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있었던 김종필·오히라 회담
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회담은 재개했으나 양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조기타결을 지시했다.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장관과 이케다 총리를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으나 일본은 3억달러 제공만 고집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내렸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를 다시 만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타결지었다. 금액은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졸속타결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김종필측도 할말은 있었다. 어떻게든 6억달러를 받아내려다 보니 일부 문구에 소홀하게 됐고,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8억달러였을 때 6억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과달카날 해전서 日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이었다. 1942년 8월 7일, 섬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나 7000명이나 되는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고통의 씨앗이 됐다.
수차례의 육·해전 끝에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넘어가자 일본군은 계속해서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저지당했다. 11월 12일, 섬을 탈환하기 위한 일본군의 총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3일 간의 전투로 양측은 해전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으나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군 증원부대는 최악의 살육전에 그대로 노출됐다.
수송선 7척이 격침됐고, 3척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력을 육지에 상륙시켰으나 이들 역시 미군의 총구에 여지없이 쓰러졌다. 섬에 남은 일본군은 고립무원 상태였다. 3만6000명에 달했던 병력 중 2만4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가운데 반수 이상이 아사자였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최초의 대패였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출범/1918. 11. 12
1918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1278년 이래 오스트리아를 지배해왔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강성해지고 제국의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차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패배로 끝나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황제는 국사에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국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 등의 독립국들로 분할되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개별적인 공화국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카를 레너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일본 전범자들 유죄 선고/1948. 11. 12
1948년 11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의 전범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1946년 1월 1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D. 맥아더는 전쟁범죄를 심리·처벌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명령'을 발포했다. 이에 기초해 A급 전범 용의자 28명에 대한 기소장이 발표되어 5월 3일 재판이 개시되었다. 2년 반의 심리를 거친 끝에 내려진 판결에서 사망 등으로 인해 제외된 3명을 빼고는 모든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이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이 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과 함께 전쟁범죄의 개념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재판으로서 국제법 역사상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당시 재판관이나 검사가 전승국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당사국과 제3국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국제재판소의 공평성 원칙에 위반된 처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일본 국민을 재판에 참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출 생
코마네치 Nadia Comaneci
1961년 11월 12일 태어남 ~
"고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나만의 비법이고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 나디아 코마네치
코마네치는 올림픽 대회 체조부문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을 획득한 루마니아의 체조선수이다. 체조 국가대표 선수단의 코치인 벨라 카롤리의 눈에 띄어 6세 때부터 체조를 시작한 그녀는 1972년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경기인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후 1973, 1974년 대회에서도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1976년 미국 뉴욕 시에서 개최된 아메리카 컵 대회에서 여자 체조선수로서는 최초로 이단평행봉에서 2회전 뒤로공중돌기를 하면서 착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성공시키며 우승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서 7차례의 만점을 기록했고, 평균대와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1979년에는 손이 감염되어 대부분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평균대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마루운동에서는 소련의 넬리 킴과 동점을 기록하면서 공동우승했다. 1976년의 올림픽 대회 이후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화려한 인기를 누렸지만 1984년 선수생활을 그만둔 후 199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켈리/Grace Kelly
Princess Grace of Monaco (Princess Grace de Monaco)라고도 함(1956~).
1929. 11. 12 미국 필라델피아~1982. 9. 14 모나코 몬테카를로.
미국의 영화배우·탤런트.
품위 있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11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뒤, 1956년 할리우드를 떠나 모나코의 레이니에 공과 결혼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극작가인 조지 켈리가 삼촌이었음) 사립학교를 거쳐 1947년 뉴욕 시의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949년 7월 하계 간이극장에서 첫무대에 올랐으며, 같은 해 11월 브로드웨이의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14시간 Fourteen Hours〉(1951)으로 영화에 처음 출연, 〈하이 눈 High Noon〉(1952), High Society(상류사회 1956),To Catch A Thief (나는 결백하다), Hitchcock Collection - Rear Window(1954) (히치콕 콜렉션 - 이창), Diel M for Murder (다이얼M을 돌려라), Bridges At Toko-Ri (원한의 도곡리 다리), Mogambo(1953) 등...
