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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우리도
히브리서 11:8-16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11)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12)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나 늙은 아브라함에게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갈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녀들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룬 것입니다. 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누가복음 18:1-11은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어 재판관에게 찾아갔다. 그런데 재판관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의 억울함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럴지라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집요하게 ‘재판관님! 제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세요!’ 하며 찾아와서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며 귀찮게 했다. 누가 과부의 간구를 중언부언(重言復言)이라 하겠는가? 결국 의롭지 못한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며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주시지 않겠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다음에 예수님이 덧붙이신 말씀이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을까? 앞의 내용보다 더 강조하시려는 아니 탄식하시는 말씀이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할 것인지 … .’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원한이 풀려지는 것이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참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었다.
육신의 고향 땅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 75세였고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서 100년을 지내다가 175세에 죽었다.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장막은 텐트(tents)라는 것으로 일시적인 처소이다. 100년을 아브람은 유목민의 거처인 텐트에서 살았는데, 대궐은 아닐지라도 몇 백 평 정도 아니 몇 십평의 집을 마련하고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살지않고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삶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고 고단했는지 ….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법적으로 아브라함은 아내의 매장지로 썼던 막벨라 굴 외에는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가나안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받아야 할 유업이 죽음과 함께 받을 하늘 가나안 즉 천국이다.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래(창 12:4) 175세로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창 25:7) 험난한 나그네 생활을 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도 그의 생을 가리켜 ‘범사에 하나님께 축복받은 삶’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그의 삶 전체가 의롭게 하시고, 믿음의 아비가 되게 해주신 것(17:5)을 의미하지 단순히 물질과 권력, 건강 등과 같은 축복을 내려 주신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라 잠시 나그네로 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에 속한 신앙생활이 아닌 하늘나라를 목표로 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그만 어려우면 ‘애굽! 애굽!’ 하듯이 만일 아브람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다가 네 재물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듣자 침울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이 바라본 것은 아직도 하늘 소망이 아닌 세상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 복락을 누리는 것이었다. 연이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자.
눅 18:24-30 / 예수께서는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6)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저희는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왔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제사장이 있고, 레위인이 있고, 백성들이 있듯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이 땅의 기업이 없을 뿐이다. 사도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민 18:20-24 /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땅으로 들어가 땅을 나누어 갖더라도 네게 돌아갈 땅은 없다. 너와 네 후손들에게 어떤 몫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나 여호와가 너와 네 후손들이 받을 몫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바치는 예물을 너와 네 후손들의 몫으로 주겠다. … 23) 오직 레위인만이 장막에서 일을 볼 수 있으며 장막에서 일을 볼 책임을 지고 있다. 이것은 너뿐만 아니라 네 후손들도 영원히 지켜야 할 규정이다. … 24)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 여호와에게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몫으로 준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 그들 몫을 나누어 갖는다 해도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는 까닭이다.”
■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태어난 프란시스는 18세 되던 해에 신분상승을 꿈꾸며 기사가 되고자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씨시의 패배로 끝났고, 그는 1년 동안의 포로생활로 병을 얻어 돌아왔다. 병상에 있는 동안 깊은 영적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으나, 기사가 되고픈 꿈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일행이 스폴레토 계곡에서 머물 때 ‘프란시스야, 너는 어찌하여 주인 대신 종을 섬기려 하느냐?’ 하는 말씀과 아씨시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씨시 근교 외딴 곳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1205년경 어느 날 그는 아씨시 교외에서 한센병(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나병환자를 무서워 피했던 그는 이번에는 말에서 내려 와 그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자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만남으로 그는 온전히 세속을 떠나게 되었다. 어느 날 다 허물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경건하게 엎드렸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프란시스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이 말씀에 따라 프란시스는 세 개의 성당을 수리하였고, 그 후 이 말씀이 교회를 영적으로 고치라는 소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굉장한 부자였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걸 주위에 나눠줄 뿐이었다. 마지막에는 ‘제가 가진 돈과 앞으로 받을 유산, 그리고 옷가지를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드린다.’고 하며 복음전파를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였다.
