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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고, 행복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이 관계 때문에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관계를 통해서 용기와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만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과 재능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관계에서 실패하면, 그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권면합니다.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여”(에크 프쉬케스 : ek psookhay's)는 “영혼으로부터”라는 뜻으로, 마음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감심(甘心 : 괴로움이나 책망 따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아무리 노고(勞苦)가 심하고 비천(卑賤)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 Coram Deo)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터 사역(Marketplace Ministry)의 전문가인 로버트 프레이저는 “일터에서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그리스도인은 일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주께 하듯 일하는 자세에서 가능케 된다. 주께 하듯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언덕 위에 비치는 빛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직장 사역 연구소 소장 방선기 목사는 “그 일을 ‘주께 하듯’할 수 있느냐”가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선택의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범사를 주께 하듯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살전5:16-18a)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항상”(판토테 : pan'toteh)은, 우리가 원하는 일들의 성취여부와 상관없는 모든 때를 의미합니다. 또 “쉬지 말고”(아디알레입토스 : adeealipe'toce)는, 모든 경우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께 나아갈 자세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또한 전치사 “엔”(en)과 함께 쓰인 “범사”(판티 : pantee)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in all circumstances, NIV)를 의미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도무지 이러한 감정들을 가지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은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는 항상 기쁩니다. 나는 항상 기뻐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다닐 순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추기는 일종의 최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한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난제(難題)를 풀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요청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롬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롬5:10a)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히, 넘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기로 작정하신 약속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결국 “항상 기뻐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슬플 때 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께 하루 스물 네 시간 쉬지 말고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한번도 눈과 귀를 떼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한 것 뿐 아니라, 미처 구할 필요를 깨닫지 못한 것까지도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혹 젖먹이는 어미가 그 아이를 잊는 일이 있을 지라도, 당신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감사가 넘치도록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모든 일을 감사로 귀결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기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필요에 아낌없이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입에서 감사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잠시잠깐의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결코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허락하시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지금 처한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와 사랑과 성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최선의 자리요, 상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바꿔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며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듯 철저히 굴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범사를 주께 하듯 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본 절의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 심판을 자초(自招)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본 대로 빌라도는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하여 파견된 적국의 책임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집행을 허락할 최종 결제자였습니다. 그가 보인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그의 권위에 굴복하셨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요, 사사요, 제사장이 될 제목이었던 사무엘은 영적으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던 엘리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b)고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습니다. 또 어쩔 수 없이 사울을 죽인 소년을 향해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삼하1:16)고 외친 그는 바로 그 소년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혹 불의 할지라도 기꺼이 굴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도발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발의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에게 사각지대란 없습니다. 우리는 혹 잊거나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에게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에게 사각지대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권위에 굴복하는 것은 저들이 가진 힘에 아첨하거나 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앞에 어떤 권위가 세워졌을지라도, 혹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사각지대를 갖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권위를 세우셨다고 믿으십니다. 선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권위를 세우셨다고 받으십시오. 그러한 믿음의 자세를 통해 모든 경우,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철저히 굴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우신 목적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3-4절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권위에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권위는 선을 행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 꾼 곧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물론 모든 권위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상태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권위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권위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 하는 하나의 도구가 됩니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떠난 악한 권위를 이용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정금같이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권위에도 기꺼이 굴복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양심에 거리끼면서까지 무조건 권위에 굴복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신앙양심에 따라야합니다. 5-7절입니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법은 육신을 묶을 수는 있지만, 양심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권위로 세워진 자의 눈을 피할 수는 있어도, 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양심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는 반면, 하나님께 대하여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이 회복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권위에 굴복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동기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굴복합니다. 세금을 바칠 때에도 지극히 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혹독한 핍박과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신앙 양심을 따라야할 때도 있습니다. 권위에 불복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 바벨론의 총리가 된 다니엘은 불길한 꿈을 꾼 느브갓네살 왕에게, 꿈의 내용이 그에게 미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리오 왕에게는 만세수(萬歲壽)를 하라고 기원할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경우에는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세우신 권위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신앙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결코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결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주께 하듯”이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윤택해질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채색 옷이 벗겨진 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다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거기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그는 다시 2년 동안이나 잊혀진 채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형통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연속해서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어떻게 형통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듯 주어진 권위를 섬겼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도 한탄하거나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듯 주어진 권위를 섬겼습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원리는 “주께 하듯”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당신 앞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일을 당신께 하듯 하는 그를 형통케 하시기 위해서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1월 28일 트랜스 포메이션 2008 “일터변혁” 컨퍼런스에 참석한 강사들은 한결같이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해야,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느 날, 목회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던 하나 웰빙의 장지만 사장은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할 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쓰시겠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권위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권위는 신적인 기원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랜 심사숙고 끝에 우리 앞에 가장 합당한 권위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선의 자리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앞에 놓여진 권위가 어떠하든지, 인정할 수 있든지 없든지 양심껏 굴복하십시오.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굴복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