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의 [우포늪 왁새]는 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흑조(黑鳥)]의 연장이자 확장이다. [흑조]에서 보여준 녹색과 원시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이번 시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두 시집의 표제인 ‘흑조’와 ‘왁새’의 상징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흑조와 왁새는 모두 시인의 자의식이 투사된 객관 상관물이다. 둘 다 광폭한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된 시인의 영혼의 심연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낭떠러지를 떠받친 암흑 속에서 날아오르는”(<흑조>) 흑조나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일제히 깃을 치며 커다란 고개를 넘어가는”(<우포늪 왁새>) 왁새 모두는 존재론적인 한계 상황을 온몸으로 가로지르는 시인의 고뇌에 찬 의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흑조와 왁새는 한몸이다. 하지만 이 둘은 또한 다르다. 이 차이는 흑조와 왁새가 투영된 공간의 차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흑조의 공간은 ‘결빙된 겨울산’이지만 왁새의 공간은 ‘우포늪’이다. 이 사실은 흑조에 비해 왁새가 좀더 생 혹은 생명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흑조의 겨울산이란 생명을 감싸 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밀어내는 공간이다. 흑조의 시적 자아가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길을 따라 떠돌 수밖에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겨울산을 삶의 배경으로 거느리고 있는 흑조는 언제나 공포에 가까운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이에 비해 우포늪을 삶의 배경으로 거느리고 있는 왁새는 떠남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견고한 정주(定住)의 삶을 영위하며, 긴장과 이완의 변증법적인 세계 속에서 좀더 탄력적으로 세계를 조망하기에 이른다.
흑조와 왁새를 통해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가 두 시집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포늪은 하나의 문제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이 시인의 상상력을 결정하는 중요 인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포늪은 두 번째 시집의 발생론적인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두 번째 시집의 의미가 우포늪과 시인 사이의 감성적인 혹은 지적인 소통의 육화에서 찾아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공간과 시인 사이의 소통의 육화라는 차원에서 그동안 우리시는 적지 않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다지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온몸(시인)으로 공간(세계)과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온몸으로 공간과 만나지 않은 시인의 언어는 세계의 견고함을 담을 수 없다. 몸과 언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넘나든다(침투적이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시인들의 시는 자기기만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나온 생태시의 경우 이 공간과 시인 사이의 소통의 육화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이비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생태시들이 훼손된 공간에 대해 혹은 훼손되지 않은 공간에 대해 비명과 환희를 질러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본능적인 두려움’ 아니면 계몽주의자의 ’지적 우월감’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지 타자로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깊은 교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문명에 대한 단순한 폭로나 전원에 대한 그리움 내지 전원적인 삶에 대한 예찬, 선(禪)의 세계로의 경도된 의식 등을 드러내고 있는 대부분의 생태시들이 이러한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우포늪 왁새]는 진일보한 자리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우포늪과 시인이 한몸이 된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은 시인이 우포늪에 정주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포늪에 정주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그것과 한몸이 될 수 없다. 한몸이 되기 위해서는 우포늪 전체와 교감할 수 있는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깊은 통찰의 눈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 자신을 “득음을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소리꾼”(<우포늪 왁새>), 다시 말하면 ‘우포늪 왁새’에다 비유한 대목은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그가 형상화하고 있는 소리꾼은 “한 대목 절창을 찾아” 혈혈단신으로 떠돌아 다니는 존재이다. 이 소리꾼에게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소리’ 한 자락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리는 아무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천지를 “자지러지도록” 뒤흔들고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자락 소리를 얻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세계와 만나는 치열함과 그것을 소리로 만들 수 있는 소리꾼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리꾼의 감각이 우포늪을 시가 되게 한 것이다. 소리꾼의 감각은 우포늪의 표층은 물론 심층까지 닿아 있다. 소리꾼의 이 감각은 시간과 공간의 심원함 속에 내장된 아름다움을 들추어내게 한다. “본래 출입구가 없”(<늪에는 출입구가 없다>)는 우포늪은 시간과 공간이 화석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먼 미래를 향해 무수한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포늪은 하나의 ‘사서(史書)’(<빗방울 화석>)인 동시에 ‘자연 도서관’(<자연 도서관>)인 것이다. 시인은 우포늪에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이것을 발견한다.
나는 지금 1억 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
빗방울은 대지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물 속에 북두칠성을 박아놓고 우주의 거리를 잰다
신호처럼 일제히 귀뚜리의 푸른 송신이 그치고
들국 몇 송이 나즉한 바람에 휘어질 때
세상의 젖이 되었던 비는,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
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했으리라
구름 이전, 미세한 수증기로 태어나기 전의 블랙홀처럼
시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새긴 화석이 되었으리라
나는 지금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1억 년 전의 생명선線 빗방울을 만난다
사서史書에 새겨진 원시적 우주의 별자리를 읽는다
― <빗방울 화석> 전문
시인은 지금 우포늪이라는 “1억 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1억 년 전의 생명선線 빗방울을 만난다.” 이 빗방울 속에 “북두칠성(우주)”이 박혀 있음을 본다. 시인은 그것을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한” 것의 산물로 읽어내고 있다. 물방울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발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성선의 [물방울 우주]라는 시집 한 권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시인의 이러한 발상은 동양적인 아포리즘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새로움을 갖는다. 우포늪, 다시 말하면 “본래 출구가 없는” 우포늪에 떨어진 물방울은 영원한 흐름 속에 있다. 우포늪의 물은 모든 것을 탈영토화한다. 우포늪은 물의 이러한 흐름이 있기에 존재 가능한 것이다. 우포늪의 모든 생명체는 물이 키워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사실은 그의 시의 상상력의 기저에 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빗방울을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생명선線”으로 표현한 것을 상기해보라.
