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장군 본관 함평이씨
12세 이량 전라 좌수사때 수중제방 구축, 왜구 격퇴 이삼장군 병조 · 공조판서등 역임, 우국충절 후대 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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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의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 함평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과 모평 두개 현이 합쳐진 지명이다. 선사시대에는 진국,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백제 때 굴내현 또는 다지현에 속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내현은 함풍현으로, 다지현은 다기현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이속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됐다. 1409년(태종 9) 모평현과 합하여 함평현으로 개편했다. 기성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함평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함평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10개 면으로 줄었으며, 1932년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으로 신설, 9개 면이 되었다. 1963년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함평 이씨의 시조는 이언으로 고려조 태조 때에 신무위대장군을 지낸 인물로써 그의 증손자 이순지는 부원군에 추봉됐다. 전라도 함평에 누대에 걸쳐 세거, 함평 평능의 사정촌에 사당이 있었다. 함평 이씨의 가계는 무인의 집안이다. 시조 이언의 2세 이화는 신호대장군을 , 3세 이상문도 신호위대장군을 지냈다. 시조 이언 이후 이극명(10세)의 선략장군호분위호군에 이르기까지 이삼 장군의 선조들은 문·무과에서 여러 인물이 계속 출현 했다. 조선전기 이삼 장군의 가계를 살펴보면 5세 위로는 무인이었고 5세 이후부터 부친대 까지는 문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세 이종생은 세조 때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460년 7월 별시에서 무과 을과 에 급제 창신교위 에 임명되었고 10월 북정도원수 신숙주의 군관으로 활약, 선략장군 에 임명됐다. 1461년 5월에 장원급제하여 선절장군, 의흥대호군 을 지냈으며, 1467년 이시애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 되어 함평군에 봉해졌다. 1468년에 오랑캐를 정벌하고 영변대도호부사 , 한성좌윤 , 평안동서중 삼절도도사, 도총관 , 내금위장 , 충청도병사 등을 역임했다. 12세 이량은 148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삭주부사 , 회령부사 의주목사 , 북병사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동지중추부사가 됐다. 1497년 전라좌도 여수좌수영 수군절도사를 역임 당시, 수중제방을 만들어 공을 세운 공로로 함천군에 봉해졌다. 13세 이세번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김해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증직받았다. 14세 이윤실은 통정대부로 죽주부사를 지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함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고조 15세 이린은 통훈대부로 사헌부 감찰 을 지냈고 증조인 16세 이응성은 가선대부로 문천군수를 하였고 함풍군에 봉해졌다. 조부 17세 이회 는 진사로 통정대부와 칠곡부사 를 지냈고, 원종공훈 으로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을 증직 받았다. 부친 18세 이사길은 1700년(숙종26년)에 음직으로 사산감역 을 지냈고 아들의 품계에 따라 숭정대부 의정부 좌참성, 세자이사 함평군으로 증직됐다. 조선조의 선조 중에서 이삼 장군의 8대조인 12세 이량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2년 전(1490년) 전라 좌수사로서 왜구들의 노략질과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여수 앞바다 돌산읍 우두리 백초 사이의 바닷물을 돌로 메워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한 수중제방 즉 수중성 을 구축했다. 이후 이량 장군은 해안에 군사들을 잠복시켜 놓고 왜선이 썰물 때에 수중제방에 걸려 좌초되면 활을 쏘면서 쇠가죽으로 선체를 덮은 박치기 배를 타고 나아가 왜선들을 파괴하고 왜구들을 모조리 전멸시켰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전(1587년)에 있었던 손죽도 해전에서 전과를 세운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 1566-1587)장군도 이삼 장군의 선조이다. 