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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1894년, 중국 상하이에 울린 세 발의 총성!
조선의 대표적인 개화파 김옥균이 한 호텔 방에서 암살된다.
일순간 수구파의 암살자로 낙인찍힌 홍종우. 그러나 그는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주장한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 - 한국사 전, 작가 : 지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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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해에서 김옥균이 죽었다!~
"매우 놀랄 만한 전보가 있으니...
김옥균씨가 상해의 호텔에서 함께 동행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음"
- 일본 유빈호히치 신문(1894년 3월)
1894년 3월 상해에서 김옥균이 암살당했다.
범인은 그와 함께 호텔에 투숙했던 홍종우.
지금까지 홍종우는 의문의 암살자로 남아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을 암살한 다소 홍종우는 낯선 이름이다.
홍종우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김옥균을 살해한 대표적인 수구파라는 정도가 전부이다.
홍종우는 입신영달을 위해 김옥균을 살해한 흉한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별한 주관도 없이 막무가내로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홍종우를 이렇게 보는 데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도쿄경제대학>에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다.
"이 그림은 1894년 김옥균 암살 사건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가는 오구니 마사시입니다."
상해의 한 호텔에서 홍종우에 기습으로
사망하는 김옥균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놓았다.
"당시 이런 그림은 대중에게 사실을 알리는 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림이 새로운 매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그림 최신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홍종우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현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894년 3월 29일 오후 3시 일본 외무부 착신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는 상해 현지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붙여졌다.'
청일전쟁사의 기록인 <중동전기(中東戰紀)>엔
홍종우의 취조 내용이 적혀 있다.
상해 연안의 장관과 일본, 영국의 관원이 홍종우를 심문했다.
그런데 홍종우의 태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김옥균은 대역부도한 놈이오.
사람마다 그를 죽이려 했는데
이제 나라를 위해 그를 죽였으니
나는 죽어도 좋소."
사건 현장인 상하이 시내.
"여기가 옛날 동화여관이 있던 자리입니다.
당시 일본인이 세운 여관이었습니다.
이곳 2층에서 김옥균이 암살당했습니다."
- 쩡쭈안 교수(상해사회과학원)
113년전 동화여관의 당시 사진.
상해 언론들은 김옥균의 사망 소식을 열흘 이상 머릿기사로 다뤘다.
'김씨 상해에서 살해당하다'
2. 갑신정변(1884년),
개화사상을 가지는 젊은이들의 '3일 천하'
특히 일본은 촉각을 세워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유독 일본의 반응이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발단(朝鮮發端)'
김옥균은 갑신정변후
일본에서 십 년째 망명중이었는데 명성이 상당히 높았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망명하기 전, 갑신정변 전부터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에 김옥균이란 사람이 있다,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다, 이름난 사람이다."
- 금병동 교수(일본 조선대학교)
개화파의 수장이었으나 이미 망명자가 되어버린 김옥균.
왜 홍종우는 상해까지 따라가 그를 암살했던 것일까?
그 불씨는 19세기 중반 이후 북촌(서울 종로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개항 무렵 이곳 북촌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이곳 북촌 일대는 예로부터 양반 세도가들이 집중 거주하던 곳으로
이른바 개화파의 거두라고 하는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도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신사상을 논의함으로 해서 개화사상이 탄생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은숙(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신기한 서양 문물은 봉건 사상을 깨고 신기한 세상을 꿈꾸게 했다.
이들의 열정은 개화파라는 정치계의 신진 세력을 만든다.
개화파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훗날 개화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헌법재판소 뒷편.
"이곳이 박규수 선생 집터군요."
"이곳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집터입니다.
이곳에서 박규수는 김옥균, 박영효 등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서구의 실학적 개혁론과 새로운 사조들을 역설함으로써
개화 사상이 출현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 박은숙(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개화파는
무력을 이용하더라도 조선을 시급히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옥균이 그린 갑신정변 작전도'
1884년 12월 4일.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한 갑신정변은
일본군이 후퇴함에 따라 3일만에 막을 내린다(3일 천하).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의 가족들은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자결했고,
살아남은 정변 가담자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 도쿄.
