)'는 이별(離別)의 슬픔을 감상적이 아닌 행동의 결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作中話者는 모든 것을 던짐으로서 自我의 解放을 추구하고 있다. 黃眞伊의 詩가 恨의 表出에 있어서 다른 女流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삼아 梅窓의 詩 한 수를 살펴보자.
春 冷 補 寒 衣 (춘랭보한의) 추운 봄 겨울옷을 꿰메노니
紗 窓 日 照 時 (사창일조시) 사창에 해가 비칠 때
低 頭 信 手 處 (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바느질손 이리저리 옮기다가
珠 淚 滴 針 絲 (주루적침사) 방울진 눈물 바늘과 실을 적시네.
☞ 섬세(纖細)하고 간곡(懇曲)한 감정이 '사창(紗窓)'이라는 空間으로 축소(縮小)되어 '虛空'이라는 공간 확대 (空間 擴大)를 표출한 黃眞伊의 詩와 대조(對照)를 이룬다. 또 바느질로 잦아드는 그리움을 內面으로 끌어 들이고 눈물로 삭히는 이 여인에 비하면 '半月'로 表象된 黃眞伊의 시는 '척(擲)'이라는 시어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적 의지로 행동적 결단을 추구했다 할 수 있다. 빗은 여인의 숙명(宿命)의 상징이다. 빗을 던진 행위는 숙명적(宿命的), 수동적(受動的)인 순응(順應)의 포기(抛棄)라 할 수 있다. 위의 時調에서 '제 구태여 보내는' 이성적 판단(理性的 判斷)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버림 받음이 아닌 主體的 행동 양식의 표현으로 황진이의 강한 자존심(自尊心)을 엿볼 수 있다.
③ '멋'을 主調로 하는 作品
'멋'이라고 흔히 말할 때 그 辭典的 意味는 〈방탕(放蕩)한 기상(氣象)〉〈풍치있는 맛〉〈事物의 眞味〉등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예술작품(藝術作品), 혹은 詩에 있어서의 멋이란 단순한 사전적 의미만이 아닌 形式과 內容의 조화미(調和美)와 심미성(審美性) 및 그것이 讀者에게 주는 감동과 쾌락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男性 中心 社會에서 규방 속에서만 지내야 했던 일반 여인들과는 달리 남성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던 唯一한 존재였던 妓女들은 남성 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그 特有의 멋을 한껏 表出할 수 있었다. 그러나 妓女들의 詩歌에 나타난 恨과 멋을 구분 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멋'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소개해 보겠다.
☞ 이 시는〈박연(朴淵)〉이라는 五言律詩이다. 박연 폭포(朴淵 瀑布)의 거창함과 그 의젓한 風景이 그림처럼 떠오르는 시이다. 비유(比喩)와 상징(象徵)을 적절히 구사(驅使)하여 박연 폭포(朴淵 瀑布)의 웅장함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기에 앞서 自然人이 아니면 엮어 내기 힘든 절묘(絶妙)한 묘사라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黃眞伊는 자연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연물에 대한 시는 이 〈박연(朴淵)〉하나로 그치고 있어 실전(失傳)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④ 黃眞伊의 時調와 漢詩의 차이점