▶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도 노아 때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시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단지 사람들에게 ‘그러니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인자는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고도 없이 올 것이다.’고 하셨다. 아울러 하신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되새겨야 할 교훈들이다.
마 24:39-42 /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휩쓸려 갈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올 때도 그럴 것이다. 40) 그때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 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 둘 것이다. 42) 그러니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 주인이 언제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리라.
위의 말씀들은 세상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에, 세상 직업을 갖는다거나 일을 할지라도 세상에 빠지지 말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언제나 에녹, 아브라함,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레위 지파와 같다. 성도의 기업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보면 이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게으르지 말고 성실히 살아야 한다.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삼는 성도는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도라면 양식보다 귀중하게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성도의 모습이요 그것이 영적 레위인들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면 영적 레위 지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레위인들처럼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영광의 나라 / 1. 너무나도 아름답도다 주님계신 영광의 나라 너무나도 귀하도다 주님계신 영광의 보좌
아 ~ 저 영광의 나라 내가 사랑하오나 죄 가지곤 갈 수 없어 주님계신 영광의 나라
2. 금은보화 다 준다해도 나는 나는 기쁘지 않아 내 주님만 바라보니 세상 영광 부럽지 않아
아 ~ 저 영광의 나라 내가 사모하오니 거듭난 자 갈 수 있어 주님계신 영광의 나라
3.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기름 등불 준비합시다 주님나라 고대하리니 깨어있어 기도합시다
아 ~ 저 영광의 나라 나를 기다리오니 할렐루야 나는 가리다 주님계신 영광의 나라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고(요 4:3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 2:15, 17).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며, 먹고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일들도 해야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일을 힘써야 하는 사람들이다(고전 10:31 /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눅 18:29-30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➊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➋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누가복음 18장과 19장에는 비교되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부족한 것을 실천하자.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사람은 부자로 관리라고 하였고, 19장에 나오는 사람은 세리장 삭개오이다. 이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➊ 두 사람 다 부자이며 ➋ 두 사람 다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➌ 두 사람 다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 두 사람은 이렇게 같은 점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결과는 아주 달랐다. 부자 관리는 올 때는 당당하게 왔으나 결과는 근심이 가득 차서 돌아갔고, 삭개오는 쭈뼛거리며 예수님을 만났으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이 부자 관리는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지만 그 속에 진정한 거듭남의 생명이 없었고, 계명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다가 네 재물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셨다.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자 침울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감동과 감사, 헌신이 뒤따르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니 헌신과 희생의 정신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모든 것을 헛되게 만들었다. 결국 이 부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왔다가 근심이 가득하여 돌아간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권면한 말씀에 매우 충격적이었다.
약 2:12-14 /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생각하든 또 어떤 행동을 하든 늘 살피고 주의해서 하십시오. 13)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비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남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심판을 면해 주실 것입니다. 14)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약 2:18-24 /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될 뿐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한 행동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한 행동이 없이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9)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약 2:20)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입니다. 23) 이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셨다'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반면 삭개오도 돈과 권세도 있었다. 그러나 돈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돈이 그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지 못하였다. 삭개오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그럴 듯 했지만, 텅 빈 영혼 속에 허무함이 크게 밀려왔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했다. ‘멀리서라도 그 분을 한번 뵈어야 하겠다. 어떤 분이시기에 병든 자가 만나면 고침을 받고, 어떤 분이시기에 상처받은 사람이 만나면 치유함을 얻고, 죄인들도 만나면 변화가 되는 것인가. 어떤 분이시기에 ….’ 그리하여 삭개오는 체면도 상관없이 나무로 올라갔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자 삭개오를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 삭개오는 초면에 자기 이름까지 부르시는 예수님 그리고 자기네 집에 머물겠다는 말씀에 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눅 19:6). 삭개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➊ 급히(얼른) ➋ 내려와 ➌ 즐거워하며(기쁜 마음) ➍ 영접하거늘(모셨다)
네 가지 행동이 지체없이 이루어졌다.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을 때에 삭개오의 입은 벌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하였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수근 대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에 감격하였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모셔서 대접을 하는 동안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동안 체증처럼 가슴 한가운데 답답하게 꽉 막혔던 것들이 쑥 빠져나가면서 감사와 기쁨이 소낙비처럼 내려와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삭개오는 심령의 변화가 왔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가치관이 달라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사는 방법에 변화가 왔다.
