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장 박만호는 정 보국차장 최세영과 업무상 안면만 있을 뿐이지 인연이 없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 을 때 꺼림칙하기부터 했다. 인사동의 한정식집이었다. 상에 가득 놓인 찬은 모두 입맛에 맞았으나 박만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대충 식사를 마쳤을 때 박만호가 먼저 물었다. "용건이 있으실 텐데, 최 차장님."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털어놔 보시지요." "뉴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냅시다. " 정색한 최세영이 말을 이었다. "뉴만도 멀정하게 돌아왔지 않습니까?그 사람 말대로 삼일 동 안 사람을 피해 숨어 있던 것으로 하지요." "이미 언론에서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제대로 먹힐까 요?" "본인이 납치를 부인하고 있는데 언론이 사건을 꾸밀 수는 없 을 겁니다. " 박만호가 잠자코 숭능그릇을 들었다. 어쨌거나 그로서는 한숨 돌린 셈이었다. 언론이 사건을 일찍 터뜨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 렀지만 뉴만이 납치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치안 책임 자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커피와 설탕을 시장 바구니에 넣은 김혜인은 진열대에 쌓인 조 미료를 훌어보았다. 오늘은 사야할 품목을 적어 왔으므로 빠뜨리 는 물건은 없을 것이다. 조미료를 찾아 바구니에 넣었을 때였다. "김혜인씨, 잠간만." 어느 틈엔지 옆으로 바짝 다가온 사내가 말했으므로 김혜인은 깜짝 놀랐다. 사내는 작달막한 키의 사십대 사내였는데 김혜인의 놀란 모습에 미안한지 어설프게 웃었다. "잠간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 "누구신데요?" "이준석 씨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 순간 김혜인은 온몸을 굳혔다. 그러자 사내가 다시 웃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라도 해야 이해가 빨 리 될 것 같아서" "무슨 일이신데요?" "가게 옆쪽에 커피숍이 있지 않습니까?그곳에서 말씀을 드리 고 싶은데요." "이준석씨는 살아 있습니다. ' 바짝 다가선 사내가 눈만 치켜들 김혜인에게 소근대듯 말했다. 그는 이제 웃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서울에 있지요" 잠시 후에 김혜인은 커피숍에서 사내와 마주앉아 있었다. 가게 에 물건을 모두 돌려놓아 빈손이었다. 조그만 커피숍이었고 이른 시간이어서 손님은 그들 둘뿐이다. 김혜인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분이 살아 있다니,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사내는 종업원이 찻잔을 놓고 돌아갈 동안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르세 유에서 죽지 않았지요. 다음 날 해변에 떠오른 시체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 "지금 서울에 있다고 하셨지요?" "예, 그리고 한바탕 일을 벌였지요. 어제 미국 앨로우 미사일회 사사장 뉴만이 납치된 것으로 보도되었다가 돌아와서는 그저 쉬 고 왔을 뿐이라고 해명한 보도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건 이준석 씨가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아저씬 누구세요?" "아, 난 CIA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미스터 고입니다. " 사내가 앉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김혜인 씨는 워렌 씨를 잘 아시지요? 워렌 씨는 지금 미국에 계십니다. " '그분도 살아계세요?" "예, 지금은 CIA 본부에 계십니다. " 어깨를 늘어뜨린 김혜인이 길게 숨을 뱉었다. 워렌이 살아 있 고 더욱이 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준석에게 불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치금 이준석 씨는 무기상 조직의 해결사들과 부딪치게 되었습 니다. 그 자들의 정보력과 조직력은 막강하지요 더욱이 자금력은 엄청납니다. " 긴장한 사내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그 자들이 김혜인 씨와 이준석 씨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지요. 그래서 제가 미리 찾아온 것입니다. ' '제가 할 일이 있나요?" "놈들은 김혜인 씨를 감시할 것입니다. 이준석 씨가 연락을 해 올지도 모르니까요,'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능을 했다. "아마 지금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내 가 CIA 요원인 줄은 알고 있을 테니 손을 쓰지는 못할 겁니다. ' 김혜인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일 이준석 씨가 연락을 해오면 워렌 씨가 본부에 계시다고 만 말해주십시오." "그렇게만 말하면 되나요?" "그 자들이 틀림없이 도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마세_架" 김혜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가슴이 뛰었고 얼굴이 달아을 랐으므로 커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마르세유를 떠난 지 육 개월이 되었고 이제야 겨우 마음이 정 리되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난 달에는 부산 근교에 있는 이준석 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만나 흠뻑 젖 기도 했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으므로 당황한 김혜인은 머리를 돌리 고 손끝으로 눈물을 씻었다. 그러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 어 올라 사내를 노려보았으나 사내는 딴전을 피웠다. "그사람은 나한테 연락해 오지 않아요." 목소리가 컸으므로 카운터의 종업원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 다. 