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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元年(辛巳:1401年)
1월 24일(갑신)
각 도(各道)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고쳐 안렴사(按廉使)로 하고, 안노생(安魯生)은 경상도(慶尙道), 조휴(趙休)는 전라도(全羅道), 이은(李垠)은 충청도(忠淸道), 이지직(李之直)은 강원도(江原道), 정혼(鄭渾)은 경기좌도(京畿左道), 유향(柳珦)은 경기우도(京畿右道), 이양(李揚)은 풍해도(豐海道)의 안렴사로 삼았다.
5월 4일(신묘)
상정도감(詳定都監)에서 상소하기를, “각 도(各道)의 부역(賦役)은 균일하게 하여야 합니다. 경기(京畿)의 민호(民戶)는 수일(數日)의 노정(路程)에서 시탄(柴炭)과 마초(馬草)를 배[船]와 말[馬]의 삯을 지급하여 가며 서울에 수납(輸納)하는데, 1년 동안에 세네번에 이르기 때문에, 그 부역을 견딜 수 없어 유리하여 옮기[流移]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충청·풍해·강원도의 정상탄(正常炭)을 정속(定屬)시킨 외의 각 호(各戶)와 경상·전라도의 각 호에서 상오승포(常五升布)를 거두고, 대호(大戶)는 2필(匹), 중호(中戶)는 1필, 소호(小戶)는 2호(戶)에서 1필을 거두어, 시탄(柴炭)이 강(江)에 이르거든 말삯[馬價]을 주고, 또 공상(供上)외의 시탄(柴炭)은 포(布)로써 대가(代價)를 지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일(무오)
원주(原州)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12월 17일(신미)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정용수(鄭龍壽)·승녕부윤(承寧府尹) 유창(劉敞) 등이 소요산(逍遙山)의 태상왕(太上王)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 용수 등이 문안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臣) 등이 오래 머물러 영선(營繕)의 폐단을 갖춰 진달하였더니, 태상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지만 장차 나의 후사(後事)를 닦으려는 것이다. 경들은 돌아가라. 내가 치재(致齋)하겠다. 경의 주상(主上)은 설 뒤에 와서 보는 것이 좋다’ 하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소요산에 가려 하다가, 이 말을 듣고 정지하고 설 뒤를 기다렸다. 태상왕의 소요산에 이르러 근처에 본궁(本宮) 노예(奴隸)와 좌도(左道)·강원도(江原道)·충청도(忠淸道)의 가까운 고을의 사람들을 징발하였는데, 날은 차고 얼음이 얼어 섶에 불피워 가며 땅을 파서 터를 쌓고 대궐을 경영하여 연말(年末)에 이르니, 백성들이 몹시 괴롭게 여기었다.
太宗 二年(壬午:1402年)
1월 6일(기축)
처음으로 무과법(武科法)을 시행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펴보건대, 무과 출신(武科出身)은 3년에 한 번 뽑기로 되었습니다.”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삼군부(三軍府)의 정관(正官) 2명을 선발하여 위임하되, 감교시사(監校試使)와 부사(副使)에 충원하시고, 동고시관(同考試官) 4명과 문하부(門下府)·사헌부(司憲府)의 각 1명은 고시 기간에 임박하여 임명하되, 훈련관(訓練觀)과 함께 시험하여 뽑게 하시고, 무경칠서(武經七書)와 마보(馬步)·무예(武藝)에 정통하고 익숙한 자는 1등으로 삼고, 3가(三家)의 병서(兵書)와 마보·무예에 통한 자는 2등으로 삼고, 마보·무예에만 통(通)한 자는 3등으로 삼되, 1등은 3명, 2등은 5명, 3등은 20명으로 하여 모두 28명을 정원(定員)으로 삼아 뽑도록 하소서. 만약 제 1등에 합격할 만한 자가 없다면, 2등 또는 제 3등만을 뽑게 하되, 짐작하여 시험해 뽑아 정원에 구애하지 말게 하고, 문서로 써서 병조에 보고하게 하소서. 1등은 바로 종7품(從七品), 2등은 종8품, 3등은 종9품에 임명하되, 무직(武職)을 전형할 때, 원래 직위(職位)가 있는 자는 1계급을 올리게 하소서. 이제 과거(科擧)의 식년(式年)이 되었사오니, 길일(吉日)을 택하여 시험해 뽑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관시(觀試)·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예(例)에 의하소서. 관시의 인원수는 50명, 향시는 좌·우도에서 20명, 충청도는 30명, 전라도는 20명, 경상도는 30명, 강원과 풍해도는 각각 10명, 동북면과 서북면은 각각 15명으로 하시고, 그 시험관은 무관(武官)으로서 양부(兩府) 이상을 2명만 뽑아, 한 사람은 감교시(監校試)로 삼고, 다른 한사람은 동감교시(同監校試)로 삼으시고, 기타(其他)의 시관(試官)은 모두 문과(文科)의 예(例)에 따르소서.” 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5월 7일(기축)
강원도 관찰사 박은(朴訔)이 의정부에 보고하여 창고를 풀어 굶주림을 구제하려고 하였으나, 의정부에서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6월 8일(경신)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허주(許周)를 양주(楊州)로 귀양보내고, 사헌부 장령 현맹인(玄孟仁)·병조의랑(兵曹議郞) 김단(金端)·사재감(司宰監) 조휴(趙休)·공조의랑(工曹議郞) 김분(金汾) 등을 면직(免職)시켰다. 처음에 현맹인은 경기좌도 안렴사(京畿左道按廉使), 김단은 경기우도 안렴사, 허주는 경상도 안렴사, 조휴는 전라도 안렴사, 이지직(李之直)은 강원도 안렴사, 김분은 풍해도 안렴사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새로 개간된 밭[新墾田]을 측량[打量]하여 계문(啓聞)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허주는 폐(廢)하여 두고 행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문(移文)만 하였을 뿐이었다.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파면한 것이었다. 이지직은 일찌기 다른 죄로 파직(罷職)된 까닭에 논(論)하지 않았다.
7월 22일(계묘)
이저(李佇)로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빈(李彬)으로 사평부좌사(司平府左使)를, 강회백(姜淮伯)으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경상도 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를, 이첨(李詹)으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김희선(金希善)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 都巡問察理使)를, 임정(林整)으로 참지승추부사(參知承樞府事)·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를, 유창(劉敞)으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이내(李來)로 첨서 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를, 여칭(呂稱)으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를, 장자충(張子忠)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풍해도 도관찰출척사(豐海道都觀察黜陟使)를, 이문화(李文和)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박신(朴信)으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조용(趙庸)·권담(權湛)으로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를, 장덕량(張德良)으로 성균대사성(成均
大司成)을 삼았다.
8월 18일(기사)
강원도 울진(蔚珍)·고성(高城)에 황충(蝗虫)이 생겼다.
10월 15일(을축)
민무구(閔無咎)로 참지승추부사(參知承樞府事)를, 민무질(閔無疾)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한상경(韓尙敬)으로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이숙번(李叔蕃)으로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를, 민여익(閔汝翼)으로 좌군총제(左軍摠制)를, 여칭(呂稱)으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김희선(金希善)으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를 삼았다.
11월 16일(을미)
총제(摠制) 신극례(申克禮)로 풍해도 절제사(豐海道節制使)를, 예조전서(禮曹典書) 구성량(具成亮)으로 강원도 병마사(江原道兵馬使)를 삼았다.
11월 19일(무술)
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강회백(姜淮伯)이 죽었다. 회백은 진양(晉陽) 사람인데, 공목공(恭穆公) 시(蓍)의 아들이다. 병진년(丙辰年)에 과거에 오르고, 임술년(壬戌年)에 나이 26세로서 대언(代言)이 되었는데, 이해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승진하였다.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고, 무진년(戊辰年)에 또 경사에 조회(朝會)하였다. 기사년(己巳年)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제수하여 교주‧강릉도를 관찰(觀察)하였고, 신미년(辛未年)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옮기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임하였다. 임신년(壬申年) 여름에 진양(晉陽)으로 폄출(貶出)되었다가, 7년 경진(庚辰)에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제수되어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조금 뒤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46세였다. 회백은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개(慷慨) 노성(老成)하여,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다섯의 아들이 있으니, 종덕(宗德)·우덕(友德)·진덕(進德)·석덕(碩德)·순덕(順德)이었다.
太宗 三年(癸未:1403年)
5월 3일(기묘)
강릉도(江陵道)에 강릉에서부터 삼척(三陟)·울진(蔚珍)에 이르기까지 눈이 내려, 이튿날에도 얼음이 녹지 않았다.
6월 26일(임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좌헌납(左獻納) 김익정(金益精)의 죄를 탄핵하여 청하였다. 처음에 횡천(橫川) 사람이 와서 익정(益精)에게 고(告)하기를, “감무(監務) 위덕해(魏德海)가 어염(魚鹽)과 포물(布物)을 강제로 민호(民戶)에다 나누어 주고 쌀·보리·삼[麻]을 거두니,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하였다. 익정(益精)이 본원(本院)에 말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포착하게 한다고 헌부(憲府)에 이문(移文)하였다. 헌부(憲府)에서 감사(監司)에 이문(移文)하니 감사가 조사하여 회보(回報)하기를, “덕해(德海)의 일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포착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헌부에게 곧 좌사간(左司諫) 우홍강(禹洪康)·우정언(右正言) 이명선(李明善)을 논핵(論劾)하였으니, 대개 처음에 발언(發言)한 자를 물은 것이었다. 이에 익정(益精)을 논핵하여 상소하기를, “덕해(德海)가 어물(魚物)을 무역(貿易)한 것은 죄(罪)가 됨이 사실이나, 삼[麻]을 계산하여 포(布)를 준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익정이, 덕해가 횡천 감무(橫川監務)로 있을 때에 익정의 처부(妻父)인 권담(權湛)을 박대하였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말을 만들어 죄(罪)에 처하고자 한 것이니, 청컨대, 익정을 죄주어 간사하고 속이는 것을 징계하소서. 덕해는 수령으로서 민간에 무역하였으니, 비록 정사를 어지럽힌 것은 아니나, 또한 죄를 면치 못합니다.” 하였다. 익정(益精)이 상서(上書)하여 이를 변명하고, 또 헌사(憲司)의 잘못을 호소하니, 임금이 헌부(憲府)의 소(疏)와 익정의 상서(上書)를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빨리 결단하지 않으므로,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 등은 거사(擧司)하여 대궐에 나와 아뢰기를, “신(臣) 등이 듣자오니, 신 등의 상소(上疏)를 의정부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하오니, 원컨대, 주상께서 신 등과 간관(諫官)을 나오게 하여 친히 물어서 결단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부에 내렸으니, 신문(申聞)을 기다려서 내가 마땅히 결단하겠다.” 하였다. 신(信)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일을 정부에 내려서 의논하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만일 반드시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시려거든, 원컨대, 정부와 신 등을 불러서 그 시비(是非)를 의논하게 하시고, 친히 들어서 결단하소서. 간원(諫院)이 옳으면 신 등이 죄를 받아야 하고, 신 등이 옳으면 간원이 죄를 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마침 몸이 불편하니 뒤에 마땅히 청한 대로 하겠다.” 하였다. 며칠 뒤에 임금이 사헌부 장무(掌務)를 불러 명하기를, “처음에 위덕해의 일을 익정에게 고한 자가 누구냐고 익정에게 물으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대간원(臺諫員)이 들은 것을 가지고 공좌(公座)에 고(告)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상사(常事)입니다. 만일 고한 자를 말한다면, 비록 말할 일이 있더라도 누가 말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명령이 있으시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한 자는 횡천의 토민(土民)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위덕해는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의 가신(家臣)이었다. 또 명하였다. “청한 바 위덕해의 죄는 파직(罷職)에 지나지 않고, 김익정은 다시 거론하지 말라.”
6월 29일(을해)
남재(南在)로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를, 이지(李至)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를, 성석인(成石因)으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임정(林整)으로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삼았다.
7월 26일(신축)
왜선(倭船) 8척이 강릉(江陵) 임내(任內)인 우계현(羽溪縣)에 침입하였다.
7월 30일(을사)
좌군첨총제(左軍僉摠制) 신유정(辛有定)으로 강원도 조전병마사(江原道助戰兵馬使)를 삼고 명(命)하기를, “경이 금중(禁中)에서 시위(侍衛)하는 것을 내가 매우 중하게 여기나, 강원도(江原道)는 본래 거진(巨鎭)이 없기 때문에, 주군(州郡)을 맡고 있는 자가 거의 모두 우활(于闊)한 서생(書生)들이어서 무비(武備)가 폐하고 해이해졌다. 강릉부사는 비록 서생은 아니라 하더라도 정사는 잘 하나 무사(武事)가 소루하다. 지금 왜구가 침략하여 백성의 환(患)이 되니, 내가 몹시 근심하여 경을 강릉 등처의 조전병마사로 삼는 것이다. 경은 행장(行裝)을 재촉하여 기사(騎士) 10인을 데리고 내일 역마(驛馬)를 타고 가라.” 하니, 유정이 대답하였다.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8월 11일(병진)
강릉도(江陵道)의 무릉도(武陵島) 거민(居民)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으니, 감사(監司)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8월 20일(을축)
최유경(崔有慶)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조견(趙狷)를 좌군도통제(左軍都摠制)로, 평성군(平城君) 이문화(李文和)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신유정(辛有定)을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병마도절제사(兼兵馬都節制使)로 삼았다.
10월 30일(갑술)
안협감무(安峽監務) 김흥조(金興祚)·승령감무(僧嶺監務) 강성안(姜成鴈)·통진감무(通津監務) 이치(李菑)·과천감무(果川監務) 김진(金晉)·흡곡현령(▦谷縣令) 안기(安紀)를 파면시켰다. 흥조(興祚) 등이 그 직임(職任)을 감내하지 못하므로 정부(政府)에서 신문(申聞)하여 파면시킨 것이다. 헌사(憲司)에서 상서사(尙瑞司)에 이문(移文)하여 천거한 자를 물었으니, 천거한 자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죄가 거주(擧主)에게 미치는 영(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11월 19일(임술)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上疏)하여 부·주·군·현(府州郡縣)의 이름을 정하자고 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생각컨대, 예전으로부터 제왕(帝王)이 일어나매,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를 세워서, 일대(一代)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우(唐虞)가 비록 성인(聖人)으로서 성인(聖人)을 이었으나, 제도(制度)․문물(文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때에 따라서 덜고 보탠 것은, 새것을 취하고 묵은 것을 고치어 서로 인습(因襲)하지 않은 것을 보인 것입니다. 옛적에 황제(黃帝)가 주(州)를 나누는 제도를 처음으로 베풀었고, 순(舜)이 천하(天下)를 나누어 12주(州)를 만들었고, 우(禹)가 다시 9주(州)를 만들었고, 삼대(三代) 이래로 당나라․송나라에 이르기까지 비록 연혁은 같지 않으나, 주․부․군․현의 이름은 정연하게 차서(次序)가 있었습니다. 전조(前朝)의 성시(盛時)에 3유수(三留守)․8목(八牧)․4도호부(四都護府)를 두고, 군(郡)과 현(縣)은 각각 그 땅의 가까운 것을 따라서 큰 고을[巨邑]에다 나누어 예속시키었는데, 족히 정령(政令)을 행할 수 있고, 백성들이 번잡하고 가혹한 폐단을 받지 않았습니다. 쇠퇴한 말년에 이르러 권간(權奸)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법령(法令)이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무릇 주(州)와 군(郡)이, 혹은 한 재상(宰相)이 정치를 잡거나,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天庭]에 들어가 입시(入侍)하였다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환향(還鄕)하거나, 혹은 중[僧]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權勢)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혹은 부곡(部曲)을 승격하여 감무(監務)를 만들고,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州)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토지(土地)의 넓고 좁은 것과 인민(人民)의 많고 적은 것이 그 이름에 맞지 않고, 또 주․부․군․현이 각각 정해진 이름이 있는데, 혹은 주(州)를 부(府)라 칭하고, 혹은 현(縣)을 주라 칭하여, 명기(名器)가 혼잡하고 어지러워졌습니다. 지금에도 오히려 묵은 폐습을 따라서 환시(宦寺)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오는 자가 다시 간청(干請)함이 있어, 청산(淸山)은 상주(尙州) 임내(任內)로서 따로 감무(監務)가 되고, 보안(保安)은 감무로서 승격하여 현령(縣令)이 되고, 괴주(槐州)는 감무로서 승격하여 지주(知州)가 되고, 김제(金提)는 현령으로서 승격하여 지군(知郡)이 되고, 임주(林州)는 주로서 승격하여 부관(府官)이 되었습니다.
또 지금 환자(宦者) 35인이 중국[朝廷]에 갔으니, 만일 후일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돌아오면 또한 반드시 청(請)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말을 다 따른다면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적에 한고조(漢高祖)가 패읍(沛邑)에서 낳았고, 광무제(光武帝)가 용릉(舂陵)에서 일어났으나, 패읍과 용릉을 승격시켜 아무 주(州), 아무 군(郡)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본국(本國)만이 한 재상(宰相)과 사신(使臣)을 위하여 주현(州縣)의 명실(名實)을 가볍게 고칠 수 있습니까? 대저 작은 고을[小邑]을 가호(加號)하는 것은 그 폐단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토지(土地)가 좁은 것은 그 땅을 보태자고 청하고, 인민(人民)이 적은 것은 백성을 보태자고 청하고, 늠록(廩祿)과 아봉(衙俸)이 또한 모두 증가되어 토지와 인민이 서로 침삭(侵削)당하여, 서로 탄식하고 원망하여 소송(訴訟)이 끊이지 않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여러 도(道)의 주(州)․부(府)의 제도를 밝히어 마땅한 것을 헤아려서 이를 개혁하여, 주․부․군․현의 명호(名號)와 등급(等級)을 한결같이 장(狀) 뒤에 아뢴 바와 같이 하여, 3유수부(留守府)는 1등(等)을 만들고, 5대도호부(大都護府)․10주목(州牧)은 2등을 만들고, 20부관(府官)은 3등을 만들고, 그 나머지 부․주․군은 모두 군으로 고쳐서 지군사(知郡事)라 칭하여 4등을 만들고, 현령․감무는 모두 현으로 만들어서 지현사(知縣事)라 칭하여 5등을 만들고, 문자(文字)로 서로 통하는 정식(程式)과 늠급(늠給)․아봉(衙俸)의 수량은 한결같이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예(例)에 의하여, 매양 목(牧)에만 주(州)라 칭하고, 부와 군에는 모두 주라 칭하지 말아서, 주․부․군․현으로 하여금 각각 정한 이름이 있어, 찬연(粲然)하게 질서가 있게 하여,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르고, 아래 것으로 위 것을 이어받게 하면, 저절로 통속(統屬)이 있고, 정령(政令)이 행하여질 것입니다.
상항(上項)의 사신(使臣)의 간청(干請)으로 인하여 명호(名號)를 뛰어올린 것은 모두 예전대로 회복하고, 지금부터 밝게 일대(一代)의 제도를 세워서, 비록 후비(后妃)의 고향과 사신(使臣)․재상(宰相)․왕사(王師)․국사(國師)가 출생한 땅이라 하더라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여 명호(名號)를 더하지 말고, 무릇 군(郡)․현(縣)이 감히 조령(條令)을 준수하지 않고, 권력에 붙고 난잡하게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규리(糾理)를 행하여 일대(一代)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고, 영원히 만세(萬世)의 규범을 삼으소서. 완산(莞山)․평양(平壤)․계림(雞林)은 3유수(留守)로 삼으소서. 위의 세 부(府)는 모두 예전 왕자(王者)의 도읍(都邑)이니, 마땅히 유수(留守)로 칭하여야 합니다. 의주(義州)는 의순(義順)으로 고치고, 안주(安州)는 안흥(安興)으로 고치고, 길주(吉州)는 길안(吉安)으로 고치고, 강릉(江陵)은 예전대로 하고, 제주(濟州)는 탐라(耽羅)라 고치어, 5대도호부(大都護府)를 삼으소서. 위의 다섯 부(府)는 모두 국경(國境)의 거진(巨鎭)이니, 마땅히 도호부(都護府)로 칭하여 군민(軍民)의 책임을 겸하여 맡게 하소서. 해주(海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원주(原州)·나주(羅州)·상주(尙州)·진주(晉州)·성주(星州)의 아홉 주(州)는 모두 예전 목(牧)으로서 오래 도록 큰 것이니, 마땅히 예전대로 하여야 합니다. 안동대도호부는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치소서. 위의 부(府)는 봉강(封疆)의 경계나 병융(兵戎)의 땅도 아니니, 마땅히 목(牧)으로 칭하여야 합니다. 양주(楊州)는 양원(楊原)으로 고치고, 김해(金海)․영해(寧海)․남원(南原)․순천(順天)․강화(江華)․연안(延安)․여흥(驪興)․경원(慶源)․강계(江界)․이성(泥城)의 12부(府)는 호(號)를 그대로 하고, 공주(公州)는 공산(公山)으로 고치고, 홍주(洪州)는 안평(安平)으로 고치고, 광주(光州)는 화평(化平)으로 고치고, 황주(黃州)는 제안(齊安)으로 고치고, 함주(咸州)는 함녕(咸寧)으로 고치고, 정주(定州)는 정원(定源)으로 고치고, 청주(靑州)는 청해(靑海)로 고치소서. 위의 일곱 주(州)는 모두 신설(新設)한 목(牧)이니, 마땅히 강등하여 부(府)를 만들어야 합니다. 밀성군(密城郡)은 승격하여 밀양부(密陽府)를 삼으소서. 위의 부(府)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서 실로 경상도의 큰 고을[臣邑]이니, 마땅히 승격하여 부(府)를 삼아야 합니다. 그 나머지 장신(狀申)한 이외의 것으로서 예전에 주(州)․부(府)라고 일컫던 것은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이 모두 상항(上項)의 주․부에 미치지 못하니, 일례(一例)로 고쳐 군(郡)을 삼아서 지군사(知郡事)라 칭하고, 현령(縣令)․감무(監務)는 전조(前朝) 말년에 모두 부사(府使)․서도(胥徒)의 용렬한 무리들이 제수(除授)를 받았으므로, 지금의 조사(朝士)가 그 이름을 익히 들어서, 수령(守令)을 제수할 때를 당하면 모두 다 싫어하니, 지금 마땅히 일례(一例)로 고쳐 현을 만들어서 현사(縣事)라 칭하여, 그 이름을 새롭게 하소서.”
좌정승 하윤이 아뢰기를, “간관은 인군의 거조와 국가의 휴척에 대하여 직언하지 않음이 없으니,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죄를 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헌사의 청으로 인하여 간관에게 죄를 가하시면, 후세에 전하를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하(判下)한 것이 하루도 못되어 문득 고치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윤이 말하기를, “허물을 알고 즉시 고치는 것은 이것이 인군의 대덕(大德)이요,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군의 큰 잘못입니다. 한(漢)나라에서 장차 육국(六國)을 봉하려고 하여 이미 인(印)을 만들었는데, 장양(張良)*이 불가하다고 말하매, 고제(高帝)가 곧 고치었는데, 사책(史冊)에 이를 써서 지금까지 전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간관을 죄주지 마옵소서.” 하였다.
그러나, 근시(近侍)하는 신하들이 모두 간관을 그르다 하기 때문에,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 장량(張良) : 한고조(漢高祖)의 충신(忠臣).
12월 28일(신축)
강릉부(江陵府)에서 지진(地震)하였는데, 원주(原州)까지 이르렀다.
太宗 四年(甲申:1404年)
4월 19일(기축)
진헌색(進獻色)을 두어 소를 바꾸는 일을 맡게 하고, 중외(中外)의 시산(時散) 각품(各品)으로 하여금 품등(品等)에 따라 소를 바치게 하고, 자원하여 소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 주게 하고, 또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화자(火者)를 뽑게 하였다.
4월 25일(을미)
의정부(議政府)에서 각 도의 전답(田畓)과 호구수(戶口數)를 올리었는데, 충청도(忠淸道)는 밭이 223,090결(結), 호(戶)가 19,561호, 인구가 44,476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밭이 173,990결, 호(戶)가 15,703호, 인구가 39,151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밭이 224,625결, 호(戶)가 48,992호, 인구가 98,915명이고, 풍해도(豐海道)는 밭이 90,922결, 호(戶)가 14,170호, 인구가 29,441명이고, 강원도(江原道)는 밭이 59,989결, 호(戶)가 15,879호, 인구가 29,238명이고, 동북면(東北面)은 밭이 3,271결, 호(戶)가 11,311호, 인구가 28,693명이고, 서북면(西北面)은 밭이 6,648결, 호(戶)가 27,788호, 인구가 52,872명으로, 합계가 전지가 782,543결, 호(戶)가 153,404호, 인구가 322,786명이었다.
5월 12일(임자)
강원도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와 콩의 싹이 상하였다.
8월 23일(임진)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에 우박이 5치 가량 내려 홍안(鴻鴈)이 죽었다.
9월 25일(계해)
강원도의 금년 전조(田租)의 수량을 감(減)하였다. 관찰사가 상언(上言)하였다.