김옥균은 일본 진정사(眞淨寺)를 비롯한 일본 전역을 떠돌게 된다.
유명인사인 그를 만나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김옥균이 달갑지 않았다.
망명자 김옥균은 이용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변방을 떠돌던 김옥균은 많은 유작을 남겼는데
그중엔 김옥균의 친필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정치인이 자기 심정을 말한 게 아니고
시인으로서의 김옥균, 아주 특성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금병동 교수(일본 조선대학교)
김옥균의 유작인 한시, 최초 공개
일본의 철저한 배신속에서
김옥균은 그리움과 외로움을 시로 가끔 풀어냈다.
홍종우에 의한 김옥균 살해는
외교관계가 얼킨 예민한 사항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으로 전보를 보냈고,
곧 회답이 왔다.
'김옥균은 나라의 반역자이고 홍종우는 관원이니
이 사건은 본국으로 돌려보내
우리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시신을 수습해
조선으로 돌아간다.
홍종우의 이 '암살'은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처형'의 의미였던 것이다.
"지금 보시는 것은 김옥균의 암살 사건을 다룬 일본 신문의 내용입니다.
양화진에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하자마자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능지처참은 당시 대역죄인에게나 내려졌던 극형입니다.
한편 홍종우에 대해서는
'흉노(兇奴)'이며 '미개한 한국인(韓人未開)'이란 기사가 눈에 띕니다."
3. 마흔 한 살.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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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홍종우는 당시 기사처럼 어리석은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김옥균의 개화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홍종우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120여 년전 홍종우의 흔적을 찾아 파리의 기메박물관을 찾았다.
기메박물관엔 홍종우의 선명한 자취가 남아있었다.
"이것이 홍종우의 명함입니다.
1894년에 남긴 거죠.
조선 경성이라는 주소가 있네요."
"이것은 홍종우의 사진입니다.
당시 기념 방문 기념으로 찍은 거죠."
- 프란시스 마꾸앵(기메박물관 도서관장)
조선의 이방인은 낯선 파리에 어떻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1890년 홍종우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레가미를 만난거죠."
- 피에르 캉봉(게메박물관 한국관 큐레이터)
1890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인 홍종우.
파리는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에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홍종우와의 첫만남을 레가미가 기록으로 남겼다.
레가미의 글은 <통보>라는 잡지에 실려있다.
<정치적 암살자>
"그의 머리는 천장까지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나는 일종의 신비로운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 느낌은 예전 동양에서 본 큰 호랑이가 내게 불러일으켰던 경외감 같은 것이었다."
홍종우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레가미는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간직했다.
"레가미는 그 당시 화가였습니다.
또한 신문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한동안 홍종우와 함께 지냈습니다."
이 때 홍종우의 나이 마흔 하나.
불혹의 조선인이 만리 타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홍종우는 배우려는 욕구가 매우 강하다.
그는 야망이 아주 강하여 자기 나라의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 문명을 흡수하기를 열망한다."
당시 파리는 정치와 경제, 문화면에서 화려한 시대를 맞고 있었다.
에펠탑을 세웠고 전기도 보급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한 근대 문명의 체험.
이를 위해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을 오랫동안 혼자서 준비한다.
"당시 홍종우는 프랑스에 오기전부터 불어를 공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1880년대 편찬 된 한불사전이 있었는데
홍종우는 이 사전을 항상 지니고 다녔을 것입니다."
- 이진명 교수(프랑스 리옹대학)
그러나 홍종우에게 외국 유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타난 홍종우에 대한 기록.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까지 흘러가 살았다.
"홍종우는 경기도 안산 사람이다."
"고금도로 흘러가 살았다."
- 황현, <매천야록>
"쑥물도 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구차한 생활을 하였다."
- <대한제국 비서원일기>
또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그가 여비를 어떻게 마련했을까?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전 홍종우는
일본에서 2년간 배삯을 모은다.
국제정세에 나름 식견이 있었던 그는
아사히 신문에 식자공으로 취직을 했다.
이곳에서 국제신문을 봐 가며 견문을 더 넓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에게 연설을 할 수준이 되었다.
