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린다」는 유언비어 난무… 시위대에게 光州 출신 대위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줘』
역사자료/ 金一玉 당시 7공수 35대대장
전남大에서 해산된 학생들 光州 도심으로
우리 대대는 5월17일 22시 부대를 출발, 5월18일 00시에 전남大에 도착했다. 대학생 200여 명은 늦은 시간인데도 연구실, 강당에서 불온 유인물 제작 및 전국 계엄령 확대에 따른 학생들의 활동 방향 등을 토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2개 지역대가 점거하여 체포, 그중 40여 명을 수사기관에 인계했다.
학원 내 중요지역 및 정·후문에 1개 지대 규모(14명)씩 학생들의 교내시위 방지를 위해 근무했다. 5월18일 09시30분경 전남大 정문에 200∼300명의 학생이 가방을 들고 와서 『왜 신성한 학원을 軍이 점령하고 있느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軍은 학원에서 철수하라』는 등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정문 경계 중인 지휘자가 확성기로 『전국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학생들은 당분간 학원 내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자 학생들은 가방에서 일제히 자갈(돌)을 꺼내 경계 근무자에게 투석, 80여m의 거리를 두고 시위가 시작됐다. 그 당시 근무 중인 3명이 투석에 의한 타박상을 입었다. 아울러 전남大 후문 및 울타리 주변으로 집결한 학생들도 시위가 시작되었다.학생들을 해산시키고자 09시50분에 1개 중대(30명) 규모를 정문에 출동시켜 1차 해산시켰으나, 또다시 몰려와 세 차례 半 강압적으로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해산시켰다.
11시부터는 전남大 정문에서 해산된 학생들을 주축으로 전남도청 및 가톨릭 센터 일대에서 400∼500명 단위로 집단 시위를 시작,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의 극렬한 투석으로 경찰의 부상자가 발생, 사태 수습이 곤란한 상태였다. 대대는 출동 명령을 받고 15시30분에 금남로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크게 3개 그룹으로 짜여 1개 그룹은 경찰과 직접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고 있으며, 1개 그룹은 人道의 보도블록을 깨뜨려 전달했고, 1개 그룹은 뒤에서 시민들에게 시위 가담을 요구하면서 극렬한 행동을 계속했다. 대대는 대열을 갖추고 접근하여 확성기로 해산을 요구했으나 시위대들이 자갈 및 각목을 던져 선두제대 병력 8명이 크게 부상을 입었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극렬분자 103명을 체포해 연행 계엄분소로 이첩했으며, 1차 시위는 일시 중단상태가 되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유인물을 제작해 각 가정 및 거리에 뿌렸다. 차후 시위에 대한 준비 및 집회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대에 의해 회수된 유인물의 일부 내용은 ① 경상도 출신 군인만 모집, 광주에 투입시켜 시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 ② 시위 주동자 학생들을 연행, 사살했다. ③ 계엄군이 광주시민 씨를 말린다고 임신부를 해부해서 창자를 끌고 다닌다. ④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 총 끝에 매달고 다닌다. ⑤ 광주시민은 이제 다 죽고 만다. 죽기 전에 끝까지 궐기하자는 것이었다.
구타 행위 일부 발생
이러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여 시민들에게 불안과 반발의식을 주입,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대가 체포·연행 과정에서 대항하는 학생들에게 방어수단으로 구타 행위는 일부 발생되었으나, 국민의 군대가 유언비어 내용 대로 선량한 시민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대대는 1차 시위를 제압하고 야간에도 군중 집결이 예상되는 광장 및 넓은 공간 지역 36개소에 철야 병력을 배치해 경계에 임했다. 대체로 5월18일 저녁 광주시내 동정은 조용한 편이였다.
5월19일 오후부터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역별 2000∼3000명 단위로 도청, 계림동 고속터미널 일대에서 反정부구호 ① 위대한 민족의 횃불 金大中 선생을 구하자. ②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위대한 全南國을 만들자. ③ 現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다. 위정자는 떠나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 투석을 하며 더욱 극렬한 시위가 지속되었다.
