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도분이 어떤 스님에게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을 짓지 말라’는 표현은 부처님께서 하실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환언하자면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자 표현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제가 순서대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한자(漢字) ‘상(相)’으로 번역해서 쓰는 원래 단어는 팔리어로는 산냐(saññā)입니다. ‘산냐’는 부처님께서 친설하신 바, 오온(五蘊)-무상(無常)-고(苦)-비아(非我) 설법의 다섯 가지 무더기, 즉 오온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오온이란 물질(物質)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색온(色蘊), 느낌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수온(受蘊), 인식자(認識者)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상온(相蘊), 형성(形成)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행온(行蘊), 의식(意識)의 무더기라는 의미의 식온(識蘊)입니다.
제가 저의 스승님께 듣고 배운 바로는, 부처님께서는 중생[=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삶을 오온(五蘊)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온-무상-고-비아 설법의 의미는, “중생이라는 존재와 그 삶은 오온일 뿐인 것으로, 항상하지 않고, 항상할 수 없어서 괴롭다. 변하기 마련이고 괴롭기 마련인 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입니다.
[[ 오온-무상-고-비아 법문 ]]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산냐는 … 상카라들은 …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자이건 … 그것이 어떠한 형성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무아의 특징 경」 |
둘째로 삼매 수행으로 선정(禪定)의 구경(究竟)에 통달(通達)한 수행자에게 부처님께서는 산냐의 생멸(生滅)을 설하시면서, 산냐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산냐의 구경(究竟)을 언급하십니다.
[[ 산냐의 생멸 ]]
뽓타빠다여,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산냐는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정형화된 순차적인 실천 수행[계정혜 수행] 중에서 계행과 삼매 성취 수행을 설하십니다. 그래서 삼매를 성취하여서 선정에 들고 나는 수행자에게서 각각의 선정에 각각의 산냐가 생멸한다고 가르치십니다. -
뽓타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다섯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겨난다. 환희로운 자에게는 희열이 생긴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輕安)하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그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림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그의 감각적 욕망의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자기 내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이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떨쳐버림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희열이 바래었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사띠-삼빠쟈나하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고 사띠하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사띠가 청정한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그러면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산냐는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산냐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미묘하고 참된 산냐를 가진 자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
[[ 산냐의 구경 ]]
“뽓타빠다여, 비구는 여기서 초선의 경지에서 고유한 산냐를 가진 자가 되는데, 그때 그는 그 경지로부터 다시 제2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다시 제3선이라는 다른 경지로 이렇게 점차적으로 산냐의 구경(究竟)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 그가 산냐의 구경에 서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면 이런 나의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게속해서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산냐는 소멸하고 다른 거친 산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산냐가 차례대로 소멸하는 증득이 있다.”
- 중략(中略) -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산냐의 구경(究竟)이 하나라고 천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나는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하십니까?" "뽓타빠다여, 소멸을 체험할 때마다 나는 산냐의 구경을 천명한다. 이와 같이 나는 산냐의 구경은 하나라고도 천명하고 개별적인 산냐의 구경들도 천명한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먼저 산냐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깁니까, 아니면 먼저 지혜가 생기고 산냐가 생깁니까, 혹은 산냐와 지혜가 전도 후도 없이 생깁니까?"
"뽓타빠다여, 산냐가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산냐가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 그는 그와 같이 꿰뚫어 안다. '참으로 이것에 조건 지워져 나의 지혜는 생긴다.'라고. 뽓타빠다여, 이런 방식을 통해서 '산냐가 먼저 생기고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산냐가 생기면 지혜도 반드시 생긴다.'라고 알아야 한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법문에서 보살마하살들에게 ‘산냐에 머물지 않는 보시행’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직 금강경에서만 나타나는 이 ‘산냐에 머물지 않는 보시행’은 불교 수행의 마지막 단계 수행으로 보살마하살들은 이 수행을 하여 남음이 없는 완전한 열반인 무여열반의 아라한이 됩니다.
[[ 금강경 보시행 수행 법문 ]]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에게 중생-산냐가 일어난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나-산냐 또는 중생-산냐 또는 생명-산냐 또는 인간-산냐가 일어나면 그는 보살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형성(形成)된 것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여서는 안 되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여 보시해서도 안 되며 형상(形像)에 집착하여 보시해서도 안 되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들에 집착하여 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수보리야, 이와 같이 보살 마하살은 대상(對象)-산냐에조차 집착하지 않은 채 보시해야 한다. |
이와같이 부처님의 법문에서 ‘상(相)[산냐]’는 매우 중요한 수행의 필수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상’은 중생이 의도적으로 짓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심이 일어날 때마다 저절로 생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은 불교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서술입니다.
중생은 산냐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