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교자료 (3) - 역사
1.1.중국 기독교의 역사 중국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635년에 중동으로부터 들어온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을 통해서 였다. 경교(景敎)라고 불리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그후 고위층을 중심으로 210년간 전파되다가 845년에 있었던 당(唐) 무종(武宗)의 반불교도 박해 시기에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후 약 400년 후 원(元) 왕조 시대에 가톨릭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이 당시 수도인 캄발럭(북경)에 파송되었으나 민중 속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후에 명(明)나라 말기에 와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테오 리치 신부였다. 또한 청(淸)왕조 때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번성하였으나 이른바 '전례논쟁'으로 인해 1724년 황제의 칙령으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1807년에 런던 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에 와서 중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번역하는 등 1834년 그가 죽을 때 까지 헌신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조인된 남경 조약 이후로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허드슨 테일러도 이 때 들어와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반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고,1949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교회는 다시 한번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중국의 교회 2.1.삼자 교회 자전, 자양, 자치를 일컫는 삼자는 원래 20세기초 일부 중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외국선교사가 중국교회의 토착화와 자립을 목표로 내세웠던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후 3자 애국운동 위원회가 성립되면서 결국 공산당의 정치적 이용물로 전락하여 실제적인 삼자원칙에 의한 교회 운영을 못하고 일부의 교회와 목회자만이 교회문을 열었지만 정치적 간여가 심해 명맥만 유지다가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1980년에 삼자조직이 다시 조직되면서 부활하게 되었다. 1991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 6천 개의 교회당이 있었던 것을 보아, 현재 1만여 교회당이 있고 그 외에 삼자 측에서 관리하는 집회소는 2만개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한다. 삼자교회나 집회소에 출석하는 교인도 1천만 명을 웃돌 것으로 추정한다. 2.1.1.삼자교회의 애국서약의 핵심적 항목 a)기독교인들은 중국공산당의 4개견지(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견지,중국 공산당지배의 견지, 인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적 독재의 견지,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를 지지할 것이다. b)기독교인들은 정치와 교육, 그리고 결혼이나 가족계획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c)기독교인들은 18세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전도하거나 세례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d)기독교인들은 국가의 모든 법률과 정책들을 따를 것이며, 외국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원조와 문서, 그리고 성경을 포함한 모든 외국교회들의 침투에 단호히 저항할 것이다. e)교회들은 삼정정책(三定政策, 지정된 장소, 지정된 사람, 지정된 구역)을 실천할 것이다. 2.1.2. 삼자 교회의 신학 근래의 삼자 교회 신학의 성격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신학이며 새로운 정치현실 속에서의 자기 변호와 공산당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 그리고 미래의 변화에 안전하게 대처하기 위한 자기 보호적인 성격과 동기를 가진 상황화 신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신학 사상은 공산당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적 환경 속에서 나온 정치적 성격의 신학 사상이다. 겉으로는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됨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삼자 교회의 주요 취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2.1.3. 삼자교회의 신학교 1981년 2월에 난징의 금륭협화 신학원이 복교된 것을 필두로 현재 중국 전역에는 13개의 신학원과 4개의 성경학교가 있다. 이들 신학원의 졸업생은 현재까지 3천여 명이고 교역자의 수는 2천명 미만이다. 신학원은 4년제와 2년제가 있고, 성경학교는 대부분 1년제인데 금륭협화 신학원만이 학위가 주어지며 연구과(대학원) 과정이 있다. 이들 신학교들은 삼자 교회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있는지 중국 신학생들의 신학 교육을 염려하는 분도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교육받는 신학 내용은 상당히 복음적이라고 한다. 또한 이들 신학원들이 공통적으로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첫째, 교수 요원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교수들이 목회를 겸임하고 있어서 연구와 교수하는데 전념할 시간이 없다. 둘째, 젊은 교수진들은 이제 막 신학원이나 연구과를 졸업한 자로서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가르치는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 실제로 필요한 과목(목회상담,예배학 등)이 개설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넷째, 신학 도서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중국 신학원의 상황> 1. 금릉협화신학원: 전국적 모집 1981년 다시 개강 4년제 본과/연구과 및 3년제 통신과정 2. 연경신학원: 북경,천진,하북,북서,내몽고,섬서,감숙,영하,청해,신강 등의 성시에서 모집 3. 화동신학원: 산동,강서,절강,복건, 및 상해 등지에서 모집/ 1985년開/1997년 7월 이전 4. 동북신학원: 흑룡강,길림,요녕3성에서 모집/1982년 開/4년제 본과 5. 산동신학원: 1987년 開/4년제 본과 2년제 과정 6. 안휘신학원: 1986년 開/2년제 과정, 현재 교외에 신축 중에 있음 7. 절강신학원: 1984년 開/2년제 과정 8. 복건신학원: 1983년 開/2년제 과정 9. 중남신학원: 하남,호북,호남,광동,광서,해남6성에서 모집/1985년 開/4년제 본과 및 2년제 과정 10.