나 중심의 삶 → 하나님 중심의 삶 / 물질 중심의 삶 → 말씀 중심 / 육신 중심의 삶 → 영혼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이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엡 4:21-24 /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 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모습을 가르켜 영접(迎接)이라고 하며, 이렇게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영접한 사람에게서는 이런 고백이 나왔다.
눅 19:8 /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계셨던 예수님은 지체없이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이다. 나, 인자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왜 부자는 이름이 없고, 나사로는 이름이 있을까? 아무리 부자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존재이기에 이름이 없다.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어 보이는 거지라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삶은 그 이름이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심)라고 나온다. 누가복음 18장과 19장에서 똑같은 부자 사람인데, 한 사람은 그냥 부자로 나오고 또 한 부자는 ‘삭개오’(청결한 사람)라고 이름이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있고,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 유명한 배우 오드리 햅번은 1929년에 태어나서 1993년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전쟁과 평화’(1956), ‘로마의 휴일’(1953)등이 유명한 영화이다. 그 청초한 아름다움에 모두 반하였다. 그러나 오드리 햅번이 유명한 것은 영화배우로서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인생의 후반부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과 생활과 재물을 다 바쳐 헌신한 인생을 살다가 갔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나는 사람이다.
어떤 회사홍보광고에서 이 두 번째 사진을 크게 싣고 그 밑에 이런 글귀를 써 놓았다.
‘우리는 오드리 햅번의 아름다운 얼굴을 스크린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오드리 햅번의 얼굴은 쭈그렁 할머니 모습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얼굴이 아니라 삶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였을 때에 모습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도 반론하지 못하는 것은 미모보다 그녀의 인품과 행적이 참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따라서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할까? 하나님께서 겉모습으로 우리를 평가하실까? ‘어떤 믿음, 어떤 가치관, 어떤 영혼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삶일 것이다!
▶ 3년 동안 특별 교육을 받았던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하늘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하셨다.
요 13:33-35, 14:1-2 /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떠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떠나가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말하였던 것과 같이 너희가 나를 찾더라도 찾지 못할 것이다. 34)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으로 너희가 네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기 전까지도 제자들은 육신에 속한 나라 소망을 버리지 못하였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세상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늘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온전한 믿음 중 최고의 단계는 자기를 부인(목숨까지)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하신 말씀을 보자.
요 18:36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내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붙잡혔을 때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항하였을 것이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나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구하는 핵심적인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면서 구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었다.
마 6:9-10 /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외침은 하늘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처럼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마 4:23 /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온갖 병자와 앓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4:17, 마 9:35, 마 10:5-8).
마 5:3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0 /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20 /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7:21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 8:11-12 / 이 백부장과 같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늘나라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
마 13:44 /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흥분하여 그 밭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다. 그래서 밭을 살뿐만 아니라 보물까지도 얻는다(마 13:45-46, 47-48)
마 16:19 /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마 18:3-4 /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마 25:1 / 하늘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유할 수 있다(마 25:14-15).
▶ 아브라함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땅을 얻는 것이 자신의 순례여정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지으신 영원토록 견고한 도성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세상의 덧없는 현실을 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축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장차 그에게 임할 영광의 빛 안에서 보았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임할 영광에 비교할 수 없음도 알았다. 그러기에 가나안의 어렵고 고단한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마 16:24-26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4. 아브라함처럼 과감하게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자.
1.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성령님의 뜻을 따라 남은 생애를 살아가자.
요 8:31-36 / 예수께서 자신을 믿는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너희는 참된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32)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 땅 위에서 살며 어느 누구의 노예도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3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는 하나같이 죄의 노예다. 35) 노예는 권리가 없지만 아들은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36) 그러니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해줄 때 비로소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진리로 우리 자신을 가꾸어 가다보면 자유하는 사람이 된다. 구원이 무엇인가? 죄의 속박, 유혹, 하나님과의 결별인 영적 죽음, 악한 영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는 생명과 빛, 권세가 있었다.
