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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거룩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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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얼굴방(기본자료실) 스크랩 범계성당 사순특강 -수난과 부활- ◆제 2 편◆ 강사: 윤인복
몬테크리스토백작 추천 0 조회 72 12.04.22 20: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12년 3월 4일, 11일.(일요일: 13:30분)-범계성당 대성전-

 

◆제 2 편◆ 

 

 

 

성화(聖畵)를 통해서 보는 신앙 이야기

-강의록: 수난과 부활-

                                                                                                                 강사: 윤 인 복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무한한 것. 헤아릴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기도" 726-730년)

 

 

 

◇사진을 크릭  하시면 크게 원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고갱이퐁타방 지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트레말로의 한 성당에 채색된 나무 십자가 장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십자가 뒤에는 도시가 언덕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배경으로 보이고 있다.

아마도 퐁타방 마을과 생트 마르그리트 언덕일 것이다. 고갱은 세 명의 브르타뉴 지방이 여인들, 십자가, 붉은 색의 나무들 등 모두 하나의 상징적인 요소를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야성작이고 자만이 가득한 고갱이 이 작품에 임하며서는 최소한 경견한 마음으로 건고한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살짝 비대청이나 규칙적이고 단순한 도식으로 구성된 그림은 색채의 분위기를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에서 노란 오랜지색은 그리스도의 "오늘과 내일" 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바로 고갱 자신이 확언하는 것처럼 화가로써 겪는 자신의 고통을 의미한다. 한 비평가는 고갱의 노란 그리스도에 대해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예수의 주변에 나치의 만행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이 독립된 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수 주변부는 서사시적인 구성으로 다양한 시간대에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왼편상단 :  아치가 유대 고회를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 파괴로 신성을 더럽히고 있다, 그 아래에는 대혼란 속에서유대인의 율법(모세오경)인 두루마리 형태의 토라(Torah) 내팽겨쳐져 있다.

 

오른편 하단: 한 유대인이 토라를 보호하듯 안고 도망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마치 노아의 홍수를 피해 달아나듯 배를 타고 떠나고 있다.

 

오름편 상단: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 중인 사람들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나치가 저지르는 대학살과 방화로 집들이 불타로 있다.

 

유대인 랍비들과 장로들이 영혼이 예수의 머리 위에서 바라보면서 처참한 상황에 놀라워하고 있다. 예수는 분노와 오열을 부드러움과 침묵으로 삼키고 있다. 격렬하게 분노하지도 않고  공포로 울부짖지도 않는다. →샤갈은 예수를 유대인으로 묘사.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샤갈은 예수를 인간을 구원하는 저대적인 구세주가 아나라 수난과 박해를 받았던 유인의 선조로서 받아들였다.

→ 예수를 유대인만이 겪는 민족적인 고통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였다.

 

→ 예수의 죽임이 결국 부활이라는 영광을 가져왔듯이 현대사의 유대인의 고통이 아무리 참혹하다 할지라도 분명 희망이 도래할 것이라는 샤갈의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골고다"는 뭉크가 20세기에 그린 첫 작품.

 

화면 천정의 얼굴들은 뭉크 주변 사람들: 뭉크에게 사상적, 개념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 당시 예술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던 스승 크리스티안크로그, 화면의 중앙, 책형당해 있는  예수 바로 아래에 있는 남자는 뭉크가  한때 그의 부인고 불륜에 빠졌던 문인 프지비세프스키, 오른편의 창백한 옆 얼굴의 남자는 젊은 날으 뭉크, 뭉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뭉크를 키워주고 예술가의 길을 가도록 적극적으로 후?해준 이모 카랜.

군중의정점에 서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개개인이 겪는 고통의 상징으로서 화면의 중심에 있다.

 

"골고타"에서 예수가 화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이 회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되지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홀로 있다.

뭉크는 개개인의 반응고 심리 작용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 차이점이다. 뭉크는 개개인의 인물 묘사를 정학히 하여 개인이 겪는 심리적 반응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 당시에 세 부류의 사람들, 즉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무관심한  사람들,예수의 비극과 고통에카타르시스적인 쾌락을 느낀 군중, 제자글과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 등 애도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예수 주변에 있었다.

"미술에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모티프이고 영감일 뿐이다"라고 하며 인류갈 살아가는 모습 자체에 관심을 거졌다.

 

피카소는 십자가 책형을 기도교에 국한되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능의 잔흑성과 폭력성이 빚어낸 인류의 역사로 다루고 있다.

 

 

 

 

 

 

 

 

 

 

예수: 육체적 고통으로 경련적인 발작, 잔혹성과 분노를 통해 구원의 의미를 찾으면서 분노와 학살, 폭동의 긴장을 몸의 움지임을 이용하여 가친 붓자국으로 형태화하였다.