“본도의 전지(田地)가 척박하여 화곡(禾穀)의 결실(結實)이 다른 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수전(水田) 1결(結)에 조미(糙米) 26두(斗) 5승(升)을, 한전(旱田) 1결에 보리 25두를 거두고, 창고(倉庫)·궁사(宮司)의 전조(田租)는 유밀(油蜜)과 포화(布貨)를 자원(自願)하여 수납(輸納)하게 하는 것은 고례(古例)입니다. 임오년(壬午年)부터 조세를 거두는 수량을 이에 다른 도의 예로 하여, 수전(水田) 1결에 쌀 30두를 거두고, 한전(旱田) 1결에 보리 30두를 거두니,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합니다. 금년에 또 큰 바람과 큰 물로 인하여 손상이 심히 많으니, 원하건대, 전에 있었던 과식(科式)대로 수조(收租)하게 하고, 포화(布貨)·유밀(油蜜)도 또한 자원(自願)에 따라 수납하게 하여, 생민(生民)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10월 22일(경인)
정역(鄭易)·조휴(趙休)·윤수(尹須) 등을 외방에 유배하였다. 정역은 재령(載寧)에, 조휴는 백주(白州)에, 윤수는 평주(平州)에, 안성(安省)은 해주(海州)에, 윤향(尹向)은 공주(公州)에, 이치(李致)는 고령(高靈)에, 이임(李稔)은 죽주(竹州)에, 허모(許謨)는 안악(安岳)에, 이회(李薈)는 옹진(瓮津)에, 서선(徐選)은 여흥(驪興)에, 조말생(趙末生)은 양성(陽城)에, 이형(李衡)은 청주(淸州)에, 송면(宋勉)은 원주(原州)에, 탁신(卓愼)은 평창(平昌)으로 귀양보냈다. 유양(柳亮)은 공신인 까닭으로 면하였는데, 유양은 성문(城門)을 나가서 상서(上書)하고, 스스로 전라도 낭산(朗山)으로 갔다.
太宗 五年(乙酉:1405年)
2월 3일(기사)
경상도 계림(雞林)·안동(安東) 등 15 고을과 강원도 강릉(江陵)·평창(平昌) 등지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계림·안동 등처에 진병 별제(鎭兵別祭)를 행하게 하였다.
3월 20일(을묘)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을 포상(褒賞)하도록 하교(下敎)하고, 또 나이 80세의 노인과 환과고독(鱞寡孤獨)을 모두 구휼(救恤)하도록 명하였으니 강원도 관찰사의 청을 쫓은 것이었다.
4월 16일(신사)
이천(伊川)에 우박이 내리고, 고성(高城)·평강(平康)에서는 비와 눈이 내렸다.
4월 29일(갑오)
신도(新都)에서 이궁(離宮)을 짓는 군인(軍人)들을 놓아 보내고, 우봉(牛峯)·토산(兎山)·영평(永平)·철원(鐵原)·안협(安峽)·삭녕(朔寧) 등처의 선군(船軍)에게 석달의 급료(給料)를 주도록 명하였다.
7월 8일(신축)
유관(柳觀)으로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를 삼고, 성석인(成石因)으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함부림(咸傅霖)으로 경기 도관찰사를, 김이음(金爾音)으로 강원도 도관찰사를, 유습(柳濕)으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겸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강사덕(姜思德)으로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삼았다.
7월 14일(정미)
강원도 여러 고을에 황충(蝗虫)이 일었다.
8월 19일(임오)
사헌부 대사헌 김첨(金瞻)을 여흥(驪興)에, 전 계림부윤(前雞林府尹) 한이(韓理)를 안성(安城)에, 전 철원부사(前鐵原府使) 한임(韓任)을 춘주(春州)로 귀양보냈다. 사헌부(司憲府)와 형조(刑曹)에서 박상문(朴尙文) 등의 양천(良賤)을 변석(辨析)하여 보니 과연 종천(從賤)시키는 것이 부당하였다. 이에 첨(瞻)과 이(理)·임(任)을 탄핵하고 수직(守直)*하였다. 임금이 첨(瞻) 등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리어 국문(鞫問)하고, 율(律)을 상고하니,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해당하였다. 이에 명하여 귀양보내었다. 첨(瞻)은 예조의랑(禮曹議郞)으로 있을 때에 상문(尙文) 등을 종천(從賤)할 것으로 결절(決折)하였고, 이(理)와 임(任)은 민제(閔霽)·권홍(權弘)과 동종(同宗)이기 때문에 상문(尙文)의 일족(一族)을 천(賤)에 붙여서 역사(役使)시킨 자였다.
* 수직(守直) : 죄인을 도망하지 못하도록 그 집을 지키는 것.
8월 20일(계미)
울진(蔚珍)·삼척(三陟)의 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였다.
8월 26일(기축)
사간원(司諫院)에서 충청도(忠淸道)·강원도(江原道)의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赴役)시키지 말 것을 청하였다. 소(疏)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금년 봄·여름에 한재(旱災)가 너무 심하여, 전하께서 백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창고(倉庫)를 열어 진휼구제(賑恤救濟)하시고, 승여(乘輿)가 들에 나가서 화가(禾稼)를 친히 살펴보시고 측연(惻然)히 눈물을 흘리시었으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하신 정성이 어떻게 더할 수 있습니까? 지금 신도(新都)의 수즙(修葺)하는 역사(役事)로 인하여 충청·강원 두 도(道)의 백성을 징발하시니, 두 도(道)의 화곡(禾穀)이 비록 경기(京畿)보다는 조금 낫게 되었다고 하겠으나, 어떻게 풍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땅히 그 힘을 풀어주어 추종(秋種)과 수확(收穫)의 일을 폐지하지 않게 하여, 오는 해의 계획을 하시고, 신도(新都)의 수즙(修葺)하는 역사는 가까운 도(道)의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돕게 하고, 두 도(道)의 백성은 징발하지 말아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의정부(議政府)에 내리어 의논하니, 정부에서 인부(人夫)가 다른 데서 나올 곳이 없다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 경기(京畿)의 백성들이 천도(遷都)로 인하여 역사가 번번하게 많아 이궁(離宮)의 역사에 참여시키지 말자고 청하니, 윤허하였다.
9월 17일(기유)
의정부(議政府)에서 강원도 여러 고을의 조세(租稅) 감면(減免)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회양(淮陽)·정선(旌善)은 풍재(風災)로 인하여 화곡(禾穀)의 3분의 1이 손상되었으니, 그 조세(租稅)를 미(米)·포(布) 반반으로 하고, 춘주(春州)·양주(襄州)·간성(杆城)·통주(通州)·우계(羽溪)는 풍재(風災)·수재(水災)·충재(虫災)로 인하여 화곡의 2분의 1이 손상되었으니, 그 조세를 포(布)로 바치게 하고, 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고성(高城)은 풍재·수재로 인하여 5분의 4가 손상되었사오니, 그 조세를 면제하소서.”
11월 20일(임자)
박신(朴信)·서선(徐選)·현맹인(玄孟仁)·신경원(申敬原)·성엄(成揜) 등을 순금사(巡禁司)로 보내어, 신(信)은 아주(牙州)로, 맹인(孟仁)은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선(選)은 음죽(陰竹)으로, 엄(揜)은 원주(原州)로, 경원(敬原)은 괴주(槐州)로 귀양보내고, 사간(司諫) 윤수(尹須) 등을 불러 명하였다.
“ 긴급(緊急)하지 않은 일은 두 번씩이나 상소(上疏)하고, 사헌부에서 허척(許倜)의 죄를 몽롱(朦朧)하게 한 것은 다시 청하지 않으니, 매우 위임(委任)한 뜻에 어긋난다. 각각 집으로 물러가라.”
12월 27일(기축)
민정(民丁) 3천명을, 충청·강원 두 도(道)에서 각각 1천 5백 명씩 징발하여 태상전(太上殿)을 짓는 역사(役事)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 16일까지 역사에 나오도록 기한을 정하였다.
太宗 六年(丙戌:1406年)
1월 16일(정미)
충청도와 강원도 정부(丁夫) 3천 명이 도성(都城)에 이르렀다. 덕수궁(德壽宮)과 창덕궁(昌德宮)에 부역하는 이가 각각 1천명씩이고, 한성부(漢城府)에 6백명인데, 개천을 파는 일을 맡았고, 군자감(軍資監)·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사온서(司醞署)에 각각 1백 명씩인데, 공해(公廨)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1월 25일(병진)
박은(朴訔)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조박(趙璞)을 서북면 도순문사로, 권진(權軫)을 강원도 도관찰사로 삼고, 맹사성(孟思誠)을 다시 좌부대언으로 삼았다.
1월 28일(기미)
전 군자감(軍資監) 조사덕(曹士德)을 춘주(春州)에 유배(流配)시켰다. …….
1월 28일(기미)
별와요(別瓦窯)*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이응(李膺)을 제조(提調)로, 전 전서(典書) 이사영(李士穎)과 김광보(金光寶)를 부제조(副提調)로 삼고, 중 해선(海宣)을 화주(化主)로 삼았다. 해선이 일찌기 나라에 말하기를, “신도(新都)의 대소 인가(大小人家)가 모두 띠[茅]로 집을 덮어서, 중국(中國) 사신이 왕래할 때에 보기가 아름답지 못하고, 또 화재(火災)가 두렵습니다. 만약 별요(別窯)를 설치하고, 나에게 기와 굽는 일을 맡게 하여, 사람마다 값을 내고 이를 사가도록 허락한다면, 10년이 차지 아니하여, 성 안의 여염(閭閻)이 모두 기와집[瓦屋]이 될 것입니다.”
하니, 나라에서 그렇게 여겨, 여러 도(道)에서 승·장(僧匠)을 차등 있게 징발해서 그 역(役)에 나가도록 하였는데, 충청도·강원도에서 각각 중[僧] 50명과 와장(瓦匠) 6명, 경상도에서 중 80명과 와장 10명, 경기도·풍해도에서 각각 중 30명과 와장 5명, 전라도에서 중 30명과 와장 8명이었다.
* 별와요(別瓦窯) : 조선조 태종(太宗) 6년에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기와를 굽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관부(官府). 각 도의 승(僧)과 와장(瓦匠)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기와를 생산하여 널리 공급했음.
2월 1일(임술)
공안부 소윤(恭安府少尹) 신임(申臨)을 강원도에 보내어, 벌목(伐木)하고 운반하는 일을 독촉하게 하였다.
2월 16일(정축)
충청도·강원도의 역도(役徒)들을 방환(放還)하였다.
2월 20일(신사)
강무(講武)할 장소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이숙번·윤저와 더불어 의논하였다.
“전일에 정부(政府)에서 인주(仁州)·안산(安山)·부평(富平)·광주(廣州) 등지를 강무(講武)하는 장소로 삼도록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토질이 진흙이며 산과 골이 험하고 막혀서 달리고 쫓는 데 불편하고,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이 있으니, 땅이 평탄하여 달리고 쫓기에 편리함이 철원(鐵原)만 못하다. 또 철원 등지는 화곡(禾穀)이 풍년이 드니, 그 꼴짚[芻藁]을 이바지하는 데 백성들이 괴로와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이번 행차를 도당(都堂)과 대간(臺諫)에서는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나, 나는 생각하건대, 옛 제왕(帝王)들은 사냥하는 데 일정한 장소가 있었으니, 어찌 도성(都城) 가까운 곳에 원유(苑囿)를 설치하였겠는가? 반드시 백성들이 살지 아니하고 비어 있는 먼 땅을 골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따금 오활(迕闊)한 무리들이 생소(生疏)한 말을 꺼내서 말리나, 내 뜻이 정해졌으니, 경 등은 정부에 내 뜻을 밝게 효유하여 사냥하는 장소를 다시 정하게 하라.” …….
3월 28일(무오)
강원도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4월 12일(임신)
지리산(智異山)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두 자였고, 영흥부(永興府)에는 한 자였으며, 삭주(朔州) 및 금주(錦州) 임내(任內) 횡천소(橫川所)·함양(咸陽)·합주(陜州)·순흥(順興)·강릉(江陵)에도 모두 눈이 내렸다.
4월 13일(계유)
지리산과 옥주(沃州)에 서리가 내리고, 이천(伊川)·안변(安邊)·영풍(永豐)·간성(杆城)·열산(烈山)에 눈이 내리니, 눈이 많은 데는 2자 5치에 이르렀다.
4월 20일(경진)
이천(伊川)과 영풍(永豐)에 서리가 내렸다.
5월 3일(임진)
춘주(春州) 기린현(騏驎縣)에 안개가 끼었다.
○ 의정부에서 여러 도(道)의 양전(量田)한 결수(結數)를 올렸다.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에 다시 양전(量田)을 행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고,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풍해도·강원도의 6도(道)에 원전(原田)이 대개 96만여 결(結)이었는데, 다시 양전(量田)하여 얻은 잉전(剩田)이 30여만 결이었다. 고려 말기에 전제(田制)가 크게 허물어져서 홍무(洪武) 기사년(己巳年)에 6도(道)를 다시 양전(量田)하여 전적(田籍)에 올렸으나, 그때 왜구가 한창 성하여 바닷가는 모두 진황지(陳荒地)였다. 이때에 이르러 개간한 땅이 날로 붙어서 남아 있는 땅이 없어기 때문에 다시 양전(量田)한 것이다.
* 양전(量田) : 토지를 측량하던 일.
5월 3일(임진)
명하여 전 장군(將軍) 한을생(韓乙生)의 직첩을 거두고 먼 지방으로 유배시켰다. 한을생은 개국공신(開國功臣) 한충(韓忠)의 아들인데, 본디 광망(狂妄)하고 삼가지 못하더니, 사노(私奴) 김철(金哲)의 아내, 보패(寶棑)라고 하는 여자를 간통(奸通)하여 아이를 가지게 하였다. 김철이 잡아서 형조에 고소하니, 한을생이 본 고향 이천현(伊川縣)으로 도망하였는데, 임금이 외방의 군역(軍役)에 정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한을생이 몰래 서울로 돌아와 또 보패와 대낮에 간통하니, 김철이 또 잡아서 고소하였다. 형조에서 한을생을 군역(軍役)을 마음대로 이탈하여 음욕(淫欲)을 자행(恣行)한 죄로 논하여, 이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5월 17일(병오)
이천(伊川)에 비와 우박이 내렸다.
○ 이천의 인가(人家)에서 말이 네 눈 가진 암망아지를 낳았는데, 그날 죽었다.
6월 5일(계해)
회양부(淮陽府) 화악산(華嶽山)에 비와 눈이 내렸다. 전 대호군 강진(康鎭)을 원주에 유배하고,…….
6월 22일(경진)
동북면(東北面)이 굶주리니, 이를 진휼(賑恤)하였다. 도순문사(都巡問使) 박신(朴信)이 상언(上言)하기를, “강원도에서 보낸 곡식이 적어서 기민(飢民)을 진휼하기에 부족하니, 3천석을 더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7월 11일(무진)
원주(原州) 사람인 죽은 전서(典書) 최운사(崔云嗣)의 가비(家婢) 개덕(蓋德)이 한꺼번에 2남 1녀를 낳으니, 명하여 미두(米豆) 10석을 내려 주었다.
9월 8일(갑자)
경차관(敬差官) 김구덕(金九德) 등 60여 명을 나누어 보내 다시 전지(田地)를 측량하게 하였다. 경기(京畿)·풍해(豐海)·강원도(江原道)에 모두 측량을 마치라고 명하니, 의정부에서 그 경계(經界)가 바르지 못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11일(정묘)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였다.
9월 12일(무진)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노루 세 마리를 덕수궁에 바쳤다. 임금이 포천(抱川) 등성이에서 고정모(高頂帽)를 쓴 두어 사람이 뒤쫓아 오는 것을 보고,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저들은 누군가?” 하니, “대언(代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을 멈추고 여섯 대언(代言)을 불러, 노희봉(盧希鳳)을 시켜서 각각 큰 바리[盂]에다 술을 부어 하사하고, 또 다시 큰 술잔[鍾]으로 한 잔씩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좌대언(左代言) 윤사수(尹思修)는 엉금엉금 기어서 물러가고, 우대언(右代言) 권완(權緩)은 말을 타려 하다가 떨어지니, 임금이 웃었다. 이숙번(李叔蕃)을 불러 이르기를, “이곳에는 짐승이 적고, 날이 흐려사 비가 이처럼 내리니, 내 환궁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지나신 곳마다 예전부터 이와 같으니, 만약 철원(鐵原)지방으로 들어가시면 들이 평평하고 짐승도 꽤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3일[己巳]에 철원지방에 들어가니, 과연 이숙번의 말과 같았다. 저녁 때 철원의 신지(新池)에서 행차를 멈추었다. 임금이 중축(中軸) 사이에서 말을 달리며 짐승을 쫓았다.
9월 14일(경오)
철원 봉성평(鳳城坪)에 행차하였다.…….
9월 15일(신미)
대가(大駕)가 평강현(平康縣)에 이르렀다.
10월 30일(병진)
호조에서 금년(今年) 제도(諸道)의 호구수(戶口數)를 올렸는데, 경기 좌도는 10,739호(戶)에, 정(丁)이 19,319명이고, 경기 우도는 9,990호에 정이 18,819명이며, 충청도는 19,560호에, 정이 44,476명이며, 경상도는 48,993호에, 정이 98,915명이며, 전라도는 15,714호에 정이 39,167명이며, 풍해도는 14,170호에, 정이 29,441명이며, 강원도는 15,879호에, 정이 29,224명이며, 동북면(東北面)은 11,311호에, 정이 28,683명이며, 서북면(西北面)은 33,890호에, 정이 62,321명이었다.
太宗 七年(丁亥:1407年)
3월 15일(기사)
충청(忠淸)·강원(江原)·경상도(慶尙道)에 명하여 진헌(進獻)할 중폭지(中幅紙)를 만들게 하였다.
3월 21일(을해)
원주(原州)에 눈이 내렸다.
5월 14일(정묘)
조신(朝臣)을 나누어 보내서 사리(舍利)를 각 도(道) 사사(寺社)에서 구(求)하였으니, 충청도(忠淸道)에는 사재소감(司宰少監) 한유문(韓有紋)을, 경상도(慶尙道)에는 전좌랑(前佐郞) 하지혼(河之混)을, 전라도(全羅道)에는 전정언(前正言) 김위민(金爲民)을, 강원도(江原道)에는 종부부령(宗簿副令) 이당(李堂)을 보내었다. 황엄(黃儼) 등이 장차 오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유문은 45매를 얻고, 하지혼은 164매를 얻고, 김위민은 155매를 얻고, 이당은 90매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5월 16일(기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김승주(金承霔)의 죄를 청하였으나, 용서하였다. 처음에 승주(承霔)가 아뢰기를, “신(臣)의 가노(家奴)가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에 사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경작하는 전지(田地)가 5결(結) 밖에 안되는데, 경차관(敬差官)이 이를 고쳐 측량하여 25결로 증가해 만들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네 전지가 비록 5결이지마는, 그 중에 더 경작한 것이 있지 않은가? 혹 원래의 전지가 5결뿐이 아닌데, 네가 5결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더니, 종[奴]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사헌(大司憲) 성석인(成石因)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와 같다면 경차관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집법관(執法官)이 어찌 놓아두려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행대감찰(行臺監察) 유면(兪勉)을 보내 허실(虛實)을 살펴보게 하였다. 유면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승주(承霔)의 아뢴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여러 번 승주의 무망죄(誣罔罪)를 청하고, 아전을 보내어 수직(守直)*하니, 임금이 공신(功臣)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 수직(守直) : 죄인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그 집을 지키는 것.
5월 27일(경진)
큰 비가 내려 경성(京城)의 개천이 모두 넘치고, 강원도 평창군(平昌郡)에 물이 넘쳐 민가(民家) 30여 호(戶)가 표몰(漂沒)되었다.
7월 26일(정축)
왜선(倭船) 세 척이 삼척부(三陟府)를 노략질하여 한 사람을 죽이고 갔는데, 천호(天戶) 정인부(丁仁富)가 두려워하고 겁내어 쫒아가 잡지 못하였다. 관찰사(觀察使)가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8일(무자)
사헌집의(司憲執義) 허조(許稠)가 상소하여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논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가만히 근년(近年)의 풍속을 보건대, 전조(前朝) 말년의 일을 느리게 하던 것을 싫어하여, 모든 일에 있어 백성의 폐해를 돌보지 않고 오직 빨리 하기만 힘쓰는데, 영선(營繕)하는 일에 있어 더욱 심합니다. 사령(使令)이 된 자가 그 관원(官員)을 두려워하여 독촉하기를 매우 엄하게 하여, 역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내몰아 소·양과 다를 바가 없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앞을 다투어 분주(奔走)하다가, 나무와 돌에 상(傷)하는 자가 자주 있습니다. 신이 지난 해 봄에 춘주(春州)에 가서 들으니, 나무를 베고 운반하던 즈음에 죽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선 신(臣)의 이목(耳目)이 미친 것으로 말씀드리면, 지난번 문묘(文廟)의 역사에 신의 조카 허성(許誠)의 종이 죽었고, 근일 관사(館舍)의 역사에 호군(護軍) 백원봉(白元奉)의 종이 죽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를 보면, 나머지를 모두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문책을 당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무릇 백성을 역사시키는 자가 모두 빨리 이룩하고자 하니, 이 같은 일을 금하지 않는다면, 신은 죄 없는 백성이 나무와 돌에 많이 치어 죽을까 두렵습니다. ……”
임금이 상소를 보고 얼굴빛이 변하며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도리를 아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듣지 못하였으며, 왜 나에게 고하지 않았는가?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許稠) 뿐이로다. 내가 만일 이것을 알았다면, 어찌 이 역사를 일으키려 하였겠는가? 인명(人命)이 매우 중하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곧 역사를 파할 것을 명하고, 감독총제(監督摠制) 박자청(朴子靑)을 소환하였다. 박자청은 성질이 까다롭고 급하여, 매양 역사를 감독하면 빨리 이루고자 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부를 재촉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겼다.
12월 2일(신사)
의정부(議政府)에서 부의하는 법[致賻之法]을 계문(啓文)하였다. 계문은 이러하였다.
“시직(時職)·산직(散職)의 대소인원(大小人員)으로 조정(朝廷)이나 본국(本國) 경내(境內)에 봉명(奉命) 출사(出使)하였다가 병에 걸려 죽은 자가 있으면, 예조(禮曹)에서 <그 사람의> 맡은 일의 근만(勤慢)을 분간하여, 왕지(王旨)를 받아서 차등있게 부의하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강원도 경력(經歷) 한고(韓皐)·지예원군사(知預原郡事) 박희문(朴希文)이 모두 임소(任所)에 있다가 죽었는데, 임금이 듣고 의정부에 명하기를, “내가 궁중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모두 부의를 하는데, 조사(朝士)로서 나라를 위해 분주(奔走)하다가 죽은 자에게 어찌 부의하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영갑(令甲)으로 명문화하여서 유사(有司)가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이러한 계문이 있었다.
太宗 八年(戊子:1408年)
1월 29일(무인)
임금이 덕수궁에 나아갔다. 처음에 태상왕이 영선(營繕)을 하려고 하므로, 임금이 명하여 충청·강원도의 군정(軍丁) 300명을 징발해서 그 역사(役事)에 이바지하게 하였었는데, 이날 서울에 도착하였으므로 곧 모두 방환(放還)하였다.
2월 8일(정해)
윤사수(尹思修)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삼았다.
3월 21일(경오)
의정부에서 각도(各道) 병선(兵船)의 수(數)를 증가하자고 청하기를, “경기 좌·우도의 원수(元數)가 51척인데 지금 25척을 더 정하고, 전라도는 원수가 81척인데 지금 30척을 더 정하고, 경상도는 원수가 137척인데 지금 50척을 더 정하고, 풍해도는 원수가 26척인데 지금 20척을 더 정하고, 강원도는 원수가 16척인데 지금 10척을 더 정하고, 충청도는 원수가 47척인데 지금 30척을 더 정하고, 서북면은 원수가 40척인데 지금 15척을 더 정하고, 동북면은 원수가 30척인데 지금 5척을 더 정하여, 상항(上項)의 선척(船隻)을 관찰사가 각관(各官)의 잔성(殘盛) 등차(等差)와 재목(材木)의 유무(有無), 그리고 운반하기의 어렵고 쉬운 것으로 분간하여 사체(事體)를 정해 만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29일(정미)
사헌부에서 강원도 도관찰사 조면(趙勉)과 전 판원주목사(前判原州牧事) 유귀산(庾龜山) 등의 죄를 청하였다. 원주 교수관(原州敎授官) 신도(申圖)가 일찌기 목사(牧使) 유귀산의 불법한 일을 소송하였는데, 조면이 신도에게 죄를 돌리고 귀산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귀산도 또한 여기에 좌죄(坐罪)되어 면관(免官)되었다. 헌부(憲府)에서 논핵(論劾)하여 아뢰기를,
“전 판원주목사 유귀산이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산신(山神)을 가지고 수죄(數罪)하며 태형(笞刑)을 가하였으니, 이미 불경(不敬)하고, 또 황후(皇后)를 위하여 거애(擧哀)*하던 날에 풍악을 울리며 연음(宴飮)하였고, 또 관찰사 조면과 더불어 함께 부처(付處)한 사람 전직(全直)의 우사(寓舍)에 가서 술이 몹시 취하여 춤을 추었으니, 수령(守令)의 의(義)가 조금도 없습니다. 전 원주 교수관 신도는 사랑하는 기생[愛妓]을 투기(妬忌)하여 귀산을 불충불효(不忠不孝)로 송사하고, 또 거애하던 날 제 자신도 연석(宴席)에 참여하고 허물을 목사(牧使)에게만 돌리니, 또한 부당합니다. 그러나, 신도는 이미 조면에게 논죄(論罪)되어 상주(尙州)에 부처(付處)하였고, 조면은 귀산의 말을 듣고 함께 전직의 집에서 마시고, 신도가 고소하매, 귀산의 죄는 묻지 않고 도리어 신도를 죄주었으니, 공평하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여 감사(監司)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전 횡천감무(前橫川監務) 단순(段純)은 조면과 귀산의 뜻에 아첨하여 지나치게 신도를 형벌하고, 옥사(獄辭)를 증감(增減)하였는데,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알고 중로(中路)에서 도망하였으니, 상항(上項)의 인원(人員)의 죄상(罪狀)을 율(律)에 의해 과단(科斷)하기기 바랍니다.”