時調에서는 "情恨"이 女性的인 섬세한 정서로 완만하게 표현되어 있는 반면, 漢詩에서는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空間이 주는 餘白이 時調보다는 적음을 알 수 있다. 修辭上의 특징에서 時調는 거의 모든 수사 표현을 동원하여 우리 言語가 누릴 수 있는 묘(妙)를 최대한(最大限)으로 살리고 있는 반면, 漢詩에서는 漢字自體의 제약 때문이겠지만, 과장(誇張)·의인(擬人)·직유(直喩)등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였을 뿐이다. 시어 사용에 있어서 時調에서는 平易한 國語體로 감미로운 우리말의 리듬을 충분히 살리고 있기 때문에 쉽게 불리워지는 잇점이 있으나 漢詩에서는 詩語 自體가 常用語가 아니어서 時調보다는 쉽게 불리워질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오늘날 黃眞伊의 漢詩보다는 時調가 뛰어 나다고 평가하는데 황진이의 시조에서만 그의 문학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시의 치밀한 구성과 자아의 인식을 통한 철학적 바탕 위에 승화된 서정으로 표현한 것은 가히 독보적(獨步的)이라고 할 수 있어서 漢詩에 있어서도 문학성이 높다는 것을 재인식해야 되리라 믿는다. 결국 時調와 漢詩의 差異는 讀者의 이해도(理解度)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3) 소실(小室)
조선 시대에는 한 번 소실이면 그 자식도 소실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제약이 단순히 신분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활동에도 미쳤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문학사의 흐름에서 따로 떨어져서 흘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작품을 문학사적인 기술로 나타낼 수는 없을지라도 몇 안되는 우리 고전작품 속에 그중에 또 몇 안되는 숫자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남성이나 여타 정실(正室)들의 작품과 경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나름의 서정성을 가지고 색짙어 눈에 띄지 보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으로 안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시중에 나온 책들의 해설경향은 대체로 앞에서 규수나 기생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따로 실지 않기로 한다. 다만, 소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머리속에 기억하고 다음에 인용되어 있는 작품들을 찬찬히 훑어 본다면 나름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덧붙여, 한시작가론이나 여타 여류한시모음 등을 살펴 보았지만 조사자의 좁은 식견으로 인해 더 이상의 문학사적 도움이 되는 자료는 찾지 못했음을 밝혀두고 다음의 자료들이 나름의 한국한시의 미학을 바탕으로 감상에 도움이 되었으면한다.
① 이옥봉(李玉峯)(? ∼1592(선조25년))
조선중기 여류시인으로. 선조 때의 옥천군수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조원(趙媛)의 소실로 살았다. 일찍이 정철(鄭澈)·이항복(李恒福) 등과도 수창(酬唱: 시가를 불러 서로 주고 받음)했다고 한다.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원명시귀(媛名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져 왔으며, 시집 1권이 있었다고 하나 한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峯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閨情 규정
有約來何晩 유약래하만 약속해 놓고 왜 안 오는고
庭梅欲謝時 정매욕사시 뜰의 매화는 다 지려 하네
忽聞枝上鵲 홀문지상작 문득 나뭇가지의 까치소리를 듣고
虛畵鏡中眉 허화경중미 부질없이 거울 속의 눈썹 그리네.
憑欄 빙난
小白梅逾耿 소백매유경 희부연 매화꽃은 더욱 빛나고
深靑竹更姸 심청죽갱연 새파란 대나무는 한결 고와라.
憑欄未忍下 빙난미인하 난간에서 차마 내려가지 못하나니
爲待月華圓 위대월화원 둥근 달 떠오르기 기다리려 함이네.
聽鷄 청계
明宵雖短短 명소수단단 내일밤이야 아무리 짧아도 좋지만
今夜原長長 금야원장장 오늘밤만은 길고도 또 길기를 바라네