'한국 손님 홍종우를 초대하다'
'일본과 한국의 상업 상황에 대해 연설할 예정이다.'
- 1890년 호쿠료우 신문
우여곡절 끝에 홍종우는 요코하마, 상하이를 거쳐
마침내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요코하마 -> 상하이 -> 사이공 -> 싱가포르 -> 콜롬보 -> 수에즈운하 -> 마르세이유
당시 유학은 명문 자제들이 관비로 다녀오는 것이 관례였지만
홍종우는 스스로 모든 걸 마련한 특이한 경우였다.
40여 일이 걸려 도착한 프랑스.
그곳은 놀라웠다.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알제리, 튀니지를 식민지로 거느리며
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당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식민지를 경영(제국주의)하면서
매우 화려한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 에릭 망숑 리고 교수(파리 소르본느대학 근대사)
파리의 문학엔 아시아 열풍이 불었다.
때마침 도착한 한국의 유학생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컸습니다.
홍종우는 이들에게 조선의 지성인으로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습니다."
- 이진명 교수(프랑스 리옹대학)
그는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당시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인 고고르당과
19세기 대표적인 사상가인 르낭을 비롯한 명사들을 두루 만났다.
한편 홍종우는 조선에 대해 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메박물관>
"홍종우에 의해 번역된 책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춘향전입니다.
당시 로니라는 소설가와 함께 출간한 책이죠."
인기 소설가 로니와 함께 번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된 춘향전.
프랑스 제목으로는 춘향을 풀어서 쓴 <향기로운 봄>이다.
<향기로운 봄> - 홍종우, 로니 번역
춘향이는 서민의 딸이고 향단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각색을 했지만
여전히 해피엔딩이다.
"로니가 놀란 것은 이 작품에서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가 놀랍다는 겁니다.
이렇게 사랑 관계가 있으면 자기들 같으면
누군가 죽거나 죽이는 이런 게 있을텐데 그게 없다는 겁니다."
- 김윤식 명예교수(서울대)
홍종우는 춘향전을 번역하면서 소설의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
로니에게 춘향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홍종우씨가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노래와 번역에서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한한 부드러움이 담긴 꿈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백인과 황인종의 문명이 서로 평행선을 이룬 것 같았다."
- 로니의 한국의 풍속 중
<향기로운 봄>이 인기를 끌자,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1895년 출간)과
<직성행년편람 번역>(1897년 출간)도 출간된다.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는
심청전을 번역한 책이다.
번역은 기메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홍종우는 레가미의 소개로
기메박물관에 취직해 외국인 협력자로 일했다.
"당시 박물관의 지출내역서입니다.
여기 보면 홍종우가 받은 금액도 나와 있네요."
홍종우는 한 달에 백프랑을 받았고,
1892년 6월 2일엔 몸이 아파 결근을 한번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었다.
번역이외에도
조선에서 들어오는 문물을 분류하는 작업도 맡았다.
그의 손을 거쳐 세워진 것이 '기메박물관 한국관'이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더 큰 세상을 만났고
세상은 홍종우를 통해 조선을 만났다.
"이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70여 년전(1936년)
러시아 발레단의 전설적인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에 의해 공연된 '사랑의 시련'이란 작품입니다.
이 '사랑의 시련'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발레 작품의 고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시련'이 바로 홍종우가 번역한 <향기로운 봄>
즉, <춘향전>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최근 문화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홍종우가 최초로 번역한 <춘향전>.
미하일 포킨의 발레극 '사랑의 시련'으로 부활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 시절 내내
유럽의 문화를 흡수하고 조선의 문화를 전파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홍종우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상해의 한 호텔에서 김옥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날.
홍종우는 그때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 홍종우의 사진에서 특이한 것은 그가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캐릭터였죠.
홍종우는 파리에서 양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서양식 장갑도 보이지만 그는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홍종우는 파리에서 '조선의 한복 신사'로 통했다.
그는 왜 항상 한복을 고집했을까?
그 답을 짐작해볼 수 있는 신문 기사가 있다.