하니,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유귀산과 신도는 이미 벌써 죄를 받았으니 다시 거론하지 말고, 조면은 현재 병으로 앓고 있으니 단순(段純)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서 한꺼번에 죄를 의논하라.”
* 사전(祀典) : 제사(祭祀)에 대한 예전(禮典).
* 거애(擧哀) : 곡읍(哭泣)하는 예(禮).
7월 3일(기유)
각 도(各道)에 순찰사(巡察使)를 나누어 보내어 다시 처녀(處女)를 선발하게 하고, 또 내관(內官) 한 사람씩을 따라가게 하였는데, 이름을 경차내관(敬差內官)이라 하였다. 경기좌도·강원도·동북면은 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내관(內官) 김용기(金龍奇)이고, 경기우도·풍해도·서북면은 전 도순문사(前都巡問使) 여칭(呂稱)·내관(內官) 이원봉(李元鳳)이고, 충청도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내(李來)·내관(內官) 윤백안(尹伯顔)이고, 전라도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이귀령(李貴齡)·내관 염유치(廉有恥)이고, 경상도는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내관 박유(朴輶)였다. 의정부에서 각 도(道)에 이첩(移牒)하였다.
“지난번에 도관찰사(都觀察使)·도순문사(都巡問使)와 경차관(敬差官) 등이 도내(道內)의 처녀들을 용심(用心)하여 추쇄(推刷)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報告)에 빠진 자가 많이 있다. 다시 대소(大小) 수령(守令)과 품관(品官)·향리(鄕吏)·일수양반(日守兩班)*·향교생도(鄕校生徒) 및 백성(百姓) 각 호(各戶)에 만일 자색(姿色)이 있거든 모두 채택(採擇)하여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丹粧)시켜 천사(天使)의 사열(査閱)을 기다리고,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침구(針灸)하거나 머리를 자르고 약(藥)을 붙이고 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고 꾀하는 자는, 통정(通政) 이하는 직접 처단하고, 가선(嘉善) 이상은 신문(申聞)하여 모두 ‘왕지(王旨)를 따르지 않는 죄’로 논하고,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라.”
* 일수양반(日守兩班) : 지방 각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하노(下奴). 세종실록(世宗實錄) 권 28, 7년 을사(乙巳) 4월 경신(庚申)조에 의하면 “各官各驛給事於前者 國俗謂之日守兩班”이라 하였음.
7월 5일(신해)
여러 도(道)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산릉(山陵)의 역사(役事)에 부역(赴役)하게 하였는데, 충청도에서 3,500명, 풍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이었다. 7월 그믐날을 기(期)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
7월 7일(계축)
춘주(春州)에 황충(蝗虫)이 있었다.
7월 8일(갑인)
김우(金宇)로 강계(江界)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판강계부사(判江界府事)를, 권충(權衷)으로 이성(泥城)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使)를, 박영(朴齡)으로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판길주목사(兼 判吉州牧事)를, 윤사수(尹思修)로 강원도 도관찰사(都觀察使)·판원주목사(判原州牧事)를, 이간(李衎)으로 강원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를, 함부림(咸傅霖)으로 풍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판황주목사(判黃州牧事)를, 김계지(金繼志)로 풍해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판해주목사(判海州牧事)를 삼았으니, 모두 의정부(議政府)에서 입초(入抄)한 것을 가지고 낙점(落點)하여 차견(差遣)한 것이었다.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7월 15일(신유)
강원도의 원주·정선·인제와 풍해도의 봉주(鳳州)·장연(長淵)에 황충이 일었다.
7월 17일(계해)
의정부에서 각 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군관수(軍官數)를 아뢰어 정[啓定]하였다. 계림 안동도(鷄林安東道)·상주 진주도(尙州晉州道)·전라도·충청도·동서북면(東西北面)의 도순문사(都巡問使)는 각각 10인이고, 강원도·풍해도·길주(吉州)·경원(慶源)·이성(泥城)·강계(疆界)는 각각 7인이고, 함주(咸州)·청주(淸州)·안주(安州) 및 각 진(鎭)의 병마사(兵馬使)는 각각 5인이었다.
9월 20일(을축)
강원도 양주(襄州) 등 다섯 고을에 우박이 내려 깊이가 5촌(寸)이나 되었다.
9월 29일(갑술)
강원도에 큰 비가 내려서 화곡(禾穀)을 손상하였다.
10월 16일(경인)
명하여 민무구를 풍해도 옹진진(甕津鎭)에, 민무질을 강원도 삼척진에 옮겨 두었다. …….
11월 12일(병진)
각 도의 시위군 절도사(侍衛軍節度使)를 고쳐 임명하여, 경기 우도는 이귀령(李龜齡)을, 전라도는 조흡(曹恰)을, 경상도는 심종(沈淙)·김승주(金承霔)를, 강원도는 이승간(李承幹)·심인봉(沈仁鳳)을, 동북면은 윤저(尹柢)를, 안주도(安州道)는 홍부(洪敷)를 제수하고, 또 색장(色掌)을 고쳐 진무(鎭撫)라 하였다.
太宗 九年(己丑:1409年)
2월 26일(기해)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경작할 만한 전지를 주도록 명하였다.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였다. “듣건대, 민무질이 남의 집에 기숙(寄宿)하여 과객과 같고, 경작하는 땅도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니, 민무구가 우거(寓居)하는 집 주인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또 전지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라.” 또, 풍해도 도관찰사에게 전지하였다. “민무구에게 경작할 만한 전지를 주라.”
또, 민무구와 민무질의 서울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동평관(東平館)*과 서평관(西平館)을 짓고, 그 값을 주도록 명하였다.
* 동평관(東平館)․서평관(西坪館) : 조선조 초엽에 일본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마련한 두 개의 관사(館舍). 처음에 일본의 왜구(倭寇)에 대해서 회유(懷柔) 정책을 취하여 수많은 왜객(倭客)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동․서평관 둘을 두었었으나 세종 때에 왜구(倭寇)가 어느 정도 진압되어, 국가의 지출을 막기 위해 왜사(倭使)의 왕래를 억제하게 되자, 서평관은 폐지하고 동평관만 남겨 두었다.
3월 4일(정미)
철원부사 송극첨(宋克瞻)에게 장(杖) 100대를 때렸다. 나라의 제도에, 가을과 겨울을 당하면 여러 목장의 여위고 병든 말을 골라서 주군(州郡)에 나누어 주어 기르게 하고, 매양 사복시(司僕寺) 관원을 보내어 고찰(考察)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복시부정(副正) 정종성(鄭宗誠)이 철원에 이르러, 말이 여위고 파리하다고 하여 말을 먹인 자에게 장(杖)을 때리려고 하니, 송극첨이 사모(絲帽)를 벗고 관대(冠帶)를 풀어 땅에 집어던지고 성난 목소리로, “만약 장리(掌吏)에게 죄주려거든 나에게 죄를 가함이 마땅하다.” 하고, 또 곤장을 잡은 자를 꾸짖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었다. 정종성이 돌아와서 아뢰니, 송극첨을 잡아오도록 명하여 순금사(巡禁司)에 내리고,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죄하게 하였다.
3월 16일(기미)
전 강원도 도관찰사 김이음(金爾音)이 졸(卒)하였다.
3월 16일(기미)
강원도의 기민(飢民)을 진제(賑濟)하게 하였다. 도관찰사가 상언(上言)하기를, “굶주린 백성이 도토리[橡實]를 주어 연명하는데, 도토리가 이미 다 없어졌고, 의창(義倉)에 저장한 곡식도 구제하기에 부족합니다. 원컨대 국고(國庫)의 곡식을 내어 흉년을 구제하고 농사를 권장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9일(임신)
강원도 평강(平康)·낭천(狼川)·김화(金化)에 우박이 내렸다.
4월 5일(정축)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에 비와 눈이 3일 동안 내렸다.
4월 13일(을유)
강원도의 실농(失農)한 각 고을에 국고의 곡식을 내어 종자(種子)와 농량(農糧)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도관찰사가 상언하였다. “의창(義倉)에 저장한 곡식은 겨우 굶주림을 구제할 만하옵고, 종자와 농량은 전혀 의뢰할 데가 없습니다. 만약 의정부의 정식(定式)대로 행이(行移)하여 지급하면, 집집의 전지에 파종(播種)을 마치지 못할 형편입니다. 원컨대, 국고의 쌀과 콩을 적당하게 나누어 주어 넉넉하게 하여 실농(失農)하지 않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2일(갑오)
동북면의 기민(飢民)을 진제(賑濟)하였다. 임금이 동북면의 안변군(安邊郡)에 기근이 들었는데, 민간(民間)에서 군사가 이른다는 거짓말이 나돌아 서로 도망하여 숨는다는 소문을 듣고, 의정부 지인(知印)을 보내어 효유(曉諭)해 안심시키고, 회양창(淮陽倉)의 곡식을 운반하여 진대(賑貸)하도록 명하였다.
윤4월 12일(갑인)
풍해도의 문화현(文化縣)에 얼음과 싸락눈이 섞여 내려서 거의 두 자나 되었고, 안악(安岳)·풍주(豐州)·신주(信州)와 강원도 평창(平昌)에는 우박이 내렸다.
윤4월 13일(을묘)
원주(原州)에 서리가 내렸다.
윤4월 16일(무오)
경차관(敬差官)을 경상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나누어 보냈으니,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각도 수령들이 영선(營繕)을 멈추지 아니하고 누대(樓臺)를 많이 지어서 놀이를 일삼아,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괴롭힌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이해 봄에 충청도 백성들이, 관찰사 유정현(柳廷顯)이 각박하게 부세(賦稅)를 거두는 데 시달려 굶주림이 더욱 심하였다.
5월 28일(기해)
순금사(巡禁司)의 관원을 이천(伊川)에 보내어 손효종(孫孝宗)을 숨겨 준 사람을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풍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함부림(咸傅霖)이 아뢰기를, “손효종이 이천현(伊川縣)에 있는 동복 누이 기전룡(奇田龍)의 처(妻) 집에 도망하여 숨어 있습니다.” 하였으므로, 의정부에서 순금사 관원 한 사람을 보내어 숨겨 준 사람을 조사하여 심문하도록 청하였다. 관원이 가 보니, 손효종이 갑자기 죽어서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
7월 3일(계유)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우뢰와 번개가 몹시 심하여, 도봉산(道峰山)이 무너졌다. 양주(楊州)에서 산이 무너진 것이 더욱 심하였다.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아뢰고 서운감후(書雲監侯) 김종선(金種善)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니, 벽제(碧蹄)와 고령(高嶺) 사이에 산이 무너진 곳이 270곳이나 되었는데, 고령사(高嶺寺) 아랫 마을에서 한 가족 22인이 모두 압사(壓死)하였다. 경기 도관찰사가 아뢰기를, “이달 초3일 수재(水災)에 산이 무너져, 양주(楊州)·포천(抱川)·풍양(豐壤) 등처에서 사람이 죽은 자가 55명이나 되고, 소가 죽은 것이 5두(頭), 말이 죽은 것이 5필(匹)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제왕(帝王)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행실을 닦은 이가 있었는데, 어떤 것이 행실을 닦는 일이 되는가?” 하였다.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표류(漂流)한 민가(民家)가 9호(戶)이고, 강원도 조종현(朝宗縣)에 산이 무너져 압사(壓死)한 자가 남녀 20명이고, 말이 죽은 것이 7필, 소가 죽은 것이 3두였다.
7월 5일(을해)
진헌색 제조(進獻色提調) 이귀령(李貴齡) 등이 처녀(處女)를 선택하는 사의(事宜)를 아뢰었다. “서울 안의 처녀는 지금 이미 두루 살펴보았는데 입격할 만한 자가 없으니, 의정부에 명하여 편의한 대로 시행하소서.” 하였다. 이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유후사(留後司)와 풍해도·강원도·전라도에서 각각 2인, 경상도에서 4인, 경기 좌우도에서 3인을 뽑되, 이미 보았거나 아직 보지 못한 처녀 중에서 연령 17세 이하 13세 이상으로 잘 생긴 사람을 선택하여 전년(前年)에 입격한 처녀 27인과 합하여 올려보내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어 지인(知印)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고, 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중외(中外)의 처녀가 금령(禁令)으로 인해 혼가(婚嫁)의 때를 잃으니, 천도(天道)가 두렵다. 그러나 대국(大國)의 요구를 소국(小國)이 또한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할 적에 마땅히 부주(附奏)를 행하라.” ……
○ 강원도 병마도절제사 심인봉(沈仁鳳)을 파직(罷職)하고, 심인봉으로 하여금 사마(私馬)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윤사수(尹思修)가, 심인봉이 반인(伴人)으로 하여금 역마(驛馬)를 달리게 하여 왕도(枉道)*한 죄를 논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인봉이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사수와 더불어 혐의하고 시기하여 마지 않았다.”
* 왕도(枉道) : 정도(正道)를 그르침.
7월 24일(갑오)
성주목사(星州牧使) 이백지(李伯持)·영해부사(寧海府使) 권만(權蔓)·지울주사(知蔚州事) 양오복(楊五福)·지영주사(知永州事) 이백함(李伯含)·울진만호(蔚珍萬戶) 권소(權紹)·횡천감무(橫川監務) 구익령(具益齡)·가평감무(加平監務) 김욱(金郁) 등을 자원(自願)에 따라 부처(付處)하였으니, 경차관(敬差官)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평민(平民)을 역사시켜 관둔전(官屯田)을 경작하였습니다.” 고 하였기 때문이다.
7월 29일(기해)
원주(原州)에서 흰 벌레[白虫]가 조 이삭을 갉아 먹었다.
9월 12일(신사)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유점사(楡帖寺)에 봉안한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받들어 모셔오게 하였다.
10월 2일(경자)
유용생(柳龍生)·구성량(具成亮) 등을 곤장을 때려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순금사(巡禁司)에서 아뢰기를, “유용생과 구종수(具宗秀) 두 사람은 이무(李茂)에게 당부하여 기밀(機密)을 누설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관직(官職)을 삭탈하고 곤장 60대를 때려 먼 지방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용생은 부여(扶餘)에, 구종수는 울진(蔚珍)에 귀양보내고, 또 순금사 영사(巡禁司令史) 이양배(李陽培)를 옹진(瓮津)에 장류(杖流)하였으니, 옥사(獄辭)를 홍언(洪彦)에게 누설한 자이다. 구성량(具成亮)을 울주(蔚州)에, …… 이승조(李承祚)를 장기(長鬐)에, 이공유(李公柔)를 옥구(沃溝)에, 이공효(李公孝)를 풍주(豐州)에, 이공지(李公祗)를 청주(淸州)에, 이탁(李托)을 평해(平海)에 귀양보내고, 오직 이공유(李公裕)만은 소경[盲人]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10월 12일(경술)
각 도에 순찰사(巡察使)를 나누어 보냈는데, 이직(李稷)은 서북면(西北面)에, 이원(李原)은 강원도·동북면(東北面)에, 함부림(咸傅霖)은 충청·전라도에, 박은(朴訔)은 경상도에, 전 도관찰사(前都觀察使) 권진(權軫)은 풍해도에 보냈다.
10월 14일(임자)
순금사 사직(巡禁司司直) 심귀린(沈龜麟)을 옹진(瓮津)에, 부사직(副司直) 우도(禹導)를 삼척(三陟)에 보내어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을 압령(押領)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순금사 관원은 전라도에 이르러 돌아오게 하고, 관찰사가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제주로 압송(押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민무구 등이 그 가내(家內)와 노비(奴婢)를 데리고 가는 것을 들어주었다.
10월 16일(갑인)
김승주(金承霔)로 길주도(吉州道)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를, 이종무(李從茂)로 안주도(安州道)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이지실(李之實)로 강계도(江界道) 도병마사를, 이승간(李承幹)으로 강릉도(江陵道)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삼고, 윤향(尹向)으로 다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삼았다.
10월 27일(을축)
11도(道)에 도절제사(都節制使) 각 한 사람을 두고, 그를 보좌하는 자는, 가선(嘉善) 이상은 절제사(節制使)를 삼고, 통정(通政) 이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삼았다. 상주(尙州)·진주도(晉州道)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과 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이고, 계림(雞林)·안동도(安東道)는 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와 전절제사(前節制使) 조완(曹緩)이고, 전라도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과 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총제(摠制) 조흡(曹洽)이고, 충청도는 도총제(都摠制) 김남수(金南秀)와 총제(摠制) 조질(趙秩)·성발도(成發道)이고, 경기좌도는 안원군(安原君) 한장수(韓長壽)와 전절제사(前節制使) 유습(柳濕)·전첨총제(前僉摠制) 박지(朴芷)이고, 경기우도는 도총제(都摠制) 정진(鄭鎭)과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유신(康有信)·홍부(洪敷)이고, 풍해도는 전절제사(前節制使) 김계지(金繼志)와 김중보(金重寶)·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이고, 강원도는 전 도절제사(前都節制使) 심인봉(沈仁鳳)과 전 총제(前摠制) 이승간(李承幹)·전 첨총제(前僉摠制) 문효종(文孝宗)이고, 동북면은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과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화영(李和英)이고, 평양도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총제(摠制) 이지실(李之實)이고, 안주도(安州道)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와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동지총제(同知摠制) 김만수(金萬壽)이다. 또 첨총제(僉摠制) 문천봉(文天奉)과 상호군(上護軍) 김옥(金玉)으로 동북면 별패(別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 강원도 도절제사(都節制使)를 파(罷)하고, 관찰사(觀察使)가 겸하게 하였다.
11월 15일(계미)
대간(臺諫)이 상서(上書)하여 다시 이저(李佇)의 죄를 청하기를,
“ …… 10월 초2일에 안협현(安峽縣) 여진동(女眞洞)에서 사냥하였으니, 안협(安峽)과 임강(臨江)은 그 상거(相距)가 가깝지 않습니다. 말을 달려 사냥한 것도 죄가 되는데, 또 돼지를 쏠 때에 부개(夫介)란 자가 잘못 몽기(蒙奇)를 맞혀 즉사(卽死)하였으니, 몽기의 죽음이 비록 부개의 손에 있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이저(李佇)가 사냥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저(李佇)는 전과 같이 임강(臨江)의 촌장(村莊)에 안치하여 출입(出入)을 금하고, 함께 사냥한 무리들은 때가 지금 몹시 추우니, 경(輕)한 법에 따라 결단(決斷)하라.”
太宗 十年(庚寅:1410)
1월 17일(갑신)
동북면(東北面)의 기근(饑饉)을 진휼(賑恤)하였다. 수륙(水陸)으로 강원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진휼하라고 명하였다.
2월 4일(신축)
의흥부(義興府)에서 각 도 시위정군(侍衛正軍)의 수목(數目)을 올렸는데, 경상도는 4,238명이고, 전라도는 1,378명, 충청도는 1,539명, 강원도는 1,248명이었다. 임금이 각 도의 군사를 3번(番)으로 나누어 3월부터 5월까지 교대로 번상(番上) 시위(侍衛)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다시 전과 같이 하라고 명하는데, 경상도는 200, 나머지 3도(道)는 100명씩 번상하게 하였다.
2월 15일(임자)
경기·강원도의 기근(饑饉)을 진휼(賑恤)하였다.
2월 27일(갑자)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어 그 아들 망고(望古)와 그 무리 3인을 거느리고 경상·전라·강원도에서 왜적을 막게 하였다. 조정(朝廷)의 의논이 이르기를, “평도전(平道全)은 마음씨가 사나워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 무리들이 한데 모여 서울에 사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여, 흩어져 살게 한 것이었다.
3월 26일(임진)
경기·강원·풍해도의 군사가 4월부터 7월까지 번상(番上)하여 시위(侍衛)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풍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정역(鄭易)이 백성들의 기근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4월 5일(신축)
전 강릉대도호부사(前江陵大都護府使) 박인간(朴仁幹)을 외방에 귀양보냈다. 정해년(丁亥年)에 박인간이 강릉에 있을 적에 부인(府人) 전판사(前判事) 최운보(崔云寶)의 큰 말을 강제로 빌려 품마(品馬)로 바치고, 뒤에 말값[馬價]으로 초자(綃子) 7필, 면포(綿布) 3필을 받았는데, 초자 2필을 떼어 먹고 주지 않았다. 최운보가 관찰사에게 호소하니, 박인간이 작은 말을 운보에게 주었다.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이 평창(平昌)에 이르니, 군사(郡事) 서종준(徐宗俊)이 그 일을 적발하였다. 이에 헌부(憲府)에서 박인간이 탐오(貪汚)하고 청렴(淸廉)하지 못하여 사풍(士風)을 오염(汚染)시킨 죄를 논했기 때문이다.
4월 20일(병진)
……. 의정부에서 죄인에게 연좌(連坐)된 자를 각 고을에 이배(移配)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이무(李茂)의 아들 이간(李衎)은 기장(機張)에, 이승조(李承祖)는 장기(長鬐)에, 이공효(李公孝)는 풍주(豐州)에, 이공유(李公柔)는 옥구(沃溝)에, 이공지(李公祗)는 남포(藍浦)에, 이탁(李托)은 평해(平海)에, 강사덕(姜思德)의 아들 강대(姜待)는 순천(順天)에, 유기(柳沂)의 아비 유후(柳厚)는 광주(光州)에, 그 아들 유방선(柳方善)은 영주(永州)에, 유방경(柳方敬)은 울주(蔚州)에, 유선로(柳善老)는 순흥(順興)에, 유효복(柳孝僕)·유막동(柳莫同)은 온수(溫水)에, 조희민(趙希閔)의 아들 조금동(趙今同)은 여흥(驪興)에, 조효순(趙孝順)은 서주(瑞州)에, 윤목(尹穆)의 아들 윤소남(尹召南)은 대흥(大興)에, 윤주남(尹周南)은 신창(新昌)에, 조호(趙瑚)의 아들 조수(趙須)는 회양(淮陽)에, 조아(趙雅)는 원주(原州)에, 윤목(尹穆)의 조카 윤희이(尹希夷)는 해진(海珍)에, 윤희제(尹希齊)는 광주(光州)에 옮겼다.
5월 2일(무진)
명하여 강원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장(金漳) 등을 곤장을 때렸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송인(宋因)이 아뢰기를, “도내(道內) 병선(兵船) 4척이 동북면에 쌀을 운반하다가, 동산현(洞山縣) 정진(井津)에 이르러 역풍(逆風)을 만나 패선(敗船)하여, 쌀·콩 9백 25석을 잃어버렸는데, 운반하던 군사[漕卒]는 모두 언덕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언덕에 의지하였다 하니, 바다 가운데는 아니다. 풍세(風勢)의 변(變)함을 살피비 못하고, 마음을 써서 구호(救護)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압령(押領)을 운반하던 만호(萬戶)·천호(千戶)를 마땅히 그 죄를 다스리라.”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첨절제사(僉節制使) 김장(金漳)은 조운선척(漕運船隻)을 친히 점고(點考)하지 않고, 관기(官妓)를 싣고 육로(陸路)로 경유하여 갔는데, 배 가운데의 물건[陸物]을 도둑질하여 기생에게 주고, 또 군인 7, 8명을 시켜 기생을 집까지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만호(萬戶) 이천언(李天彦)과 천호(千戶) 배원려(裵元呂) 등 네 사람은 모두 압령관(押領官)이 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패선(敗船)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율(律)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김장 같은 자는 마땅히 머리를 베어 여러 도(道)에 전시(傳示)해야 되겠으나, 율(律) 밖의 형벌을 행할 수가 없으니, 천언(天彦) 등과 함께 곤장을 때리도록 하라.”
