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깍발이 -------------------------------------------------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하지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여윌 대로 여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맻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無力)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 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 뻗쳤으며, 이마는 대게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멜 대로 꿰멘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이 적삼이거나 복이 들도록 솜바지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띫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두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 거리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 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이나마 의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 앉아서 사서오경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을 얼음에 박 밀 듯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 염치가 있을 뿐이다. 인과 의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백이와 숙제를 배울 것이요, 악비와 문천상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음사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취대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마는,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 삼척 냉돌에 변변하지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달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 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쪼인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明人)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로 만든 것은 어쭙지않은 관료들이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민충정도 그다. 국호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 청의 승낙을 얻어야 했고, 역서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으로써 지존에 직소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에 박도되었을 때,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소를 올려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하기 작이 없었지마는, 죽음도 개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직 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적지 아니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시,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 년 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에 현명하다. 염결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며,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
* 이해와 감상 남산골 샌님의 외모와 옷차림과 무기력함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이 가진 기개와 절조와 청빈을 높이 사자는 의도로 쓰여진 글이다. 현대인의 영악함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 딸깍발이의 정신을 배우자는 주장을 글의 말미에 펼쳐두었다.
현대인의 탐욕과 이기주의를 옛 선비들의 태도에 비교해 반성을 촉구하는 글로 읽혀도 좋겠다. 특히 가치관의 혼돈 때문에 표류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는 잃어져가는 선비정신, 양반정신을 우리의 도덕적 지표로서 재조명될 필요가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 이 글은 작자의 사회관, 역사관이 '선비 정신'이라는 내용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사회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인 이희승 씨가 일제 치하에서 한 지식인으로서 한글 운동에 앞장서고 <조선어 학회> 활동으로 자신의 항일 의지를 나타냈던 점은 바로 체험으로써의 선비정신을 수필로 드러낼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 요점 정리 - 성격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사회적 수필 - 표현 : 한문투의 문체, 해학적인 표현 - 주제 : 현대인들이 배워야 할 선비들의 정신자세(지조, 강직, 의기 등) - 출전 : <벙어리 냉가슴>(1956) - 어휘 정리 * 손방 : 할 줄 모르는 솜씨 * 삼순구식(삼순구식) : (서른 날에 아홉 끼니라는 뜻으로)가난하여 끼니를 많이 거름 * 대우 : 갓 모자 * 모지라지고 : 물건의 끝이 닳거나 잘려서 없어지다. * 중치막 :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입던 웃옷의 한 가지 * 행전 : 바지 가랭이를 가든하게 하고자 무릎 아래에서 발목까지 싸서 매는 번듯한 헝겊으로 만든 물건 * 폐포파립 : 너절하고 구차한 옷차림. * 취대 : 돈을 꾸어 쓰기도 하고 꾸어 주기도 함 * 가명인 : 사대주의에 물들어 명나라 사람인 듯이 행세하는 사람 * 단석 : 아침과 저녁이라는 뜻으로, 위급한 시기 혹은 절박한 상태 * 박도 : 가까이 닥쳐옴 * 고식지계 :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일시적인 계책. 임시방편, 미봉책, 언 발에 오줌 누기 * 염결 : 청렴하고 결백함 *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 →양반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자기 체면만은 그대로 지키려고 애를 쓴다. * 이 목이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 →개화기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최익현이 올린 상소문에 있는 구절이다.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표출한 것으로, 〈효경(孝經)〉에 있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의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희승 [李熙昇, 1896~19897] 자 성세(聖世). 호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조선어학회 간사 및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40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 검거되어 일본이 망할 때까지 복역하고 8·15광복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에 취임하고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고, 1960년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63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대구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가 1969년 성균관대학교로 옮겨 교수·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8년 학술원 부회장에 선임되고 1971년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국어대사전》《역대 국문학정화》《국문학 연구초》 등이 있고, 시집으로 《박꽃》《심장의 파편》, 수필집에 《벙어리 냉가슴》《소경의 잠꼬대》 등이 있다. [출처] 이희승 [李熙昇 ] | 네이버 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