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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등과시 서에 대한 논란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
고려시대 말기의 유학자이며, 대학자로 명성을 떨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은,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 등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종합고전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색(李穡) 선생은 자신의 글 ‘동문선’(東文選)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죽계(竹溪)는 근재(謹齋) 선생의 아들이요, 지금 밀직 첨서(密直簽書)로 이색(李穡)과 동년(同年)의 진사다.”라고 하였다.
이 시의 첫 머리에 나오는 ‘죽계’(竹溪)는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을 가리킨다. 시의 두 번째에 나오는 ‘근재’(謹齋)는, 안축(安軸, 1287-1348)을 가리킨다. 죽계(竹溪) 안종원(安宗源)은 안축(安軸)의 차남이다. 안축(安軸, 1282년~1348년)은 호가 근재(謹齋)이며,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안축(安軸)의 둘째 아들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은 나이가 17세 되던 해(1341년)에 성균시 백자과에 합격하여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된다. 이 때 목은 이색도 14세라는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한다. 이러한 관계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안종원은 평생을 두고 가장 절친하게 지내는 동년(同年)이 되었다.
그래서 묵은 이색 선생은 순흥안씨의 가문에 대하여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에 대학자인 문성공(안향, 순흥4세)의 아들이 누구이며, 손자가 누구이고, 증손자가 누구라는 것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분이다.
이색(李穡) 선생은 순흥안씨와 관련있는 한 시를 남겼는데, 이 시의 제목 가운데,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라는 부분이 최근에 논란에 불씨가 되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창룡무오4월'(蒼龍戊午四月▣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창룡(蒼龍) 무오년(서기 1378, 우왕4) 4월 일에 쓰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서기 1378년 4월에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라는 글을 남겼다는 뜻이다. 이 시가 최근에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남겨 놓은 시의 원문과 번역문을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고전번역DB)의 기록을 보면서 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지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다.
“고전번역서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86권 > 서(序)에,
하 죽계 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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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죽계(竹溪)는 근재(謹齋) 선생의 아들이요, 지금 밀직 첨서(密直簽書)로 이색(李穡)과 동년(同年)의 진사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선친 삼 형제가 과거로 말미암아 현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또 내 자식 삼 형제가 모두 요행히 말석의 과거에 편입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 안씨만을 후히 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가. 문성공은 충렬왕을 섬기어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였고, 근고에 없는 훌륭한 문장을 지니셨는데도 오히려 3대를 지나서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 그 갚음을 받은 것이 더디었다 하겠다. 원문은,
東文選卷之八十六
序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
竹溪。謹齋先生之嗣。今密直簽書公。穡同年進士也。甞曰。吾先君三昆季。由科第顯。致位宰相。而吾子三人。又皆僥倖綴末第。此天也。吾族祖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又登科。何天之厚吾安氏之至此耶。文成公事忠烈王。興學校。作成人材。文章之盛。近古未有。猶且歷三世而後。其孫之登科。則其受報也遅矣。吾先君雖曰積德行義。원문과 번역문은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고전번역DB)에서 가져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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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이나 번역문에 따르면,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 안향 순흥4세)의 손자 정당공(政堂公, 순흥 6세 안목)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3대가 지나서 그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라고 하였다. 문성공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은 순흥 1파 6세인 안목(安牧)을 가리킨다.
이색(李穡) 선생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목(安牧)의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것도 문성공을 언급하면서 3대가 지나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문구가 최근에 왜 논란의 불씨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원 안재홍님이 “순흥안씨는 없다”라는 책을 통해 안목(安牧)의 자녀들은 1남 1녀라고 주장하고, 안목(安牧)의 아드님이 세 아들이라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부터이다. 오원 안재홍님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순흥順興안가는 안향의 후예다. 순흥문중은 시조 안자미安子美부터 안향安珦의 증손자인 안원숭安元崇까지 7세가 줄곤 독자獨子였으며, 원숭은 세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안목의 아들은 독자다. ‘문성공의 증손자 정당공은 아들 셋이 있었다’ 빠진 글자 ‘증曾’자가 안원숭의 아우 안원형安元衡과 안원린安元璘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문경공 보의 묘지문 또한 그러하고’ 는 착오다. 문경공 보(輔 3파) 묘지명에는 '文成公之曾孫(문선공지증손)'이라 쓰여 있다. 이 묘지명도 목은(李穡)이 지었다. 묘지명에, '문성공의 증손(元崇 文惠公)인 정당문학의 아들 셋이 등과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묘지명은 1379 년에 지었고, 문제의 '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1378)'를 쓴 다음 해의 기록이다.”고 하였으며, ‘문성공지손 정당공 유삼자文成公之孫政堂公 有三子’가 낳은 수많은 거짓 기록. 아무도 대문장가 이색이 지었으므로 의심하지 않으려는 시 한 편. 하죽계안씨등과시서賀竹溪安氏登科詩序.
