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전투
1216년(고려 고종 3) 9월 개평역(開平驛:평북 寧邊)에서 벌어진 거란군과의 싸움. 걸노(乞奴)가 이끈 거란유민은 감국(監國)을 칭하여 거란부흥운동을 벌이는 한편 고려가 그들이 요구한 군량미 제공과 그들 황제의 조칙을 거부하였다 하여 9만 대군을 이끌고 1216년 8월 압록강을 건너 대부영(大夫營)으로 진격했다.
이어 거란군은 영주(寧州)·삭주(朔州)·의주·운주(雲州) 등지를 공격하여 재물·곡식·가축 등을 빼앗으며 계속 남하, 북계(北界)지역은 거란군과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처자들로 가득하였다. 이에 고려조정은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 오응부(吳應富)-오현보공이며 해주오씨의 시조, 이 전투에서 동복오씨의 시조인 오현좌장군, 보성오씨의 시조인 오현필장군 등이 형인 오응부 장군을 도왔다고 한다-를 우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를 후군병마사로 하는 중군·우군·후군의 3군을 편성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 3군은 연주(延州)에 주둔하며, 개평역과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하고 있던 거란군과 세 차례에 걸친 접전을 전개한 끝에 거란군을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사로잡히거나 죽은 거란군은 2,400명에 이르렀고 도망하다 남강(南江)에 빠져 죽은 자만도 1,000명을 헤아렸다. 이 싸움은 고려와 거란유민군이 싸운 최초의 대규모전으로, 이로부터 양군은 김취려가 1218년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의 잔당을 무찌를 때까지 3년간 몇 차례의 대접전을 치렀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오현보,오현좌,오현필 공은 각각 해주군,동복군,보성군에 봉해졌다. 오현보공은 후에 참지정사(장관급)를 지냈다.
지금도 충남 공주의 유림들은 이 세분을 위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매년 음력 3월 15일 공주 유림과 함깨 제항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