鷄聲聽秋曉 계성청추효 어느듯 가을 새벽, 닭소리를 들으니
雙瞼淚千行 쌍검루천행 두 눈에 하염없이 눈물 흐르네
離恨 이한
平生雜恨成身病 평생잡한성신병 기약없는 이별 설움, 끝내 병이 났으니
酒不能療藥不治 주불능료약불치 술로도 못 달래고 약으로도 못 고칠 병
衾裡泣如氷下水 금리읍여빙하수 이불 속의 우는 눈물, 얼음 밑의 물과 같아
月夜長流人不知 월야장류인불지 달밤이면 늘 흘러도 아는 사람이 없네
詠雪 영설
閉戶何妨高臥客 폐호하방고와객 숨어사는 사람이라 문 닫은들 어떠하리
牛衣垂淚未歸身 우의수루미귀신 우의에 눈물 지으며 돌아가지 못하는 몸
雲深山徑飄如席 운심산경표여석 산길에 깊은 구름 자리처럼 나부기고
風捲長空緊若鹿 풍권장공긴약녹 하늘에 바람 불어 먼지처럼 모이네
渚白非沙欺落 저백비사기락안 물가는 희나 모래밭 아니니 앉는 기러기 속이고
窓明忽曉却愁人 창명홀효각수인 창 밝자 곧 새벽이라 도리어 시름겹다
江南此月應梅發 강남차월응매발 오늘 강남에는 아마 매화 피었으리
傍水連天幾樹春 방수연천기수춘 물가의 하늘에 닿는 몇 나무의 봄일런고
採蓮曲 채련곡
南湖採蓮女 남호채련녀 저 남호에서 연밥 따는 여자들
日日南湖歸 일일남호귀 날마다 남호의 물가로 돌아온다
淺渚蓮子滿 천저련자만 얕은 물가에는 연밥이 가득하고
深潭荷葉稀 심담하엽희 깊은 못에는 연잎이 드물어라
蕩 嬌無力 탕장교무력 노를 젓기에는 여자의 힘에 겨워
水 越羅衣 수천월나의 얇은 비단옷을 물에 적신다
無心却同棹 무심각동도 무심히 같이 젓지 않고
貧看鴛鴦飛 빈간원앙비 날아가는 원앙새를 바라본다
初月 초승달
誰採崑山玉 수채곤산옥 누가 곤륜산 옥을 캐내어
巧成一半梳 교성일반소 솜씨 있게 절반 빗을 만들었는고
自從離別後 자종리별후 님을 이별한 그 뒤로는
愁亂擲空虛 수란척공허 시름에 겨워 허공에 던져 뒀다
寧越道中 영월도중
五月長干三日越 오월장간삼일월 오월의 장간산을 사흘에 겨우 넘으니
哀歌唱斷魯陸雲 애가창단어육운 노릉의 구름 속에 슬픈 노래 끊이었네
妾身亦是王孫女 첩신역시왕손녀 (첩된)이 몸 또한 왕가의 자손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 차지견성불인문 이 산골의 두견소리 차마 듣지 못하겟네
癸未北亂 계미북란
干戈縱異書生事 간모종이서생사 전쟁은 비록 선비 일과 다르지만
憂國還應 髮蒼 우국환응빈발창 나라 근심에 귀밑머리 다 세었네
制敵此時思去病 제적차시사거병 적을 무찌를 때는 곽거병을 생각하고
運籌今日懷張良 운주금일회장양 전략을 세울 때는 장량이 그리워라
源城戰血山河赤 원성전혈산하적 경원성 싸움 피에 강산이 다 붉었고
阿堡妖氣日月黃 아보요기일월황 아산보의 요기에 일월이 흐리었네
京洛徽音尙不達 경락휘음상부달 서울서는 좋은 소식 아직도 오지 않아
江湖春色亦凄凉 강호춘색역처량 이 강산에 봄빛이 쓸쓸하기만 하네
② 김부용당 운초(金芙蓉堂雲楚)
정조때 평남 성천에서 이름 높은 기생이었으나, 뒤에 김이양(金履陽)의 소실로 들어갔다. 시를 잘 지어 유고집(遺稿集)에 '운초집(雲楚集)'이 있다.
諷詩酒客 시주객을 풍자함
酒過能伐性 주과능벌성 술이 과하면 사람의 목숨 끊고
詩巧必窮人 시교필궁인 시를 잘하면 곤궁하게 되나니
詩酒雖爲友 시주수위우 시와 술 그것은 벗이 될 수 있으나
不疎亦不親 불소역불친 너무 멀리도 너무 가까이도 말라
孤墳(一) 외로운 무덤1
蘭苕花發在芳蹊 난초화발재방혜 향기로운 좁은 길에 피어 있는 들난초
留待三春翡翠棲 유대삼춘비취서 봄이오면 물총새가 깃들기를 기다리네.
無寧寂寞損林莽 무녕적막손림망 차라리 병든 숲의 쓸쓸한 잡초되어
羞逐狂風落 泥 수축광풍락혼니 광풍에 흩날리어 진흙 속에 묻혔으면……
(二) 2
寒梅孤着可憐枝 한매고착가련지 매화 꽃 하나 외로이 붙어 잇는 가벼운 가지
雨癩風因委垂 체우나풍인위수 잔인한 비와 바람에 고달피 늘어졌네
縱合落地香猶在 종합락지향유재 비록 땅에 떨어져도 향기야 그대로 있을 것을
勝似楊花蕩浪姿 승사양화탕랑자 버들꽃의 방탕한 그 모습보다야 나으리
(三) 3
幽愁 淡 靑娥 유수암담감청아 깊은 시름 암담해라 미인을 묻었구나
雨打紅梨畵掩紗 우타홍리화엄사 비 맞은 붉은 배꽃을 비단에 싼듯
鶯喚鵲啼猶忽聽 앵환작제유홀청 꾀꼬리와 까치 울음은 들을 수야 있지만
其如山外笛聲何 기여산회적성하 산 밖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어찌할꼬
百年心 백년심
遲日鶯啼小杏陰 지일앵제소행음 긴 날에 꾀고리는 살구나무 그늘에서 울고
佳人 坐繡簾深 가인초좌수염심 아름다운 사람은 깊은 발 안에 쓸쓸히 앉아 있네.