‘문성공지증손 정당공’했어야 할 것을, ‘문성공지손 정당공’이라 하였다. 빠진 글자 ‘증曾’ 하나가 억측을 낳았다. 억측은 왜곡을 낳았고 왜곡이 기록의 날조를 낳았다. 날조된 글자 한 자 한 자가 모여 문장이 되었다. 날조는 계속되었고 충돌하는 부분이 생겼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또 다른 날조를 하였다. 날조는 날조를 낳았고 날조된 기록은 점점 길어졌다. 기록이 늘어났다. 그리고 족보에 올랐다. 족보 기록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문장이 쌓여갔다. 마침내 책이 되어 ‘순흥안씨 상계 변정록’이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이 그대로 <소청서류>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청서류>의 내용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전국의 순흥안씨들에게 널리널리 알리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아니면 '소송도 불사不辭'하겠다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원 안재홍님과 같은 동일하게 주장하는 분이 또 있는데, 씨족사에 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발표하고 있는 안창국(안씨족사 탐구)씨이다. 이 분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7-1348)의 차남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1378년에 시(詩)와 서문(序)을 지었는데, 목은집에는 시(詩)는 목은시고(牧隱詩藁) 제12권에, 서문(序)은 목은문고(牧隱文藁) 제8권에 따로 수록되어 있다. 목은의 이 글은 본문 중에 나오는 말 "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又登科。"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흔히 문성공 안향의 손자 안목(安牧, 1290-1360)의 아들 3형제가 급제했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내용의 전후 관계와 당시 문과 급제 상황을 고려하면 문성공의 증손자 안원숭(安元崇, 1309-?)의 아들 3형제가 급제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文成公之曾孫政堂公으로 되어야 할 것이나 착오로 曾 한 글자가 누락된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이 안목의 아들 3형제가 급제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오원 안재홍님과 안창국님은 한결같이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증손자(曾孫子)라고 기록할 부분을 손자(孫子)로 착각하여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이색(李穡) 선생은 순흥안씨 안축의 둘째 아들인 안종원(安宗源, 1325∼1394)과는 평생을 두고 절친한 사이로 지냈기 때문이다. 순흥안씨 집안과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이색 선생이 손자(孫子)와 증손자(曾孫子)를 구분하지 못하고 대(代)를 구분하지 못해서 3대라고 기록하고, ‘증’(曾)자를 빼 놓고 그냥 손자(孫子)라고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약 이색(李穡) 선생이 순흥안씨와 먼 관계에 있었다면 가능성이 있는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순흥안씨 가문에 대해서 집안에 손가락이 몇 개 있는 것을 알 정도로 관계를 유지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실수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색 선생이 남겨 놓은 문장을 자세하게 보면, “문성공(文成公, 안향 순흥4세)이 나오고, 그 다음에 문성공(안향)의 손자 정당공(政堂公) 곧 순흥 6세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 1290년, 고려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1360년 5월 2일 72세에 졸)이 언급되고 그 다음에 ‘세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순서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순흥안씨의 가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한국중앙연구원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부분을 자세하게 보면, “내 자식 삼 형제가 모두 요행히 말석의 과거에 편입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준 것이다.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 안씨만을 후히 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남긴 글이 시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시인들은 옛날이나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매우 다양한 수사법(강조법(强調法), 변화법(變化法), 비유법(比喩法))등을 사용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은 문성공의 손자 순흥 6세 안목의 아들 삼형제가 급제한 것처럼, 안축(安軸, 1287-1348)의 차남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한것을 말하는 것이다. 똑같이 삼형제가 급제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오원 안재홍님과 안창국님이 남긴 글들을 통해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겸재謙齋, 1290-1360)의 아들이 독자(獨子) 안원숭(安元崇)인가, 아니면 삼형제(三兄弟, 원숭元崇, 원형元衡, 원린元璘)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오원 안재홍님의 독자설 주장에 대하여 ‘신죽산의 시조인 안원형’(安元衡)의 22세 손인 안종채(安鍾採) 씨는 ‘순흥안씨 상계 변정록’(順興安氏 上系 辨正錄)을 통해 순흥안씨 두 번째의 족보인 기해보에 근거하여 삼자설을 주장한다.
안종채(安鍾採) 씨는 기해보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남겨 놓은 시를 그대로 신뢰한다. 반면에 오원 안재홍님과 안창국님은 이색(李穡) 선생의 기록을 다르게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순흥안씨의 족보인 기해보를 불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도 백암 안응창 선생이 남겨 놓은 순흥안씨의 묘지명들은 신뢰한다.
