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모험가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똑같은 이름이 다르게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가령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영어식 철자며,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ellanes)로 불렸다. 하지만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유명하므로 이 글에서도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통일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왕궁에 들어가 시동으로 일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가했고 8년 동안 동남아시아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 경험을 쌓았다.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 도중에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열망에 불타서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원정 후원을 요청했지만 연이어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마젤란이 고국인 포르투갈을 버리고 에스파냐와 협력해 원정을 떠난 것은 마치 변절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령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역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 모두에서 후원을 받았다. 마젤란의 원정대만 해도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여러 국적의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517년에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접근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항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마젤란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었다. 과연 그런 항로가 있는지 여부는 물론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