5월 7일(계유)
강원도에 우박이 내렸다. 춘주(春州)·고성(高城)·홍천(洪川)에는 큰 것이 탄환(彈丸)만 하고, 정선(旌善)에는 큰 것이 주먹만 하여 3일이 지나도 녹지 않았다.
5월 22일(무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동북면의 군자(軍資)가 60,000석뿐인데, 지금 도적을 막는 수졸(戍卒)이 거의 8~900명이나 되니, 여름 석 달 경비와 환상(還上)을 나누어 줄 수량을 제하면, 나머지가 2~30,000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적을 막는 일의 지속(遲速)을 알 수 없으니, 청컨대, 강원도의 군자(軍資)를 동북면에 조운(漕運)하고, 경상도 안강(安康) 이북의 군자(軍資)를 강원도에 조운하소서. 가을이 와서 바람이 높아지면 곡식을 수운(輸運)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이때에 회박(回泊)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회박(回泊)할 즈음에 배가 깨어지고 사람이 상할까 두려우니 잘 의논하여 시행하라.”
5월 26일(임진)
강원도에 큰 비가 내려 원주·횡천(橫川)에 산이 무너졌다. …….
5월 29일(을미)
강원도 통천(通川)과 흡곡(▦谷)에 황충(蝗虫)이 일었다.
6월 5일(경자)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또 지신사(知申事) 안등(安騰)과 더불어 말하기를,
“동북면 주군(州郡)에 저축한 잡곡(雜穀)이 5~60,000석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강원도 군자(軍資)를 조운(漕運)하고자 말하는 자도 있고, 그 토성(土姓)의 사환(仕宦)하는 자의 곡식과 교환하자고 말하는 자도 있어, 의논이 한결같지 않으나, 조운을 하자면 수로(水路)가 몹시 나빠서 인명(人命)을 상할까 두렵고, 만일 교환을 하자면 많아야 수천 곡(斛)에 지나지 못하니, 이 의논이 결단하기 어렵소. 또 김남수(金南秀)로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를 삼아서 들여보내면, 군사는 적고 장수는 많아서 공(功)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고, 이 사람이 강하고 용맹하여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어, 의논이 분분하니, 청컨대, 왕지(王旨)를 받아서 시행하시오.” 하였다. 이에 조영무(趙英茂)가 말하기를,
“동북면 일은 언제 끝날지 헤아릴 수 없으니, 강원도 군자(軍資)를 조운하는 것이 가하오. 조운의 이해(利害)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어찌 백성의 생명을 아껴서 국가의 대체(大體)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소?” 하고, 지부사(知府事)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교환하면 공사(公私)가 모두 하고,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아니하오.” 하였다.
6월 13일(무신)
형조판서(刑曹判書) 함부림(咸縛霖)을 파직(罷職)하고, 정랑(正郞) 김자서(金自西)를 청주(淸州)에, 양윤관(梁允寬)을 곡성(谷城)에, 좌랑(佐郞) 이맹진(李孟畛)을 원주(原州)로 귀양보내고, 또 검률(檢律) 배약(裵爚) 등을 곤장을 때렸으니, 모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의 죄를 잘못 청한 데에 좌죄(坐罪)된 것이었다. …….
7월 1일(병인)
강원도 대령산(大嶺山)의 대나무[竹]에 열매가 열었다. 관찰사 송인(宋因)이 아뢰었다.
“강릉부 대령산의 대나무에 열매가 열어 보리와 함께 익었는데, 이삭은 기장[黍]과 같고, 열매는 보리[麥]와 같고, 차지기는 율무[薏苡]와 같고, 그 맛은 당서(唐黍)와 같습니다. 백성들이 이것을 따서 먹이를 삼고 혹은 술을 만드는데, 오곡(五穀)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5, 6두(斗), 혹은 10두를 수확하여 백성들이 모두 7, 8석(石)씩 저축하여 조석(朝夕) 끼니를 마련하였습니다.”
8월 20일(갑인)
북면의 기민(飢民)을 진휼하였다. 강원도 회양 이북의 군자(軍資)는 동북면으로 수운하고, 경기 철원 이북의 군자는 회양으로 수운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20일(임자)
원주 각림사(覺林寺)에 향(香)을 내렸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이 절에서 글을 읽었는데, 중 석초(釋超)가 주지(住持)로서 간다고 하직하니, 향(香)을 주어 보냈다.
太宗 十一年(辛卯:1411年)
2월 23일(갑인)
노숭(盧崇)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숙번(李叔蕃)으로 안성군(安城君) 겸 지의흥부사(兼 知義興府事)를, 권충(權衷)으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정역(鄭易)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오승(吳陞)으로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박습(朴習)으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김만수(金萬壽)로 안주도 도절제사(安州道都節制使)를, 안노생(安魯生)으로 판광주부사(判廣州府事)를, 김소(金素)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이윤상(李允商)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을 삼고, 지평(持平) 김최(金最)를 좌천(左遷)시켜 재령 현령(載寧縣令)을 삼았다. 사헌부에서 김최의 관향(貫鄕)이 불명(不明)하다 하여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을까 염려한 까닭에 외방(外方)으로 임명한 것이다.
3월 6일(병인)
강원도 진명창(鎭溟倉) 이북의 주군(州郡) 곡식을 길주(吉州) 등처로 옮기고, 서북면 안주(安州) 이북의 주군(州郡) 곡식을 의주(義州) 등처로 옮겼으니, 정부(政府)의 청에 따라 뜻하지 않은 근심에 대비한 것이었다.
5월 10일(경오)
우박(雨雹)이 내렸다. 경기도 인주(仁州)·부평(富平)에 우박이 내려 하루 종일 녹지 않았으며, 충청도 청주(淸州)·평택(平澤)·청안(淸安)과 강원도 평창·정선 등지에 우박이 내려 삼[麻]과 보리[麥]를 상하게 하였고, 전라도 장성(長城)·진원(珍原)·복순(福順)·창평(昌平)에 모두 우박이 내렸다.
7월 25일(갑신)
군자감(軍資監)을 조성(造成)하는 역사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호조판서 이응(李膺)이 상언하였다. “용산강(龍山江)의 군자감 창고가 작은데도 축적한 것은 많으니, 마땅히 승도(僧徒)를 시켜 군자감 창고를 증축하고, 강원도 조세(租稅)는 우선 회양 관(官)에 수납하고, 풍해도 조세는 수납하지 말며, 임진(臨津) 이북으로부터 대진(大津) 이서(以西)는 개성부(開城府)에 수납하게 하소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에 명하였다. “토목 역사는 내가 싫어하는 바이니, 우선 유후사(留後司)의 중들이 없는 사사(寺社)에 군량을 쌓아 두라.”
8월 12일(신축)
사헌부 대사헌 박은(朴訔) 등이 상소하여 각 도의 손실 경차관(損實敬差官)을 파(罷)할 것을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신(臣) 등은 생각컨대, 밭[田]이라는 것은 민생(民生)의 휴척(休戚)과 창고의 차고 비는 것이 매어 있으니, 수조(收租)하기를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많으면 걸(桀)이고, 적으면 맥(貊)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조(租)를 거두는 것이 맞지 않으므로 경차관(敬差官)을 나누어 보내어 공사(公私)를 편하게 하니,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경차관이 도(道)마다 각각 2, 3인, 혹은 3, 4인이 되어, 그것을 보고 타량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한 도 안에 손실(損實)의 경중이 동쪽과 서쪽이 뚜렷하게 다르고, 또 가끔 이름을 좋아하는 무리가 전하의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본받지 않고, 그 지경(地境)에 들어가면 먼저 전 해의 손실의 수를 물어서 오로지 실(實)이 많은 것으로 힘쓰는 자가 흔히 있고, 전의 숫자를 비교하여 허위로 보태어 꾸미는 자가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세(租稅)가 맞지 않고 백성의 살림이 날로 박하여져서 원망이 조정에 미치니,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에 어떻겠습니까? 원컨대, 경차관을 파하고 오로지 감사(監司)에게 붙이고, 때없이 행대감찰(行臺監察)*을 나누어 보내어 손실(損實)의 경중, 국민의 고락, 수륙(水陸) 장리(將吏;守令)의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두루 돌아다니며 체찰(體察) 신문(申聞)하여 각근(恪勤)하지 못한 것을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보고 의정부에 내리어 상량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정부에서 아뢰었다.
“금년에 잠정적으로 파하여 내년을 기다리면 경차관이 있고 없는 것의 이해(利害)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부(憲府)의 청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가볍게 고칠 수 없으니, 예전대로 시행하라.” 헌부(憲府)에서 다시 청하기를, “만일 파하지 않겠거든 마땅히 차등을 두어 차견(差遣)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라서 전라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서북면은 각각 2인씩으로, 풍해도·경기도·동북면은 각각 1인씩으로 하고, 경차관(敬差官)에게 명하였다.
“내가 들으니, 근년 이래로 경차관이 도리어 백성을 몹시 가혹하게 다스리는 것을 급무로 삼는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너그럽고 공평하게 하는 데에 힘쓰도록 하라.”
* 행대감찰(行臺監察) : 조선조 초엽에 민간의 이해(利害), 수령의 치적(治績)․근만(勤慢), 향리(鄕吏)의 횡포를 조사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분대(分臺).
10월 15일(계묘)
판강릉 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조휴(趙休)가 졸(卒)하였다.
11월 20일(정축)
경차관(敬差官)을 외방에 나누어 보내었다. 처음에 임금이, “나는 백성 가운데에 혹 큰 추위에 살 곳을 얻지 못한 자가 있으까 몹시 염려된다.” 하니, 박자청(朴子靑)이 대답하였다. “지금 국가가 백성을 역사시키는 일이 없으니, 어찌 살 곳을 잃은 자가 있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마땅히 조사(朝士) 중에 강명(剛明)하고 자혜(慈惠)한 자를 선택하여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어서 아뢰라.”
이에 이르러 조신(朝臣)을 나누어 보내 민생의 질고와 옥송(獄訟)의 원통하고 지체된 것과, 무릇 화기를 상하고 수재·한재를 부르는 연유가 되는 것을 캐어 물어 아뢰게 하였다. 충청도·전라도에는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 이지강(李之剛)을, 풍해도·서북면에는 전농정(典農正) 조치(曹致)를, 강원도·동북면에는 예빈윤(禮賓尹) 유의(柳顗)를, 경상도에는 호조정랑(戶曹正郞) 이유희(李有喜)를 보냈다. 정부(政府)에서 아뢰기를, “만일 수령(守令)이 불법한 일을 하고, 간사한 아전이 작폐(作弊)하여 백성이 그 해독을 받는 자는 자세히 추문(推問)하여, 3품 이상은 가두고 신청(申請)하고, 4품 이하는 율(律)에 의하여 직접 결단하고, 감사(監司)와 수륙 군관(水陸軍官) 가운데 만일 그 직책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며, 또한 실지 형적을 갖추어 신문(申聞)하고 무릇 재앙을 구제하고 환란을 불쌍히 여기며, 이(利)되는 것을 일으키고 해(害)되는 것을 제거하는 사건을 빠짐 없이 캐어 물어 일을 아울러 위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6일(계미)
강원도 도관찰사가 흰 꿩[白雉]을 바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것은 산군(山郡)에 있는 것이니, 상서로운 것이 아니다.”
11월 28일(을유)
동지(冬至)에 왕세자(王世子) 이하 백관이 향궐 하례(向闕賀禮)를 행하기를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편치 않아 정부(政府)에 전지(傳旨)하였다. “내가 오늘 병이 났다. 경 등은 내가 게으르더라도 예(禮)를 행하도록 하라.” 정부 백관이 들어와 하례하고, 강원도에서 흰 노루가죽[白獐皮] 두 장을 바치었다. 정부와 입직(入直)한 신료(臣僚)에게 술과 과실을 주었는데, 아래로 군사에까지 미치었다.
윤12월 1일(정사)
운하[渠]를 파는 일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이 수도(首都)에 운하를 파는 일을 각 도(道)에 이문(移文)하였는가?” 하니,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대답하였다. “명년 2월 초1일에 역사를 시작하는 일로 이미 충청도·강원도에 이문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금년은 윤12월 15일이 입춘(立春)이니, 정월의 기후가 반드시 따뜻할 것이다. 2월을 기다리면 농시(農時)를 빼앗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정월 보름이 되는 때에 부역(赴役)하게 하라. 금년에는 경상도․전라도도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또한 소집하는 것이 좋겠다.”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朴信)이 대답하기를, “경상도 백성에게는 충주창(忠州倉)을 짓는 일을 이미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그러면 노역을 겹쳐서 행할 수가 없으니, 전라상도(全羅上道)의 백성을 부역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충청도·강원도·전라도 군사가 4만 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운하를 파는 일이 거창한데, 군인의 수가 적다.” 하였다. 정부에서 다시 아뢰었다. “5만인으로 하고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가(可)하다.” 하였다.
윤12월 13일(기사)
강원도 도관찰사 박습(朴習)이 경차관 유의(柳顗)의 죄를 청하였다. 계문(啓文)은 이러하였다. “마음대로 회양 교수관(敎授官) 이노(李路)에게 역마를 주어서 자기의 도망한 노비(奴婢)를 찾게 하였으니, 조금도 사신(使臣)의 체통이 없습니다.” 유의에게 행공(行公)을 그만두고, 도로 서울로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윤12월 27일(계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소(疏) 두 가지를 올렸다. 그 첫째는 이러하였다.
“국가에 밖으로 주·부·군·현(州府郡縣)을 설치하고 신료(臣僚)를 선택하여 인부(印符)를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그래도 수령(守令)이 그 직책을 각근히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감사(監司)를 보내어 한 방면을 전제(專制)하게 합니다. 감사로 된 자가 덕음(德音)을 선포(宣布)하고 출척(黜陟)을 밝게 행하는 것이 그 직책인데, 지금 강원감사 박습(朴習)이 근신[左右]을 섬기어 남의 아름다움을 빼앗고 은혜를 사고자 하여 면포·마포 모두 52필을 대언사(代言司)와 전농시(典農寺)에 나누어 증여(贈與)하였는데, 운수할 즈음에 역마와 식량의 비용이 적지 않아서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경차관(敬差官) 예빈시윤(禮賓寺尹) 유의(柳顗)가 주상에게 아뢰고자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박습이 먼저 유의의 죄를 달려가 아뢰었습니다. 무릇 관물(官物)은 비록 1전(錢)의 적은 것이라도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도내(道內)의 회양부사 민교(閔校)·지양주사(知襄州事) 박고(朴翶)·삼척부사 이원밀(李原密)·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 조경부(趙敬夫)·지통주사(知通州事) 이숙경(李叔卿)·지고성군사(知高城郡事) 김저(金渚)·판울진현사(判蔚珍縣事) 노의(盧倚)·지평창군사(知平昌郡事) 남인전(南仁琠)·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 김익정(金益精)·원주판관(原州判官) 오선경(吳先敬)·강릉판관(江陵判官) 이맹상(李孟常)·홍천감무(洪川監務) 성익지(成翼之)·횡천감무(橫川監務) 송사은(宋斯殷) 등이 또한 면포(綿布)와 가죽과 종이를 기증(寄贈)하여 보냈으니, 이것은 감사가 선창(先倡)하니까 수령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에게 거두어 화뢰(貨輅)를 행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이는 경차관의 명을 받고 가서 이곳에 이르러 도로에서 증괴(贈餽)하는 물건을 보고 거두어 원주에 두고, 즉시 계문(啓聞)하지 않는다고 감사가 자기의 죄를 청한 것을 들은 뒤에야 아뢰었고, 또 도망한 노비를 찾으려고 하여서 집의 종을 치중(輜重)의 말에 태워서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니었고, 또 제가 좋아하는 회양 교수관(敎授官) 이노(李路)에게 임의로 휴가를 주어 역마를 태워 집에 돌아가게 하였으니, 그 죄가 작지 않습니다. 우대언(右代言) 조말생(措末生)은 근시(近侍)하는 신하로서 항상 궁금(宮禁)에 있으니, 공비(供費)하는 물건을 밖에 구할 것이 아닌데, 이에 파오치(波吾赤)* 김승례(金承禮)로 하여금 물건을 강원도에서 구하였고,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이각(李慤)·장무(掌務) 판관(判官) 민서각(閔犀角) 등이 또한 청구를 행하였으니, 이 사람들을 율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 파오치(波吾赤) : 사련소(司臠所)에서 고기를 베는 일을 맡아보던 사람. 몽골어 bakurchi에서 나온 말임.
太宗 十二年(壬辰:1412年)
1월 16일(신축)
강원도의 춘등월과(春等月課)*의 군기(軍器)를 면제하였다.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도내(道內) 인민이 올 봄에 행랑(行廊)의 재목을 베는 역사에 나가야 하니, 청컨대 월과의 군기를 면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춘등월과(春等月課)의 군기(軍器) : 봄철에 다달마다 각도의 주부군현(州府郡縣)에 부과하여 공납[貢]하게 하는 군수 물자.
1월 18일(계묘)
외방의 죄인을 용서하였다. 수원(水原)에 안치(安置)한 …… , 강원도 김화(金化) 수군에 정속(定屬)한 달달(韃靼) 조금(趙金), …… 등을 경외종편(京外從便)*하였다.
* 경외종편(京外從便) : 유배된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주어 서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자원하여 살게 하던 제도. 대개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통례였음.
1월 21일(병오)
춘주(春州) 소양강(昭陽江) 상탄(上灘)에 물이 말라서 깊이가 겨우 반자[尺]쯤 되었다가 즉일로 전과 같아졌다.
1월 27일(임자)
유맹문(柳孟聞)·성효상(成孝祥)을 파직하였다. 사헌부에서 청하였다.
“근자에 전 이조좌랑(吏曹佐郞) 유맹문으로 횡천감무(橫川監務)를 삼고, 전 감찰(監察) 성효상으로 영춘감무(永春監務)를 삼았는데, 유맹문 등이 파면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 또 배명(拜命)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나라의 큰 권세는 상과 벌인데, 상벌에 전장(典章)이 없으면 어떻게 권면하고 저지하겠습니까? 원컨대, 그 직임을 파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15일(경오)
이언(李彦)을 숨겨 준 자 9인의 고신(告身)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고주(高州) 전 전서(典書) 서을보(徐乙寶), 길주 전 만호(萬戶) 손귀(孫貴), 전 부령(副令) 강문(姜文), 강릉 전 판사(判事) 조천(趙千), 통주(通州) 전 낭장(郎將) 문중선(文仲宣), 이천 전 낭장(郎將) 최원(崔源), 이주(理州) 전 군기윤(軍器尹) 임원(任元), 해주(海州) 전 중랑장(中郎將) 김장수(金長守), 보주(甫州) 전 현령(縣令) 이영주(李英柱)이었다.
2월 18일(계유)
철원부(鐵原府)의 들[坪]을 강무장(講武場)으로 삼고, 인하여 사렵(私獵)을 금지하였다.
○ 사약(司鑰) 강의(姜義)를 강원도에 보내어 좋은 배나무 가지[梨枝]를 구하였으니, 상림원(上林園)의 나무에 접목하기 위함이었다.
2월 19일(갑술)
사헌부에서 또 박만(朴蔓)·임순례(任純禮)의 죄를 청하니, …… 헌사(憲司)가 또 청하였다. “강원도 평강 등처가 한재로 인하여 백성이 굶주리니, 빌건대 근교(近郊)로 사냥하소서.”
임금이 따르지 않고 승정원(承政院)에 명하기를, “지신사(知申事) 이외에 기타 대언(代言)과 대간(臺諫)은 모두 호종(扈從)하지 말라.” 하고, 서연관(書筵官)을 불러, “세자(世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사냥하는 데에 따라 행할 수 없으니, 도성에 머물러 감국(監國)하라.” 하였으나, 마침내는 따라 행하였다.
2월 25일(경진)
철원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에게 일렀다.
“점치는 자가 전 해에는 액이 있다 하였으므로, 내가 비록 믿지 않으나 감히 말을 달려 사냥하지 아니하였다. 금년 봄에 비록 백성을 역사시켜 하천을 파기는 하였으나, 경기 백성은 참여시키지 않았다. 역사를 파한 뒤에 내가 철원에 사냥하고자 하니, 미리 관리(官吏)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라.”
호군(護軍) 이자화(李自和)를 보내어 임강(臨江)·장단(長湍)·우봉(牛峰)·토산(兎山)에 가서 산림(山林)을 불태워 강무(講武)를 준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행하니, 세자가 따라갔다. 대간(臺諫) 두 사람이 뒤따라가 행궁(行宮)에 이르러 호가(扈駕)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근신(近臣)이 아뢰지 않았다.
3월 6일(경인)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인녕부(仁寧府) 사윤(司尹) 황자후(黃子厚)의 죄를 청하였는데, 황자후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에 노비(奴婢)를 불공평하게 임시로 결절(決絶)한 죄를 논하니, 명하여 순금사(巡禁司)에 내리어 태장(笞杖)을 때리어 복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횡천감무(橫川監務) 강순(姜順)이 3일동안의 노정(路程)을 20일이 되어서 취직(就職)하였고, 또 마음대로 직임을 떠나서 서울에 온 죄를 상소하여 청하니, 순금사(巡禁司)에 내리어 율(律)에 의하여 죄주라고 명하였다.
4월 15일(기사)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을 처치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강원도 감찰사가 보고 하였다. “유산국도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武陵島;울릉도)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人戶)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本島)로 옮겨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息) 거리입니다. 우마(牛馬)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竹]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通州)·고성(高城)·간성(杆城)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 해착(海錯) : 각종의 해산물(海産物).
4월 19일(계유)
칠성군(漆城君) 윤저(尹柢)가 동발(銅鉢) 두 개를 바치고 또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전라도 금주(錦州) 땅에서 동석(銅石)이 산출한다 하오니, 원컨대 캐어오게 하소서.”
전 삼척군사(三陟郡事) 윤종정(尹宗貞)에게 명하여 캐도록 하였다.
5월 14일(정유)
원주(原州)·정선(旌善)·평창(平昌)·영월(寧越) 등의 고을에 큰 물이 화곡(禾穀)을 상하였다.
6월 9일(임술)
경상도 도관찰사 안등(安騰)이 병으로 사직하니, 한성윤(漢城尹) 한옹(韓雍)으로 대신시켰다. 병조참의(兵曹參議) 양수(梁需)를 폄출(貶出)하여 강릉 대도호부사로 삼았으니, 양수가 일찌기 형조참의가 되어 남봉생(南鳳生)의 노비를 잘못 판결한 까닭이었다. 양수가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의 오결한 죄는 법에 마땅히 면직하여야 하겠으나, 경은 내 옛친구이고,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차마 산직(散職)에 두지 못하고, 명하여 강릉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자급을 승진시키지 않은 것은 좌천한 때문이다.”
양수가 대답하기를, “은혜가 지극합니다. 다만 아내의 병이 위독하여 근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네가 벼슬을 면하고자 하는가?” 대답하기를, “벼슬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가까운 고을을 원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아직 가지 말라.”
7월 22일(을사)
명하여 충청·전라·경상·강원도에서 시위군(侍衛軍)으로 8월에 번상(番上)할 자는 면제하게 하였다.
8월 1일(계축)
풍해·충청·강원·경상도 도관찰사 겸 목(都觀察使兼牧)의 임직을 혁파하고, 염치용(廉致庸)으로 판황주목사(判黃州牧事)를, 민무회(閔無悔)로 판원주(判原州)를, 김점(金漸)으로 판청주(判淸州)를, 이지강(李之綱)으로 판상주(判尙州)를 삼았다.
10월 17일(기사)
명하기를 원주목사(原州牧使)에게 각림사(覺林寺) 중이 수조(收租)한 일을 핵문(覈問)하지 말게 하였다. 원주 각림사 주지(住持) 석휴(釋休)가 와서 아뢰었다. “완우(頑愚)*한 승도(僧徒)들이 신이 서울에 나갔을 때, 전세(田稅)를 후하게 거두어 전객(佃客)이 관(官)에 고소하였고, 또 요역(徭役)도 다단(多端)합니다.”
승정원에 명하여 원주에 치서(馳書)하기를, “후하게 거두어 들인 일은 핵문하지 말라.” 하고, 이어 요역을 견감(蠲減)하였다. 이 절은 방금 재건되어 낙성(落成)을 보게 되었는데, 중관(中官)을 보내어 부처에게 현훈폐(玄▦幣)* 1필을 각각 바치고, 중들에게는 면포(綿布)·주포(紬布) 합계 10필, 마포(麻布) 50필, 저화(楮貨) 200장(張)을 내려 주었으니, 임금이 잠저에 있을 때 독서(讀書)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 완우(頑愚) : 완만하고 어리석음.
* 현훈폐(玄▦幣) : 검은 것과 붉은 것의 두가지 폐백.
11월 19일(경자)
명하여 최위(崔渭)의 죄안(罪安)과 자자(刺字)를 삭제토록 하였다. 처음에 최위가 강릉교수(江陵敎授)가 되었을 때, 향교(鄕校)의 미곡을 사용(私用)하였다 하여 관찰사가 매질과 자자로 가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최위가 상서(上書)하여 호소하므로, 임금이 불쌍히 여겨 이런 명령을 내렸다.