대대는 병력을 차량에 탑승시켜 주력은 광주역에 집결해 기동타격대로 운용되었으며 오전에 두세 차례 2개 지역대 규모(차량 9대)로 차량 무력시위를 실시했다. 아울러 31사단 96연대 병력이 주요시설에 경계근무를 하던 중, 시위 학생들에게 휴대한 장비를 피탈당하고 시설을 점령당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기동타격 부대 출동 명령을 받고 13시에 버스터미널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대들로부터 부상을 입었던 96연대 병사가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는데, 시위대가 「죽여 버리겠다」며 병원 정문에서 집결되어 있는 것을 해산시킨 후 환자를 구출했다. 이 병사를 통합병원으로 후송시켰고, 광주공원 일대에 집결해 시위하는 군중을 해산시켰다.
초저녁에는 부분적인 시위와, 관용 차량과 경상도에서 생산한 물건을 적재하고 광주시내로 들어온 모든 차량을 방화하는 행위가 소수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중 집결 예상지역을 지역대별 무력시위를 하면서 집결을 방해하고 23시에 전남大로 全병력을 집결 보유했다.
시위대가 공수부대 철수하도록 길을 터줘
5월20일 오전에는 5월19일과 동일하게 산발적으로 학생 및 불량배들의 시위가 있었다. 오후부터는 시위 방법이 다양화되어 영업용 택시 40∼50대가 떼지어 계림동 일대 도로를 질주하면서 경계 중인 대대에게 『너희들은 가라』고 외쳤다.
야간에는 학생 및 시민까지 합세하여 500∼1000명 단위로 행렬의 맨 앞에는 할아버지·할머니·어린이를 세우고, 뒤에는 학생 및 지역 장년이 주도하여 횃불을 들고 삽·낫·곡괭이·각목 등을 휴대한 채 애국가를 부르면서 접근하고 투석했다. (계엄군이) 물러가지 않으면 찍어 죽이겠다고 하며 조직적인 시위가 되었다. 술에 만취된 일부 시위대는 앞에 나와서 계엄군 지휘관과 협상하자고 제의했다. 학생과 남녀노소 합세 시위로 대대의 소요진압은 어렵게 되었다. 결국 시위대의 대표와 대대장과 대위 이희웅 외 경계요원 5명이 시위대 지역에 들어가서 직접 대표의 의견을 들었다.
시위대 대표는 『계엄군이 광주시내를 떠나면 자체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겠다』, 『경상도 군인만 소집, 광주에 투입했다는데 정말이냐』고 물었다. 대대장은 대대 내의 광주지역 출신, 특히 광주商高 출신인 이희웅 대위가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면서 해명해 주었다. 대대장은 시민들이 원한다면 병력을 철수시킬 테니 철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찬성을 했으나 일부는 반대하면서 투석을 했다.
대표가 시위대에게 적극 설득하여 『군인들이 자진 철수한다니, 철수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자』고 제안을 하자 시위대는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계림동파출소 경찰의 안내를 받아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광주高 육교 밑을 통과하던 중 시위대가 육교 위에서 바위를 여러 개 투하시켜 철수 중이던 병력 6명이 크게 부상을 당했다. 대대장 차에도 떨어져 호로가 찢어지고 대대장 철모가 쭈그러지는 등 부상을 입으면서 全부대가 조선大로 철수했다.
극렬분자들에 의해서 공공시설, 즉 광주세무서, 광주 KBS방송국, 경찰서 및 파출소 등에 방화 및 시내지역의 무기고를 포함 아세아 주식회사에서 생산된 차량 및 APC(장갑 병력수송차량-편집자 注) 수십 대가 탈취되었다. 이날 전국의 시위집단이 광주에 진입했고, 탈취한 APC로 계엄군을 돌파하기도 했다.
조선大에 도착하여 외곽경계를 할당, 근무 중 극렬분자들이 정문 및 후문지역에 중앙고속버스 2∼3대에 시위대를 탑승시켜 제파식으로 돌파를 계속 시도했다. 그중 고속버스 1대는 民家를 들이받아서 잠자던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5월21일 새벽까지 돌파를 저지하면서 시위대와 대치했다.