■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수차례 탈출을 시도한 끝에 악마의 섬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주인공은 탈출하기 전 친구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한다. 친구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주인공은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악마의 섬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외칠 때 남아 있던 친구는 이렇게 독백한다. “네가 아무리 탈출에 성공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너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리.” 이 영화는 실화이다. ㅡ티브 맥퀸이 연기한 주인공의 실제 인물은 프랑스의 앙리 샤리에르라는 사람이다. 빠비용에 보면 주인공이 왜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고 했는지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빠삐용의 속편 빙꼬에 나온다. 1930년 앙리 샤리에르가 스무살 때 파리 시내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근처에서 그 시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앙리는 그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실적이 눈이 먼 검사가 현장 근처에 있던 앙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살인자로 누명을 씌워 감옥에 넣는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검사에게 복수하려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결국 아홉 번의 시도 끝에 14년 만에 탈출한 샤리에르는 남미 곳곳을 다니면서 갖은 일을 하여 돈을 모았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형법상 공소시효가 지난 1967년에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파리로 돌아간다. 자기가 젊었을 때 다니던 거리, 부모님과 함께 다녔던 장소, 어릴 때 꿈꾸던 미래를 떠 올리면서 마음을 바꾼다. 샤리에르는 살인범으로 억울하게 체포된 그 장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댓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분이다. 너는 여기에 있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나는 지금 확인하고 있다. 이 일에 관계된 사람중에 네가 가장 행복한 자임을..’" 앙리는 복수하러 간 그 곳에서 복수와 증오로 부터 자유를 얻었다. 37년 동안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던 ‘자기’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보완해 주셨다. 아니 이 말씀은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용서를 받은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 모두는 이 말씀에서 벗어나서도 안 되거니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귀중한 말씀이다. 만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힘입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당연한 공식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사울 왕처럼 악력에게 억매임을 당하여 시달리게 된다.
마 18:21-22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마 18:23-35 / [무자비한 사람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춰 보는 것에 비할 수 있다. 24) 셈을 하는 중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나왔다. 25) 그가 빚을 갚을 돈이 없음을 알자 왕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29)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30)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35)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건만 왜 우리들은 그렇게 못하고 있는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하려면 하나님께 도우심을 요청하자. 마귀는 자꾸 우리를 충동하여 경건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자꾸 우리의 마음에 경건하게 살기를 독려하신다.
갈 5:19-25 / 여러분이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여러분의 생활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곧 더러운 생각, 육신의 쾌락을 찾는 마음, 20) 우상숭배, 마술, 헐뜯음과 싸움,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 불평과 비판적인 태도, 자기의 작은 당파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와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교설 21) 시기, 살인,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따위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한번 더 당부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22)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4)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려고 한다면 성령께서 꼭 도와주실 것이다.
롬 8:26-28 /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실한 감정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27)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아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간구하시는 성령의 뜻을 다 알고 계십니다. 2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살아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유익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 오해에 앞서 배려하는 넓은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자.
분노와 미움, 다툼은 사랑하지 못하는 중에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에 대하여 자유스러울 수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인 창세기 13:5-11을 보자.