우포늪과 그의 시의 상상력이 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시적 모티프는 말할 것도 없고, 소재나 주제 그리고 리듬이나 이미지 같은 차원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형식과 내용을 아우르는 이 모든 것들은 시인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예를 <소리의 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겨울 정오, 혼자 늪 기슭에 섰더니
물 속에서 아기 옹알이가 들렸다
벌레 울음 같기도 한 기묘한 음정이 자꾸만
내 귀을 당겼다. 살얼음을
담요처럼 덮은 물면에 떠다니는
소목마을 부근의 햇빛이 내 발목을 끌고
첨벙첨벙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늪은 광활하고 수심은 무릎쯤,
습지식물 뿌리들의 젖은 잠이 밟혀왔다
그때
내 발바닥을 밀고 올라오는 부드러운 힘!
누군가 물 속에서 숨을 내쉴 때
올라오는 기포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물의 신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물은 사금파리 같은 냉기를 내 뼈 속까지 박아
넣었다. 온몸에 닿은 그 냉기의 알갱이들!
눈부셨다
…(중략)…
아, 엄동설한에만 생생히 피는
소리의 꽃!
― <소리의 꽃> 부분
물 속에서 습지식물의 “아기 옹알이”를 느낄 수 있는 감각(“습지식물 뿌리들의 젖은 잠이 밟혀옴”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란 보통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시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부드러운 힘”을 부드러운 힘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부드럽다’는 의미 속에는 물의 속성이 내재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감각이란 물의 그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의 부드러움은 엄동설한의 얼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진다. 시인은 이 힘을 ‘푸른 힘’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푸른 힘이 “세상을 설레게 하”고, “세상을 웅숭깊게 한”(<푸른 힘이 세상을 설레게 한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세상을 설레게 혹은 웅숭깊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의 길을 만들기도 한다. 물의 부드러운 힘의 속성은 세계를 동일성의 원리로 묶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경계와 경계 사이의 끊임없는 넘나듦을 통해 그것을 해체하기도 한다. 동일성과 비동일성 사이의 긴장은 시에 탄력을 더해준다. 시인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우포늪의 심층 속으로 스며들면서 보다 거대한 ‘물의 신전’을 만들어 낸다. 물의 신전에서는 모두가 “빛의 축복을 받은 동행자”(<물의 신전神殿>)가 된다. 모두가 빛의 축복을 받을 때 시인의 언어는 더욱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포늪이 반짝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우포늪이 반/짝이는 것은 크고 작은 우주들의 눈부신 운행이 그려내는 파문 때문이”(<반짝이는 늪에 관한 명상>)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크고 작은 우주들”이란 늪을 이루는 물방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물방울 각각이 “영원히 멸하지 않을 생명”으로 존재할 때 우포늪은 하나의 의미 있는 텍스트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의 언어 하나 하나가 “영원히 멸하지 않을 생명”으로 존재할 때 그의 시는 하나의 의미 있는 텍스트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노래한 <나무 성자聖者>처럼 ‘우포늪의 성자’가 되어야 한다.
가을이 청명한 것은
불타는 잎들이 천공天空 문질러
하루 맨 처음 햇빛을 팽팽히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깡마른 팔 다리로
하늘 퉁기는
저 성자들
세간 근심 무거운 자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로
바람 끝에 제 살덩이인 잎들을 풀어놓는다
얼마 있지 않아 차갑게 식을 땅에
입맞춤으로 축복을 내리는
붉은 잎들의 환한 시간
나는 이보다 더 장엄한 단청불사를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햇빛에 찔려 몸 구멍난
마음은 피리라도 된 것일까,
…(중략)…
나무 성자들은
영혼과 눈과 온 생명으로 등불을 내건다
― <나무 성자聖者> 부분
우포늪 성자의 길은 나무 성자가 그렇듯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깡마른 팔 다리”와 “제 살덩이를 풀어놓는”, “장엄한 단청불사”를 감내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시인도 이 시의 말미에서 “나도 이제/내 몸의 기름으로 등잔 하나 밝혀야 하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겸손의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 “장엄한 단청불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언어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짜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몸의 언어의 묘미를 그의 시에서 체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우포늪’과 ‘시’ 모두를 생명의 빛으로 건져올린 것이 사실이다. 우리 생태시가 나아갈 길을 이번 시집에서 그가 보여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나온 사이비 생태시인들에게 동통(疼痛)의 아픔을 안겨주었으리라고 본다. 생태시란 ‘뇌’가 아니라 ‘몸’으로 밀고 나갈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시적 상상력이 우포늪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포늪이 비록 생명 혹은 생태의 ‘사서史書’요 ‘도서관’이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볼 때 하나의 순수한 성지일 뿐이다. 그곳을 굳건히 지키는 성자의 모습은 비극적 아름다움을 환기하지만 문명이라는 괴물은 그 아름다움마저 삼켜버릴 수 있다. 우포늪이 순수한 성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제 우포늪과 문명 사이의 길을 터야 한다. 그가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에 대해 “황무지를 가진”(<그들이 황무지를 가진 것은>) 자라고 냉소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황무지를 우포늪으로 바꾸는 주체는 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시의 또 다른 변모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