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광풍 속에서 가장 큰 위로는 의료진의 헌신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을 이끈 힘은 아마도 의사, 간호사가 됐을 때의 첫 마음일지 모른다. 일곱 살 어린아이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의 불을 밝히고 평생 그 빛을 따라 살았다. 사랑으로 돌본 환자들의 기적 같은 회복을 수없이 경험했다. 다시 태어나도 간호사로 살 것이라는 ‘한국의 나이팅게일’ 김수지 박사를 만났다.
김수지 박사는 뼛속까지 간호사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람 돌봄 이론’으로 간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간호대상’ 수상, 간호사 최고의 영예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았다. 그 모든 명예보다 한 사람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이 행복하다며 여전히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돌봄에 힘쓰고 있다.
오후 2시 45분. 냉방이 안 되는 역 광장은 후텁지근했다. “새벽 5시부터 움직였어요. 공주에 내려가서 말라위 학생을 실습 병원으로 인도해주고 막 올라오는 길이에요. 저녁에 회의까지 있으니 오늘 하루 정말 바쁘네요. 하하하.”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합실을 나서며 건네는 목소리가 짱짱하다. 더위에 늘어졌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라위 대양간호대학 학장을 지낸 김수지(74) 박사와 첫 만남은 얼음을 깨문 것처럼 쨍했다.
나는 꼭 간호사가 될 거야 김수지 박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여수·순천사건(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한 국군 내의 좌익 세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간호사를 보며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밤새도록 간호해서 살려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어요.”
어린 시절의 꿈은 꿈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꿈을 평생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하루 28시간을 사는 아이’ 로 불릴 만큼 바쁘고 열정적이었다. 공부도 동아리 활동도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간호학과에 들어갔는데 간호학 공부가 참 재미있었어요. 동생들을 앉혀놓고 배운 것을 얘기해줄 만큼. 실습을 시작하고 환자의 특성에 맞게 돌보는 것이 정말 신나고 좋았지요.”
지독히 가난한 집안 환경에 고등학교 진학, 대학 진학, 유학, 박사 과정…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이 자신을 한 단계씩 높이는 디딤돌이 되었다.
간호_사람을 사랑하는 일 “허리디스크 때하고, 폐렴으로 한 번 입원한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픈 적이 없어요. 간호사는 자신의 건강관리가 중요합니다. 내 몸이 불편하면 환자에게 성실할 수 없으니까요.”
김 박사의 손등에는 작은 점들이 있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지압점이다. 매번 지압점 찾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예 문신으로 새겼다. 자신을 돌보는 것도 환자들을 온전히 돌보기 위함이라니…. 강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간호사로서 헌신적으로 살아온 그에게 요즘 학생들에 대해 물었다.
“학생들 참 솔직하지요. 간호대학에 들어온 이유가 점수에 맞춰서 혹은 안정적인 직업과 소득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학생도 있어요.” 김 박사는 돈이나 직장이 두 번째나 세 번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첫 번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간호사는 환자의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영적인 욕구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병을 얻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공포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환자에게 희망과 용기, 사랑받는다는 확신을 주는 것도 간호사가 할 일이라는 것.
“간호사니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보지만(cure), 간호사는 아픈 사람의 심리나 환경까지 세심하게 돌봐야(care) 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간호사의 삶_ 나눔 지금은 ‘간호사’ 란 호칭이 익숙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간호원이란 호칭이 일반적이었다.
간호사를 전문 의료인으로 여기기보다 공무원이나 은행원같이 직업군의 하나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김 박사는 일반인의 의식을 바꾸고, 간호사들에게 자존감과 책임감을 더하기 위해 의료법 개정을 통해 호칭을 바꿀 수 있도록 힘을 더하기도 했다.
호칭이 바뀌고 인식이 달라져도 간호사들의 노동 강도는 여전히 만만찮다. 정작 현장에서 간호사들은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다.
김 박사는 간호를 ‘일이나 노동’으로 생각한다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많은 간호사들이 현장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소명을 깨닫고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
2014년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 환자를 돌보다 감염된 영국인 남자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면서 “아직도 거기서 내가 필요하다. 현장으로 돌아가 무고한 죽음을 최대한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가 환자들을 돌봤다고.
이번 메르스 사태에도 스스로 격리하며 환자들을 돌본 의료진의 모습 또한 자기 삶을 환자들과 나누려는 모습이라며 많은 사람이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진을 좀더 이해하고 응원해주길 바랐다.
“그렇다고 간호사 성격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간호사의 길을 걸으며 달라지는 제자나 후배들의 모습을 많이 보거든요.”
제자 중 한 명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간호사란 직업이 싫어 취직하지 않다가, 우연한 기회에 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하고 환자를 만나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도 활발하게 변해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병원의 책임 전문 간호사로 일한다.
김 박사의 딸도 엄마와 같은 길을 걷는다. “간호사를 하면서 엄마인 내가 느끼는 감동을 아이도 느낀 모양이에요.” 그림도 잘 그리고 성적이 좋아 학교에서는 의대를, 김 박사는 미대를 권유했다. 하지만 결국 간호사의 길을 선택했고 자신의 선택을 만족해한단다.
간호_ 요람에서 무덤까지 김 박사가 호스피스 케어를 처음 접한 것은 1973년 하와이의 한 병원에서 근무할 때였다.
환자의 임종 과정과 죽은 뒤 가족까지 사랑으로 돌보는 것을 강조하는 강의를 들은 뒤 ‘한국에 돌아가면 꼭 호스피스 케어를 시작하겠다’ 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말기암 환자에게 정확한 상태를 알려주지 않아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경우가 흔했다. “말기 암 환자나 회복하기 힘든 질환을 않는 경우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자기 삶을 초라하게 여겨 심리적인 고통을 겪기도 하고요.” 김 박사는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 두려움을 덜어주고, 환자의 삶을 칭찬해주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우면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며 ‘아름다운 죽음’을 돕는 일도 간호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노인 공동생활 가정인 ‘사랑의 집’을 운영한다. 사회복지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서울사이버대학교의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여 학생 신분으로 강의를 들은 것은 유명한 일화. 이것을 인연으로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12월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직을 내려놓고 쉴 때 고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건강이 허락되는 한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 2011년부터 아프리카 말라위의 대양간호대학 원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행복하게 수행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더위와 함께 지내다 보니 우리나라 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하.”
외길을 걸어온 삶.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나이, 인종, 직업…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걷는 길을 동행하다 보니 안 가본 길이 없는 것 같아요. 모든 상황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학습장이지요.”
김 박사가 서명 대신 쓰는 인사 ‘감사함’(감사하고 사랑하고 함께하자)의 의미가 궁금했다.
“예전에는 ‘기기감’(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이 인사였는데, 말라위에 가보고 나서 바꿨어요. 그곳 환경이 정말 열악해서 모두 사랑으로 함께하지 않으면 길이 안 보이거든요.”
그는 “건강이란 몸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파워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상태다” 라는 나이팅게일의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만나는 사람과 환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힘이 닿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김 박사의 발걸음 앞에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밝힌 불빛이 여전히 환하게 빛난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