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수대첩
1)정의; 612년(고구려 영양왕23년) 중국 수(隋)나라의 양제가 군대를 고구려가 살 수(청천강)에서 크게 격파한 싸움
2)역사적 배경
수나라 문제(양견)가 선양을 통해 제위에 올라 남조인 진을 멸망시켜 중국 남 북조시대를 통일왕조로 이룩한다.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동 쪽으로 신장(伸長)해 올 것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598년 고구려가 말갈족과 함께 요서를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자 수문제는 고구 려 원정을 명하게 된다 .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재해로 인해 실패하고 원정을 중지 한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 때 고구려는 수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 과 상통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수의 신경을 또다시 날카롭게 하였다.
3)과정
양제가 친히 거느린 육군의 1개 부대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공격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초조한 수나라군은 별동대(別動隊) 30만 5000명을 압록 강 서쪽에 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챈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살수(청천강)와 압록 강을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쳐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허실을 탐지하 고 돌아온 뒤 그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침입한 수나라군의 대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1편의 시(詩)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수군은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으나 을지문 덕은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감행해 대승을 거둔다.
4)결과
이 전쟁에서 수나라는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년과 614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오히려 이로 말미 암아 수나라 내부의 동요가 일어나 종말을 재촉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도 거듭되는 수나라의 침공을 격퇴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를 신장시켰으나, 반도 내의 삼국 간에는 전쟁이 계속되어 많은 국력의 소모로 뒷 날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2.고구려의 대당 전쟁
1)정의 ; 644년(보장왕 3)에서 668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와 당(唐)과의 전쟁.
2)역사적 배경
초기에 우호적(포로 1만명 송환)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 등 장 후 당과 신라에 강력한 대외 정책을 시도했다.
대수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통일 중국 세력의 팽창 정책 에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 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 응하자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3)과정
①당태종의 1차 침입; 644년 부터 신성 개모성 요동성, 비사성, 백암성을 함 락 시킨후 6월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원정한다.
안시성 전투는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 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끈질긴 항전 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이다.
645년 4월 1일 여러개의 성을 함락시킨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 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토산(土山)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그러나 갑자 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 하여 승리를 거둔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야사(野史)에 양만춘 이라고 전 하나 정사(正史)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②당태종의 2차 침입(647년)
고구려는 647년에 재개된 제2차 대당전쟁에서 당군의 화공으로 말미암아 남성을 비롯한 북쪽 변경의 크고 작은 여러 성과 그 주변일대가 초토화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남쪽 변경지방의 여러 성도 당군과의 격렬한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③당고종의 말기 침입(661~668)
이 시기는 최후의 결전기였다. 당에서는 대병력을 연속적으로 투입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사력을 다해서 항전했지만 끝내 방어벽이 무너지고 국망민산 (國亡民散)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3)결과
고구려는 대당전쟁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쇠진해진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데다 최고집권층 내의 분쟁과 반역 행위가 일어나자 고구려의 저항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마침내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645년부터 시작된 대 당전쟁은 668년 결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