더 나아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남겨 놓은 “내 족조(族祖) 문성공(文成公)의 손자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또 과거에 올랐으니”라는 부분은 신죽산안씨측에서 맨 처음에 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원 안재홍님은 마치 신죽산안씨측에서 안목의 아들이 삼형제라고 최초로 주장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공(政堂公)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은 백암(柏巖) 안응창(安應昌, 1593∼1673) 선생이 간행한 순흥안씨 두 번째의 족보(기해보, 1659)가 맨 처음 제공했다.
오원 안재홍님은 기해보를 매우 신뢰하면서도 기해보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시, ‘하 죽계안씨 삼자등과시 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는, 백암(柏巖) 안응창(安應昌, 1593∼1673) 선생이 순흥안씨 두 번째의 족보인 기해보에서 맨 처음에 주장했던 것이다.
순흥안씨 두 번째 족보인 기해보(1659)에는, “목은 이 선생 하근재삼자등과시서 유 왈 문성공지손 정당공유삼자 우등과운, 牧隱 李先生 賀謹齋三子登科詩序 有 曰 文成公之孫 政堂公有三子 又登科云)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기해보가 안목(安牧, 겸재謙齋, 1290-1360)의 아들이 삼형제라고 기록한 최초의 문헌이다. 기해보는 기록하기를, 최초의 족보인 구보(병오보(1546년)에 안목의 아들 삼형제가 등재되어 있지 않아 기해보에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좀 더 기록들을 살펴보고, 알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기해보를 주관하고 간행했던 당시의 사람들이 순흥안씨 6세 안목(安牧(겸재謙齋, 1290-1360)의 아들들이 삼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백암집에는 그 기록을 남겨 놓고 기해보에는 그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순흥안씨 기해보의 주관자들과 간행자들이 그 얼마나 엄격하게 생각했는가를 보여 주여 대목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순흥안씨의 두 번째의 족보인 기해보(1659)를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또한 오원 안재홍님은 백암(柏巖) 안응창(安應昌, 1593∼1673) 선생이 간행한 순흥안씨 두 번째의 족보(기해보, 1659)를 매우 신뢰하면서도 백암(柏巖) 안응창(安應昌, 1593∼1673) 선생이 남긴 백암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신하고 있다.
“순원군順原君 安應昌은 순흥안씨 두 번째 족보 기해(1659)보를 주관하였다. 순흥안씨 가훈 '숭조목족崇祖睦族'을 실천한 훌륭한 선조였다. 최초의 족보 병오(1536)보 이후에 많은 묘지명을 남겼다. 문제의 무오(1918)보 후에 ‘백암집栢巖集’이 간행(1925)되었다. 무오보를 주관한 ‘참판공파’ 후손들이 주관하여 간행되었다. 역대 족보에 기록되었던 묘지명이 대부분인데 그 묘지명에 ‘안원형’과 ‘안원린’을 ‘안목의 아들’로 기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오보의 거짓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고 하였다.
오원 안재홍님은, 순흥안씨 1파 후손인 참판공파의 후손들이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과 탐진군(耽津君) 안원린(安元璘) 등을 백암집(栢巖集)에 추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오원 안재홍님이 주장하는 글을 그대로 신뢰하고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백암집(栢巖集)의 원문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저기를 찾아 다니느랴 고생했다.
백암집(栢巖集)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존경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영인본은 고려대학교의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원문들을 모두 확인하여 보았는데, 백암집(栢巖集) 원문에는 분명히 안목(安牧(겸재謙齋, 1290-1360)의 아들이 삼형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백암집(栢巖集)이 순흥안씨 1파 참판공파의 후손들이 첨가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백방으로 알아 보고, 전문적인 사학자들과 순흥안씨의 종족사를 자세하게 아는 분들을 만나 여쭈어 보았다. 질문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사학계가 모두 신뢰하고 있는 백암집(栢巖集)에 추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오원 안재홍님의 글을 보여 주었더니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선조가 남겨 놓은 백암집(栢巖集)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행위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사학계가 모두 신뢰하고 있는 백암집(栢巖集)을 불신하는 오원 안재홍님을 직접 찾아 가서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 첨가 부분을 요구하라고 했다. 만약 증거 자료(사료史料)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순흥안씨 참판공파와 죽성군파 등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것으로 검찰에 고소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백암집(栢巖集) 논란에 대해서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여러 원문들을 제시하면서 반론을 제시할 것이다.
닉네님 정도~~~
[출처] 삼자등과시에 대한 논란-반론입니다. (순흥안씨 문숙공파 종회) |작성자 정도
첫댓글 조상님의 발자취을 정확히알고 논하는것이 후손들의 도리인것을 근거없이 논란의 소지을개인사고방식으로 논하는것은 후손으로서 할일이아니다
위 내용을 보면 탐인 안씨 일부는 순흥에서 분파한 것이 맞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