거친 붓자구기: 예수의 극단적인 불안과 공포, 두려움, 육체적 고통으로 뒤틀리는 몸의 경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십자가 예수를 통한 인강의 극한 절망의 상황을 표현하고자한다. 몸부림치고 통곡할 수조차도 없는 경련적인 발작 상태의 절망을 시각화 한 것이다.  

 

 

 

 

 

 

 

 

 

 

 

 

 

 

 

 

 

 

악마같은 그로테스크한 형상, 신적 경외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 강조된 턱뼈,약마같은 큰 눈의 강렬한 시선은 예수가 아니라 탐욕스런 현대인의 모습니다.

성서의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욕망에 못 박혀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쾌락과 욕망을 의미한다.  

 

 

 

 

 

 

"내가 진술로 너에게 말한다.

누군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 3-5)

 

이 그림은 1440년경 프라 안젤리코가 피레체에 산트리니타라는 성당의 스트로치 경당에 제대

(祭臺)를 위해 그린 것이다. 원래 이 제단화는 로렌초 모나코가 전통적이 고딕 양식으로 세 개의 팀

파눔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1425년경 로렌초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안제리고가 제단화를 완성하기

에 이른다. 프라 안제리코는 사다리로 수작의 축을 강조구성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사람들의 그

룹은 죽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말 아래에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왼쪽 앞줄에 무룹을 꿇고 있는 소년으

로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고 그 뒤쪽으로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다섯 사람이 축 늘어진 예수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 사도 요한은 스승의 주검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그리고 건축가 미켈로초의 초상이

라 알려진 머리에 고급스런 검정색 모자를 쓴 인물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는 예수를 십자

가에서 조심스럽게 내리도록 요청하는 듯하다.

 

아홉명의 여인들: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힌 자세를 취하면서 예수의 즉음을 애도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죄의 용서를 청하듯 예수의 발에 부드럽게 입맏춤을 하고 있으며, 구 뒤로 짙은 푸른색 튜

닉을 입은 성모마리아는 전통작으로 고통을 의미하는 동작으로 두손을 모으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여섯 명의 남자들: 당시에 인물들로 추측된다. 그 중 붉은 색 모자를 쓴  사람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강에서 뽑은 세 개의 대못과 그리스도가 썼던 가시관을 손에 들고 있다. 안젤리코는

성서에 기록된 인물 이외에도 작품을 주문한 후원자라든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 등 많은 사람들을

그림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등장인물들을 통해 감상자 역시 예수의 죽음을 함께 동참

하며 기도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서는 예수의 고통스런 죽음을 주제로 강조 했다가 보다는 외적인 장식에

치우쳤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수도자인 안젤리코는 밝고 정갈한 색을 사용하여 등장인물들의 절

제된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보다 예수의 죽음을 고고하게 승화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1602  카라바조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의 제단화를 시작하여 1604년에 완성한다.

빛과 어둠의 대조는 깊이를 더하고 드라미틱한 장면을 연출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키는 주제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그룹은 감상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으며 인물의 구성은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단계적인 리듬을 나타내며 강한 결집력을 보인다.

 

세 명의 말리아: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가 양 팔을 하늘로 치켜든 것은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바참한 고통을 나타내는 몸짓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은 오란테(Orante, 어깨 위로 손을 들고 서 있는 기도하는 여자의 모습을 묘사 한 것)의 동작으로 간절한 소망을 청하는 듯하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고기를 숙인 채 하염없이 울고 있다. 그리고 수도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수 팔을 양 옆으로 펼쳐 예수의

고통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온 세상을 포옹하려는 몸짓이다.

 

예수의 시신을 바라보는 애제자 요한과 감상자 쪽을  향한 아라마태아 출신의 요셉이 예수의 시신

을 돌무덤으로 옮기고 있다. 예수의 축 늘어진  오른팔의 손가락은 예수 자체를 교회의 "초석"임을 암시하

는 석판에 닿아있고, 그 아래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초록 식물이 그려져 있다. 한편 석판 반대 모서

리에는 또 다른 시든 식물이 놓여있다.

 

사실적인 세부묘사: 성모 마리아는 슬픔에 잠긴 인간적인 모습으로 늙은 여인의 얼굴로 주름살이 표현되

어 있고, 농부의 얼굴로 묘사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움푹 들어 어두운 눈가에 주름살과 거친 다리,

그리고 무거운 시신을 애써 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뚝 솟아나온힘즐을 묘사하고 있다.

 

카라바존는  단순히 인물들을 운동감과 리듬감을 나타내기 위해 하강 곡선으오 표현한 것은 아니다.

미사에서 성찬의 전례의 전례 중 사제는 "너희는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내 몸이니라"라고 말하면서  성체를 들어 올린 후 몸을 앞으로 굽힌다.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예

수의 시신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흰 색 제대포가 덮인 제단과 같은 석판위에 예수의 몸을 성체로 보

고 몸을 굽히고 있는 것이다. 맨뒤에 마리아는 하늘을 향한 눈과 양 손은 그 다음에 이어질 성체거양

을 의미한다.

