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로 집을 잃고 몇 번의 이사를 거친 후 본격적으로 월셋방을 진전하기 시작했던 첫 집은 내가 다녔던 여중 입구의 현대식 단층 슬라브 집이었다. 오른 모퉁이를 돌아 부엌이 입구였던 조그만 방은 주인집 작은 방을 임시로 세 낸 방이었지만 그때 이미 어머니께서는 빚쟁이에 쫓겨 품 삯으로나마 돈을 벌기 위해 아는 분을 따라 경북 의성 마늘 밭으로 떠나신 후였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에도 적지 않은 월세를 지불하면서까지 어머니께서 그 방을 구해주신 건 깨끗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6월에 이른 한 여름 중순 더위는 시작되고 있었고 당신의 물 욕심과 맞물려 수돗물이 잘 나오고 깔 끔을 떨던 딸 둘을 위한 배려였지만 정작 당신은 먼 타지에서 다 쓰러져가는 처마간에서 날을 지새며 단 한밤조차 함께 하지 못했던 방이었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안 계신 탓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허허로운 기분을 느끼며 여상을 갓 졸업한 셋째 언니와 여고를 입학한 나와 중학교 새내기 동생 셋이서 거처한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살던 작은 방은 주인집 현관으로 통해 넓은 사각형 거실과 연결된 방이었지만 얼음처럼 싸늘한 분위기의 주인 내외는 거실로 통하는 방문 입구에 굵은 자물쇠를 채워두었다.
한번도 정면에서 자물쇠를 본 적은 없지만 우리 집을 가졌던 습관은 남아서 나도 모르게 방문을 밀치기라도 하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굵은 자물쇠의 옆 모습이 쇠사슬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어찌나 굵고 큰 걸로 잠과 두었던지 오히려 주인집의 거실 내부가 훤히 비췰 만큼 길던 자물쇠의 길이만큼 집 없는 설움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아픔 또한 길고 깊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자물쇠보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때까지도 연탄불에 밥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는 서툰 직장 생활과 야간 자율 학습으로 인해 항상 늦은시간에 귀가했었고 당연히 밤이 늦어서야 겨우 밥 한 술을 뜰 수 있었다. 그래서 궁핍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반비례하며 사치를 부린 건 당시에도 귀했던 전기 밥솥이었다.
전기만 꽂으면 어머니의 온기마냥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밥솥은 더없이 귀중한 물건이었지만 우연히 주인 아주머니께 발견된 후로 혹독한 설움과 함께 애물 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얼마나 심한 악다구니를 퍼붓는 지, 한 겨울 찬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는 살벌한 냉기마냥 뼈에 사무치도록 삭히는 아픔으로 우리는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12000원의 전기세를 매달 45000원으로 지불할 때는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경리로 일하던 셋째 언니의 월급이 십만 원이었으니 주인의 횡포에도 단 한마디 불평 불만도 하지 못한 채 방세와 전기세 등 공과금으로 언니 월급을 다 주고도 욕은 오물처럼 바가지로 뒤집어 쓰며 근근이 몇 달을 인내와 동거 동락 하며 살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놀부 마누라보다 더 지독했던 주인 여자는 흥부 얼굴을 씻어 숭늉으로 마실 만큼 우리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어느 날 우연히 전기 요금 고지 세를 보았던 우리는 세 집을 통틀어 도합 전기세가 45000원인 것을 알았을 때서야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결정했지만 또다시 한 평생 들을 욕을 한꺼번에 가불 받으며 더욱 더 지독한 설움을 당해야 했다.
일년을 채우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이유가 됐고 많은 종갓집 살림을 집 구석 창고에 세워둘 수 밖에 없었던 이사 조건까지 들먹이던 주인집에서 서러운 눈물을 훔치며 나올 때는 어쩌면 공감각마저 느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속사포보다 아프게 전해졌던 주인 여자의 음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마치 잠과 둔 자물쇠에서 풀려나듯 영혼마저 자유로진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마치 예견했던 일처럼 주소지 변경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일주일을 살아도 습관처럼 전입 신고를 했지만 처음으로 몇 달을 살면서도 등본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첫 번째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번의 번지수조차 없는 집을 돌아다녔는지 기억마저도 희미하지만 우리에게 그토록 집 없는 설움을 철저하게 일깨웠던 집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집 없는 설움으로 인한 눈물 바람은 뿌리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지독하리만큼 당했던 월셋방의 설움은 도공이 명검을 만들기 위해 수 없는 풀무질로 담금질 하듯 우리를 시련으로 단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이사를 한 곳은 사춘기 적 내 감성을 두드렸던 산 중턱 높은 별장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