12월 1일(임자)
처음으로 옥원역승 겸 수성천호(沃原驛丞兼守成千戶)를 두었다. 강원도 도관찰사가 보고하였다.
“도내(道內)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옥원역(沃原驛)은 바로 왜구(倭寇)의 요충지이므로 국가에서 일찌기 성을 쌓고 천호(千戶)를 차정(差定)하여 이곳을 지키고, 만약 변(變)이 있게 되면 그 역(驛)과 부근의 용화역(龍化驛) 아전이 수어(守御)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역승(驛丞)을 차견한 뒤로는 역리(驛吏)를 진퇴(進退)하는 권한이 천호에게 있지 않아, 혹 완급(緩急)이 있으면 어찌 이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또 대창도(大昌道) 소관(所管)은 모두 38역(驛)인데, 도로(道路)가 멀리 떨어져 실로 졸지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청하건대, 앞서의 규정에 의하여 평릉(平陵)이하의 9역은 옥원역승에 예속하고, 겸 수성천호(兼守成千戶)의 직을 차하(差下)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11일(임술)
박저생(朴抵生)이 자살하였다. 박저생은 고 전서(故典書) 박침의 아들이다. 병술년 여름에 계모 곽씨(郭氏)와 더불어 가산(家産)을 다투다가 헌부(憲府)에 송사하니, …….
그 해 7월에 사헌부에 명하여 전등(前等)의 대원(臺員)이 사송(詞訟)을 계류(稽留)한 죄를 핵실하게 하여, 전 대사헌(大司憲) 허응(許應)을 연산(連山)으로, 집의(執義) 이맹균(李孟畇)을 원주(原州)로, 장령 이명덕(李明德)을 곡산(谷山)으로, 지평 허항(許恒)을 진주(鎭州)로 유배시켰다. …….
○ 정해년(丁亥年;태종 7년) 2월에 이르러 사헌부(司憲府)·사간원·형조에서 아뢰었다. …… 이윽고, 박저생이 또다시 옥중에서 도피하였는데, 유지(宥旨)를 거쳐서 나왔다. 유사(攸司)에서 또 치죄(治罪)하고자 하였으나, 유지를 거쳤으므로 대벽(大辟;사형)을 면하고 울주(蔚州)에 부처(付處)되었다. 또 김화현(金化縣)에 도망하여 숨었다가 그 현(縣)사람과 밭을 다투어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였다. 그 현(縣) 사람의 아내가 달려가 헌사(憲司)에 고하매, 이문(移文)을 구집(拘執;구속)하니, 박저생이 자살하였다.
12월 12일(계해)
윤자당(尹子當)으로 길주도 도안무 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를, 권완(權緩)으로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를 삼고, 박기(朴頎) 등 7인에게 다시 성균교서(成均校書)의 직(職)을 주었다. 박기 등은 시강(試講)할 때 가독(加瀆)함이 없었음으로 외방교수(外方敎授)가 되고, 혹은 파직(罷職)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중월부시(仲月賦試)에 1등으로 합격되었기 때문에 모두 복직하게 하였다.
太宗 十三年(癸巳:1413年)
1월 24일(갑진)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김구덕(金九德)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삼고, 우홍강(禹洪康)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평안도 순안(順安)사람 전 총랑(摠郞) 석인정(石仁正)에게 판사(判事)를 제수하여 치사(致仕)하게 하니, 석인정은 사재(私財)를 내어 관가(官家)를 세우고 또 은혜를 백성에게 베풀었으므로, 정부에서 포상하기를 청한 때문이었다. 또 그 아들 부사직(副司直) 석거(石琚)의 직질도 승진시키었다.
6월 5일(임자)
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으로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를, 한상경(韓尙敬)·유정현(柳廷顯)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연(趙涓)으로 공조판서를, 박자청(朴子靑)으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하구(河久)로 우군 도총제를, 안성(安省)으로 강원도 도관찰사를 삼았다. 강원도 도관찰사 우홍강(禹洪康)·충청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충주목사(忠州牧使) 권진(權軫)·원주목사 권완(權緩) 등이 충청도 제주(提州;제천)에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일이 발각되자 헌사(憲司)에서 탄핵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우홍강이 타도(他道)에 넘어 들어갔다고 하여, 특명으로 파직시켰다.
6월 30일(정축)
“…… 1. 양현고(養賢庫)에 속한 전지(田地) 1,000결은 해마다 손(損)이 많고 실(實)이 적어서 그 때문에 제생(諸生)들을 공억(供億)하는 것이 나물[菜]과 국[▦]이외에 다른 반찬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어량(魚粱) 한두 곳을 양현고(養賢庫)에 오로지 속(屬)하게 하여, 전라도·충청도에서 생산되는 황각(黃角)과 경상도·강원도에서 생산되는 해곽(海藿)을 요량하여 숫자를 정하고,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절기(節氣)마다 상납(上納)하게 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도록 할 것.”
“위의 조목에서 사재감(司宰監)으로 하여금 달[月]마다 수량을 헤아려 제급(題給)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7월 19일(병신)
최이(崔迤)를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연사종(延嗣宗)을 동북면 도순문사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으로, 김승주(金承霔)를 서북면 병마 도절제사 겸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로, 이종무(李從茂)를 동북면 병마 도절제사 겸 판길주목사(判吉州牧使)로 삼고, 조비형(曹備衡)을 상주도(尙州道)·진주도(晉州道)에, 윤곤(尹坤)을 계림도(雞林道)·안동도(安東道)에, 마천목(馬天牧)을 전라도에, 조흡(曹恰)을 풍해도(豐海道)에, 박구(朴矩)를 강원도에 모두 병마 도절제사로 삼았다. ……
7월 21일(무술)
철원부(鐵原府)사람 전 감무(監務) 고중생(高仲生)의 딸의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그 딸이 절개를 지키고 과부로 사는데, 또 그 어미를 잃고 계모(繼母)를 받드는 데 오직 공경하였습니다. 어느날 집에 불이 일어나 계모가 불에 타서 죽으니, 고씨(高氏)가 시체를 껴안고 소리내어 울고 의복을 갖추어 염빈(斂殯)하고, 조석으로 전(奠)드리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계모가 수양(收養)하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고씨가 아들처럼 무육(撫育)하고 있습니다.”
8월 1일(정미)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좌정승 하륜(河崙)·우정승 조영무(趙英茂)·이조 판서 이천우(李天祐)·병조판서 이숙번(李叔蕃)을 인견(引見)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도성(都城)은 나라의 근본이 되므로 의리상 완고(完固)하게 해야 마땅하니, 청컨대 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정부에서 아뢰기를, “수축군(修築軍)은 경기에서 12,000명, 충청도에서 22,000명, 경상도에서 27,000명, 전라도에서 24,000명, 강원도에서 5,000명, 풍해도에서 10,000명, 아울러 100,000명을 조발(調發)하여 속히 부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일(정미)
경기우도(京畿右道)의 백주(白州)·연안(延安)·강음(江陰)·우봉(牛峰)·토산(兎山) 등의 고을을 풍해도에 이속(移屬)하고, 충청도의 여흥(驪興)·음죽(陰竹)·양지(陽智)·안성(安城)·양성(陽城)과 강원도의 가평(加平) 등의 고을을 경기좌도에 이속하였다. 경기우도 여러 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 아울러 1,613결과, 각 품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 아울러 20,041결 및 풍해도 여러 군(郡)의 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 아울러 17,345결을 모두 군자(軍資)에 속하게 하여서 양향(糧餉)을 마련하게 하고, 여흥 등지의 군자전(軍資田) 14,700결 및 경기좌도 여러 군(郡)의 군자전 28,057결을 이에 보충하였다. 이러한 논의가 임진년(壬辰年) 8월에 비롯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부에서 다시 품지(稟旨)하여 시행하였다.
8월 20일(병인)
회양인(淮陽人) 정성(鄭成)을 참(斬)하였다. 정성이 요사스러운 말을 만들어, “올 봄에 마땅히 대군(大軍)을 일으켜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봄 축일(丑日)에 행행(行幸)하면 봄의 소[春牛]가 서로 싸울 것이다.” 하였으므로 순금사(巡禁司)에서 안율(按律)하여 아뢰니, 참(斬)하였다.
8월 24일(경오)
경상도 조선(漕船) 2척이 바람을 만나 강원도에서 패몰(敗沒)하였다. 임금이 놀라 탄식하고 즉시 정부에 전지(傳旨)하였다. “강원도의 풍파(風波)는 험악하고, 또 그 인민이 배를 모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동북면의 조운(漕運)은 의당 즉시 파하도록 하라. 지난날 정부에서 경상도의 속(粟)은 3일이면 김천(金遷)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제 그러한 방법으로 동북면에서 육지로 운수한다면 어찌 불가하겠는가! 우마(牛馬)가 비록 곤폐(困斃)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9월 1일(정축)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 사렵(私獵)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일(정미)
좌정승 하륜(河崙) 등이 풍해도(豐海道)·충청도(忠淸道)·강원도(江原道)의 미곡(米穀)을 수납할 사의(事宜)를 올렸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풍해도의 녹전미(祿轉米)는 마땅히 그 고을에 거두어 들이도록 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광흥창(廣興倉)의 반록(頒祿)은 마땅히 군자감(軍資監)의 묵은 쌀을 쓰도록 하며, 또 충청도·강원도 양도(兩道)의 속미(粟米)는 매양 얼음이 얼기 전에 상납(上納)하는 데, 이러한 연유로 벼가 미처 익지 않아도 갑자기 베어내니, 이것이 여러 해 쌓인 폐단입니다. 빌건대,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첫봄[春初]까지 기다려 전납(轉納)하게 하여서 민폐를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0일(병진)
양근(楊根)·지평(砥平)·횡천(橫川) 등지에 사렵(私獵)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5일(신유)
각 도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임금이 하륜(河崙)에게 이르기를, “전주(全州)를 이제 완산부(完山府)라고 고치고도 오히려 ‘전라도’라고 칭하고, 경주(慶州)를 이제 계림부(雞林府)라고 고치고도 오히려 ‘경상도’라고 칭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유독 이 곳만이 아니라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도 또한 이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드디어 완산을 다시 ‘전주’라고 칭하고, 계림을 다시 ‘경주’라고 칭하고, 서북면을 ‘평안도(平安道)’로 하고,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하여, 평양(平壤)·안주(安州)·영흥(永興)‧길주(吉州)를 ‘계수관(界首官)’으로 삼았다. 또 각 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군(郡)·현(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 단부(單府) : 종2품관 고을 이외의 지명에 주(州)자를 가진 고을을 말함. 원래 종2품 유수부(留守府)는 경주(慶州)·전주(全州)·평양(平壤)·함흥(咸興)의 4곳인데, 그 외의 도 중 주(州)자를 띤 단부(單府)가 많았으므로, 태종 13년 10월에 유수부(留守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관(牧官)을 제외한 단부(單府)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군현(郡縣)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음.
10월 21일(정묘)
대호군 이군실(李君實)에게 명하여, 양근(楊根)·지평(砥平)·홍천(洪川)·횡천(橫川)에 가서 금수(禽獸)의 많고 적음을 살피게 하였다.
11월 6일(임오)
양근(楊根)·원주(原州)·횡천(橫川) 등지에 사렵(私獵)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1일(정해)
각 도 각 고을의 향교의 노비 수를 정하였다. 강원도 도관찰사가 아뢰었다. “외방(外方) 각 고을의 향교의 노비는 유수관(留守官)에는 20호씩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목관(牧官)에는 15호씩으로, 도호부에는 10호씩으로, 지관(知官)에는 7호씩으로, 현령(縣令)·현감(縣監)에는 5호씩으로 하고, 정한 액수 이외의 노비는 모두 노비가 없는 향교에 이속(移屬)하여 그 액수를 충원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2일(무술)
의정부에서 사재감(司宰監)의 계목(啓目)을 의논하여 올렸다. ……
“1. 도성(都城)의 땅이 큰 강(江)가에 있어서 배의 사용이 심히 많습니다. 경상도의 세공(歲貢)은 다만 초마선(哨嗎船) 10척 뿐이므로 조금이라도 주즙(舟楫)을 쓸 데가 있으면 반드시 사선(私船)을 빼앗아서 이바지합니다. 이제부터 성상의 거둥에 정자선(亭子船) 2척, 초마선(哨嗎船) 20척, 소거도선(小居刀船) 10척, 평저선(平底船) 80척을 공액(貢額)으로 정하고, 각 도에 나누어 배정하여 매 무(戊)·계(癸)자가 든 두 해의 농한기에 당하여, 견실하게 배를 만들어 본감(本監)에 상납하게 하고, 점고(點考)하여 화인(火印)을 직고서 문적에 잇달아 쓰게 하소서.”
“위의 조목에서 충청도·강원도·풍해도의 평저선(平底船)을 각각 10척씩으로 하고, 경상도는 전액 숫자대로 하고, 전라도는 초마선(哨嗎船)을 10척씩으로 하여, 계목(啓目)과 같이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4일(경자)
총제 유은지(柳殷之)·대호군 이군실(李君實) 등에게 명하여 원주·횡천 등지에 가서 강무장(講武場)을 조사하였다.
11월 26일(임인)
평안도·영길도(永吉道) 두 도의 군자(軍資)를 저축하라고 명하였다. 두 도가 중국과 경계가 잇달아 있으나 군자(軍資)가 모자랐으므로, 매년 풍해도(豐海道)의 조세를 평안도로 수송하고, 강원도의 조세를 영길도(永吉道)로 수송하는 것으로써 길이 항식(恒式)을 삼았다.
12월 21일(병인)
경차관(敬差官)을 각 도에 나누어 보냈는데, 천변(天變)을 염려하여 민원을 물으려는 것이었다. 경기에는 성균사예(成均司藝) 이양명(李陽明)을 보내고, 충청도에는 사성(司成) 유영(柳穎)을 보내고, 경상도에는 제용감(濟用監) 최순(崔洵)을 보내고, 전라도에는 전 도사(都事) 유승(柳升)을 보내고, 강원도·영길도에는 전 부사(府使) 장윤화(張允和)를 보내고, 풍해도·평안도에는 전 부사 조치(曹致)를 보냈다. 외방 각 도에서 옥(獄)에 갇힌 죄수로서 오래 끌어서 민간에 폐가 되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바가 없지 않거나, 무거운 죄수로서 범장(犯臟)의 증거가 없이 강제로 형을 받아 원망을 하는 것이나,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로서 해를 지나도록 결단하지 않은 것이나, 가벼운 죄수로서 여러 달 동안 판결하지 않은 것이나, 도형(徒刑)의 연한이 다하였으나 아직 석방하지 않는 것을, 각 고을 수령(守令)에게 추핵(推覈)하였다. 대소 군민관(軍民官) 가운데 탐오하여 불법으로 무겁게 조세를 거두어 백성에게 폐를 끼치고 조령(條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나, 품관향리(品官鄕吏) 가운데 작폐(作弊)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자를 찾아 물어서 추고(推考)하였다. 2품 이상이면 수령관(首領官)과 판관(判官)·진무(鎭撫)를, 3품이면 당사자를 감옥에 가두고 계문(啓聞)하고, 4품 이하이면 조율(照律)하여 바로 결단(決斷)한 뒤에 계문(啓聞)하였다. 환과고독(鱞寡孤獨) 가운데 빈한하고 궁핍하여 능히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나 군민(軍民) 각 호(戶)에서 고락(苦樂)이 있는지 없는지를 또한 모두 찾아 다니며 물었다.
太宗 十四年(甲午:1414年)
1월 8일(계미)
총제(摠制) 유은지(柳殷之)와 대호군(大護軍) 조치(趙菑)를 강원도에 보내어 사냥할 장소를 살피게 하였다. 또 횡천현감(橫川縣監)에게 전지(傳旨)하였다. “내가 장차 강무(講武)하려는데, 네가 그 해동(解凍)할 때에 기후와 짐승의 많고 적음을 살피고, 평지(平地)의 넓고 좁음을 헤아리고, 또 올 곡식을 파종(播種)할 때의 기후를 늙은 농부에게 상세히 물어서 가급적이면 2월 보름 전에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
1월 19일(갑오)
전 낭장(郎將) 김윤하(金允河)를 강원도 채방별감(江原道採訪別監)으로 삼았다.
1월 24일(기해)
횡천(橫川) 등지의 사렵(私獵)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2월 6일(경술)
사헌집의(司憲執義) 홍여방(洪汝方)이 대간(臺諫)에서 강무(講武)에 호종(扈從)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강무(講武)는 본래 사졸(士卒)을 사열(査閱)하는 것이니, 비록 동대문(東大門) 밖에서라도 또한 족히 병사를 진열할 수 있다. 평강(平康) 등지는 동쪽 변방(邊方)에 가까우니, 비용과 양향(糧餉)이 필요할 것이다. 또 산골짜기 사이를 가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잠정적으로 후일을 기다려서 장소를 정하여서 뒤에 의논하겠다.”
○ 의정부에서 철원부사 남금(南琴)과 양주부사 이지(李漬)와 광주목사(廣州牧使) 황녹(黃祿)의 죄를 청하니, 경기 경차관이 남금·이지가 둔전(屯田)을 함부로 설치하고, 황녹은 정액(定額) 외에 곡초(穀草)·탄소목(炭燒木)을 지나치게 거둔 죄를 정계(呈啓)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명하여 모두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2월 20일(기사)
처음에 강무소(講武所)가 강원도 순제(蓴堤)였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하다가, 이날 지진이 일어나니, 하륜(河崙) 등이 아뢰기를, “때가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멀리 나갈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철원(鐵原) 등지의 십여 일 거리로 정하였다.
2월 27일(신미)
임금이 상왕(上王)을 받들고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였다. 낮에 녹양평(祿楊平)에 머물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여악(女樂)을 베풀고, 저녁에 포천현(抱川縣) 매장원(每場院)에 머물렀다.
3월 1일(갑술)
저녁에 김화현(金化縣) 동창역(東昌驛)에 머물렀다.
○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어 철원(鐵原) 보개산(寶蓋山)·금악산(金岳山)·소을눌탄(所乙訥灘) 등의 신(神)에게 제사지냈다.
3월 2일(을해)
어가(御駕)가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 이르러 적산(積山) 등지에서 몰이하였다.
3월 15일(무자)
임금이 양근(楊根)에 갔다가 용진(龍津)에 머물렀는데, 수가(隨駕)하는 각 품(各品)을 줄였다. 처음에 임금이 광주(廣州)·양근(楊根) 등지에 거둥하고자 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정지시켰다. 임금이 대간 장무(臺諫掌務)를 불러서 이관(李灌)에게 명하여 이를 꾸짖었다.
“내가 항상 명하기를, ‘무릇 나에게 고(告)할 일이 있으면 조계(朝啓)에서 이를 말하고, 들어주지 않은 뒤에야 소청(疏請)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는데, 이제 헌사(憲司)에서 갑자기 상소(上疏)하였다. 이제부터 조계(朝啓)에 참여하지 말라. 또 내가 사냥에 나간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따라와서 알겠느냐?”
대답하기를, “어제 방방(放牓) 때에 전정(殿庭)에 입시(入侍)하여 전정 가운데에서 행진(行陳)의 그림[圖]을 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행진(行陳)을 펴 놓았던 자를 조사하게 하였다.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허규(許揆)를 시켜서 아뢰었다.
“오랫동안 비가 와서 진흙탕이 되고, 봄 농사가 바야흐로 한창이니, 청컨대 사냥하러 나가지 마소서.”
임금이 정부에서 어떻게 이를 알았느냐고 물으니, 허규가 찬성(贊成) 이숙번(李叔蕃)에게서 나왔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숙번이 내가 이미 구군(驅軍;몰이꾼)을 놓아 보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하고, 이어서 허규에게 명하여 정부에 유시하였다. “이번 행차는 불과 나흘인데 어찌 백성들에게 폐가 되겠느냐.” 임금이 헌사(憲司)의 상소에 ‘노력과 비용이 적지 않아 백성들에게 해가 있다’는 말이 있음을 보고 말하였다. “지금 나의 행행(行幸)은 이와 같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헌사(憲司)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마땅히 공정고(供正庫)*로 하여금 반미(飯米)를 가져가게 하고, 매양 주정소(晝停所)나 숙소(宿所)에는 감사(感謝)와 수령(守令)은 나아오지 말게 하겠다. 만약 혹시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있으면 지신사(知申事)가 마당히 그 견책을 받을 것이다.”
대간(臺諫)에서 예궐(詣闕)하여 청(請)하였다. “강무(講武)는 마땅히 일정한 장소를 정(定)해야 하며 삼가서 먼 곳으로 행행(行幸)하지 마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옛날 인군(人君)이 세 곳을 정하였으니, 만약 일정한 장소를 정한다면 충청도·풍해도·강원도로써 장소를 정하겠다.”
이날 승여(乘輿)가 이미 출발하였으나 양도(兩道)의 길이 진흙탕이 되어 사람이 넘어지고 쓰러지니, 이응(李膺)·이관(李灌) 등에게 명하였다. “명일 환궁(還宮)하여 날이 맑기를 기다려서 사냥할지의 여부를 의논하여 아뢰어라.” 이응 등이 대답하였다. “이번은 머물러서 날이 맑기를 기다렸다가 양근(楊根)에서 사냥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공정고(供正庫) : 조선조 때 대궐 안의 쌀․간장 등의 공급을 맡아 보던 관아. 나중에 사도시(司導寺)로 바꾸었음.
4월 14일(정사)
경상도 함양(咸陽) 등지에 서리가 내리고, 강원도 금성(金城)·회양(淮陽) 등지에 비와 눈이 내렸다.
5월 2일(갑술)
경상도 보성군(甫城郡) 청부현(靑鳧縣)에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5월에 서리가 내릴 수 있는가?” 하니, 좌대언(左代言) 유사눌(柳思訥)이 대답하였다. “보성(甫城)은 북쪽으로 강원도 대산(大山)과 연하였으므로 5월에 서리가 내린들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유사눌의 말은 대개 이와 같았다.
5월 7일(기묘)
노인(老人)을 진휼(賑恤)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었다.
“각 도의 경차관(敬差官)이 추천한 환과고독(鱞寡孤獨)으로서 능히 스스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1,156인 가운데 101세의 2인에게는 쌀·콩 각각 7섬씩을, 90세 이상의 7인에게는 쌀·콩 각각 5석씩을, 80세 이상에게는 쌀·콩 각각 3석씩을 진휼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강원도 경차관이 추천한 나이 30세가 지나도록 시집가지 못한 여자[未嫁女子] 12명을 각 고을에 있는 수속(收贖)으로써 자장(資裝)을 보태 주어서, 금년 안에 성혼(成婚)을 끝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9일(신묘)
당인(唐人;중국사람) 서아단(徐亞端)·대아첨(對亞添)·황기생(黃起生) 등을 원주(原州)에 안치(安置)하였다. 서아단 등이 일본(日本)의 적중(賊中)에서 오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빌건대 외방(外方)에 두소서. 또 전에 온 당인(唐人) 섭관생(葉官生)·원지두(元之豆) 등이 모두 예빈시(禮賓寺)의 여종[婢]을 아내로 삼았으니, 또한 마땅히 아내를 데리고 외방(外方)에 거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유사눌(柳思訥)이 말하기를, “예빈시의 비(婢)는 구실[役]이 있는 사람들이니, 반드시 함께 보낼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부(夫婦)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니, 어찌 강제로 다른 곳에 있도록 하겠는가?” 하였다.
6월 20일(신유)
병조판서 이응(李膺)이 취각법(吹角法)을 거듭 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렇다. 이것은 평안할 때 위험(危險)한 것을 잊지 않는 방도이다.” 하고, 또 이응(李膺)에게 이르기를, “취각법(吹角法)은 경(卿) 등이 마땅히 밝게 신칙하여 약속하고서 기다리라. 내가 비록 한밤중[夜半]에라도 취각(吹角)할 것이니, 근태(勤怠)를 살피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제경(諸卿)에게 일렀다.
“근래 황제(皇帝)가 북정(北征)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곧 문정(門庭)의 적이라 하니, 일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번 안남(安南)에 출정한 것은 황제의 실책이었다. 스스로 우리 동방(東方)을 생각하면,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고 국경이 중국(中國)과 연접하였으므로,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사대(事大)하여 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경우이면, 곡식을 축적하고 병사를 훈련하여 봉강(封彊)을 고수(固守)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황제가 나를 대우함이 심히 두터운데, 또 남정북벌(南征北伐)하여 진실로 편안한 해가 없으니, 다만 전쟁에 피폐(疲弊)한 백성이 우리 강토에 뛰어들어서 신축년(辛丑年)의 사관(沙關)*과 같이 될까 두려울 뿐이다.”