願取春風無限柳 원취춘풍무한제 바라건대 봄바람의 무수한 버들가지를 꺾어
絲絲宿結百年心 사사숙결백년심 그 실가지로 그대와의 백년 마음을 맺었으면…….
春風起 봄바람
垂楊深處綺窓開 수양심처기창개 정자 이름 사절이 도리어 의심되나니
小院無人長綠笞 소원무인장록태 사절은 맞지 않고 오절이라야 하네
簾外時聞風自起 염외시문풍자기 산과 바람, 물과 달이 서로 모이는 곳에
幾回錯認故人來 기회착인고인래 이 세상에 뛰어난 마인이 또 있거니.
③ 박죽서(朴竹西)(1817-1851?)
호는 반아당(半啞堂)으로 소실의 딸로 태어나 서울 부사(府使) 서기보(徐箕輔)의 부실(副室)로 살았다. '죽서시집(竹西詩集)'의 발문(跋文)'을 쓴 금원(錦園)과 같은 원주사람으로 일생을 친하게 지냈다.
十歲作 십세에 짓다
窓外彼啼鳥 창밖에서 우는 저 새야
何山宿早來 어느 산에서 자고 일찍 왔는가
應識山中事 너는 아마 산중 일을 알겠거니
杜鵑開未開 진달래 꽃은 피엇던가 안 피었던가
病中 병중에
淹病伊來一笑稀 엄병이래일소희 병난 뒤로 웃을 일 하나도 없고
夢魂長是暗中歸 몽혼장시암중귀 언제[나 굼길만이 어둠 속을 헤매네
此新若使因成鳥 차신약사인성조 이 몸이 이러다가 이대로 새가 되면
不暫相離到處飛 불잠상리도처비 잠깐도 안 떠나고 님 계신 곳 따라가리.
懷伯兄 오빠를 그리워하며
一年春事落花殘 일년춘사락화잔 한 해의 봄의 일이 지는 꽃에 남았구나
風未吹愁愁百端 풍미취수수백단 천만 갈래 시름을 바람도 못 날리네
匹馬東歸雲漠漠 필마동귀운막막 말 타고 돌아오매 구름길이 아득하고
斜陽西盡角難難 사양서진각난난 저녁해 넘어가고 피리소리 애를 끊네
別時遺話心中在 별시유화심중재 떠나실 때 주신 말씀 아직 마음속에 있고
行處誰知夢裡看 행처수지몽리간 가신 곳 누가 알리, 꿈속에서 뵈온 것을.
萬疊峰巒遮望眼 일첩봉만차망안 만첩 청산은 바라보는 눈을 막아
捲簾徒倚曲欄干 권렴도의곡난간 발을 걷고 부질없이 난간에 기대 있네
寄呈 님께 드림
鏡裏誰憐病己成 경리수련병기성 거울 속의 병든 몸을 누가 가여워하리
不須醫藥不須驚 불수의약불수경 약으로도 못 고치니 놀랄 것 없네
他生藥使君如我 타생약사군여아 저승에서 나와 님이 바꾸어 태어나면
應識相思此夜情 응식상사차야정 오늘밤의 이 그리움을 아마 님은 아시리
④ 강 지재당(姜只在堂)
김해의 기생으로 이름은 담운(澹雲)이고 호가 지재당이다. 고종때 사람인 차산(此山) 배문전(裵文典)의 소실이다. 글씨에도 능했다 한다.
