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그의 일관된
정신은 애국애족이고 이나라 독립이며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이다. 1978년에 태어나
젊은시절 국내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선생님이 (이하
존칭 생략) 새로운 문물에 접하고 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미국땅에 첫 발을 내 딛은것은 1902년
10월이다. 이로부터 미국을 근거지로 조선, 중국 등지를 넘나들며
그의 뜻을 펼처나간다. 미국의 이민역사는 우리동포가 하와이에 집단
으로 이주한 1903년부터 시작되지만 도산은 그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민 한인들의 중심적 위치에서 활동을
벌려 나갔다. 미국을 마지막 떠나던 1926년까지 미국에서 결성한
공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국민회, 그리고 그가 세운 학교는
미국 한인사회의 중심이고 본국의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미국 이민사는 안창호와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산 안창호와 초기 미국 이민사 김영우 다큐멘터리
이런 얘기를 미국에서 50년간 방송활동을 한
김영우선생님이 50분 다큐멘터리로 제작 "춘하추동방송"에
제공 해 주셨다. 필자가 아직 몰랐던 얘기 못 보았던 사진영상 등등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접하면서 여러번에 걸처 반복 보고 들었으며
산진을 갶쳐하면서 이 글을 쓴다. 김영우 선생님은 미국에서 제작한 그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넣었고 안창호 대전형무소 출감
직후의 사진 등은 미국에 사는 "수산 안 커디"를 비롯한 그 가족 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구하기 어려운 사진들이라고 했으며 사진으로 표현 할 수 없는 화면은
스스로 그린 삽화를 사용했다. 도산에 관한 설명은 그의 딸 "수산 안",
외손주 "커디 Cuddy" 등으로 부터 들은 생생한 얘기로 엮어졌다.
김영우 선생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동영상, 오디오,
사진과 함깨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 올린다.
동영상 보기
동영상 보시기 오디오를 먼저 끄셔요.
김영우 선생님 글
이 글을 보신 김영우 선생님께서
다음 글을 이메일로 보내 오셨습니다.
도산 션생님의 전기를 불록에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심혈을
기우려 제작한 이 작품이 한동안 도산선생의 외손자
Cuddy 에 의해 DVD 원본이 한국과 미국내에 여러 교육기관에
배포됬을 뿐이였는데 이번에 춘하추동방송의 이 국장님의 성의로
Internet룰 통해 세계전역에 알려지개 된것을 흐믓하게 생각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젼기는 수십권의 책으로 엮어도 모자랄 정도로
광범위 합니다. 그러나 도산선생의 조국광복을 위해 활약했던 중에서
대성학교 창립, 신민회 조직,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립 등은
중국은 물론 민주, 시배리아, 호주, 맥시코등 세계 각처룰
순회하변서 이룩한 도산 선생 업적에서 극히
중요한 사건들입미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수산 안(수잔 안) 커디 Susan Ahn Cuddy 애국자 도산 안창호선생님 큰딸
http://blog.daum.net/jc21th/17782174
이승만 건국대통령, 독립운동
http://blog.daum.net/jc21th/17781841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02년 10월
14일의 일이다. 조선조 말 못살던 사람들이 흉년 등으로
어려움을 격던시절, 미국과 이민조약을 체결하고 1903년 1월 12일
102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를 미국
이민사의 시작으로 보고 그로부터 올해로 111년이 되었다. 안창호는
그에 앞서 2002년에 샌프란시스코에도착한 것이다. "집조"라는
대한 외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미국에 온것이다.
이로부터 도산의 미국생활이 시작된다.
김영우 아나운서가 스스로 그린 도산 내외분의 미국도착 그림
도산이 미국에 도착 했을때 인삼을 파는
한인 두사람이 미국인들 앞에서 상투를 잡고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인삼 판매영역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미국으로부터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도산은
미국인들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해서 친목회를 구성하고 판매영역을 조정해주면서
교육을 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공립협회 조직과 공립신보
1904년 리버사이드로 옮긴 도산은
오랜지농장에서 노동일을 했다. 초기 이민사에서
미국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활을 위해 노동으로부터
삶이 시작 된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농장주로부터 신임을
얻은 도산은 한국인을 끌여들여 일자리를 마련 해 주었다. 이 무렵
하와이에 와 일하던 한인들이 미국 본토를 찾고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공립협회를 구성해서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힘을
기울이고 학교를 세워 교육에 임하면서 공립신보(共立
新報)를 발간해서 뜻을 실천 해 나갔다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평양 대성학교
1904년 노일전쟁으로 거칠것이 없던
일본은 1905년 조선과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산은 1906년 귀국 , 미국에서 창안한 신민회를 구성했다.