이직(李稷)이 말하였다. “영길도(永吉道)·평안도 2계(界)는 군량(軍糧)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일찌기 경상도의 곡식을 강원도에 옮기고, 강원도의 곡식을 영길도에 옮기고, 또 풍해도의 곡식을 평양(平壤)에 옮기라는 전지(傳旨)가 있어서 혹은 시행하기도 하고, 혹은 중지하기도 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그리 좋은 계책(計策)은 아닙니다. 또 2계(界)의 산성(山城)은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렸다가 수축(修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전 사정(司正) 이유지(李宥智)가 수정석(水精石)과 묵탄(墨炭)을 바쳤다. 이유지가 강원도·경상도에 와서 말하였다. “고성과 순흥(順興)에 수정석이 있고, 영해(寧海)에 묵탄이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소량(小量)을 바쳤다. 과연 모두가 진품(眞品)이었다. 어느 대신(大臣)이 묵탄을 채취하여 어용(御用)에 이바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목탄(木炭)이 심히 좋으나 어찌 계속하기 어려운 물건을 쓰겠는가?”
* 신축년의 사관(沙關) :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辛丑年)에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홍건적(紅巾賊) 10만명을 이끌고 쳐들어 온 사건.
6월 28일(기사)
본궁(本宮)을 영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태조(太祖)가 처음에 경복궁(景福宮)을 지을 때 하륜(河崙)이 상서(上書)하여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산(山)이 갇히고, 물[水]이 마르니 왕(王)이 사로잡히고 족속(族屬)이 멸할 것이므로 형세(形勢)가 좋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나, 태조가 짓던 전각(殿角)과 낭무(廊廡)*가 이미 갖추어졌고, 만약 중국의 사신(使臣)을 응접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또 경회루(慶會樓)를 그 옆에 짓고, 따로 이곳에다 창덕궁(昌德宮)을 지었다. 근년 이래로 별로 재액(災厄)이 없었고, 만약 피방(避方)하여 천사(遷徙)할 일이 있으면 재상(宰相)의 집을 빼앗아 담장벽을 헐어버리고, 또 근처의 편호(編戶)를 빼앗으니, 소란하여 안정(安靜)을 얻을 수가 없어 내 마음이 편안치 못하였다. 여경방(餘慶坊)의 본궁(本宮)을 국용(國用)에 충당하여 피방(避方)하는 장소로 삼아서 만세를 위해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 또 여경방(餘慶坊)에다 복지(卜地)하여 궁전을 영조하는 것은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계책이다.”
이관(李灌)에게 명하여 풍해·충청·경기의 수군절도사에게 전지(傳旨)하였다. “써까래[椽木] 3,000개를 마련하여 본궁(本宮)의 영선(營繕)에 충당하도록 대비하라.”
임금이 말하였다. “본궁(本宮)을 짓고자 하나 농사를 방해할까 두렵다. 일찌기 사사로이 고용(雇傭)한 번(番)내려간 대장(隊長) 60명에게 사람마다 의포(衣布)와 구량(口糧)을 주어서, 낭천(狼川)에 이르러 나무 1천여 그루를 베어 뗏목[桴]으로 묶어서 내려 보내라.”
* 낭무(廊廡) : 정전(正殿)에 부속된 건물.
7월 8일(기묘)
대간(臺諫)의 관원을 외방(外方)에 부처(俯處)하였다. ……. 순금사(巡禁司)에 명하여 대간의 관원을 불러 오도록 하여 왕패(王牌)*를 내보이고 아울러 자원안치(自願安置)시켰는데, 집의(執義) 이작(李作)은 부여(扶餘)에, 장령(掌令) 복간(卜亻門 )은 대흥(大興)에, 이유희(李有喜)는 춘천에, 지평(持平) 이맹진(李孟畛)은 충주에, 이문간(李文幹)은 신은(新恩)에, 사간(司諫) 윤회종(尹會宗)은 진산(珍山)에, 헌납(獻納) 유미(柳渼)는 곡성(谷城)에, 김이상(金履祥)은 보천(甫川)에, 정언(正言) 이심(李審)은 아산(牙山)에, 한권(韓卷)은 황간(黃澗)에 안치시켰으나, 다만 대사헌 유관(柳觀)은 태조(太祖)의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 하여 면제시켰다. 지사간(知司諫) 김익정(金益精)은 병 때문에 처음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 왕패(王牌) : 임금이 특별한 일을 하명(下命)할 때 어압(御押)을 두고 대보(大寶)를 찍어서 내려 주던 패(牌). 이 패를 소지한 자는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특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 또 공(功)이 있는 자에게도 이 패를 주었는데, 이는 자손 대대로 그 특전(特典)을 보장하여 주는 데 목적이 있었음.
7월 21일(임진)
도성(都城)의 좌우행랑(左右行廊)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종루(鍾樓)에서 남대문(南大門)에 이르기까지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東大門)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行廊)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하겠다. 마땅히 충청도·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
박신(朴信)·한상경(韓尙敬)·정탁(鄭擢)·황희(黃喜) 등이, “연례의 재목으로는 두루 족(足)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충청도·강원도의 물가 각 고을에 적당히 헤아려 분정(分定)하여야 합니다.” 하고, 박신이 또 별요(別窯)를 다시 두어서 개와(盖瓦)를 준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양계(兩界)·각 도의 승군(僧軍) 600명과 경기·풍해도의 선군(船軍) 1,000명을 징발하여서 그 역사에 나오게 하였다.
7월 28일(기해)
강원도 조선(漕船) 7척이 풍랑을 만나서 패몰(敗沒)하여 쌀·콩 270석을 침수(沈水)하였다.
8월 5일(을사)
원주·횡천의 작목(斫木)하는 역사를 면제시켰다. 임금이 대언(代言)에게 일렀다. “일년에 봄·가을 강무(講武) 이외에는 오래도록 궁중(宮中)에 있으니, 기운이 펴질 수가 없다. 또 지난날에 경기에서 강무할 때에는 길[行]이 물에 질퍽거려서 말에서 떨어져 용의(容儀)를 잃었고, 사렵(射獵)도 또한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강원도가 비록 먼 길이라 하더라도 원주·횡천이 서울[京城]과의 상거(相距)가 겨우 6, 7식(息) 정도이니, 이제 가고자 한다. 그곳의 행랑(行廊)에 작목(斫木)하는 역사를 면제하여서 강무의 행차에 이바지하게 하라.”
8월 7일(정미)
해도찰방(海道察訪)*을 나누어 보냈는데, 모두 손실 경차관(損實敬差官)의 임무를 겸하였다. 한성소윤(漢城少尹) 송흥(宋興)을 경기에, 상호군(上護軍) 이춘생(李春生)을 충청도에, 대호군 권초(權軺)를 경상도에, 상호군 김상려(金尙旅)를 전라도에, 사직(司直) 이자직(李自直)을 강원도에, 대호군 박돈의(朴敦義)를 풍해도에, 상호군 박동미(朴東美)를 영길도(永吉道)에, 전 부사(府使) 전사리(田思理)를 평안도에 보냈다. 찰방(察訪)에게 준 조목은 이러하였다. “1. 군기(軍器)와 마필(馬匹)을 점고(點考)할 것. 1. 시위군(侍衛軍)·기선군(騎船軍)을 점고(點考)할 것. 1. 병선(兵船)과 육물(陸物)의 여러 연고(緣故)를 상고할 것. 1. 병선이 정박하여 서는 요해처(要害處)와 병선의 수를 상고할 것. 1. 수령(守令)으로서 선군(船軍)을 세우기를 궐(闕)한 자와 만호(萬戶)·천호(千戶)로서 급유(給由)*하는 자를 아울러 고찰할 것. 1. 각 진(鎭)·각 고을의 월과(月課)를 아울러 고찰할 것. 1. 전의 월과군기(月課軍器)* 안에 부실(不實)한 물건이 있을 것 같으면 각 등 관리를 추핵(推覈)할 것. 1. 각 고을 수령(守令)으로서 성자(城子)를 수리하지 않는 자는 논죄할 것. 1. 위의 조항의 조령(條令) 내에서 어기거나 범하는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는 율(律)에 비추어 바로 결단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상은 신문(申聞)하고 과죄(科罪)할 것.”
* 해도찰방(道察訪) : 조선 초기에 하삼도(下三道)의 포구(浦口)에 파견하여 해변의 방어(防禦)를 고찰하던 찰방(察訪). 해도(海道)의 만호(萬戶)·천호(千戶)를 검찰하고, 선군(船軍)의 입번(立番)과 훈련 및 군기(軍器)·의갑(衣甲) 등을 고찰하였음.
* 급유(給由) : 말미를 주는 것.
* 월과군기(月課軍器) : 나라에서 각 도의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매달마다 상공(常貢)으로 부과하던 군수용 물자.
8월 18일(무오)
정부·육조를 불러서 조운(漕運)과 급전(給田)의 사의(事宜)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과전(科田)을 한 반은 기내(畿內)에서 주도록 하고 한 반은 하도(下道)에 주도록 한다면 전라도 조운의 수는 감할 것이다. 수를 감한다면 4, 5월 안에 한두 차례 조운하기를 끝내고 7월에 바람을 만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만약 운하를 파는 의논이라면 우선 한두 곳을 시험해 보는 것이 가하다.”
즉시,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지강(李之剛)을 충청도·전라도에 보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 황자후(黃子厚)를 경상도에 보내고, 대호군(大護軍) 이도(李韜)를 강원도·영길도에 보내어 그 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와 같이 그 형세의 어렵고 쉬운 것을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
8월 21일(신유)
예조(禮曹)에서 산천(山川)의 사전(祀典) 제도를 올렸다. …….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嶽)·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삼고, 여러 산천(山川)은 소사(小祀)로 삼았다. 경성(京城) 삼각산(三角山)의 신(神)·한강(漢江)의 신, 경기의 송악산(松嶽山)·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熊津), 경상도의 가야진(伽耶津), 전라도의 지리산(智異山)·남해(南海), 강원도의 동해(東海), 풍해도의 서해(西海), 영길도의 비백산(鼻白山), 평안도의 압록강(鴨綠江)·평양강(平壤江)은 모두 중사(中祀)이었고,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명소(德津溟所), 풍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의 영흥성황(永興城隍)·함흥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익수(九津溺水)는 모두 소사(小祀)이니, 전에는 소재관(所在官)에서 행하던 것이다. 경기의 용호산(龍虎山)·화악(華嶽), 경상도의 진주성황(晉州城隍), 영길도의 현덕진(顯德鎭)·백두산(白頭山)은 이것은 모두 옛날 그대로 소재관(所在官)에서 스스로 행하게 하고, 영안성(永安城)·정주목감(貞州牧監)·구룡산(九龍山)·인달암(因達巖)은 모두 혁거(革去)하였다. …….
○ 명하여 각 품(品)의 과전(科田)을 옛날 그대로 하고 경외(京外)의 용관(冗官)을 도태하였다.…….
이에 자문(紫門)*에 모여서 정부에서 상량 의논하여 아뢰었다. “……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을 병합하여 용인(龍仁)으로 하고, ……, 삭녕(朔寧)과 안협(安峽)을 병합하여 안삭(安朔)으로 하고, …….”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자문(紫門) : 궁전(宮殿)을 둘러싼 자성(紫城)에 설치된 문(門). 대개 신하들끼리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 이곳에 모였음. 또 자문 안에는 선공감(繕工監)․군기감(軍器監)이 있었으므로, 뒤에 자문감(紫門監)은 여기에서 나온 말임.
8월 26일(병인)
육조판서(六曹判書)·대간(臺諫)·참찬(參贊) 이숙번(李叔蕃) 등을 불러서 강무(講武)할 장소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강무(講武)하는 데 일정한 장소가 있는 것이 옛 제도이다. 지난 해에 멀리 전라도에서 사냥한 것을 나는 심히 후회한다. 후세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태안(泰安)·해주(海州)·횡천(橫川)·광주(廣州) 등지에 상소(常所)를 정하여서 자손(子孫)의 법규(法規)로 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강무하는 장소를 반드시 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 등은 모두 글을 읽은 사람들인데, 선왕(先王)들이 과연 일정한 장소가 없었던가?” 하니, 대답하였다.
“선왕(先王)들의 원유(苑囿)는 모두 교외(郊外) 관문(關門)안에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가까운 땅에다가 정한다면 선왕(先王)의 제도에 합할 것입니다. 그 가까운 땅에는 금수(禽獸)가 드뭅니다. 어찌 저 태안·해주의 해변가 땅이 금수(禽獸)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자손의 법규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만둘 수 없다면 별례(別例)로서 가서 사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경 등의 말이 옳다.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 하고, 명하여 대호군(大護軍) 조치(趙菑)를 태안(泰安)에, 이군실(李君實)을 해주(海州)에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9월 8일(무인)
경기 도관찰사가 도내의 병합한 현읍(縣邑)의 사의(事宜)를 보고하였다. 보고는 이러하였다.
“……, 안삭(安朔)은 안협(安峽)과 삭녕(朔寧)에 옮겨 붙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호조에서 과천을 금천에 옮기고 양천을 김포에 옮기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0일(경진)
대호군(大護軍) 이군실(李君實)과 호군(護軍) 지함(池含)을 강원도 횡천(橫川)으로 보내었다. 임금이 강무(講武)하고자 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장소에 풀을 베게 하였다.
9월 29일(기해)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옛부터 제왕(帝王)이 비록 평안하게 다스려지는 세상에 있더라도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봄·여름에는 진려(振旅)*·발사(茇舍)*하는 이름이 있었고, 가을·겨울에는 치병(治兵)·대열(大閱)하는 법이 있었던 것은, 편안할 때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으니, 그 생각이 깊었습니다. ……. 신 등이 엎드려 바라건대, 금년 가을의 강무(講武)는 잠정적으로 또 중지하고, 이제부터 강무(講武)는 교외(郊外)의 경기(京畿)에 그치고, 또한 십일간을 넘지 않는 것으로써 길이 만세(萬世)의 법을 삼도록 하소서.”
임금이 노하여 집의(執義) 이당(李堂)·지평(持平) 정연(鄭淵)을 불러서 물었다. “강원도의 백성으로서 굶어 죽은 자가 몇 사람이냐? 옛날에는 사시(四時)에 사냥하던 법이 있었으나, 나는 다만 춘추(春秋)의 강무(講武)만 시행할 뿐인데, 하물며 일년 내내 근심 걱정만 하다가 오로지 며칠의 유렵(游獵)을 할 수 없겠느냐? 또 친히 사냥하여 조종(祖宗)에 제사지내는 것은 옛 법이다. 너희가 이름만을 구하려 하니, 나는 따를 수가 없다.”
이튿날 이당 등이 다시 강무일(講武日)의 기한을 줄이도록 청하고, 또 횡성(橫城) 지역의 산이 높고 길이 험한 폐를 말하니, 임금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재삼 힐책하고, 풍해도 도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여 해주(海州)로 향하고자 하여 기마(騎馬)와 역자(驛子)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병조판서 김승주(金承霔)가 간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횡성(橫城)은 조도(調度)*가 이미 갖추어져서 화가(禾家)를 수확(收穫)하고 교량(橋梁)과 도로(道路)를 모두 이미 수리하였습니다. 만약 해주(海州)로 향한다면 양도(兩道)의 백성들이 다 같이 그 폐를 받을 것이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언사(言辭)가 간절하고 정성스러웠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이당·정연을 행궁찰방(行宮察訪)으로 삼고 명하였다. “너희들이 횡성(橫城)의 길이 험하다고 하기 때문에 광주(廣州) 천녕(天寧)으로 향하고자 하니, 너희가 속히 가서 영판(營辦)*하고 공억(供億)*하는 일을 늦지 않도록 하라. 만약 전지(田地) 하나라도 수확(收穫)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복(吏僕)도 거느리고 가지 마라. 이렇게 못하면 내가 마땅히 깊이 죄를 다스리겠다.”
이어서 진무(鎭撫) 등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천녕(川寧)에 숙소(宿所)를 정하게 하니, 김승주가 또 상언(上言)하여 힘써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중관(中官)이 불가(不可)하다고 하여 김승주 등이 아뢰지 못하였다. 임금이 특히 헌사(憲司)를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실은 다른 도(道)로 향하고자 아니하였다. 한참 뒤에 노여움이 풀리자, 이당(李堂) 등을 찰방(察訪)에 임명한 것을 중지하였다.
* 진려(振旅) : 군사(軍士)를 거둠.
* 발사(茇舍) : 초사(草舍)에서 노영(露營)하는 것.
* 조도(調度) : 일을 정도에 따라 알맞게 처림함.
* 영판(營辦) : 숙소(宿所)와 기물(器物)을 준비하는 것.
* 공억(供億) : 음식물을 준비하는 것.
윤9월 3일(계묘)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오로지 지신사(知申事) 이관(李灌)·좌대언(左代言) 유사눌(柳思訥)만이 따라갔고, 2품이상도 또한 20명에 지나지 않았고, 시위(侍衛)하고 지응(支應)하는 여러가지 일도 모두 간약(簡約)한 데 따랐다. 임금이, “폐(弊)가 농민에게 미치지 말도록 하라.” 하여, 군기감(軍器監)에 소속한 잡색군정(雜色軍丁)·시위군(侍衛軍)·대장(隊長)·대부(隊副), 경기의 당령선군(當領船軍)·재인(才人)·화척(禾尺)을 징발하여 구군(驅軍;몰이꾼)으로 충당하였는데, 모두 5,000명이었다.
윤9월 7일(정미)
횡천(橫川) 사기소(砂器所)에 머물렀다. 수종(隨從)한 신하와 군사(軍士)들에게 5일간의 식량을 주라고 명하였다. 강원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가 말 1필과 매 3련을 바치고,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 이승간(李承幹)이 사냥개[田犬]를 바쳤다.
윤9월 9일(기유)
어가(御駕)가 횡천(橫川) 화동(禾洞)에 이르렀다. 전라도 도관찰사 김정준(金廷雋)이 경력(經歷) 이종화(李種和)를 보내어 말 1필을 바치었다.
윤9월 13일(계축)
돌아와 횡천(橫川) 실미원(實美院)에 머물렀다. 임금이 말이 뛰는 바람에 떨어졌으나, 다치는 데 이르지는 않았다.
윤9월 14일(갑인)
원주(原州) 각림사(覺林寺)에 거둥하였으니, 잠저(潛邸) 때 옛날 공부하던 곳이었다. 절의 중에게 채단(綵段)·홍초(紅綃)를 각각 3필씩 내려 주고, 쌀과 콩 아울러 100석을 내려 주고, 전지(田地) 100결(結)과 노비(奴婢) 50구(口)를 더 주고, 절의 노비 등에게 쌀과 콩 아울러 30석을 내려 주었다.
10월 8일(무인)
횡천현감(橫川縣監) 정면(鄭綿)이 파면되었다. 임금이 횡천(橫川)에 거둥하였을 적에 횡천현리(橫川縣吏) 황상중(黃尙中)이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듣고 따라가도록 명하였다. 정면이 황상중의 하직을 고(告)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그 어미를 가두었으므로, 불공죄(不恭罪)에 연좌되어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다가 드디어 파직하였다.
11월 5일(갑진)
강원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와 풍해도 도관찰사 이발(李潑)에게 모두 본도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11월 21일(경신)
각 도 별패(別牌)의 액수(額數)를 정하였다. 경기는 350명이고, 충청도는 700명이고, 전라도·영길도·강원도는 각각 450명씩이고, 상주 진주도(尙州晉州道)는 400명이고, 경주안동도(慶州安東道)는 400명이고, 풍해도·평안도는 각각 400명이었는데, 아울러 4,000명이었다.
太宗 十五年(乙未:1415年)
1월 11일(경술)
영길도·강원도·평안도·풍해도의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좋은 매[鷹]를 진상하도록 하였고, 또 충청도 도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여 사렵(私獵)을 금하게 하였다.
1월 18일(정사)
사간원(司諫院)의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이맹균(李孟畇) 등이 상소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옛부터 정치를 하는 도리는 문(文)과 무(武)뿐입니다. 이제 전하가 문교(文敎)를 크게 일으켜 옹희(雍熙)에 이르기를 기약하는데, 봄․가을에 강무(講武)도 그것이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잘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짐을 잊어버리지 않는 도리에 방도를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계사년(癸巳年) 봄에 해주(海州)로 거둥하였고, 가을에 임실(任實)에 이르렀습니다. 또 작년 가을에는 횡천(橫川)으로 거둥하여 경기(京畿) 이외의 지방에서 수렵하는 일이 해마다 잦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공억(供億)과 비만(飛輓)하는 즈음에 백성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도 간혹 있었습니다. 이제 강무한다는 하교가 이미 하달되었는데 전하가 또 장차 어디로 가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군사를 사열하고 병졸을 훈련시킴은 비록 국가의 떳떳한 법이라 하더라도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함이 진실로 임금의 큰 덕이라’고 여깁니다.
지난해의 한재가 매우 심한 것으로 보아, 금년의 흉년 들 것을 알 수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전하가 몸을 돌이켜 반성하고 백성을 긍휼(衿恤)히 여겨야 할 때인데, 어찌 군중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고 놀고 즐기겠습니까? 옛날에 부열(傅說)이 공종(高宗)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선(善)을 생각하여 움직이되, 움직이더라도 오직 적당한 때에 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강무(講武)는 비록 폐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거둥하심은 적당한 시기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특별히 권도(權道)로 정지한다는 명을 내려서 간(諫)하는 것을 따른다는 아름다움을 이루소서.”
임금이 읽어보고 말하였다. “사간원에 풍해도(豐海道)의 올해 곡식이 풍년이 들지 못하였다 하여 강무를 정지 하도록 청하였다. 내가 듣건대, 강원도는 약간 풍년이라 하니,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
대언(代言) 등이 아뢰었다. “공억(供億)을 이미 풍해도에 준비하였는데, 이제 만약 갑자기 강원도로 거둥한다면 민생(民生)이 소요(搔擾)해질 것입니다.” 마침내 거둥을 실행하지는 아니하였다. …….
2월 3일(신미)
강무할 장소를 정하였다. 병조에 전지를 내렸다.
“충청도의 순제곶이(蓴堤串) 내와 전라도의 임실(任實) 등지에서는 사렵(私獵)을 금하지 말고, 백성들이 전답을 개간하도록 하게 하라. 강원도의 평강(平康)·횡천(橫川)·이천(伊川)·평창(平昌)·강릉(江陵)의 진보(珍寶)·방림(芳林)·대화(大和)·원주(原州)의 각림사(覺林寺)·실미원(實美院) 등지와 풍해도의 우봉(牛峯)·대둔산(大芚山)과 경기(京畿)의 임강(臨江)·수회(水回)·마성(馬城)·장단(長湍)·광주(廣州)·양근(楊根) 등지에서는 사렵(私獵)을 금지하여 강무(講武)하는 장소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2월 13일(신사)
강원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가 경력(經歷) 정환(鄭還)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4월 5일(임신)
동해(東海)의 물이 넘쳤다. 영일(迎日)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기까지 바닷물의 높이가 5척, 또는 13척이나 되어, 육지로서 어떤 곳은 5, 6척, 어떤 곳은 백여척이나 덮었는데, 진퇴(進退)가 조수(潮水)와 같았다. 또 삼척(三陟)과 연곡(連谷) 등지에서는 바닷물이 줄고 넘치기를 5, 6차례나 하였는데, 넘칠 때에는 5~60척이나 되고, 줄 때에는 40여척이나 되었다.
4월 20일(정해)
강원도 도관찰사 이안우(李安寓)가 상서하니, 의정부와 육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1. 금을 캐[採金]는 일은 진실로 국가에서 사대(事大)하는 데 쓰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도내의 회양(淮陽)과 정선(旌善)에서 금을 2백여 냥(兩)이나 캤으니, 이것은 땅이 보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시기에 응하여 나오게 한 것이며,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채방(採訪)할 때에 미편(未便)한 점이 있었으므로,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견(差遣)한 채방사(採訪使)가 정월 그믐께 이 지방에 내려와서 주현(州縣)을 독령(督令)하여 백성들을 모아, 먼 변읍(邊邑)에 있는 백성들은 10일만에 이른 자도 있고, 익숙하지 못한 백성들로 하여금 기계(器械)를 수리하게 하여 밤낮으로 독려하니, 일은 시작도 하지 않고 백성들은 도리어 피로하게 되어, 20일이 걸려서야 역사가 파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가만히 듣건대, 이 지방에서 금을 생산하는 곳이 두 곳이 있다 하는데, 영길도(永吉道)에도 두세 곳이 있다 하니, 마땅히 금이 나는 현(縣)에, 민호(民戶)의 다소를 헤아려서 일개 고을[州]을 1소(所)에 전부 붙이거나, 혹은 한두 군현(郡縣)을 합하여 1소에 붙여서, 그 경작하는 바의 조세(租稅)만 받고, 기타의 요역(徭役)과 공부(貢賦)는 모두 면제하여 주며, 향중(鄕中)에 강기염간(綱紀廉幹)한 자를 골라서 감고(監考)로 삼아 때때로 여금(勵禁)하게 하여, 금의 생산의 다소에 따라 상공(常貢)의 수량을 정하소서.