'도포에 갓을 쓰고 다니는 선비, 조선의 근대화를 바라다'
- '르 몽드 일뤼스트레(1894. 6. 23)'
그리고 더 인상적인 점은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을 소중히 품고 다녔다는 것이다.
"홍종우는 서구의 근대성을 조선에 접목시키고자 했지만은
조선 근대화의 방향은 국가, 자주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그 논리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독특한 인물로 평가해볼 수 있겠습니다."
- 조재곤 겸임교수(경원대학교 역사철학부)
그의 정치적 주관은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17세기까지 코리아는 지도상에 하나의 섬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무지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서양 문명과의 접촉하려는 열의가 적었기 때문이었음을 겸허히 고백한다."
또한 약소국인 조선이 처한 정세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코리아의 상황을 발칸반도와 비교할 것이다.
조선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여왔으며
얼마 후면 러시아가 끼게 될 것이다."
당시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을 정확히 읽어낸 홍종우는
조선의 전통 뿐아니라 군주의 권위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개화파와 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면서도 서양의 문물 만큼이나
동양의 가치 또한 훌륭한 것이라 여겼다.
홍종우는 유학 시절 볼테르와 같은 유럽 사상가들에게 심취하면서도
조선 문화에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인디안이 에스키모인들처럼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각각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다."
-<마른 가지에 꽃이 피다> 서문 중
"조선의 정치 이념을 신봉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이념, 유교 정치의 이념을 계속 지니고 구현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시시한 나라가 아니고, 세계속에 떳떳한 민족이고 국가임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 같습니다."
- 김윤식 명예교수 (서울대)
홍종우는 다양한 문화 존재 가치와
조선의 역사에 대해 파리 사교계에 알린다.
카페 '드 마고'에는 당시 파리의 사교 모임이 자주 열리곤 했다.
귀족과 정치인, 소설가와 사상가들이 모이는 이곳에 홍종우도 초대를 받는다.
왕족인 앙리 필립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홍종우가 미리 작성한 연설문이다.
홍종우는 레가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당신들은 우리 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천년 이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조선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저는 유럽 문명을 조속히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도움과 충고를 바랍니다."
홍종우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를레앙 왕자는 그 자리에서 직접 헌금을 모으기도 했다.
홍종우는 파리에서 제국주의의 생리와
조선 개화의 필요성을 알아가고 있었다.
4.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죽였을까?
홍종우는 3여 년 동안 다양한 국제 정세를 깨닫고
드디어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를 출발한 홍종우는
잠시 일본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때 일본엔 십 년째 망명 생활을 하던 김옥균이 있었다.
조선의 개화를 간절히 원했던 김옥균과 홍종우.
그러나 그들의 갈 길은 너무나 달랐다.
김옥균이 암살 당한 직접적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도야마 미츠루의 손자인 다이도우 미노루씨를 만났다.
김옥균의 일본 망명생활 10년에 대한 증언
도야마 미츠루 손자, 다이도우 미노루
"매우 오래된 칼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도야마 미츠루의 유물입니다."
도야마 미츠루가 귀하게 여겼다는 이 칼은
600년전에 만들어져서 한때 일본 천황이 지녔던 칼이다.
극우파의 원조인 그는
일본 낭인들을 중심으로 겐요사를 창설했는데
김옥균의 망명생활을 지원하며 가깝게 지냈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조선에는 김옥균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있단다'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김옥균이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도야마 미츠루 손자, 다이도우 미노루(90살)
다이도우씨는 김옥균의 것으로 보인다며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기록에 따르면 김옥균은 신체가 건장하고 피부가 희다고 하였는데 비슷하게 보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냉대를 받던 김옥균은
도야마 미츠루의 지원 아래 정치적 재기를 도모한다.
"어린 나이에 듣긴 했습니다만 김옥균이란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겐요사는 훗날 명성황후 시해의 배후가 되는 단체인데
김옥균은 이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도야마 미츠루의 조직 겐요사 등이 김옥균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우익, 좌익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이들은 우익으로 발전하는데 그들이 김옥균을 지원하고 있었죠."