광동협화신학원: 1986년 開/ 3년제 과정 11.사천신학원: 운남,광주,사천 3성에서 모집/1984년 開/ 4년제 본과 2년제 과정 12.운남성기독교신학원:1988년 신설/3년제 과정(현재 문제가 있어 문이 닫혀 있음) 13.하남신학원: 2년제 과정 14.강서성경학교:1991년 開/1996년 신축이전/1년제 성경학교/ 현재 2년제 신학원으로 신청 중 15.호남성경학교:1년제 성경학교 16.섬서성경학교:1년제 성경학교 17.내몽고배훈반:1년제 성경학교 2.2. 가정교회 중국의 가정교회는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대략 1901년에서 1919년까지 전개되었던 "독립교회운동"과 1919년에서 1927년 사이에 나타난 "중국토착교회 운동" "예수가정운동"이 역사적인 근원이라고 평가한다. 이들은 서구의 여러 교파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치, 자전, 자양의 교회를 원했던 토착화 운동과 연관이 있다. 1949년 혁명에 이어, 삼자회는 교회 기구 조직의 책임을 맡게되고 가정교회는 불법으로 낙인찍혔다. 급기야 1966년에는 모든 교회가 폐쇄되었고, 아주 조심해서 모이는 소그룹만이 살아 남았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 이후 가정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하였고 현재 중국 그리스도인의 80% 이상이 가정교회 교인으로 중국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나단 챠오박사는 중국 가정 교회의 성장 요인 중의 하나를 고난으로 보았다. 즉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성장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이다. 2.2.1 가정교회의 형성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은 중국을 전체주의 형태의 통치로 이끌어 나갔고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당과 정부의 통제와 관리, 제재와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회의 순수성과 정체성이 상실되지 않기 위해 비공인적인 교회공동체를 비밀적, 음성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정교회의 형성요인이 된 것이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성, 발전된 교회공동체이다. 비록 1949년 이후에 형성, 발전되어 왔지만 이전 시대의 토착적인 중국교회전통을 모델로 계승, 발전해 나갔다. 2.2.2. 가정교회의 특징 a)평신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형성 되었다. b)중국의 독특한 환경에서 교회가 형성, 발전되어 왔기에 탈 서양적 교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후 해외와 서양교회의 영향력과 관계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c)항상 정부와 공인된 교회로부터 제재와 금지를 받게 되어 은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d)통일적 조직체로 존재된 것이 아니라 중국전역에 무작위적이며,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면서 존재와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2.2.3 가정교회의 종류 a) 공개적 가정교회 공개적 가정교회란 교회가 공개적으로 존재하고, 활동도 대담하게 전개해 나가는 가정교회를 말한다. 보통 공개적 가정교회의 형태를 취하는 교회는 지도자가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지 인물이거나, 정부와 공인당국의 위협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대 도시에 존재하며, 해외와의 교류도 빈번하며, 정기적인 집회와 여러 활동들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외부인들이나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모임에 참석이 가능하다. b) 반공개적 가정교회 반공개적 가정교회는 교회의 존재가 주변사람이나 정부에서도 알고 있지만 별다른 제재와 탄압을 받지 않으면서 교회의 정기모임은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기타 활동은 비밀리에 모이는 형태의 가정교회이다. 공개적인 정기모임은 주로 소그룹으로 진행하며, 노인들의 모임, 장애인들의 집회, 이웃들과의 회합 등은 표출시키면서도 기타 지도자훈련이나 세례식, 특별모임들은 비밀리에 개최한다. 반공개적 가정교회는 대도시와 농촌 모두 존재하고 있다. c) 비공개적 가정교회 비공개적 가정교회는 모임과 활동이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는데 중국 가정교회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며, 고정 참석자와 허락 받은 자 외에는 모임과 활동에의 참여가 불가능하다.
2.3 가정교회의 활동 2.3.1 공개적인 전도 및 활동 공개적 가정교회는 정부와 공인된 교회의 경고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존재하며 예배 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 등 각종모임, 성경공부와 지도자훈련, 전도활동과 대외교류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2.3.2 정부와 공인된 교회에 대한 항의 성명발표 1988년 3월 24일 가정교회 지도자인 장성재는 전국 인민 대표회의와 전국 정치 협상회의에 신앙자유 문제에 대해 항의편지를 보냈으며, 같은해 4월 3일 당시의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정치 협상회의의 주석인 정광훈에게 삼자회가 교회에 대해 핍박하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해서 항의 편지를 보냈다. (1988년 4월 9일 정광훈 주석의 답변이 있었고, 1988년 4월 16일 장성재의 재 회답이 있었다.) 2.3.3 연합운동 a)연합운동의 계기: 중국의 가정교회는 개혁개방이후 비록 정부의 종교정책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발전을 이룩하였고 1990년대 들어서자 이들 가정교회는 중국 교회의 자립과 자존을 위하고 복음 전도의 확산 그리고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과 다양한 은사의 교류를 위해 교회의 연합운동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있다. b)연합운동의 내용:중국의 가정교회의 연합운동은 각 계파의 가정교회 조직과 행정체재를 하나의 통일된 조직체로 연합하기보다는 정신과 사역협력차원에서의 연합운동이다. 그 내용들은 다음 같다. *교제와 교류: 화중지역의 오순절 계파와 중생파는 성령충만과 방언문제로 1980년대에는 서로를 이단이라고 공격하였으나,지도자층의 연합운동 논의로 교제와 교류가 시작되었다. *자원의 교류: 해외에서 공급받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한 성경, 신앙 및 신학서적 교재 등을 서로 지원하고 교류하고 있다. *은사의 교류:서로 부족한 지도자 훈련의 교수요원을 서로 교류하고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훈련, 문서사역, 교회음악 등이 있다. *연합으로 지도자 훈련과정 개최: 부족한 교수자원과 시설, 물질적 상황아래 각 가정교회는 연합으로 지도자 훈련과정을 개최하여 각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을 확충시키고 있다.