이대원 장군은 여수 앞 손죽도 일대에서 왜선 10여 척과 수백 명의 왜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조정에서 장군의 공을 치하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다시 많은 왜선들이 몰려오자 이 장군은 옷에 혈서를 써서 집으로 보낸 다음 싸움터로 나갔으나 중과부적으로 왜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됐다. 그러나 이대원 장군은 왜구들에게 칼과 창으로 난자당하고 톱으로 온몸이 썰려나가도록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군의 순직으로 수군절도사에 봉직되지는 못했으나 후일 충열공 병조판서로 추대됐다. 이렇듯 장군의 가계를 살펴보면 문무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이삼 장군도 무장으로서 입신출세했던 것이다. 이삼 장군은 장원급제 후 문무 관직에 임용된 31년 동안 무관직이 27회, 문관직이 15회로 문무도합 42직책을 역임했다. 20대에 창방, 태정훈련주부를 거쳐 30대에 훈련부정, 창원부사, 장단부사, 전라좌수사, 총융중군, 영남좌변사, 어영별장, 정주목사, 평안병사 등을 역임했고, 40대에는 양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남병사, 금군별장, 수원부사, 우포도대장, 충청병사, 형조참판, 어영대장, 총융사 등을 지냈다. 노년기인 50대에는 훈련대장, 좌포도대장, 훈련대장, 병조판서, 공조판서, 한성판윤, 능성부수, 특진관 등 문무관을 두루 지낸 성공한 인물로서 유학과 한시에도 능해 많은 문학작품을 후손들에게 남겼을 뿐만 아니라 우국충절 의 정신적 유산과 그 선비정신은 오늘날까지 길이 전하고 있다.
■ 세거지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시조 이언의 18세손이며 이삼장군의 부친함평군 이사길이 1700년경에 노성군 하도면 주곡리로 낙향, 300여년 동안 12대를 이어왔다. 이사길 후손은 논산시 관내에 140여 가구에 5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만영(李萬榮)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2 갑과 장원급제 이장영(李長榮) :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중시 갑과 장원급제 이휘항(李彙恒, 1695 乙亥生) : 문과 영조2년(1726) 식년시 갑과 장원급제 이희겸(李喜謙, 1707 丁亥生) : 문과 영조15년(1739) 알성시 갑과 장원급제 이윤신(李潤身, 1707 丁亥生) : 문과 영조22년(1746) 중시 갑과 장원급제 이긍(李兢, 1707 丁亥生) : 문과 세종9년(1427) 중시 을과) 이함일(李涵一, 1562 壬戌生) : 문과 선조36년(1603) 식년시 병과 이침(李沈, 1593 癸巳生) : 문과 인조13년(1635) 증광시 병과 이정운(李貞運, 1747 丁卯生) : 문과 정조10년(1786) 별시 을과 이정운(李貞運, 1747 丁卯生) : 문과 정조20년(1796) 중시 을과 등 모두 29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78명, 무과 14명, 사마시 199명, 의과 2명)
■ 계파 -감정공파(監正公派) -교수공파(敎授公派) -기성군파(箕城君派) -기와공파(箕窩公派) -대교공파(待敎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운봉공파(雲峯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철성군파(鐵城君派) -판관공파(判官公派) -함성군파(咸城君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효우공파(孝友公派)
23世
○서(緖) |
24世
유(儒)○ |
25世 민(敏)○ |
26世
○헌(憲) |
27世
계(啓)○ |
28世
○범(範) |
29世
재(載)○ |
30世
○행(行) |
31世
건(建)○ |
32世
○성(聖) |
33世
규(奎)○ |
34世
○선(善) |
35世
원(源)○ |
36世
○식(植) |
37世
희(熙)○ |
38世
○기(基) |
39世
진(鎭)○ |
40世
○수(洙) |
41世
병(秉)○ |
42世
○열(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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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4世孫은 23代孫) |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평이씨는 1985년에는 총 24,776가구 103,697명, 2000년에는 총 38,852가구 125,41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
첫댓글 어머! 이런 걸 제가 보내드렸었나요? 가지고 계셨군요. 고맙습니다. 제가 저 쪽 집에서 미쳐 가지고나오지 않았었나봐요.
그런데 세와 대에 대한 내용이 좀 다르군요.
몇세손, 몇대조라 할 때는 본인을 뺀 숫자이며
보통은 세와 대를 같이 사용합니다.
재자항렬 옥임은 29세이며 이언 할아버지의 28세 손이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시조 언 할아버님은 재자항렬 옥임의 28대조이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