- 도리우미 야쓰시(동경대 명예교수)
5. 홍종우가 쏜 세 발의 탄환, 김옥균을 관통하다
1893년.
제국주의 야욕을 파악하고 돌아온 홍종우는 김옥균을 주목한다.
김옥균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합세해
유럽과 미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삼화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제 2의 갑신정변을 자신의 방법으로 기도하려 했다.
'김옥균이 일본의 폭력배 100명을 이끌고 폭약을 휴대하고 조선에 침입했다는 풍설이 있다.'
'김옥균이 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동요하고 곳곳에서 분개했다.'
- 1893년 초야신문
김옥균을 용납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계속 해서 일본으로 자객을 보내고 있었다.
홍종우는 그 일을 자신이 맡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배웠던 근대 문물이 조선에 적용되길 바라면서 귀국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 일본에 도착하게 됩니다.
홍종우는 김옥균과 세계관, 국가관, 그리고 백성을 대하는 인민관까지 틀렸기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사람들로 봤었습니다."
- 조재곤 겸임교수(경원대학교 역사철학부)
김옥균에게 접근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조선 최초의 파리 유학생.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홍종우는 직접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며 환심을 샀다.
"홍종우, 프랑스 요리로 김옥균을 유혹하다."
- 김옥균과 대아세아주의 중에서
홍종우는 오랜 기간에 걸쳐 김옥균에게 접근해갔지만
김옥균은 홍종우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홍종우는 김옥균 암살을 위해서 6연식 리볼보(권총)를 구한다.
그리고 그 암살 장소로는 청나라의 상하이를 택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 김옥균의 측근이 많았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리볼보.
보기에는 허술해도 김옥균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김옥균은 1894년 3월 27일 홍종우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다.
"김옥균과 홍종우 일행이 상해에 도착...
동화로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 <중동전기>
상해에는 김옥균과 친분이 있는 윤치호가 있었다.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홍종우가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렇지 않다. 그가 스파이일리는 없다고 했다."
- <윤치호일기>
"김옥균은 2층 첫 번째 방에 머물렀으며
홍종우는 다른 방을 사용했다."
김옥균은 홍종우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 1894년 상해신문
"김옥균은 방에서
혼자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
- <김옥균 전(傳)>
"오후 4시경 홍종우는 조선 관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 <중동전기>
"김옥균은 서쪽 창문쪽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 상해신문
나라를 다르게 걱정한 두 젊은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홍종우는 총을 꺼내 김옥균을 쏘았다.
선혈이 낭자했다.
여관에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 불꽃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그들이 떼를 지어 가보니 김옥균이 죽어있었다."
- <중동전기>
6. 홍종우가 그린 세상, '근대화와 자주성'
- 김옥균, 두 사람의 엇갈린 평가
김옥균의 죽음은
곧 동북아 정세에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다.
김옥균을 골치덩이로 여겼던 일본은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피와 눈물을 가진 의협심 있는 자는 이를 보고 참을 수 없다."
- 일본 유빈호히치신문, 1894년 3월 30일 사설.
또한 김옥균을 애도하는 추모금을 모으기도 했다.
'고(故) 김옥균씨 추모금 모집 광고'
각계 인사와 신문사들은 그들만의 장례식도 치뤘다.
'2천명의 각계 인사와 82개의 신문사 대표가 장례식에 참석'
"김옥균이 죽자마자 일본 정부는 곧바로 신문을 통해서
김옥균의 죽음을 추앙하는 그러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어 갑니다.
그러면서 나온 이야기가 김옥균을 위해 복수하자,
조선 정부와 청국 정부를 향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대중들에게 호소했고,
특히 언론매체들이 적극 앞장섰으며,
또 당시 일본 대중들도 이 부분에 대해 굉장히 동정심을 가지면서
청일전쟁을 적극 지지합니다."
- 김태웅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
한편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죽음을 기뻐했다.
수구파 관료들에게 김옥균의 죽음 만큼 반가운 일이 없었다.
홍종우는 수구파 관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홍종우는 이들의 환대를 거절한다.