 

 

 

 

파도바라는 도시의 스크로베니 경당에 36장면 중 왼쪽 벽 하단부분에 있는 프레

스코화의 하나이다. 이 경당의 모든 벽면은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유년기>, <미덕>과 ,<악덕>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내용으로한다. 즉 '구원의 이

르는 길'로 주제를 통합할 수 있다.

조토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선과 악의 영원하고 극적이며 초인적인 투쟁을 묘사하였

다면 조토는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슬픔, 고뇌, 절암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을 표현한

다. 또한 조토는 인물들을 자신만의 공간과 볼륨감으로 나타내면서 르네상스 미술양

식의 혁신적 요소를 제시하게 된다.

 

억제된 감정이 엿보이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절망스럽게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의 전경에 등을 돌린 채 예수의 몸을 붙잡고 있는 여인들은 단

순한 기하학적 형태로만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 옆에 슬퍼하

며 눈물을 흘리는 사도요한의 얼굴과 힘차게 뻗은 팔은 실로 드라미틱한 장면이다.

사도 요한의 오른쪽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던

아리미태아 출신 요셉과 니토데모가 예수의 몸을 슬픈 침묵 속에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바로 앞에는 긴 금발과 붉은 색 옷을 입고 바닥에 앉을 마리

아 막달레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남아 있는 예수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발을 자신의 눈물로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바리새인의 집에서의 저녁식사 일화를 상기시킨다.

오른쪽 위에 다 떨어져버린 한 그루의 나무는 마치 예수의 즉음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서있고, 예수의 희생으로 모든 만물들이 애도하고 있음을 말한다.

동물과 나무 그리고 바위와 구름 등과 같은 자연은 슬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천사들도 하늘에서 비통해하면서 인간적인 처절한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 피 에 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6-27)

 

피에타(Pieta)란 말은 라틴어 'imago Beatae Virginis de pietale.' 즉 '슬픔에 젖은 성모상'에서 기원된 것이다. 라틴어 '피에타스

Pietas'는 '경견함'이지만 '연민', '불쌍함'이란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미술에서 피에타상은 단순히 경견함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모자

가 겪은 고통의 경험을 마음 깊이 함께 느끼는데 목적이 있다. 피에타는 비록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미술가들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피에타상의 기원은 중세 독일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1400년경부터 독일 피에타가 이탈리아로 전파되면서 점차 확산 되었으며 그 표현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피골이 상접해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예수와 머리 크기를 왜곡기킨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격렬한 고통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고,

형태를 왜곡시킴으로서 주제의 내용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의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에 대해

중세 사람들은

'붉은 신비의 상징'이러고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몸은 포도나무를 뜻한다.

곧 포도나무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자들과 함께 나눈 음료를 상기시키는

포도주를 상징한다.

 

 

 

 

 

 

 

 

 

 

 

 

 

 

 

 

미캘란 젤로가 그의 나이 23살 때 2년에 걸쳐 제작한

<이에타>는 매우 사실적으로 인체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써의 명성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든다.

고요와 적막만이 어머니 마리아의 얼굴에 흐른다.

한 손으로 힘과 역동성이 상실된 예수의 축 늘어진 등을 받치고,

인손으 아들의 다리 옆에 놓여있다.

예수의 머리와 허리, 무릎 부분이 급격한 각도를 이루고

상체가 뒤틀려 있는 구도이긴 하지만 성모의 다리 안에 들어간

죽은 자의 자세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조화로운 구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절제된 감정의 표현을 통해 인간적인 세계를 초월한

정신세계와 신앙심을 보여주고 있다.

 

 

 

 

피에타 :

리아는 무릎 위에 예수를 올려놓고 있지 않고, 얼굴도 슬픔으로 가득찬 표정이 아니다.

반 고흐는 우울함과 절망, 슬픔을 마리아보다 예수에게서 더 깊게 표현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반 고흐는 인류의 배신에 대한 아픔과 그들에 대한 용서.사랑.구원의 의미를 마리아보다는 예수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은 예수의 야왼 얼굴과 빨간 머리는 반 고흐와 닮았다.  

 

예수: 고흐의 자화상, 자신의 병이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어쩌면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오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노란 서광: 반 고흐가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안고 오는 듯하다.

 

 

 

 

 

 

 

◆ 부활

 

예수가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한 사제들과 바리사이 사람들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간 후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

에서 되살아나셨다.'할 염려에 빌라도에게 셋째 날까지 무덤 앞에 경비병을 세워둘 것을 요청하였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불편한 심기를 "당

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라며 그들에게 드러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새워 무

덤을 지키게 하였다.