■ ○○○교회에서 있었던 일 / 옷가게를 하던 교인이 있었는데, 어떤 고객이 티셔츠를 사갔다가 바꿔달라고 왔다. 그런데 옷이 교환해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바꿔줄 수 없다고 하다가 싸우게 되었다.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가벼운 부상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하게 되었다. 웬만하면 화해를 시켜보려고 만나보니, 그 쪽도 이웃 교회 집사였다. 이렇게 서로 교인인 것을 알았으면 그 때라도 그만 화해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끝까지 싸웠다. 결국 티셔츠 하나 때문에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고 말았다. 믿는 사람들끼리 어쩌면 그렇게 악랄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지 놀랐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했겠는가? 그들은 그래도 믿는 사람들은 더 나을 줄 생각하는데,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했으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람들은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황금만능주의> 세상이라고 한다. 돈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맘모니즘(Mammonism)‘이 판을 치고 있다. 맘모니즘은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맘몬(Mammon)이란 말은 ’나는 믿는다‘(I believe)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하나님께서 앉아야 할 자리에 돈이 앉아 있다. 돈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믿고, 돈이 나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해준다고 믿고,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믿고 있다. 목숨 걸고 돈에 집착하다보면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오죽하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앞으로도 그 어떠한 것보다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돈 때문에 예의가 사라지고 있고, 돈 때문에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도 잊혀져가고 있고, 돈 때문에 가족관계도 허물어지고 있다. 한 마디로 돈이 세상을 막 가게 만들고 있다. 과거 가난해도 정답게 살던 시절도 있었다. 당장 끼니걱정을 하더라도, 가정에 웃음이 끊어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1년 한 두 차례 삭월세방, 전세방을 전전하더라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돈이 있는 부잣집에서는 유산 상속 때문에 송사가 벌어지는 것이 예삿일처럼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잃어버렸다. 돈보다 사랑이 중요하고, 돈보다 명분이 중요하고 돈보다 가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브라함과 롯과의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 마치 이와 같았다. 그것도 이방인들 앞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 싸움도 잠깐 실랑이가 벌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과거에 물이 귀했던 시절에 시골에서 논에 물을 대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심하면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아브라함과 롯과의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 바로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아브라함과 롯이 해결할 수가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롯과의 갈등은 단순히 이권에 관한 것 보다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일을 속히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풀고자 했던 것이다(8-9절).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먼저 푸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지? 안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술 한 잔씩 마시면서 쉽게 푼다는데, 믿는 사람들은 잘 풀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믿음은 형편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롯을 찾아간 아브라함은 롯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우리가 만일 이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문제는 더욱 꼬이고 어렵게 된다.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우리는 한 친족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싸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 문제가 생겼을 때,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느냐?’ 하고 따지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싸울 사이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사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면서 이 문제를 풀고자 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내가 챙길 것 다 챙기려고 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마음에 드는 땅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사실 롯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삼촌을 따라왔으며, 또 아브라함이 어른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우선권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조카를 이해하며 또 긍휼히 여겼기에 기득권을 양보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롯은 다툼 없이 기쁨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남아프리카 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영국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사전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지만, 추장 한 명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이에 함께 있던 영국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자 갑자기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오신 손님들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남아프리카를 통합하자는 여왕의 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한다. 만약 여왕이 무례하게 식사한다고 큰소리로 손님들을 책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한 사람은 이처럼 부요하고 관대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요하고 관대한가? 라오디게아 교인은 아닌지 되돌아보자.
계 3:17-18 /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충고한다. 불로 제련된 순금을 내게서 사라. 그것만이 네가 참다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흰옷을 내게서 사라. 그래야 너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네 눈을 치료하려거든 내게서 안약을 사라. 그러면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3. 아브라함처럼 떠나야 할 것은 떠나지 아니면 롯과 같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것은 모든 면에서 결코 잘한 것은 아니다.
창 12:4-5 /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아브람을 따라 길을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에 온 것은 참 잘한 것이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 또는 하란과 같은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요단 들녘에는 물이 매우 넉넉한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였고 또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던, 여호와께서 멸망시키기 전이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내려갔을 뿐 아니라 요단 들녘에 마음이 끌려 동쪽으로 옮겨 갔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이렇게 해서 헤어져 살게 되었다.
롯의 소돔과 고모라의 생활에 대하여 베드로후서에는 잘 표현되어 있다.
