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로..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이야기...
기원전1세기경 경주지방에 6촌의 연합체가 있었다..임금님도 이 연합체의 우두머리들에 의해서 추대되었다..6촌과 촌장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양산촌(알평), 고허촌(소벌도리), 대수촌(구례마), 진지촌(지백호), 가리촌(지타), 고야촌(호진)이다..
이들 6명의 촌장들이 모여 임금을 추대할 일을 의논하고 있을때 양산촌 나정이라는 우물 옆 숲속에서 오색 광채가 하늘로 뻗치고 있었다..
6촌장들이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보니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큰 알 속에서 늠름한 사내아기가 나왔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으니 성은 박씨고, 널리 동방을 빛나게 하라는 뜻인 불구내가 이름이 되었다..'불구내'란 말리 한자로 변하여 '혁'이 되고 '거서간'이란 말이 한데 모려 '혁거세'가 되었다..6촌장들은 혁거시를 임금으로 모셨다..박혁거세가 임금이 된 후 벌판 남산 쪽에 도읍을 정하여 성을 크게 쌓았는데 쇠울타리같이 단단하다는 뜻으로 쇠울이라 명명하였다..
이 쇠울은 한자로 금성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뒤 서울이라는 뜻으로 변한 것이다..
두번째..석탈해 이야기..
어느날..아진개 앞바다에 수십마리의 까치떼가 날아들었다. 아진의선이란 할머니가 가보니 황금궤짝이 있었고 그 안에 용궁나라인 용성국의 왕자가 들어있었다.. 바다에서 튀어나왔다하여 토해라 하던것이 바뀌어서 탈해가 되고 까치 작자에서 새가 날아가니 나머지인 옛 석자를 성으로 정하여 아기의 이름은 석탈해가 되었다..
세번째..김 알지 이야기..
석탈해가 임금으로 있던 시절...월궁성 서쪽 숲속에서는 밤마다 닭 울음 소리가 들렸다..그곳에 가보니 황금 궤짝이 있었고 그안에 한 사내아기가 있었다..황금궤짝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으로 정하고 이름은 그냥 아기로 불렀는데 이것이 뒷날 변하여 알지가 되어 김알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동일 신라때....
당나라는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지배하려고 했으나 신라가 고구려 왕족 등과 힘을 합쳐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려는 총력전을 폈다..김유신 장군은 10여년 동안이나 그들과 싸우며 승리를 거듭하여 당나라의 안동 도호부를 만주 지방으로 쫓아내었다.. 김유신장군은 태대각이 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나라에서는 김유신 장군에게 흥무대왕이라고 신분을 높여주었다..김유신 장군이 세상을 떠나기전 그의 아들 원술랑은 싸움터에서 당나라군과 싸웠다..그러나 전세에 밀려 후퇴할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아버지인 김유신 장군에게 크게 꾸짖음을 듣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은 원술랑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고 그때문에 원술랑은 태박산 속에서 숨어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왔다..어머니는 원술랑이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했다하여 받아주지 않았고 원술랑은 싸움터로 나가 삼국 통일의 유업을 달성하겠다고 아버지 무덤에서 맹세를 했다..신라 문무왕 15년인 675년 문무왕은 지금의 양주에 있던 매초성의 당나라군을 공격하였다..원술랑은 앞장서서 적군에 뛰어들었고 싸움에서 이겼다..문무왕은 매우 기뻐하며 벼슬을 주려 했으나 원술랑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불효자가 어찌 벼슬을 받겠냐는 말을 남기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보고 이야기..
신라 소년 궁복은 청운의 꿈을 품고 당나라에 들어가 무예를 익혔고 이름을 장보고라고 바꿨다..장보고는 당나라 서주 지방에서 무령군 소장으로서 장군이 되었다..그무렵 신라 해안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해적들에게 잡혀가 당나라에 노예로 팔리고 있었다..828년 장보고 장군은 당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뇨예로 있던 많은 동포들을 데리고 신라로 돌아왔다..흥덕왕3년 장보고장군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지금의 가포리에 성을 튼튼히 쌓아 군사기지와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장보고의 전함들은 나타나는 해적선마다 모조리 쳐부수었으며 마침내 바다의 왕자가 되었다..그러나 신라 왕족들의 싸움으로 장보고 장군은 왕죽의 일파가 보낸 염장이라는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원효 스님 이야기...
648년 황룡사에서 스님이 된 원효는 650년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당황성 근처에 이르러 동굴속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깊은밤 목이마른 원효스님은 머리맡에 있던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다..다음날 아침에 보니 두 스님이 자던곳은 무덤속이었고 지난밤에 마신물은 해골에 괸 썩은 물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원효스님은 이 평범한 일을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원효스님은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던 발결음을 돌려 신라로 되올아왔다..원요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며 법성종을 일으켜 불교보급에 힘썼다.그무렵 요석궁에는 요석공주가 홀로 외로이 살고 있었는데 원효 대사는 요석 공주와 만나 스님의 옷을 벗고 거사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이러한 일을 불교에서는 파계라고 부른다..원효대사는 스스로 소성거사, 복성거사라 일컬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원효대사와 요석 공주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두문자를 만들어낸 설총이었다..원효대사는 617년에 태어나 686년에 70세로 입적하였다..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
백제에 살던 아사달이라는 이름난 석공이 살고 있었다..그는 아사녀와 결혼했는데 얼마안되서 신라로 가게 되었다.아사달이 3년이 되도록 돌아오지않자 아사녀는 서라벌로 길을 떠났다..옛날 신라 때에는 불국사의 청운교 밑에 연못이 있어 청운교 일부가 불속에 잠겨 있었다..서라벌에 온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탑이 완성될때까지 만날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영지라는 연못가에서 디다렸다..아사녀는 아사달을 짝사랑하는 신라의 처녀들의 말을 듣고 절망에 빠졌다..아사녀는 울면서 연못에 몸을 던졌다..한편 석탑을 완겅한 아사달은 아사녀를 만나보고 싶어 아사녀를 찾았으나 아사녀가 묵고 있던 주막집 할머니의 말을 듣고 아사녀의 뒤를 따라 연못에 몸을 던졌다..그후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마주보며 서있는 석가탑은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슬픈이야기 때문에 무영탑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에밀레종이야기...
신라의 혜공왕은 효성왕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종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에게 시주하도록 했다..봉덕사의 스님이 어느 가난한 집에 들렀다..아기를 안고 있던 가난한 어머니는 너무도 가난하여 아무것도 시주할것이 없다며 아이라도 시주하고 싶다고 말했다..스님은 빈손으로 그집에서 나올수밖에 없었다..이윽고 종이 완성되었는에 이상하게도 종에서는 소리가 나지않았다..그때 스님의 꿈에 웬 노인이 나타나 아기를 집어넣어야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꿈에서 깨어난 스님은 그 길로 아기를 시주하겠다고 말하던 가난한 집 어머니를 찾아갔다. 아기의 어머니는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슬피 울며 아기를 시주하였다..어린 혜공왕은 반대하였지만 태후와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허락하였다..종을 만드는 사람은 나라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아기를 쇠가마에 넣었지만 매우 슬피 울다가 눈까지 멀었다고 한다..마침내 종은 완성되었다..그 종을 칠때마다 어머니를 부르는 구슬픈 소리처럼 "에밀레ㅡ에밀레ㅡ"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졌다..이러한 전설이 서려 있는 에밀레종의 이름은 성덕 대왕 신종이라고 한다..
첫댓글 많죠?
심심해서 해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