예수를 묻은 후 사흘 째 되는 날,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뭄덤의 돌을 굴리고 그위에 앉았다. 결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겁에 질려 까무러쳤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 때에 그녀들에게 모습

번개 같고 눈처럼 흰 천사가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

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 4-5)

 

이 세 여인들이나 제자들도 예수가 무덤을 떠나는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은 아마도 신약성서 중 가장 장엄하고 드라

마틱한 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이 비록 예수의 부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대목일지라도 비어진 부분을 그림으로 채우기에 정

당하다.

 

 

벨리니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야기식의 표현을 강조하던 경향에서 미묘한 빛의 처리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러운 풍경과 배경을 강조하는 새로운 자연주의로 전개해나갔다.

벨리니의 <그리스도 부활>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풍경에 이른 아침의신선한 공기가 감도는 대기에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가 승리의 깃발을 들고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다.

예수에 부활에 놀라 기절한 병사들과 그 광경에 어안이 벙벙한 채 하늘만 쳐다보는 병사들도 보인다.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찾아오는 모습이 아련히 보인다.

두 마리의 토끼가 보이는데, 흰색 토끼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성모의 옆에서 순결을 상징하고 예수의 수난기에서는 승리를  의미한다. 나뭇가지 위에 사다새(펠리컨)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사다새 어미는 배고프다고 칭얼대며 서로 싸우는 새끼들을 지텨보다 자신의

가슴을 쪼아 벌린 뒤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피로 새끼들을 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

도도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피로써 인간의 죄를 구원한다는 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15세기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그뤼네발트는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에서 강렬한 색채와 격정적인

선을 통해 환상적인 표현을 찬조해낸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인사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의

손을 보이면서 마치 불꽃이 이는 강한 소용돌이처럼

무덤에서 솟아나오고 있다.

화가는 극적인 색채를 독창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정인 둥그런 강렬한 무지게 색으로 감싸어 있고,

그리스도은 빛에 의해 변모되고 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자고 있는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온 예수의 모습에 놀라

혼비백산이 된 것이다.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흰 주님의 천사'가 육중한 관 뚜껑을 열어젖히는 가운데 화면 한 모퉁이에서 그리스도가 서서히 영광스런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던 무장한 경비병들을 '무서워 떨고' 있으며 이에 놀란 나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관위에 굴러 떨어지는 사람, 너무 당황하여 칼을 떨어뜨리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등 뜻밖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고 있다.

이른 아침에 온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이라가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천사로 향해 있다. 물론 복음서에는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주의 천사가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고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연스런 움직임이란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의 움직임을 말한다. 렘브란트는 부활의 사건을 신성한 관점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고요함과 부활에 놀란 떠들썩한 분위기의 대비로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29녀경 ~1492년)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네 복음사가 중 어느 누구도 부활에 대한 이

야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은 신약성서 중

가장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이 비록 예수의

부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 대목일지라도 화가들은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통해 성서에서 비어진 부분을 그림으로 채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어떠한 하늘의 징조도 나타내지 않은 채

수의 부활 사건을 단순하고 명쾌한 구도에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나타

내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붉은 색 천을 두룬 예수

는 승리,즉 부활의 상징인 붉은 십자 표시가 있는 깃발을 들고, 자신의 시신이

안치도었덜 석관에 한쪽 발을 올리고 균형 잡힌 고정된 자세로 정면을 바라

보고 있다.

창에 찔렸던 예수의 엎구리와 못에 박혔던 손과 발의 상처에는 아직 혈흔이 

남아 있긴 하지만 고전적인 꼿꼿한 자세에서는 카리스마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예수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이와는 다리 화면 앞에 네 명의 벅사들은 놀라운 예수의 부활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잠에 빠져 있다. 오직 한 병사만이 깨어서

부활한 예수에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다.

화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서로 다른 자세- 자신의 손망으로 능력을 믿는 사람, 창과 방패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를 취한 병사들

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예수의 깃대에 기대어 자고 있는 병사의 얼굴은 다름 아닌 화가의 자화상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

카는 잠을 자면서라도 그리스도에게 기대어 의자하려는 것이다 화가는 자화상으로 예수가 '늘 깨어 있어라' 하신 가르침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반성이나 하듯 잠든 상태에서라도 그리스도에게 신앙적으로 의지하려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 6, 4) 

 

 

 

 

 

◆ 강사 소개

 

윤인복 (소화데레사)

이탈리아 로마국립대학교 인문학부에서 미술사학과(학사)를 졸업한후, 동 대학원에서 미술 사학(석사)을 전공

하고 문학(미술사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다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참 고

 

작성자는 범계성당 신자로서 특강을 받은 후

사전에 강사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진과 교재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올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강사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즉시 삭제 하겠습니다.(작성자: 황일영-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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