계엄군에 사격 유효 명령 발효
5월21일 주간에는 아세아 자동차 주식회사에서 탈취한 차량 및 APC를 이용하여 광주시내는 물론 여수·순천·목포·장성·담양 지역 일대에서 무기고에 보관 중인 총기 및 탄약을, 화순 탄광에서는 TNT, 뇌관·도폭선 등을 탈취하여 광주에 반입했다. 시위대는 차량과 APC, 무기를 휴대하고 본격적으로 「폭도化」 되었고, 탈취한 무기를 가지고 살레지오 남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사격 연습을 실시했다. 폭도들은 화기 및 폭약류 취급의 부주의, 차량의 전복 등으로 폭약류가 폭발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첩보가 계엄분소에서 전파되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행정기관의 마비, 치안계통의 마비, 교통시설의 두절 등 시민들의 생활은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폭도들은 송정리에 있는 삼양타이어 공장에서 타이어를 탈취, 광주통합병원 앞과 고속도로 진입로 일대에 계엄군의 철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타이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도로를 봉쇄했다. 주요 고층건물 옥상 및 광주 외곽지역 산 頂上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폭도들이 조선대학교에 집결되어 있는 軍 병력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18시부로 계엄군에게 사격 유효 명령이 발효되었다. 대대는 일단 조선大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차량제대와 육로 철수제대로 구분하여 준비한 후 19시부터 1차 차량제대가 정문을 출발해 화순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중 2km 지점 건물지역에 무장폭도가 집중 점거하여 차량 대열에 무참히 사격을 가해 대대는 5명이 관통상을 입는 등 부상자가 발생했다.
폭도의 사격으로 차량 2대 및 운전병이 낙오되어 보급품을 포함해 큰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낙오된 차량 및 보급품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실종되었던 운전병 중 1명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육로철수제대는 야음을 이용해 야산을 따라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도중 폭도들이 사격을 하며 조직적인 철수를 방해하기도 했다.
5월22일 새벽, 무사히 화순 방향 주답마을 부근 집결지에 도착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중 폭도들이 추가적인 TNT 및 뇌관을 탈취했다. 화순 탄광촌 광부들이 광주권 진입을 위한 이동이 예상되어, 화순터널을 포함해 도로를 차단했다.
이때 10시경 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이동 중인 폭도가 탑승한 버스는 군인을 발견하자 당황하여 도로변 가로수를 받고 전복했다.
5월23일은 주둔지를 편성하여 활동하고 있는 병력에게 무장폭도들이 집결지 부근에 접근하여 기습사격했다. 일부 폭도는 주답마을 일대에서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린 후 도주 및 마을 방송실에서 주민들에게 선동하면서 궐기할 것을 요구했다. 대대는 접근한 무장폭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서 주·야간 지역 수색을 실시했다.
5월24∼25일은 광주시민들이 의식주 문제가 심각해지자 스스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폭도들에게 물질적인 지원도 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이성을 찾은 상태였다. 대대는 5월24일 헬기를 이용하여 주답지역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여 차후 임무수행을 위한 정비를 했다.
5월26일부터는 광주시민들의 이성 회복으로 폭도의 활동범위는 좁혀져 광주 사직공원과 도청, YMCA 등에서 집단 활동을 했다. 야간에는 식량, 금은 보석, 가축들을 약탈하며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대대는 광주 사직공원 특공작전 명령을 13시30분에 접수하여 정비를 하면서 계획을 수립하고 작전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작전 종료 후 20사단에게 인계
5월27일 04시에 사직공원을 점령하여 활동 중인 폭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01시 정각에 비행장을 출발해 광주 통합병원 앞에서 하차했다. 침투지점으로 전개를 개시하자 폭도들은 준비했던 스피커를 이용하여 『공수부대가 04시를 기하여 광주시를 폭파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에 집결 배치되어 있으니 모든 시민은 대피하라』는 등 불안을 조성했다. 폭도들은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발표했다.
지역대 단위로 계획된 통로를 따라 진입할 때 8지역대 지역에서는 폭도들이 도로 좌우측, 주택가의 小路(소로) 등에서 마대로 초소를 만들어 진입을 방해했다. 폭도들의 기습적인 사격으로 첨병 지대장인 최연안 소위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진입하면서 폭도를 발견하기도 했으나 최종 목표인 사직공원 탈취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피해를 당하면서도 폭도 체포를 포함한 사격 등의 부수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04시 정각에 사직공원을 포위 완료하고 특공조를 침투시켜 수색한 결과 이미 폭도들은 他지역으로 사라지고 남아 있던 3명만 체포했다. 이들은 머리와 좌측 팔에 흰 띠를 매고 있었는데, 적색 글씨로 「서열 1번 계림동장, 충장파출소장」 등의 직급을 부여한 것을 발견했다. 사직공원에서 작전을 종료하고 20사단에게 지역을 인계한 후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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