가량 1개소에서 한 절기에 20냥(兩)을 공납(貢納)하면, 5개소면 1백냥이 되고, 봄과 가을이면 2백냥이 됩니다. 그리고, 봄과 가을을 당할 때마다 장인(匠人)을 나누어 보내고,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소상하게 고찰하여 캔 금을 분간하여 바치게 하되, 만약 수량이 미달한 자와 고찰하는 데 정밀하게 하지 못하여 유실한 자가 있으면, 율문에 따라 죄를 논하소서. 그리하면 온 도내(道內)가 소동하는 폐단이 없고, 일은 잘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 조목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국가의 소용의 다소를 헤아려서 적당한 수량을 정하면, 봄·가을의 중월(仲月)에 백성을 모았다가 돌려보내게 되니, 연례(年例)로 한 번씩 공부(貢賦)하는 제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가 개국한 초기인 임신(壬申) 연간에 국가의 소용을 참작하여 그 수량을 상정(詳定)하였으니, 그 뜻이 만세토록 전하여 폐해가 없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기에 따라 덜고 더[損益]함이 20여년이 되었으나 국가의 소용에 궁핍함이 없었는데, 근자에 각 사(各司)에서 모두 량(量)을 더하자는 의논의 기미가 있고, 인삼(人蔘)·당추자(唐楸子;호도)·대추[大棗]와 지지(紙地)·석자(席子;돗자리)·유청(油淸)·촉밀(燭蜜) 등에 이르기까지도 수량이 너무 과다하여, 간혹 오는 해[來歲]의 공물을 당겨서 바치는 사례가 있습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수량을 적당히 다시 정하도록 하고, 위 조목을 의논하여 다시 상고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1. 월과군기(月課軍器)는 국가의 어무(禦侮)의 비축(備蓄)으로 진실로 하루도 수조(修造)*를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자에 조령(條令)에 의하여 군현(郡縣)으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축함이 있는데, 절제영(節制營)*과 계수관(界首官)·각 진에서 날마다 두들겨 만들어, 야장(冶匠)이 된 자는 밤낮으로 관청에 있게 되니, 그 생리(生理;생계)를 잃게 되어, 처자들이 굶주려 우는 탄식을 면치 못하고, 또한 딱한 일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3월부터 7월까지는 방환(放還)하여 귀농(歸農)케 하였다가, 8월부터 이듬해 2월가지 몰아쳐 역사에 나가[赴役]게 하면, 거의 국가는 비축을 폐하지 않을 것이며, 장인(匠人) 또한 생리(生理)를 이룰 것입니다.”
위의 조항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4월부터 7월까지 귀농하게 하소서.”
“1. 일찌기 내리신 조령(條令)안에 ‘1, 2품 이상의 천첩(賤妾) 소생은 5품, 3품의 천첩의 소생은 6품, 4품의 천첩의 소생은 7품을 한(限)하여 차례로 음직(蔭職)을 제수하라’하였으나, 진실로 전하의 어진 마음이 깊고 은혜가 두텁습니다. 그러나, 변정(辨正)하기를 조기(早期)에 못하였으니, 서제(噬臍)*해 보았자 어찌 미치겠습니까? 원컨대, 앞으로 이 무리들은 각각 그 동류들과 서로 혼인하게 되어, 양반(兩班) 집안과는 혼인하지 못하게 하고, 또 별도로 잡직(雜職)을 제수하여 서용(叙用)해서 문무(文武)의 관작(官爵)에 섞이지 못하도록 하소서. 저들에게 일정한 직분이 없으면 은혜를 소홀히 하고 사랑에 친압하여 하지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음휼(陰譎)하여 변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흔히 이 같은 무리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한갓 재용(才勇)에만 힘 쓰고 정대고명(正大高明)한 아량이 없었음에서 이니, 이것을 옛일에 추구하여 본다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전조(前朝)의 석기(釋器)와 근자의 목인해(睦仁海)는 모두 목전(目前)의 뚜렷한 경험[明驗]입니다. 또 세가(世家)의 자제(子弟)로서 재주를 품고 도(道)를 가슴에 안고서도 이 밝은 시대에 쓰이지 못한 자가 아직도 많은데, 부정(不正)한 무리들을 어찌 써서 관작을 제수하여 명분(明分)을 혼동케 하겠습니까? 이것을 변정하지 아니하면 재세(再世) 뒤에 그 주인의 친척을 간음하여 인륜(人倫)을 어지럽힐 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을 예로부터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호칭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존비(尊卑)의 등급과 귀천(貴賤)의 분수가 하늘이 세우고 땅이 설치함과 같아서, 질서 정연하여 범(犯)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개국(開國)초로부터 예의(禮義)를 닦고 밝혀 후세에 밝게 보이셨으니, 만약 일찌기 변정하지 아니하면 밝은 시대의 성전(盛典)에 결함이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위의 항(項)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마땅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였다. “월과장인(月課匠人)은 3월부터 7월가지 귀농(歸農)케 하고, 천첩 소생은 한품(限品)하여 벼슬을 주되, 조반(朝班)에 섞이지 못하게 별도로 잡직(雜職)을 제수하자는 일을 의논하여 아뢴 대로 시행하라.”
* 수조(修造) : 수리와 제조
* 절제영(節制營) : 절제사(節制使)의 군영(軍營)
* 서제(噬臍) : 사향노루가 사람에게 잡혀 죽을 때 배꼽에 사향이 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여 자기 배꼽을 물어 뜯으면서 후회한다는 뜻.
6월 17일(임오)
육조와 승정원에 명하여 진언(陳言)한 가운데서 행할 만한 사목(事目)을 의논하게 하였다. ……
판서와 대언 등이 의논하기를, “강원도 횡천(橫川)과 진보(珍寶)로써 한 장소를 삼고, 풍해도 평산(平山)과 영봉(迎鳳)으로 한 장소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영봉은 해주곶이 내에서 거리가 멀지 않다. 내 이제 늙었으니 다시는 원행(遠行)하여 해주곶이 내에 가지 않겠다. 후대의 임금으로 만약에 연봉에 가서 사냥하게 된다면 반드시 해주곶이 내에서 사냥하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즉시 명하여 다른 곳으로 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안협(安峽)과 평강(平康)으로 한 장소를 삼아, 경기우도(京畿右道)를 아울러 사렵(私獵)을 금하고, 횡천(橫川)과 방림(芳林)을 한 장소로 삼아, 양근(楊根)·광주(廣州)·풍양(豐壤)·포천(抱川)·장단(長端)·임강(臨江)도 아울러 사렵(私獵)을 금하였다. …….
6월 25일(경인)
육조에서 시행할 만한 진언사건(陳言事件)을 의논하여 아뢰었으니, 무릇 33조항이었다.
“1. 전 강릉부사(前江陵府使) 이귀(李龜)의 진언(陳言)입니다. ‘일찌기 수령(守令)이 되어 사람을 죽였거나 사람을 상해(傷害)하여, 이미 죄를 받은 자는 서용(叙用)하지 말아서 외방 관리의 가혹한 정사(政事)를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중외(中外)의 관리로 불법하게 살인한 자와 탐오(貪汚)하여 정사를 어지렵혀서 이미 죄를 받은 자는 영구히 서용하지 말며, 몽롱(朦朧)하게 보거(保擧)*한 자도 율(律)에 의하여 단죄(斷罪)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 1. 공안부윤(恭安府尹) 안성(安省)이 진언한 것입니다. ‘강원도에서 연례(年例)로 바치는 목재(木材)는 궐(闕)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도(道)의 다른 공물(貢物)은 타도(他道)로 적당히 옮기어, 그 백성들을 부생(復生)하게 하소서’ 하였고, ……”
* 보거(保擧) : 보증(保證)하여 천거함.
7월 13일(무신)
황자후(黃子厚)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삼고, 이귀산(李貴山)으로 강원도 도관찰사를, 이숭문(李崇文)으로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를 삼았으니, 이숭문의 임명은 상왕(上王)의 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황자후가 대궐에 나아와 사은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어미의 병으로 회덕현(懷德縣)에 있었기 때문에 분부(分符)*의 명령을 구하였었는데, 지금 어미의 병이 이미 나았고 전하가 오래 편치 못하신데 신이 전의(典醫)를 겸하여 직책이 상약(嘗藥)*에 있으니, 어찌 차마 전하를 떠나서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우희열(禹希烈)에게 명하여 그 직책을 그대로 맡게 하였다.
* 분부(分符) :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음, 즉 지방수령에 임명됨.
* 상약(嘗藥) : 약(藥)의 일을 맡음.
8월 20일(갑신)
원주(原州)·평창(平昌)·횡성(橫城)·낭천(狼川)·홍천(洪川)의 조세를 수운하여 납부하지 말고 각각 본 고을에 거두어 축적하라고 명령하였으니, 다른 날 강무(講武)의 행차에 대비한 것이다.
8월 25일(기축)
강원도 도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이 양주부사(襄州府使)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새로 창고를 짓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사인(使人)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의 관찰사에게 말하라. 화곡(禾穀)이 결실하지 못하였는데 풍년이라면 이것은 간사한 신하이고, 결실하였는데 흉년이라 하면 이것도 또한 곧지 못한 것이다. 양주부사가 정장(呈狀)한 가운데에는 흉년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감사는 보통 흉년[中儉年]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생각컨대, 강무를 미리 방지하려는 것이다.”
하고, 또 승정원(承政院) 등에게 이르기를, “진언(陳言)하는 자가 강무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또 내가 대간의 말을 듣기 싫어서 행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고, 또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래 횡성(橫城) 등지에서 강무하고자 하지 않는데, 감사가 그래도 풀을 베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종묘(宗廟)에 짐승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니, 양근 등지에 나가서 4, 5일이면 족하다.”
하였다. 유사눌(柳思訥)이, “만일 4일로 제한하였다가 짐승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며칠을 더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경기의 실농(失農)한 사람을 역사시킬 수는 없다.” 하고, 또 경기 및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였다. “지금부터 사렵(私獵)을 금하는 곳에 상수리 열매 줍는 사람까지 금하지 말라.”
9월 24일(무오)
의정부 찬성 유정현(柳廷顯)과 육조판서 박은(朴訔) 등이 상왕(上王)의 행행(行幸)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대가(大駕)*는 강원도에 순행(巡行)하는데 상왕은 교하(交河)에 나아갑니다. 교하 등지에 흉년이 더욱 심하여 비록 소채의 공급도 판비하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신 등은 청컨대, 상왕전에 나가서 면전에서 전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러지 말라. 상왕이 연로(年老)하니 출행(出幸)하는 것이 몇번이나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병조에 명하여 마필을 갖추어 제공하게 하였다.
* 대가(大駕) : 임금의 수레.
9월 25일(기미)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였다.
9월 29일(계해)
강릉(江陵) 대화역(大和驛) 서쪽 들에 머무르고, 대가(大駕)를 따르는 대소인원에게 5일 동안의 인마(人馬)의 요속(料粟)을 주었다.
○ 강원도 경력(江原道經歷) 정환(鄭還)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요전에 몰이꾼 매 10명에 화정(火鼎)* 한명을 정하라고 명하였는데, 임의로 4명을 더한 때문이었다. 이때에 몰이꾼의 수가 강원도의 4,400명, 충청도의 1,000명, 모두 5,400명이었다.
* 화정(火鼎) : 솥에 불을 때서 식사(食事)를 마련하는 사람.
10월 3일(정묘)
병조에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이귀산(李貴山)의 죄를 탄핵하여 청하였으니, 임의로 몰이꾼과 화정(火鼎)을 더한 때문이었다. 논하지 말라고 명하고 인하여 정환(鄭還)을 가둔 것을 석방하였다.
10월 4일(무진)
춘천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 윤개(尹愷)를 가두었다. 이귀산이 윤개로 행궁 지응 도차사원(行宮支應都差使員)을 삼았는데, 임금이 알고 그 읍(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으나, 윤개가 지체하여 머무르고 돌아가지 않은 때문이었다. 3일만에 석방했다.
10월 7일(신미)
돌아와 방림역(芳林驛) 동쪽 들에 머물러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종친과 도진무(都鎭撫)·대언(代言)이 시연(侍宴)하였다. 인하여 대가(大駕)를 따르는 대소 인원에게 술을 주었다.
10월 9일(계유)
횡성(橫城) 실미원(實美院) 들에 머물러서 몰이꾼을 놓아 보냈다. 경상도 도관찰사 안등(安騰)이 사람을 보내어 술 100병을 바치었다.
10월 17일(신사)
대호군(大護軍) 이군실(李君實)을 이천(伊川)에 보내었다. 여러 신하가 일을 아뢰어 끝나자 모두 나가고, 이조판서 박은(朴訔)·병조판서 박신(朴信)이 뒤떨어졌다가, 박신이 아뢰기를,
“지금 강무(講武)하는 곳을 보니 해주(海州)같은 곳이 없습니다. 이미 사람이 들어가 거접(居接)하는 것을 허락하였지마는, 청컨대 감고(監考)를 정하여 사렵(私獵)을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주는 길이 멀어서, 봄철에 강무하고 돌아올 때에 짐을 실은 말이 많이 쓰러졌다. 내가 나이 50이 되었으니 강무를 몇 번이나 할까마는 세자의 기상을 보니, 반드시 사냥을 좋아할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전번에 해주곶이(海州串) 안에 사람이 들어가 거접(居接)하는 것을 허락하고 사렵을 금하지 않았으니, 다시 해주에 가지 않고자 한 것이다. 경 등은 강무할 일정한 곳을 잘 정하라.”
하였다. 박은·박신 등이 아뢰기를, “해주가 다른 곳에 비하면 비록 한두 밤 자는 먼 곳도 있기는 하나, 강무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으니, 빌건대, 해주곶이 안과 연봉(煙鳳) 등지에 사렵을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천(伊川)을 강무하는 곳으로 삼을 만하다.” 하고, 이군실을 보내어 돌아다니면서 보게 하였다.
11월 19일(임자)
형조(刑曹)에서 강원도 도관찰사 이귀산(李貴山)·경력(經歷) 정환(鄭還)·춘천 도호부사 윤개(尹愷)의 죄를 청하여 아뢰기를, “이귀산 등이 강무의 지응(支應)을 청탁하여 각 고을에 가외로 거두면서 숙소(宿所)에 공상(供上)을 올리는 것을 궐하였으니, 신자(臣子)의 임금을 받드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청컨대 직첩을 거두고 율에 의하여 과죄(科罪)하소서.” 하니,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였을 때에 이귀산이 도내의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각각 호피(虎皮) 1령(領), 납촉(蠟燭) 두어 자루를 내게 하였으니, 대개 권요(權要)에게 뇌물을 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12월 8일(신미)
병조판서(兵曹判書) 박신(朴信)·도진무(都鎭撫) 한규(韓珪)를 불러, “충청도에 강무(講武)하면 길이 멀고 폐단이 있으니, 내가 왕방산(王方山)·현종(縣鍾) 등지에 10일을 한하여 강무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지응(支應)하지 말게 하려고 하니, 경 등은 숙소와 몰이꾼[驅軍]의 출처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박신은 “서울 안에서 2,000명을 얻을 수 있고, 또 경기(京畿)의 강무하는 근처의 군민을 조발(調發)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최한(崔閑)이 “주상의 뜻은 경기의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니, 박신(朴信)이 “가까운 곳의 강원도(江原道) 군민도 또한 가합니다.” 하였다.
12월 10일(계유)
여러 도 경력(經歷)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도관찰사 안등(安騰)·경력 은여림(殷汝霖)·전 충청도 도관찰사 우희열(禹希烈)·경력 윤처성(尹處誠)·강원도 도관찰사 이귀산(李貴山)·경력 정환(鄭還)·전 경기 도관찰사 허지(許遲)·경력 성개(成槪) 등이 수령(守令)의 포폄장(褒貶狀)을 기한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교지(敎旨)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논하소서.” 하니, 명하여 다만 수령관(首領官)*만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하였다.
* 수령관(首領官) : 조선조 때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 관찰사(觀察使)나 절제사(節制使)를 보좌하던 경력(經歷)이나 도사(都事)를 일컬음.
12월 23일(병술)
명하여 민무휼(閔無恤)을 원주(原州)에 안치하고, 민무회(閔無悔)를 청주(淸州)에 안치하였다. …….
太宗 十六年(丙申:1416年)
1월 13일(병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自盡)하였다. …… 바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李孟畛)을 원주(原州)로, 송인산(宋仁山)을 청주(淸州)로 보내고, 그 고을의 수령에게 전지(傳旨)하였다. …….
1월 21일(갑인)
원주목사(原州牧使) 권우(權遇)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 내가 그들로 하여금 금하지 말라 한 것인데, 이제 원주목사 권우(權遇)가 보고하기를, ‘본주(本州)에 안치(安置)한 민무휼(閔無恤)을 왕지(王旨)에 의거하여 인리(人吏)․일수양반(日守兩班)*과 시위군(侍衛軍)으로 하여금 둘러싸서 지키고 자진(自盡)하도록 독촉하였더니, 14일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고 하였다. 대개 그 죄가 주륙에 해당한다고 여러 사람이 모두 청하였으니, 내가 비록 법대로 하였더라도 누가 나더러 잔인(殘忍)하다고 하였겠는가? 단지 중궁(中宮)을 보아서 아직까지 감히 사사(賜死)시키지 않은 것인데, 만약에 이맹진(李孟畛)이 잘못 전했다면 이맹진에게 죄가 있고, 이맹진이 말하지 않았는데 권우가 독촉하였다면, 권우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
* 일수양반(日守兩班) : 지방 각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천례(賤隷).
2월 1일(갑자)
경차관(敬差官)을 경상도·강원도·풍해도에 나누어 보내었으니, 군기(軍器)를 점고(點考)하기 위함이었다.
3월 9일(신축)
횡성(橫城)의 화동(禾洞)과 선암(扇巖) 등지에서 밭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였다. “강무장(講武場)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제때에 이접(移接;이사)시키되, 만약 철이 늦어 이사하기에 곤란한 자는 아직 그대로 살게 하라.”
3월 18일(경술)
다시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 이명덕이 “경기의 쌀은 수령(守令)이 회계(會計)때마다 다만 헛숫자를 기록하므로 그때에 저축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충청도·강원도·근기(近畿) 여러 고을의 쌀을 차례로 전용(轉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강원도의 쌀은 불가하다. 만약 동북면에 사변이 있으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공급하겠는가?” 하였다. 병조판서 박신(朴信)이 “유후사(留後司)에 묵은 곡식이 만만석(萬萬石)이 있으니, 조운(漕運)하여 쓰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19일(신해)
중외(中外)의 창고(倉庫)를 열어서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또 농사 종자를 주니, 경기 도관찰사 우희열(禹希烈)의 장계(狀啓)에 의한 것이었다. 명하여 강창(江倉)에 저장한 황두(黃豆) 740석을 꺼내고, 유후사(留後司)에 저장한 묵은 쌀·콩 1만석을 조운(漕運)하여 진제하게 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의 조세(租稅) 8,000석과 콩 4,960석, 강원도 각 고을의 콩 800석을 조운하고, 전농시(典農寺)의 조세 3,000석을 나누어 주고, 아울러 경중(京中)에 저장한 콩 5,000석을 종자로 주었다.
4월 8일(경오)
경기 진제사(京畿賑濟使) 이명덕(李明德)이 복명(復命)하여 아뢰었다.
“각 고을의 기민(飢民)은 11,910호 안에 남녀노약(男女老弱) 아울러 65,886구(口)인데, 도내 각 고을의 미곡(米穀)과 유후사(留後司)·충청도·강원도 각 고을에서 소유한 미곡을 수전(輸轉)하고, 혹은 환상(還上)으로, 혹은 진제(賑濟)로 묵은 쌀·콩·잡곡과 새 쌀·콩·잡곡을 나누어 준 것이 아울러 81,347석입니다.”
4월 28일(경인)
명하여 철(鐵) 1,000근(斤)을 원주(原州) 각림사(覺林寺)에 주니, 사승(寺僧)으로서 중창(重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3일(갑오)
사헌부에서 강원도의 군기(軍器)를 단련하지 않은 수령(守令)과 군관(軍官)의 죄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율문(律文)대로 죄를 주면 반드시 대체(代遞)해야 마땅한데, 농사철에 송영(送迎)하는 폐단이 가볍지 않을 것이다. 군관(軍官)은 색장(色掌)을, 수령은 장리(掌吏)를 우선 죄 주라.”
5월 20일(신해)
강무장(講武場)을 정하여 세 곳으로 하였다. 병조(兵曹)와 의정부(義政府)·삼공신(三功臣)·제조(諸曹)·삼군 도총제(三軍都摠制)·예문관(藝文館)·대간(臺諫)에서 같이 의논하기를, “충청도의 태안(泰安), 강원도의 횡천(橫川)·평강(平康) 등 세 곳으로 정하여 3소(三所)로 삼고, 그 나머지 각 처(各處)는 백성들이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을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4일(을묘)
명하여 한상환(韓尙桓)·원순(元恂)과 신유현(辛有賢)의 아내, 이사치(李思恥)의 아내, 김사지(金四知)의 아내 등의 속공(屬公)한 노비를 아울러 본주(本主)에게 돌려주고 ……, 강원도 금화(金化)에 안치(安置)한 황거정(黃居正)은 외방종편(外方從便)*하게 하고, 박동미(朴東美)·안승경(安升慶) 등의 속공(屬公)한 노비(奴婢)도 또한 모두 환급(還給)하였다. …….
* 외방종편(外方從便) : 죄인을 외방(外方)의 일정한 곳에 유배하던 제도. 유형(流刑).
6월 26일(병술)
태안(泰安)의 강무소(講武所)를 파하였다. 이원(李原)에게 명하였다.
“강무소는 횡천(橫川)·평강(平康)·평산(平山) 등지와 작천(鵲川) 이동으로써 영구히 상소(常所)로 삼으라. 무의(武威)를 빛내려는 것이 아니라, 좌작(坐作)과 행진(行陳)을 강(講)하려 함이다.”
이원(李原)이 말하기를, “이 세 곳은 짐승들이 없는 곳이니, 원컨대 태안(泰安)과 해주(海州)로써 상소(常所)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태안(泰安)과 해주(海州)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農耕)을 허용할 만하고, 또 도로가 험하고 멀다. 내가 후세에 무예를 좋아하는 임금이 짐승 쫓기를 싫어하지 않아 멀리 유일(遊逸)을 일삼을까 두려워한다. 이제부터 백성이 농사짓는 것을 들어주어 한광(閑曠)*하지 못하게 하고, 그 상소(常所) 이외에 사사로이 사냥하는 것과 곡식을 가는 것을 함부로 금하는 수령(守令)은 논죄(論罪)하겠다.”
* 한광(閑曠) : 묵은 땅으로 비어두는 것.
7월 5일(갑오)
편전(便殿)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보았다. ……, 인하여 경기(京圻)안에 강무할 일정한 장소를 다시 정하라고 명하고, 병조에 명하였다.
“강무는 폐지할 수가 없다. 나라에 원유(苑囿)가 없기 때문에 근래에 부득이하여 원지(遠地)에서 강무하였다. 고전(古典)에 상고하면 역대(歷代)의 강무한 장소가 모두 근지(近地)에 있다. 미원(迷原)·양주(楊州)·가평(加平)·조종(朝宗)·영평(永平) 등지로 한 곳을 삼고, 평강·철원·안삭(安朔) 등지로 한 곳을 삼고, 임강(臨江)·우봉(牛峰)·송림(松林)·개성(開城)·해풍(海豐)·강음(江陰) 등지로 한 곳을 삼고, 횡성(橫城) 등지로 한 곳을 삼아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해의 풍흉(豐凶)에 따라 서로 강무하고, 사렵(私獵)은 한결같이 금지하고, 광주(廣州)·양근(楊根) 등지도 또한 전례(前例)에 의하여 사렵(私獵)은 엄격하게 금하고, 종전에 이미 경작한 전지는 금하지 말고, 다만 새로 개간하고 나무를 베는 것만 금하라.”
7월 16일(을사)
명하여 충청도·강원도·풍해도에서 바치는 진맥(眞麥;참밀)을 8월에 조운(漕運)하는 것으로써 항식(恒食)을 삼게 하였다.
7월 30일(기미)
합병한 군현을 다시 나누어 예전대로 하였다. 경기의 금천(衿川)·양천(陽川)·삭녕(朔寧)·안협(安峽)·마전(麻田)·연천(連川)·김포(金浦)·충청도의 온수(溫水)·신창(新昌)·전의(全義)·연기(漣歧)·황간(黃澗)·청산(靑山)·전라도의 부령(扶寧)·보안(保安)을 모두 복구하였다.