딸꾹질을 하고 난 김혜인이 말을 이었다. '나같은 여자는 벌써 잊었어요." "김혜인씨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내가 옆쪽을 바라본 채 말했는데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우리 CIA뿐만 아니라 그 자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래서 김혜인 씨를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여긴 한국이에요. 외국인들이 활개치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텐데요?" 그러자 사내가 빙긋 웃었다. "CIA에도 저 같은 한국인이 있지 않습니까?그 자들도 얼마든 지 한국인을 고용할 수 있을 겁니다. " 사내가 김혜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재 연락처입니다. "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탁자 위로 밀어놓았다. "연락하실 때는 이 핸드폰을 쓰십시오.아마 김혜인 씨는 한국 정보국에서도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 그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김혜인을 향해 사내가 다시 웃었 다. "우리가 정보를 주었거든요. 정보국은 김혜인 씨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 사내가 커피숍을 나가자 김혜인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움직이 지 않았다. 앞쪽의 벽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이 준석과의 밤을 떠올렸다. 자신은 쫓기듯 서둘렀으나 그는 집요했다. 마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사람처럼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준석이 죽었다는 신문과 방송의 보도를 보았을 때는 웬일인 지 가슴이 담담했다.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 것은 가슴 한쪽에 그 런 상황에 대한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온 것은 갑자기 닥쳐온 외로움과 허무감 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은 이준석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준석은 자신의 인생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김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왔다. 햇살이 환 한 거리에 나서자 그녀는 무의식중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상 조직의 해결사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혜인이 찾는 것은 이준석이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숨어서 이쪽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 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번 가격에서 지난번의 차액을 帶아드리지요' 뉴만이 말한 순간 김인석이 심호흡을 했다. "그럼 일억 달러를 깎아 주시겠단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 의자에 등을 기댄 뉴만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한미 관계를 고려해서 우리가 양보를 하겠습니다. " "훌릉한 결단이십니다. " 김 인석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럼요, 한국과 미국은 맹방이지요 그렇게 해 주신다니 우리도 적극적으로 추가 구매량을 재검토하겠습니다. " 방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김인석의 좌우에 앉은 구매 본부의 간부들도 눈을 반짝이며 다가앉았다. 따라서 상담은 일사 천리로 진행이 되었는데 지난번 미사일 구매량과 같은 물량을 구 입한 가격이 전번 가격보다2억 달러 낮은3억 달러가 되었다 상담을 마친 한국측 관리들이 호텔방을 나가자 뉴만이 길게 숨 을 뱉었다. "헛장사를 했군. 이제 아시아에서 이윤을 남기기는 글렀다. " 서류를 챙기던 보좌관 존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뉴만이 가격을 깎아준 이유를 아는 것이다 뉴만은 일억 달러를 이준석 에게 빼앗긴 데다가 이억 달러를 希아주었으니 엄청난 손해를 보 았다. 담배를 빼어 문 뉴만이 금장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존슨, 한국측에서 보면 이준석은 애국자겠지?" '그렇겠지요 일억 달러나 거금을 들여온 데다 이억 달러를 절 약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뉴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답한 존슨이 시선 을 내렸다. 그는 뉴만과 이준석이 타협한 내용을 확실하게 예측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준석은 하마니의 거래 리스트에 적혀 있는 뉴만의 이름을 빼 주겠다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뉴만의 홀가분한 태도가 그 증거 다. '그놈은 독사 같은 놈이었다." 혼잣소리처럼 말한 뉴만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래 평생 그놈같이 소름끼치는 놈은 처음 보았다. 무서웠어." "수십 명을 죽인 살인 기계 아닙니까?" "차라리 기계라면 낫겠다. 감정이 있었어.나는 그것이 더 겁났 다. ' 뉴만과 십여 년 같이 생활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존슨 아 뉴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장님, 그럼 그놈과는 이야기가 끝났습니까?" "끝났어. 나는 그놈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으므로 뉴만과 존슨은 같이 이맛살 을 찌푸렸다. 경호팀장 레프티가 들어섰는데 뒤에 바짝 붙어선 사내는 호크였다. 호크가 레프티의 어깨를 한쪽으로 밀어젖히고는 앞으로 나섰다.
"레프티, 넌 나가봐." 레프티가 잘 길들여진 개처럼 밖으로 나가자 호크가 뉴만을 향해 빙긋 웃었다. "뉴만 씨, 모간 씨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 팔짱을 긴 그가 뉴만을 내려다 보았다. "모간 씨 말씀으로는 당신이 이준석과 타협을 하고는 혼자만 살 길을 찾은 것 같다고 하시던데." "입닥쳐, 이 자식아.' 그리고는 뉴만이 빙긋 웃었다. "모간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같은 졸개는 더욱." 그러자 호크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과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