暮春 늦봄
殘花眞薄命 잔화진박명 시들어가는 꽃은 참으로 박명하여
零落夜來風 영락야래풍 지난 밤 바람에 다 떨어졌네
家 如解惜 가동여해석 아이야 아까운 줄 알거든
不掃滿庭紅 불소만정홍 뜰에 가득 붉은 꽃을 쓸지 말아라
輕舟
輕舟一任風 경주일임풍 바람에 맡긴 가벼운 배로
漸入蘭深處 점입난심처 차츰 난초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驚起雙鴛鴦 경기쌍원앙 짝 지은 원앙새를 놀라 깨우니
綠波渺然去 녹라묘연거 푸른 물결 아득히 흘러가노라
獨日書懷 혼자있는 날의 회포(외로운날 회포를 글로 쓰다)
爛木隨靑鵲 난목수청작 까치들은 문드러진 나뭇가지를 찾고
新泥逐玄禽 신니축현금 제비들은 새 진흙을 물어 나르네
辛勤開一屋 신근개일옥 이렇게 고생하여 둥우리를 짓나니
俱是養雛心 구시양추심 그 모두 새끼들을 기르려는 마음이네
母鷄毛盡堅 모계모진견 어미닭은 그 털이 모두 굳어져
尾隨八九兒 미수팔구아 여덟 아홉 마리 새끼를 뒤에 데리고
搏犬忘吾弱 박견망오약 약한 내 힘을 잊고 개한테 덤벼드네
籍重在多兒 적중재다아 그 모두 많은 새기 소중히 여김이네
⑤ 금원(錦園)
순조 때의 원주 사람(1817-?)으로서 시랑 김덕희(侍郞 金德熙)의 소실로 살았고 시문에 능하여 문집(文集)이 있다.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있었으며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하여 1830년 순조 30년 3월경, 나이 14세때 남장을 하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히 되어 규랑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이 서울 용산에 있었는데, 그곳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 동인이 앞서 소개한 김운초, 박죽서 외에 경산(瓊山), 경춘(瓊春) 등이었다. 일찍부터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落)을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편력하면서 시문을 써 1850년 호동서락기를 탈고하고 1851년 죽서시집의 발문을 썼다. 1843년(헌종 9년), 나이 27세때 문명을 떨쳐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 불렸다.
觀海 바다를 보며
白川東匯盡 백천동회진 모든 냇물은 바다로 흘러들어
深廣渺無窮 심광묘무궁 깊고 넓고 아득해 그 끝이 없네
方知天地大 방지천지대 비로소 알겠구나, 크나큰 천지
容得一胞中 용득일포중 모두가 그 태 안에 들어 있는 걸
細雨 가랑비
簾 初開水國天 염포초개수국천 휘장을 열면 끝없는 강의 하늘
春風十二畵欄前 춘풍십이화란전 봄바람의 열두 굽이 난간 앞이다
隔江桃李淞江柳 육강도이송강류 강 건너 목사, 오얏, 송강가의 버들
盡入 一色烟 진입창몽일색연 그 모두 가랑비 속의 흐릿한 한 빛이다.
望漢陽 한양을 바라보며
閑事浮萍事遠遊 한사부평사원류 한가롭기 부평초라, 나그네길 일삼아
登臨多日部知休 등임다일부지휴 승지 찾아 하 많은 날 쉴 줄 전연 모르네
歸心欣逐東流水 귀심흔축동류수 그리는 마음 기꺼이 동류수를 따르거니
京 風烟早晩收 경명풍연조만수 서울의 저 세상도 모두 쉬이 다 보리라.
金剛山萬瀑洞 금강산만폭동
轉入香區境益新 전입향구경익신 절세계에 들수록 경계 더욱 새로와
落花芳草 世塵 낙화방초창세진 지는 꽃 꽃다운 풀, 세상 일을 슬퍼한다.
七分樹色春如畵 칠분수색춘여화 유록색 나무빛에 봄은 마치 그림인 듯
萬斛泉聲洞不貧 만곡천성동불빈 만 섬의 물소리에 골짝은 풍요하다.
得月 經三五夜 독월재경삼오야 달이 밝자 어느새 보름밤은 지내엇고
望鄕難化億千身 망향난화억천신 고향이 그리우나 백억 화신 아니다
深山落日翩翩鶴 심산락일편편학 깊은 산 지는 해에 펄펄 나는 학이여
俱是前宵夢裏人 구시전소몽리인 그 모두 지난 밤의 꿈속의 사람이다.