2.4 가정교회의 신학문제 2.4.1가정교회의 신학사상의 형성과 주제 중국의 가정교회는 비공인 교회라는 특징으로 존재와 발전을 해왔기에 공인된 삼자교회와 상이한 신학사상이 형성되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시대적 상황 (사회주의 중국의 전체주의 통치,종교의 존재와 발전의 제한성 등)과 신앙적 경험(고난과 핍박),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과정(비정규적이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의 기독교 학습)이 있기에 독특한 신학사상이 형성되어 갔다. 2.4.2 가정교회의 신학논쟁과 문제 a) 구원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중국의 가정교회에서 심각한 신학논쟁이 되고 있다. 먼저 이 구원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차적 구원후 인간의 행위와 재차 범죄치 않음이 있어야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문제이기에 그리스도 구속의 온전성 영원성 영속성, 절대 은혜성에 대한 문제이다. b) 인간론: 인간은 영, 혼, 육의 존재인가?(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인간론은 단순히 인간의 구성과 본질을 영, 혼, 육으로 나누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과 문화 이해에 직결이 되어있고 또 기독교인의 성화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하나님과 성서, 교회와 기독교 이외의 것은 모두 혼적인 것 내지는 육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멸시하고 적대시한다. 그래서 지식, 문화유산, 과학 등을 모두 무가치한 육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c) 성령론 ???)성령충만한 자는 필연적으로 방언을 하는가?(사도행전 19장 6-7절) ???)성령충만의 표증으로서 방언의 강조는 신도의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성령충만의 증거로서 인격적 증거(사랑,희락,화평 등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보다는 초자연적 현상을 강조하므로 (방언,예언등)기독교인 사이의 열등감과 교회의 혼란현상을 조성하였다. ???)은사의 분배: 은사는 성령이 성령의 뜻대로 주는 것인가? 아니면 은사있는 자가 전수해 주는 것인가?(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장 11절) 은사를 받는 길은 두 가지로써 하나는 성령으로부터 직접받고 또 하나는 은사받은 이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이런 은사 전수론으로 인해 은사 추구에 잘못된 양상이 초래되어 가정교회 내 이단 형성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d) 가정교회 신학의 문제점과 과제 ???)가정교회 신학도 과거에는 고난이 가장 큰 신학주제였지만, 현대 중국사회가 점차 물질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이 생겨난 신학문제를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경제 직업 현대화에 대한 신학적 논의와 정립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과거에는 가정교회의 보수적 성경해석과 신학경향은 [현실=고난 승리법=믿음]으로 당연한 신학주제와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었지만 현실이 다양한 되어가는 상황에서 '오직 믿음'의 논리가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있을 지가 문제이다. ???) 현대중국의 중요한 사상주제인'중국의 전통문화와 현대화 문제'를'개인구원과 교회론'에 집약된 가정 교회의 신학사상이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이는 기독교 사상과 신학이 현대중국 사상의 형성과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사회주의 중국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배경속에서 발전한 기독교회의 한 형태이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생겨났으며 독특한 교회형태와 발전을 이룩하여 중국의 주류적 교회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중국 가정교회가 양성화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 통치의 사회 완화와 사회의 다양화된 변화에 관계하며, 양성화된 가정교회는 향후 중국 가정교회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된다. 가정교회 사이에 전개된 연합운동은 가정교회가 발전을 이룩한 증거이면서도 한편 교회발전의 필연적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이 연합운동은 점차 확산되어가는 연합에 대한 당위성 필요성 ,급박성 현실성으로 인해 장기적 현상으로 중국의 가정교회 내에서 지속될 전망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가정교회가 해외선교를 하는데 좋은 여건을 제공하고 있으며 유일한 신학논리와 오직 한가지 사상만 강조했던 교조적인 틀을 넘어서 교회의 신학을 다양하게 전개하고 시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최근의 중국의 중국가정교회의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비록 중국의 가정교회가 많은 문제와 과제가 산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가정교회가 현재 성숙과 새로운 발전을 향해 도약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출처: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