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의 역사학과 구조주의는 20세기 프랑스 인문학의 흐름을 대표하는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아날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세기의 전통적 역사학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아날의 역사가들은 다양한 인접 학문들과의 교류를 통해 역사학의 대상을 확대하고 새로운 방법론들을 도입하면서 근대 역사학의 혁신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들은 정치사 중심의 전통적 역사학을 넘어서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망탈리테사 등의 새로운 영역으로 역사학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20세기 중반 이후 아날이 프랑스 역사학의 주류로 군림하고 있을 때, 구조주의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철학, 인류학, 언어학, 사회학, 문학, 지리학, 정신분석학,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거의 모든 학문들이 구조주의의 물결에 동참하고 있었다. 20세기 프랑스라는 동일한 시공간에 공존하던 아날과 구조주의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아날과 구조주의의 관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아날을 대표하는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1958년에 발표한 「역사학과 사회과학들: 장기지속」이라는 논문이다. 이 글에서 브로델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 ‘시간’이라는 핵심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로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사회구조를 설정한다며 격렬하게 비판한다. 브로델의 비판은 역사학과 구조주의의 갈등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수아 도스와 같은 이들은 역사학과 구조주의의 적대적인 관계가 196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브로델의 ‘후계자들’이 역사인류학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수용하면서 상호 우호적인 관계로 변형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전 아날의 역사학과 구조주의는 정말로 적대적인 관계였을까? 물론 브로델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초기 레비-스트로스 역시 『야생의 사고』 마지막 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역사’, 그 자체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 프랑스 구조주의의 흐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명인 것은 분명하지만, 구조주의 내부에는 다양한 사상과 흐름들이 존재한다. 구조주의의 내적 복합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보다 풍부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구조주의의 대표자 중 한 명이었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아날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브로델은 푸코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푸코 역시 자신의 이론과 아날의 친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푸코는 아날의 창시자인 뤼시앙 페브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간주되곤 했다. 여기서 우리는 구조주의를 이끈 푸코가 페브르의 후계자로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브르는 아날의 역사가들 가운데 구조주의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리는 흔히 구조주의의 전성기를 가져온 주역으로 레비-스트로스,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이 네 명을 꼽는데, 이 중 레비-스트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페브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푸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브르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1930년대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정신분석학자 라캉을 인정하고 그를 모든 비판으로부터 옹호했던 인물이 바로 페브르였다. 문학비평가 바르트의 경우는 페브르와 이론적으로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르트의 문학비평과 페브르의 역사학 사이의 이론적 연관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날과 구조주의의 관계를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페브르의 문학사회사가 바르트의 구조주의 문학비평에 끼친 영향을 추적하면서 이를 통해 아날의 역사학과 구조주의가 맺고 있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높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