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팜무파탈 유감동
세종시대에는 숱한 성 스캔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은 도덕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기치로 나라를 세웠지만 건국한 지 3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국으로, 자유분방했던 고려말의 기풍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유감동(兪甘同) 사건이 커다란 충격을 준 까닭은 그녀가 양반 가문의 딸로 고위 관리의 부인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십 명에 달하는 조정 신하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세종의 질문에 답한 사헌부(오늘날의 검찰)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유감동은 평강(平康)현감 최중기(崔仲基)의 아내로 그녀의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 벼슬의 유구수(兪龜壽)였다. 검한성이란 한성부를 검속한다는 뜻이니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시장을 감찰하는 고위직 벼슬이다. 사헌부는 8월 17일 유감동의 남편과 아버지는 모두 사족(士族·양반가문)이라며 그녀와 관계한 남자로 우선 5명의 실명을 들면서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답했다.
사헌부 조사가 진행되면서 간통한 남자의 명단은 속속 나왔다. 3일 후인 8월 20일에는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리, 개국공신의 아들 등 정권 핵심 인사 9명의 이름이 줄줄이 등장했다. 이 중에는 유감동이 자신의 숙부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사랑을 나눈 이도 있었고, 유감동의 남편 최중기의 매형도 명단에 있었다. 열흘 후인 8월 30일 사헌부는 전·현직 관리 15명이 유감동의 간부(奸夫)로 더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9월 2일에는 9명의 간부가 더 있다고 보고했다. 유감동과 관계한 이로 실록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은 조정의 전·현직 관리 40여명에 이른다.
사헌부 조사 기록에 따르면, 유감동은 본래 음란한 여인은 아니었다. 사헌부는 9월 29일 유감동 여인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金如達)에게 강포(强暴)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김여달은 순찰한다는 핑계로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 여인을 만나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유감동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았는데 김여달이 강제로 포학한 짓을 행했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동은 이후 김여달과 자주 만났다. 김여달이 최중기의 집에 찾아가기도 했고, 유감동이 남편과 잠을 자다 화장실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김여달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유감동은 남편이 무안군수가 되어 부임할 때 함께 갔으나 병을 핑계로 혼자 서울에 올라와 음란한 행실을 마구 했다고 한다. 결국 최중기는 유감동과 이혼했고, 이후 유감동은 스스로를 창기(娼妓)라고 일컬으며 서울과 외방에서 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유감동에 대한 처벌은 53년 후 어을우동이 교수형을 당한 것과는 달리 변방 고을로 보내 노비로 삼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사헌부는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세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은 이 여자를 더 추국(推鞫·중죄인을 심문함)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부가 십수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여 있으므로 일의 대체(大體)는 벌써 다 이뤄졌으니 이를 가지고 죄를 결단해도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세종은 다시 더 추국한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라고 했다. 사실상 수사 중단을 지시한 것이다. 연루된 관리들은 곤장과 유배, 관직 파면 등의 처벌을 받고 사건을 종결됐다.
세종은 왜 수사 중단을 지시했을까. 조정 고위 관리까지 연루된 성 스캔들이 계속 확산되어 정부 기능마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것은 아닐까. 남녀의 문제는 법으로만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던 듯하다. 세종은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갓 법령으로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어을우동이 너그럽고 영명했던 임금 세종이 다스리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 역시 교수형을 당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