⑥ 그 외에 전하는 소실의 작품
가) 홍당성의 소실(洪唐城小室)
閨思
童報遠帆來 동보원범래 멀리서 돛배 온다는 아이의 말에
忙登樓上望 망등루상망 바삐 다락에 올라 바라다보니
望潮直過門 망조직과문 조수 따라 문앞을 바로 지나가니
背立空 배립공초창 돌아서서 부질없이 한숨짓네
나) 김농암의 소실(金農岩小室)
偶吟
春生秋殺自平分 춘생추살자평분 봄은 살리고 가을은 죽임은 공평한 이치지만
八月梨花古未聞 팔월이화고미문 팔월에 피는 배꽃, 일찍 듣지 못하였네
萬樹西風方慘慄 만수서풍방참률 모든 나무들은 가을 바람에 추워 떠는데
一枝留得少東君 일지유득사동군 저 한 가지는 이른봄을 그대로 잡고 있다
다) 양사언의 소실(楊士彦小室)
陽山 양산관
望長塗不掩扉 창망장도불엄비 먼 길을 바라보며 사립문 닫지 않으니
夜深風露濕羅衣 야심풍로습나의 깊은 밤 이슬발이 비단옷을 적신다
陽山 裡花千樹 양산관이화천수 님 계신 양산관에 온갖 꽃이 피어 있어
日日看花歸未歸 일일간화귀미귀 날마다 그 곷 보느라 돌아오지 못하는가.
라) 취선(翠仙): 호는 설죽(雪竹)이고 김철손(金哲孫)의 소실이다.
白馬江懷古 백마강회고
晩泊皐蘭寺 만박고란사 해가 저물어 고란사에 이르러
西風獨倚樓 서풍독의류 가을 바람에 혼자 다락에 기대 있네
龍亡江萬古 용망강만고 용이 떠났나니 만고의 강만 흐르고
花落月千秋 화락월천추 꽃은 떨어졌는데 천추의 달만 밝네
마) 이씨(李氏): 김성달(金盛達)의 소실로 원래 시를 몰랐으나 부군이 죽은 후 시고(詩稿)를 갖고 있으면서 신통(神通)하였다 한다.
江村卽事 강촌즉사
山影倒江掩夕暉 산영도강엄석휘 산그림자는 강에 잠겨 저녁볕을 가렸는데
漁人 乃帶潮歸 어인애내대조귀 어부는 뱃노래로 조수 따라 돌아오네
知爾幾時逢海雨 지이기시봉해우 알겠구나, 바다 비를 얼마나 맞았기에
船頭斜掛綠蓑衣 선두사괘녹사의 뱃머리에 도롱이를 비스듬히 걸어뒀네
Ⅳ. 결 론
지금까지 여류한시를 규수, 기생, 소실의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여류답지 않게 호방한 것도 있었고, 이별의 정한을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읊는 것도 있었으며, 한편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경치를 읊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한국한문학사에서 이들의 흐름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빼놓고 있는 것이다.
문학사는 어떻게 기술하든 전체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주류에서 조금씩 일탈된 것들은 놓치기가 쉽다. 여류작가들의 작품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한문학사에서는 여류작품을 단순히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부진했다는 식으로만 다루었고, 그 중에 눈에 띄는 난설헌, 황진이, 매창 등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여인들의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 활동의 제약으로 인해 문학사에서도 전체 흐름에서 유리되어 있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당시의 배경을 전제로 한 좀더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글에서도 처음에는 문학사적인 기술을 하고자 했으나,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여 자세를 바꾸었다. 즉 범위를 한시(漢詩)로 좁히고, 어떤 흐름을 보여주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각 계층의 여인들의 작품경향을 살펴보고, 거기서 그 작품들의 시대적 존재의미를 찾기로 한 것이다. 결국 작품론 쪽으로 그 흐름이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문학사 기술의 입장에서도 여류작가들에 대한 기술은 필요하다고 본다. 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색다른 정서를 갖는 여류작품들을 빼놓는다는 것은 많지 않은 우리고전에서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래에는 모두 시대적 상황과 유리된 작품해설들이 대부분인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좀더 여류들의 시대상황을 잘 참작한 연구들이 나왔으면 좋겠고, 시 해설도 삶과 조금더 밀접한 연관을 맺었으면 한다.
【참 고 문 헌】
이응백 외, 『한국국문학 자료 사전』, 한국 사전 연구사, 1994.
김달진, 『한국 한시』3, 민음사, 1989.
황재군, 『한국 고전 여류 시문학 연구』, 집문당, 1985.
김원동, 『황진이 시문학 연구』, 경원대, 1991.
정경화, 『조선조 여류 한시의 시세계』, 한국교원대학교 학사학위 논문,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