1907년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단체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해서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
(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해서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도산의 외손주 커디
흥사단 결성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한일합방이 있기직전 한국을
탈출 배이징을 거쳐 청도로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온
도산은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했으며 신민회 탄압을 위해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와 대한학우회가 해체되면서 1913년 5월 샌프란 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했다. 나라가 독립된후 나라를 이끌 일군을 기르는 등 큰 뜻이
담겨있어 미국 유학생들을 비롯해서 많은 뜻 있는 인사들이 흥사단에
들오왔고 오늘까지도 그 정신이 이어오고 있다.
대한인 국민회 탄생 (도산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협성회 통합)
1908 년 애국의사 전명운과 장인환이
고종황제의 외부고문이었던 스티분스Stevens를
저격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을 위해 일했어야 할
스티분스가 성명서를 통해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한것은
정당하다." 는 발언을 해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전명운과 장인환이 이를 저격 사망케 라지 재미 한국인들은 의사
전명운과 장인환을 구명하기 위해 도산이 결성 운영하던
공립협회와 하화이 거주민들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인협성회를 통합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 총회장에 안창호,부회장에
박용만이 취임했다
스티분스
전명운
장인환
박용만
해멧사건과 국민회
2013년 해멧에서 백인들이 한인을
일본인으로 오인해서 배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해멧사건, 백인들이 한인들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서 한인들이 사는 동내를 습격하고 농장에서 일을
못 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도산은 영어에 능한 이대위 목사와
함께 미국정부에 탄원서를 낸다. 일본정부가 관여 "한국은 일본의
속국임으로 한국인들이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면서 미국정부가
관여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도산은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은
한.일합방전에 이주한 것임으로 일본의 지배를 밪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본인과 달리 대우해 줄것을 역설했다. 마침네 미국정부는 한인을
일본인과는 다른 독자성을 인정 하기로 했고 국민회에 그
대표성을 주었다. 도산의 외손주 커디씨는 "국민회를
일종의 대사관으로 인정했다." 고했다.
도산 안창호
이대위 목사
윌리암 재닝스 브라이언 미국 국무장관
상해 임시정부 창설과 총리서리 도산 안창호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는 임시정부수립을
서둘렀다. 임시정부 수립이 꿈이기도 했던 도산은 상해로 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다음달 1919년 4월10일과
11일 이틀 동안 각 도 대표 자격으로 항일지사 30명이모여 임시 의정원을 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 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총리로 선임된 이동휘는
상해애 없었고 대통제를 주장하던 이승만 역시 상해에 오지 않았다. 도산이 임시정부
초대 총리 서리를 맡았다. 4개월간의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며 그해 8월 18일부터 열린
제 6 차 임시회의에서 대통령제 헌법을 공포 대통령에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외무총장 박용만,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총판
안창호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위 사진은 8월 18일 제6차 임시회의
폐회 기념 사진으로 도산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도산의 미국에서 마지막 모습
도산은 1926년 미국을 떠나 중국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거로 국내에 압송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위 사사진은 미국을 떠나기전 가족들과 촬영한 사진이다. 도산은
세 아들과 두딸이 있었지만 이 사진에는 두 아들과 두 딸이 함께 했다.
부인 이혜련 여사와, 수산 안 커디 그리고 그녀의 두 오빠 큰 오빠
필립 안과 둘째 오빠 필선 안, 여동생 수라 안이 함께 한 사진
이다. 아래는 미국을 떠나던 도산의 마지막 모습이다.
위 아래 사진은 중국에서 활동 하던때의 모습을 김영우 아나운서가 손수 그려 올린그림이다.
도산 안창호의 최후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사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로 13년간
이곳에 있었던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오르고
도산은 채포되어 본국으로 송환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 했지만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다시 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었지만 오랜기간의 고문과
옥살이로 심신이 쇠약해져 1938년 해방을 보지 못한채 향년 60세로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애국애족과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도산은
교육으로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고 굳게밑고 실천 해 나갔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1962년 최고의 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강남에는 도산공원이 있고 그 안에
기념관이 있다. 미국에는 그를 기념하는 여러 시설이 있고
기념관이 있다. 2002년 미국 LA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 이 생겼으며 2012년 1월 아시아인 최초로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루서킹센터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파일:177]
출처: 이가인의 기다림 원문보기 글쓴이: 이가인(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