당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홍종우는 수구파 관료들의 이익을 위해 김옥균을 죽인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소생의 본뜻은 여러분들 개인의 적을 토벌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국가의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 1894년 일본 외교문서
"홍종우나 이용익, 길연수와 같은 근왕주의 세력은 한 마디로 왕당파입니다.
그러니까 황제권을 보위를 하되,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은 근대화에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위정척사 세력이
기존의 유교적인 가치 질서를 고수하는 것 하고는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이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서영희 교수(한국산업기술대학교)
고종은 예정에 없던 과거까지 실시하며 홍종우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는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홍종우는 자신의 국가관을 피력하기 시작한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실에 있는
홍종우의 1차 상소문에 상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내정을 닦아
외세의 간섭을 물리쳐야 한다는 건의다.
"홍종우 같은 사람은
청이 우리를 위협했고,
일본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주를 중심으로 해서 국가 기반을 키워야 한다는,
이 주장과 판단은 백 번 칭찬해도 좋은 것입니다."
- 이태진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1897년 드디어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고종은 황제에 오른다.
대한제국 수립에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 홍종우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요직에 오른다.
의정부총무국장
농상공부광산국장
태의원 소경
비서원승
충추원 의관
평리원 판사
평리원 재판장
홍종우는 고종황제에게 열한번에 걸쳐 상소를 올린다.
'외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이권침탈 반대
방곡령 실시
외국군대 철수'
주요 골자는 조선의 이권을 외국이 빼앗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개화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에겐 분명 한계도 있었다.
홍종우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김옥균의 살해범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지도 못했다.
이런 홍종우의 운명은 대한제국과 같이 하게 된다.
그가 김옥균을 용납할 수 없었듯 일본이 강점한 시대도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도쿄 아오야마 공원에 김옥균의 묘가 있다.
시신이 없어 머리카락만 매장했다.
김옥균은 사후 일본에 의해 영웅적인 인물로 추대됐다.
'고균기념사업회'도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생은 소설과 희곡 등으로 꾸준히 출간되었다.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포장이었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의 구실에 김옥균의 죽음을 이용했다.
"대동아 건설의 근본이념을
이미 50년전에 절규하였다."
- 1941 조광
"고균 김옥균선생의 삼화주의는 이번 성전의 대사명과 일치한다."
김옥균이 위인으로 떠오를수록
홍종우는 역사에 파렴치한이 되어갔다.
"홍종우에 대한 평가는
사실 이제까지 일제강점기의 소설이라든가 논설, 역사적 사료에 입각해서
거의 부정적인 시각이 강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김옥균과 홍종우의 관계가 빛과 그늘의 관계처럼 배척적인 관계에 있다보니까
김옥균이 추앙된다는 것은
홍조우는 한마디로 근대 문명의 선각자를 죽인 잔인한 암살자, 살해자로 여겨지는 것이죠."
- 김태웅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
1903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자
홍종우는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실패한 개혁가 홍종우에게 제주도민 역시 등을 돌렸다.
"영은정이라는 건물을 지으면서
거기가 금산이라는 곳인데, 울창하고 멋진 소나무들을 베어버렸어요.
여자들이 빨래하고 목욕하는 곳을 금지시켰어요.
길에서, 동산에서 보인다는 거였죠.
그래서 부녀자들의 원성이 대단했죠."
- 김찬흡 원장(북제주문화원)
그리고 2년뒤 일본이 점차 약진하면서
홍종우는 제주목사직에서 쫓겨난다.
1913년 사망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외의 종적은 없다.
19세기말 조선을 위한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홍종우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개척했지만
결국 수구파라는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사실은 개화주의자에 속하는 인물인데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구파로 몰려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홍종우도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근대화를 알기 위해 스스로 유럽으로 건너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구파입니까"
- 이태진 교수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었던 홍종우.
그가 살았던 시대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가혹했다.
조선말 치열한 격동의 시대에 치열한 삶을 살았던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문을 열고자 했지만 불행히도 그 문을 향하는 길은 서로 달랐다.
조선말 개화사상은 일부 전유물이 아니었다.
개화 대 수구라는 단순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바라본 인물들도 있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을 그들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