벧후 2:6-8 / 그 후에 또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시고 땅 위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다 후세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7-8) 그러나 주께서는 롯을 소돔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인 그는 날마다 소돔 사람들의 끔찍스런 악행을 보고 몹시 마음 아파하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롯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죄악의 낙을 즐기지 않고, 그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세상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말미암아 롯은 심령이 상했다. 롯은 자신이 범죄했을 때에도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지만, 소돔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고 음란한 짓 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괴로워하고 탄식하며 마음 아파했다. 이것이 의인의 마음이요, 거듭난 성도의 마음이기도 하였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직전까지 롯은 무엇을 하였는가? 아브라함의 기도처럼 거대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롯의 식구들을 포함하여 의인 10명이 없었다는 것은 롯은 그곳에 사는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한 안타까움만 줄 뿐이다. 사위들조차 천사가 전하여 준 말을 하는 장인 롯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여겼으니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점점 밝아오고, 롯이 계속 꾸물거리자 천사들은 답답해서 롯 부부와 두 딸의 손목을 잡고 성밖으로 끌어낸다. 그리고는 일행에게 평야를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산속으로 도망치라 하지만 롯이 간청하는 바람에 근처의 작은 성(소알)에 피신하도록 허락한다. 이후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 유황과 불덩어리들이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는 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밖으로 나간 아브라함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연기만 나고 있는 소돔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롯의 아내는 소돔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져서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천사의 열정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 살아남은 사람은 3명밖에 안 되었다. 그동안 살던 집,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재물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것도 여호와께서 롯이 살던 그 계곡의 성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그의 조카 롯이 몸을 피하도록 배려하셨다(창 19:29).
아무리 교회의 일원으로 봉사를 했을지라도 아브라함처럼 경건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경고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믿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보며 우리도 그렇게 살아 영생복락을 ….
창 13:14-17 / 아브람과 롯이 서로 헤어져 살게 된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15) 네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땅을 내가 모두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 땅이 너희의 차지가 될 것이다. 16) 또 내가 네 후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겠다. 땅의 티끌만큼이나 많게 할 것이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모두 셀 수 있다면 네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겠다. 17) 그리고 온 땅을 사방으로 왔다갔다 해보아라. 내가 그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
아브람은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척박해 보이는 땅이었지만 믿음으로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붙들었다. 그 땅을 떠나지 아니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그리울 때에 하나님 찾아와 주셨다. 아브람에게 확신이 필요할 때에 말씀이 필요할 때에 말씀을 주셨다. 새로운 꿈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꿈을 보여 주셨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복이 무엇일까? 영안(靈眼)이 열리는 것이다. 롯을 떠나보낸 아브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동서남북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이었다. 유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지옥의 불쏘시개나 개처럼 취급처럼 이방인들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나서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다. 버려진 땅 밧모섬에서 그는 죽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눈이 열려져 하늘을 보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영원히 살 새로운 천국의 꿈을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다.
구 소련은 알래스카를 얼음덩이로 보았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알래스카를 보물창고로 보았다. 단 720만 불에 미국 본토에 1/5이 넘는 알래스카를 사들이게 되는 것이다. 거기는 군사기지였고 거기는 무궁무진한 석유와 보물들이 가득히 숨겨져 있었다.
L. 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 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께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다.
■ 영국에 어느 마을에 부모를 일찍이 여윈 채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에드워드 윌리엄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다. 너무 너무 가난해서 하루하루 살기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꿈을 안고 어린 소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보스턴에 자리를 잡고 거리에 신문가판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항구를 떠날 때에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늘 기억했다. ‘너 있는 곳을 복되게 하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30분 먼저 신문을 설치해 놓았다. 매일같이 그곳에서 신문을 사서 읽던 커티스란 출판사 사장이 보니까 너무나도 성실하여 신문사에 청소부로 취직해 주었다. 너무나도 성실하여 정식 사원으로 채용했다. 마침내 열심히 일한 그는 판매부장이 되었고, 경리부장으로 승진되었을 때에 그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탄복한 커티스 사장은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다. 그리고 편집국장, 총지배인을 거쳐 마침내 거티스 출판사 사장이 되었고 미국 최고의 출판사로 만들어 가게 되었다. ‘너 있는 곳을 항상 복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다. 약속의 땅을 붙들고 버틴 아브람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셨다.
창세기 13:15-16절의 축복을 해 주셨다. “네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땅을 내가 모두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 땅이 너희의 차지가 될 것이다. 또 내가 네 후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겠다. 땅의 티끌만큼이나 많게 할 것이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모두 셀 수 있다면 네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겠다.”