박노춘/朴魯春
1912. 11. 12 충남 연기~.
시인·국문학자.
40여 년 동안 국어 교육과 국문학 연구에 몰두했다. 자는 자인(子仁), 호는 노강(蘆江). 1933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도쿄[東京]에 있는 호세이대학[法政大學] 고등과에 들어가 일본어와 한문을 공부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귀국하여 자비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 민족의 슬픔을 노래한 시집 〈여정〉을 펴냈다. 1946년에 귀국하여 성신여자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46년 시 〈핏방울〉(학병, 1946. 1)·〈불여귀 不如歸〉(우리 문학, 1946. 2) 등을 발표한 뒤,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 국문학 연구에만 열중했다. 1966년 건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교부국정교과과정 편집위원과 국어국문학회 위원을 역임했다. 1972년 국어국문학회에서는 제55~57호 통합호에 '박노춘 교수환력 기념호'라는 부제를 붙여 펴내기도 했다.
오천석/吳天錫
1901. 11. 12 평남 강서~1987. 10. 31 서울.
교육학자.
1925년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1982년 청주대학교에서 각각 철학박사 및 명예행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50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1945~47년 미군정청 문교부장, 195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및 대한교육연합회장을 지냈고, 1950~55년 미국 극동총사령관 자문, 1955~60년 한국교육학회장, 1960~61년 문교부장관 등을 지냈다. 1962~63년 미국 맥머리대학·일리노이대학교·피바디대학 등에서 초빙교수를 지냈고, 1963~67년 주멕시코 대사, 1965년 국제연합 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냈으며 1976년 학술원 회원(교육철학 분야)이 되는 등 한국 교육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수상
니콜슨/Seth Barnes Nicholson
1891. 11. 12 미국 일리노이 스프링필드~1963. 7. 2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미국의 천문학자.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캘리포니아 해밀턴 산에 있는 릭 천문대에서 9번째 위성을, 1938년에 10번째와 11번째 위성을 그리고 1951년에는 12번째 위성을(모두 윌슨 산 천문대에서) 발견했다.
니콜슨은 아이오와 디모인의 드레이크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1915년 박사학위 받음)에서 공부했으며, 1915~57년 윌슨 산 천문대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업적을 천체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위성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양 흑점에 관한 연구로, 특히 그것들의 자기적 성질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디슨 페팃과 함께 별과 행성의 복사에서 많은 열전쌍(thermocouple)을 측정했다.
쑨원/孫文
1866. 11. 12 중국 광둥 성[廣東省] 샹산[香山]~1925. 3. 12 베이징[北京].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초명(初名)은 디샹[帝象]. 자는 이셴[逸仙], 호는 르신[日新]·중산[中山]. 중국혁명의 선도자로 1911~12년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을 지냈고, 1923~25년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로댕/Auguste Rodin
정식 이름은 Rene-Francois Auguste Rodin.
1840. 11. 12 프랑스 파리~1917. 11. 17 뫼동.
프랑스의 조각가.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1880년에 의뢰받아 제작한 <지옥문 La Porte de l'Enfer>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유명한 역작인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1880)·<입맞춤 Le Baiser>(1886)이 들어 있다. 초상 조각들로는 빅토르 위고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념상들이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7세 이후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3차례나 떨어지자, 그 다음해(1858) 석조 장식일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1862년 누이인 마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도사가 될 생각까지 했지만, 1864년 재봉사인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그녀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은 1917년 2월 그녀가 죽기 몇 주 전에야 이루어졌다.
1864년,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코가 깨진 사나이>이후 <청동시대>, <세례 요한>, <칼레의 시민>, <영원한 봄>, <키스>, <생각하는 사람> 등과 위대한 걸작인 <지옥의 문(로댕의 사후에 완성됨)>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으며, 토르소 작품은 <빅토르 위고>, <르그로>, <발자크> 등의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리한 사실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생명의 약동과 아울러 육체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영혼(靈魂)의 움직임까지 극명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단순한 리얼리티(Reality)의 차원을 초월, 근대 조각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인상주의(印象主義)의 새 경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