욥의 눈이 멀리 보며 다 보는 믿음의 눈이었다. 성경에 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동방에서 제일 의롭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았다. 동방 최고의 부자였다. 자녀도 10남매나 두었다. 종들도 많았고 땅도 넓었다. 어느 면을 보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반대의 인생이 되었다. 많은 재산을 다 도적질 당하였다. 10명의 자녀가 한꺼번에 집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엎친 데 덮쳤다.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부스럼투성이로 고름이 질질 흘렀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욥을 조롱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욥은 끝장이라고 했다. 욥은 동굴 속에 갇혔다고 믿었다. 다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욥은 자기 처지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고 믿었다. 욥은 고통당하고 있는 지금만 보지 않고 멀리 내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지금 아픔을 당하고 있더라도,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더라도 오늘만 보지 말고 욥처럼 내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멀리 보면 다 보인다. 욥은 멀리 보았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에는 정금이 될 것을 믿었다. 이것이 의인 욥의 영안이었다
■ 어린 소년과 백만장자 노인의 훈훈한 미담이 미국 사회에 화제가 됐다.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어느 날, 10살 정도인 남자아이가 1달러를 손에 꼭 쥐고 거리에 있는 상점마다 들어가 이렇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가게 주인들은 안 판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이가 장사를 방해한다고 생각해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69번째 가게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좀 파시나요?” 가게 주인은 60이 넘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하나님은 사서 무엇하려고 그러니?”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처음 본 아이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사연을 노인에게 털어놨다. 아이의 부모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삼촌이 돌봐주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삼촌마저 건축 현장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현재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삼촌을 치료하던 의사가 아이에게 말했다. “삼촌을 구해줄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이라는 것이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진한 아이는 의사에게 말했다. “제가 하나님을 사다가 삼촌에게 먹일게요. 그러면 꼭 나을 거예요!” 아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돈은 얼마나 갖고 있니?” 아이는 대답했다. “1달러요.” “마침 잘 됐구나. 하나님은 꼭 1달러거든.” 노인은 아이의 돈을 받고 선반에 있던 ‘하나님의 키스’라는 음료수를 주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이 ‘하나님’을 마시면 삼촌이 금방 나을 거야.” 아이는 기뻐하며 음료수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는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삼촌! 제가 하나님을 사 왔어요! 이제 곧 나으실 거예요!” 다음 날이었다.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전문가들이 전용기를 타고 이 작은 도시에 몰려왔다. 그리고 아이의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와 삼촌의 상태를 진찰하였다. 아이의 삼촌은 최고의 의료진의 손길로 병이 나았다. 삼촌은 퇴원할 때 천문학적인 병원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라 쓰러질 뻔하였다. 그러나 병원에서 말했다. “어떤 억만장자 노인이 이미 비용을 전부 지불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냥 나가면 됩니다.” 삼촌을 진찰한 의료진도 이 노인이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삼촌은 나중에 알았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의 주인이 억만장자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노인은 할 일이 없을 때 가게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감격한 삼촌은 아이와 함께 노인의 가게로 찾아갔다. 그러나 노인은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가게 점원은 노인이 쓴 편지를 전해 주었다. “젊은이,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조카가 다 낸 것이니 말일세. 자네에게 이런 기특한 조카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행운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네. 자네를 위해서 1달러를 쥐고 온 거리를 누비며 하나님을 찾아 다녔으니 말이야 … .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자네를 살린 건 그 분이니 말일세!”
■ 한국 여성 가운데 사회장의 영예를 누린 백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다. 조선말기와 일제초기를 지냈던 사람인데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16세에 혼자 사는 몸이 되었다. 입을 것 입지 못하고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모으고 모아서 200냥을 모았다. 그리고 시어른들과 남편의 무덤을 모시기 위하여 선산을 구입하는데 친척의 소개로 대동 강변에 한 산을 사게 되었다. 땅 문서를 손에 들고 이장을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 보았더니 이장을 할 수 없는 돌이 가득한 버려진 땅이었다. 오히려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감사기도를 합니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이 이 땅을 샀더라면 망하고 말았을 터인데 아직 내 몸 건강하고 재봉틀 한 대 있으니 다시 돈을 모으면 될 터인데 하나님 다른 사람 망하지 아니하고 내가 망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그 이후 일본 사람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계획하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려고 석회암 지질을 조사하던 중 대동강변에 있는 석회암으로 쌓인 한 산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백씨 아주머니의 땅이었다. 기업주 오노단은 소개를 넣어서 300냥에 산을 팔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천 냥? 5천 냥? 나중에는 1만 냥? 2만 냥을 주겠다고 그래도 거절한다. 도지사를 통하여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인줄 알고 목사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라를 위해서 산을 팔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만났더니 “목사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200냥에 사서 마을 사람들이 나보고 망했다고 하는데 2만 냥에 사간다면 그 사람이 망하는 꼴을 내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믿는 내 양심으로 나 혼자 망하고 말아야지 다른 사람 망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2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산을 팔았다. 그 돈으로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기독교회관 건물을 지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대학교 제단을 설립하게 되었고 후에 이 사람의 믿음을 기려서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선행이라 이름을 지어 ‘백선행’이란 인물로 오늘 기독교사에 전해오고 있다.
4. 이제부터라도 아브라함이 걸었던 믿음의 길을 …
이제부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자.
누가복음 5:1-11에서 예수님께서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셨을까? 그리고 왜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러면 많은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하셨을까? 베드로가 순종하였을 때에 그물이 가득차서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기적을 베푸신 것일까?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곧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이에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 따를 것을 명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이에 네 사람은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이 말씀들을 통해 기적의 목적은 ❶ 도탄(塗炭)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함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기적을 베푸신다. ❷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함이다. 눈 먼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저 사람의 눈이 먼 것은 부모의 죄냐, 본인의 죄로 인함이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❸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마리아의 부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사탄의 주문은 단호히 거절하셨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아무리 기적을 일으켜도 사탄은 믿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이런 말씀으로 끝났다. ‘하인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8, 11) 그렇다. 기적의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❹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가운데서 한 여자가 소리쳐 말하였다. `당신을 낳고 젖을 먹인 여인은 참으로 복 받은 여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 복 받은 사람이다.’(눅 11:27-28). 벙어리를 고쳐주시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육신 어머니 마리아를 부러워하자 예수님은 그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단어를 듣거나 보거나 하면 늘 주저주저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었을 때에 ‘아멘’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헌신을 동반하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➎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설교들은 ‘천국(하늘나라)’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천국 혹은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과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즉 성전(교회)을 말한다.
결 론
아브라함이나 요셉처럼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겠다고 짐을 챙기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길이 안전한 길인지 아닌지를 확인조차 안하고 길 떠나는 것을 만류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 이왕 떠나는 길 힘차게 떠나게 해야 할까?
믿음의 결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에 기초를 둔다. 마치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가나안을 향해 떠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떠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자기 확신과 기분대로 떠나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신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 . 요셉은 생각조차 못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였기에 무척 힘들었지만 늘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를 가르쳐주면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이미 깨달은 말씀을 마음에 담아 순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아예 하나님께서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신자들 즉 영적으로 소경이거나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들을 인도하실 때 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보금자리를 떠나야만 독수리 새끼처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들 자신들을 깨뜨리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셔야 했을 것이다.
▶ 참고로 아브라함이나 요셉 모두 믿음의 사람이지만 두 사람이 걸어간 인생행로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떠난 길은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에 요셉에 비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순간순간이 생사의 길이었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을 걸어간 길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 속에서 아브람이 소망을 가지고 갔다면 요셉은 절망을 안고 갔을 것이다.
우리에게 두 사람이 걸어간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선택할 것이다. 요셉이 걸어간 길을 가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죽음과 같은 가시밭에 던져지기를 원할까?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불안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하고 또렷하게 듣는 귀가 열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환경을 보지 않고 소망을 따라 미래로 연결되는 길을 떠나는 순종이 필요하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험난했던 요셉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면,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순종 즉 전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고 자녀들은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모두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듣고 확신에 찬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윤택한 삶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