8월 5일(갑자)
각 도에 뽕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이 상서하기를,
“농사와 뽕나무는 의식(衣食)의 근본이어서 천하고금이 함께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금년에 비로소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조금 그 효과를 얻어 잠종(蠶種)을 잇달아 3백여장(張)을 거두었습니다. 한 곳에서 기르는 것이 20여장에 지나지 않고, 또 양잠하는 일이 뽕나무 잎이 누르지 않은 때로부터 명년 3월까지 예전 법에 의하여 저장하면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원컨대 각 도의 산뽕나무[桑柘]가 무성한 땅에 각각 하나의 잠실을 설치하고, 근처에 살고 있는 각 사(各司)와 혁파한 사사(寺社)의 노비(奴婢)로써 삼정(三丁)을 일호(一戶)로 만들어 역사에 예속시켜 양잠하게 하고, 소재지의 수령이 염철(鹽鐵)의 예(例)에 의하여 관장(管掌)하고, 일을 아는 사람을 보내어 가르쳐 기른 뒤에 세공(歲貢)을 하게 하면, 각 도의 인민들이 모두 보고 느끼어 이익을 쫓아서 양잠의 공적이 이루어지고 세공(歲貢)이 족할 것입니다.” 하니, 육조(六曹)에 내리어 의논하매, 모두 말하기를,
“만일 잠실을 산뽕나무[桑柘]가 무성한 땅에 설치한다면 백성의 이익을 빼앗으니, 근심과 원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각 도의 산에 붙어 있는 놀고 빈 땅에 산뽕나무[桑柘]를 심어서 무성하기를 기다려서 잠실을 설치하소서.”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8월 6일(을축)
하륜(河崙)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명하여, 각 도의 공물(貢物)을 상정(詳定)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었다. “저포(紵布)·면주(綿紬)·목면(木綿)의 위전(位田)*을 고쳐 상정하였는데, 10승(升) 저포 한 필에는 밭은 2결(結) 50복(卜), 논은 1결 25복이고, 9승 면주, 7승 목면 한필에는 밭은 3결, 논은 1결 50복입니다. 면주와 목면이 아울러 1,041필인데, 위전이 2,293결이고, 논이 293결입니다.”
* 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나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8월 10일(기사)
군현(郡縣)의 칭호를 고치었다. 이조(吏曹)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이에 청주(淸州)를 북청(北淸)이라 하고, 양주(襄州)를 양양(襄陽)이라 하고, 영산(寧山)은 예전 이름 그대로 천안(天安)이라 하고, 보성(甫城)은 예전 이름 그대로 진보(眞寶)라 하고, 보천(甫川)은 예전 이름 그대로 예천(醴泉)이라 하고, 보령(報令)은 보은(報恩)이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 문과(文科) 출신 6품 이상 교수관(敎授官)은 모관 유학교수관(某官儒學敎授官)이라 칭하고, 참외(參外)는 훈도관(訓導官)이라 칭하고,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는 교도(敎導)라 칭하고, 또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은 모도 의학교유(某道醫學敎諭)라고 고쳐 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3일(임오)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각림사(覺林寺)를 중창(重創)하는 재목 1천주(株)를 주고, 도내에 나누어 배정하여 폐단없이 운반하여 들이도록 하고, 또 승정원(承政院)에 전지하기를, “본궁(本宮)의 쌀·콩 합하여 1백석을 군자감(軍資監)에 바치고, 충청도 제천(堤川) 창고의 쌀·콩을 바꾸어 각림사에 주라.” 하였다.
9월 2일(경인)
김인우(金麟雨)를 무릉(武陵) 등지 안무사로 삼았다. 호조참판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찌기 강원도 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의 주회(周回)가 7식(息)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전지가 50여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假倭)*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三陟)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사람 이만(李萬)이 일찌기 무릉(武陵)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 하니, 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주접(住接)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적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를 침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를 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고 이만(李萬)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병선(兵船) 2척, 초공(抄工) 2명, 인해(引海) 2명, 화통(火㷁)·화약(火藥)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頭目)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와 이만에게 옷[衣]·입(笠)·화(靴)를 주었다.
* 무릉도(武陵島) : 울릉도(鬱陵島)를 말하는데, 그 옆의 소도(小島)는 분명히 독도(獨島)를 가리키는 사료(史料)임.
* 가왜(假倭) : 왜구(倭寇)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가짜 왜구(倭寇). 당시 해변에 살던 불한당이 간혹 무리를 지어 가왜구(假倭寇) 행세를 하였음.
10월 15일(계유)
강원도(江原道)에서 강무(講武)하였다.
10월 18일(병자)
용담역(龍潭驛)에 머물렀다.
○ 강원도 도관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말을 바치었다.
10월 19일(정축)
평강현 적산(積山)에 머무르고 사람을 보내어 새를 종묘(宗廟)에 바치고 전지하였다. …….
10월 25일(계미)
돌아와서 철원(鐵原) 탁천(濁川)에 머물렀다. 강원도 도관찰사 신상(申商)에게 표리(表裏)와 전모(氈帽)를 하사하고, 경력(經歷) 이맹진(李孟畛)에게 유의(襦衣)를 하사하였다.
12월 19일(병자)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조진(趙瑨)·전 평강현감(平康縣監) 최치렴(崔致濂)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조진을 파직하였으니, 친히 강무장(講武場)을 살피지 않은 때문이었다.
12월 25일(임오)
사헌부에서 호조판서 정역(鄭易)·참찬(參贊) 윤향(尹向)·강원도 도관찰사 신상(申商)·선공부정(繕工副正) 유정(柳汀)·덕은현감(德恩縣監) 이반(李胖) 등의 죄를 청하였다. 정역 등이 일찌기 형조 원리(員吏)가 되어 역신(逆臣) 유기(柳沂)의 아우 유한(柳漢)을 아울러 처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청이 있었는데,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太宗 十七年(丁酉:1417年)
1월 11일(무술)
전 전라도 도절제사 조원(趙源)을 영일현(迎日縣)으로, 전 회양부사 조진(趙瑨)을 천안군(天安郡)으로 귀양보냈다. 조원이 처음에 평강현(平康縣) 사람의 집에서 성혼(成婚)하고, 여양군(礪良君) 송거신(宋居信)에게 서신을 통하여 말하기를, “한방지(韓方至)에게 사렵(私獵)을 금(禁)하는 임직을 맡기지 말게 함으로써 일읍(一邑)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소서.”
하므로, 송거신이 그대로 아뢰었더니, 임금이 그 글을 내던지고 또 말하기를,
“내 예조(禮曹)의 계문(啓聞)을 좇아 가까운 곳인 평강(平康)을 택하여 강무(講武)하는 상소(常所)로 정하니, 예조에서 월령(月令)을 상고하여 이를 아뢰었던 것인데, 임금에게 강무할 것을 고하는 자는 모두 아첨하는 신하란 말인가? 마땅히 조원에게 ‘일읍의 소망에 부응하게 하라’는 뜻을 물어야겠다.”
하고, 곧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김유공(金有恭)에게 명하여 조원을 잡아 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귀양보내게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김여지(金汝知) 등이 상소하여 청하였다.
“……. 전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진이 박빈(朴彬)을 매질한 사실도 조원과 서로 비슷하니 또한 직첩을 거두고 그 실정을 신문(訊問)함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을 경계하소서.” …….
1월 12일(기해)
사간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최순(崔洵) 등이 소(疏)를 올려, 조원(趙源)에게 죄주기를 청했는데, 그 소(疏)는 이러하였다.
“조원은 별로 재덕(才德)도 없으면서 지위가 2품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소심(小心)으로 봉직(奉職)하여야 합니다. 전자에 전라도에서 봉사(奉仕)한 때에 직사(職事)를 삼가지 못하여 두번씩 죄망[罪罟]에 걸렸으나, 특별히 원유(原宥)를 입었으니 더욱 충성을 다하여 재조(再造)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일찌기 이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곧 혼인(婚姻)한 까닭으로 대의(大義)를 생각지 않고 슬그머니 향인(鄕人)들이 자기에게 고맙게 여기게 하고자 하여, 사사로이 송거신을 통해 평강(平康)을 강무(講武)할 곳으로 삼지 않도록 청하였으니, 그것이 신자(臣子)가 임금을 애경(愛敬)하는 마음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강무는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본래가 폐할 수 없습니다. 평강은 경도(京都)의 근읍(近邑)이므로 상소(常所)로 삼음이 마땅하므로,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함은 진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조원이란 자가 만약 말씀드릴 것이 있었다면 직접 신총(宸聰)에 상달함이 옳은 것입니다. 몰래 불경한 마음을 품고 감히 비부(比附)하는 사사로움을 행하였으니 그 죄가 막심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헌사의 청에 따라 명령을 유사(攸司)에 내려 그 연유를 국문(鞫問)케 하고, 그 죄를 명정(明正)함으로써 불경함을 징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2월 2일(기미)
의정부 좌의정 박은(朴訔)·우의정 한상경(韓尙敬)이 강무할 곳을 올렸는데, 사인(舍人) 심도원(沈道源)을 시켜 아뢰기를, “충청도 순성(蓴城)을 춘등 강무장(春等講武場)으로 하고, 강원도 횡성을 추등 강무장(秋等講武場)으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횡성은 곧 전일에 정부(政府)와 대간(臺諫)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곳인데, 그때에는 어찌 한 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느냐? 또한 지금은 강무한다는 명령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내느냐? 나더러 각림사(覺林寺)에 간다고 핑계하여 강무하라는 말이냐? 내 어찌 강무하고자 했겠느냐? 그러나, 강무는 옛 제도[古制]인 것이다. 만일 강무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 앞서 강무하였을 때에 여러 재상과 대간이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곧 임금의 악(惡)을 조장하는 것이다. 원주(原州)의 각림사는 내가 나이 어렸을 적에 유학(遊學)한 곳이므로, 사우(寺宇)와 산천(山川)이 매양 꿈속에 들어오는 까닭에, 한 번 가 보고 싶었을 뿐으로 애초부터 부처를 위함은 아니었다. 만약에 눈이 녹기를 기다려서 간다면, 반드시 ‘이를 핑계 삼아 강무한다’ 할 것이니, 모름지기 눈이 쌓였을 적에 가야겠다.”
대언(代言) 서선(徐選), 승전내관(承傳內官) 최한(崔閑)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니, 서선 등은 지난 가을에 정했던 강무장을 을미년의 일이라고 했으므로, 임금이, “나를 속였다.” 하여, 가두도록 명했다. 또 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가, 이튿날 용서하라고 명하니, 서선(徐選)·최한(崔閑) 등도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갔다. 조말생을 불러 직책에 나오게 하니, 박은․한상경 등이 예궐(詣闕)하여 아뢰었다.
“어제 심도원(沈道源)이 신 등의 뜻을 잘못 아뢰었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평강(平康) 강무장은 산이 깊고 눈이 쌓여 반드시 3월 보름을 기다린 두에야 눈이 다 녹겠고, 또 한 도내(道內)를 일년에 두 번씩 가신다면 민력(民力)이 근고(勤苦)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농사에도 방해가 될 것이므로, 원컨대, 순성(蓴城)으로써 또 한곳을 만드신다면, 금수(禽獸)도 해를 거듧함에 따라 번식할 이치가 있을 것이요, 민생에 있어서도 고되고 험함이 서로 균등하게 하는 뜻이 있게 되어, 전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폐단이 없게 하려는 염려에 거의 합당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
2월 8일(을축)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찌기 요역(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2월 10일(정묘)
사간원에서 상소하였는데, 그 소(疏)에 말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거동(擧動)은 임금의 대절(大節)이므로 명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보니,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옛 제도를 본받아 매양 봄·가을에 강무하는 일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예(禮)로써 거동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권도로 강무를 정지하고 각림사(覺林寺)로 행차하고자 하니, 신 등은 아직 알지 못하겠으나, 무슨 일 때문에 부도(浮圖;부처)의 처소에 행행하려 합니까? 또 전하의 일신(一身)은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취하는 바가 되는 즉 더욱 명분 없이 거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 이번 각림사에 행차하심을 정지하고, 특별히 강무한다는 명령을 내리시어 상소(常所)에 순행(巡行)하심으로써 법을 후세에 드리우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대호군(大護軍) 조치(趙菑)를 횡성(橫城)에 보내어 강무장에 얼음이 녹았는지의 여부를 살펴보게 하고, 이어서 명령하였다. “만약 얼음이 녹지 않았다면 본도(本道;강원도)와 충청도 기군(騎軍)·보군(步軍)과 역마(驛馬)를 모두 징취(徵聚;징집)하지 말라.”
2월 27일(갑신)
거가(車駕)가 원주의 각림사(覺林寺)로 행행(幸行)하니, 겸하여 춘수(春蒐)*를 강(講)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글을 각림사에서 읽었는데, 자라서도 매양 꿈을 꾸면 소시(少時)적에 놀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급전(給田)하고 중신(重新)하게 한 것이다. 내가 강무(講武)를 핑계하여 태조(太祖)와 모후(母后) 두 분의 기일[忌晨] 때에 가서 보고자 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기일은 5월에 있고 모후의 기일은 9월에 있으니, 5월은 바로 농사철이며, 9월은 벼가 무성한 때이다. 만약 연고 없이 간다면 대간(臺諫)이 반드시 막을 것이다. 또 불법(佛法)은 비록 믿기 어렵다 하더라도 중국(中國)에서 들어온 지 오래 되었으니, 비록 부처를 위하여 한 차례 간다 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
대언(代言) 등이, “강무(講武)로 인해 한 번 행행하는 데 누가 그것을 막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꼭 가서 봐야겠다.”
하였다. 횡성 등지의 구군(驅軍)·방패(防牌)·섭대장(攝隊長)·섭대부(攝隊副) 합쳐서 1,091명, 별군(別軍) 160명이었고, 강원도의 보군(步軍) 1,200명, 마군(馬軍) 300명이었으며, 충청도의 보군 250명, 마군 300명이었고, 경기의 250명이었다. 도관찰사(都觀察使)·수령관(守令官), 각 고을 수령 등에게 명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 춘수(春蒐) : 춘등 강무.
3월 5일(신묘)
강원도 도관찰사 신상(申商)에게 옷 2벌을 내려 주고, 또 차사원(差使員)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 권소(權紹)와 양구현감 이백충(李伯忠), 홍천현감 송저(宋儲) 등에게는 각각 옷 1벌씩 내려 주었다.
3월 10일(병신)
강원도 채은 경차관(採銀敬差官) 박윤충(朴允忠)이 금성현(金城縣)에서 납[鉛] 3정(丁)을 만들어 바쳤다.
3월 18일(임인)
이종무(李從茂)를 의정부참찬으로, 이발(李潑)을 공조참판으로, 신상(申商)을 형조참판으로, 이간(李暕)을 제주도안무사로, 윤향(尹向)을 강원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윤향에게 일러 말하였다.
“저번에 경(卿)이 실수한 일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의논[廷議]이 아직도 그치지 아니하니, 외방(外方)에 나가거든 그런 일을 피(避)함이 마땅하다.”
3월 20일(병오)
회양부사 나은(羅殷)을 파직하였다. 나은이 회양부사가 되어 그 고을 강무장(講武場)에 머물러 있는 별차(別差)* 안길(安吉)과 함께 병조의 첩문(牒文)이라 핑계하여 강무장 안에서 벌초(伐草) 등의 일을 금하였다.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이 함길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회양에 들렸더니, 나은이 말하기를,
“강무장 안에서 벌초함을 금(禁)하니, 백성의 원망이 지심(至甚)합니다. 바라건대, 공(公)께서 주상에게 전문(轉聞)하여 이 금령(禁令)을 늦추면, 이것은 공께서 내려줌입니다.”
하므로, 연사종이 임금에게 고했더니, 임금이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그 도(道)의 도관찰사로 하여금 이를 추핵하게 하니, 실은 병조의 이첩(移牒)이 아니라, 곧 나은 스스로가 금하게 하고 도리어 백성의 원망을 임금에게 돌렸던 까닭에, 나은과 안길은 모두 좌죄(坐罪)되었다. …….
* 별차(別差) : 나라에서 특정한 임무를 위하여 특별히 파견하던 임시 관원.
4월 11일(정묘)
명하여 전 판서 이문관(李文貫)의 아들 이미(李彌)를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겨울 임금이 강원도에 강무(講武)하였을 때, 차중보(車重寶)와 속모치(速毛赤)* 이홍(李弘)이 세자를 유인(誘引)하여, 10월 20일 초저녁에 세자전(世子殿)에 나가 첫닭이 울 무렵, 부평(富平)에 있는 이문관(李文貫)의 집에 이르러 자고, 이튿날 이문관 3부자(三父子)를 거느리고 철관포(鐵串浦)에 이르러 매사냥을 하였다. 그뒤 세자가 또 출유(出遊)*하였는데, 이 문관은 그 아들 이미(李彌) 등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갖추어 올리게 하였다. 경기감사 이관(李灌)은 이문제의 족제(族弟)였다. 이 말을 듣자 임금께 고하니, 임금이 “그 당시는 세자가 반드시 이문관으로 하여금 이 일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추핵(推劾)하지 않음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이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여 출입(出入)에 절도가 없었는데, 이문관이 말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하고, 즉시 그 아들 이미를 가두고,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정신도(鄭伸道)를 부평에 보내어, 이문관을 잡아 오게 하였다.
* 출유(出遊) : 나가서 놀음.
* 속모치(速毛赤) : 병조(兵曹)의 군기감(軍器監)에 딸린 장인(匠人)의 하나. 조선 초기의 정원은 12명이었음.
4월 25일(신사)
민막(民瘼)*을 찾아서 묻게 하였다. ……. 의금부(義禁府)에 하지(下旨)하기를,
“영동(永同)에 부처(付處)된 김훈(金訓), 나주(羅州)에 부처된 윤흥부(尹興阜), 원주(原州)에 부처된 강유신(康有信)과 옥천(沃川)에 정속(定屬)된 박안수(朴安守)를 모두 외방종편(外方從便)하게 하라.” 하고, 권보(權堡)·이법화(李法華)·검동(黔同)·이홍(李弘)의 가산(家産)을 환급(還給)하였다.
* 민막(民瘼) : 백성에게 폐가 되는 일.
5월 9일(갑오)
평안도·함길도·풍해도·강원도 감사 등에게 전지하였다. “여름철에 진상하는 익두라진(益頭羅進;黃鷹)·가지개(加之介;靑海靑)·응자(鷹子;매)는 전지가 있기를 기다려서 바치게 하라.”
윤5월 1일(병진)
윤향(尹向)을 경상도 도관찰사로, 이백지(李伯持)를 강원도 도관찰사로, 김구덕(金九德)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삼았다.
윤5월 14일(기사)
예조에서 과거(科擧)의 법을 올렸다. “……. 1. 부시생도(赴試生徒)의 액수(額數)는, 관시(館試)에서는 20을 더하여 50인으로 하고, 한성시(漢城試)에서는 10을 더하여 40인으로 하며, 강원도·풍해도에서는 각각 5인을 감하여 10인으로 하고, 그 나머지 충청도에서는 20인, 경상도에서는 30인, 전라도에서는 20인, 평안도에서는 10인, 함길도에서는 10인으로 모두 옛날 그대로 하소서. …….”
윤5월 28일(계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유공(金有恭)을 강원도로 보내어 왜인(倭人) 슬라(瑟羅)를 잡아오게 하였다. 처음에 도관찰사가 치보(馳報)*하기를, “평해군(平海郡) 후리포(厚里浦)에서 반간(反間)하는 왜놈 슬라(瑟羅)를 잡아 본군(本郡)에 가두었는데, 그 왜놈이 납사(納辭)하기를, ‘대마도(對馬島)에 거주하는 선주(船主) 오라(吾羅)·삼보라(三甫羅) 등 3인이 왜인 21인을 거느리고 평해지방[平海地面]에서 정박하였다가 저만 두고 가면서 말하기를, 「조선의 각포(各浦)에서 흥리(興利)를 엄금하여 생리(生理)*가 심히 어렵다. 연해(沿海)를 두루 다니면서 부자로 사는 민가를 살펴 허실을 알고 6월 보름이 지나서 돌아오라」고 하였다’합니다.” 하니, 이때에 이르러 잡아 오게 하였다.
* 생리(生理) : 생계.
* 치보(馳報) : 말을 달려 가서 알림.
6월 3일(정해)
대호군(大護軍) 남득량(南得良)을 강원도에 보냈다. 남득량이 조전 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가 되어 갑사(甲士) 4인을 거느리고 떠나니, 인하여 남득량에게 궁전(弓箭)과 마포(麻布) 1필, 저포(苧布) 2필을 내려 주었다. 처음에 강원도 도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적선(賊船) 3척이 바다 가운데 떠 있으면서 자주 횃불을 올리며 가지 않고 나타났다 숨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조말생이 말하였다.
“이 도적들이 횃불을 올리는 것은 반드시 붙잡힌 그의 반간(反間)*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복병(伏兵)하여 두고 반간할 장소를 약속하되 불로써 응화(應火)하게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반간하는 불이라 하여 이르러 올 것이니 그 때에 합공(合攻)함이 상책(上策)입니다. 그러나 반간이 우리에게 구집(拘執;체포) 당한 줄을 저들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적(賊)이 반간하다가 구집(拘執)당한 줄 안다면 어찌 경솔하게 들어오겠느냐?” 하고, 판우군 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이원(李原)에게 명하여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더니, 이원이 말하였다.
“이 도적들은 반드시 경솔하게 들어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록 반간이 구집되었다 하더라도 저들은 본래가 욕심이 많으므로 그 이익을 얻지 못하면 떠나려고 하지 아니하여 방비가 없는 곳으로 돌입해서 서절(鼠竊)할 것이 두렵습니다. 강원도 연해주군(沿海州郡)의 수령(守令)으로 무재(武才)가 있는 자는 오직 여흥열(余興烈) 뿐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3품 이하의 무용(武勇)있는 사람 1인을 조전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라 칭하여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임금이, “그렇다. 내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누가 적당한가?” 하니, 병조찬판 이춘생(李春生)이 아뢰기를, “대호군 남득량은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무재(武才)도 있어서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합니다.” 하여, 이 때에 이르러 그를 파견하였다.
* 반간(反間) : 적국에 들어가 정세를 탐지하여 보고하는 사람.
7월 5일(무오)
원주 각림사(覺林寺)의 중이 사곡(私穀) 200석을 근처 제천(堤川) 창고의 쌀 100석과 바꾸도록 청하니, 허락하고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각림사는 내가 젊었을 때에 놀던 땅이다. 지금도 꿈속에서 가끔 간다. 그러므로 중수하고자 하는 것이지 부처를 좋아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중들은 본래 성질이 지리(支離)하고 탐하는 마음이 있으니, 간사승(幹事僧)*으로 하여금 나를 빙자하여 범람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그 뒤에 또 전지하기를, “연안부(延安府)의 본궁(本宮) 곡식 2백 석을 그 부(府)의 창고에 들이고, 충청도 제천(堤川) 고을의 창고 쌀 100석과 경원창(慶源倉)*의 보리 20석을 각림사에 주라.”
하니, 대개 낙성(落成)한 법회(法會)를 도운 것이다.
* 간사승(幹事僧) : 일을 맡아 보는 중.
* 경원창(慶源倉) : 충청도 충주(忠州) 서쪽 10리에 있던 창고(倉庫).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의 공부(貢賦)를 거두어 받는 곳이라” 하였음.
7월 17일(경오)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과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에 황충이 일었다.
7월 19일(임신)
사재감 정(司宰監正) 조유중(趙惟中)을 강원도(江原道)에 보내어 황충을 잡았다.
8월 1일(갑신)
회양 등지에서 금을 캐는 군인을 놓아 보내었다. 이에 앞서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병조참판 및 지신사(知申事)를 불러 추등 강무(秋等講武)할 장소와 거둥할 시기를 의논하고,
“평강(平康)은 봄이 좋으냐? 가을이 좋으냐?”
하니, 모두, “가을이 좋습니다. 9월 24일에 거둥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평강(平康)으로 정하고 채금 군정(採金軍丁)*을 장차 몰이 꾼[驅軍]으로 쓰려고 놓아 보내어 쉬게 한 것이다.
* 채금군정(採金軍丁) : 금을 캐는데 종사하는 장정.
8월 17일(경자)
예빈 소윤(禮賓少尹) 변계손(卞季孫)을 강원도에 보내었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백지(李伯持)가 보고하기를, “이달 초 5일부터 8일까지 큰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어 육지에 물이 30리를 넘치고 통천(通川) 민호(民戶)가 표류(漂流)한 것이 다섯채이며, 빠져 죽은 남녀가 모두 15명이고, 또 고성포(高城浦)에 정박한 군선(軍船) 2척이 표류하는 큰 나무와 충돌하여 파선되어 군인 10구(口)가 빠져 죽었고, 또 회양(淮陽) 이내(任內) 장양현(長楊縣)에 3호(戶)가 표류하고 두 사람이 빠져 죽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통천군수 강자명(姜自明)은 큰 비를 당하여 물가의 민호(民戶)를 미리 옮기지 못하였고, 고성포 만호(高城浦萬戶)는 미리 병선(兵船)을 붙잡아 매지 못하여 인명(人命)을 빠져 죽게 만들었으니, 모두 법을 받드는 뜻이 없다.” 하고, 변계손(卞季孫)을 명하여 보내어 안문(按問)하게 하였다.
8월 25일(무신)
예빈소윤(禮賓少尹) 변계손(卞季孫)이 복명(復命)하여, 통천·고성·회양의 수해로 손곡(損穀)한 것과 고성포만호(高城浦萬戶) 신유선(辛惟善)이 변선을 미리 붙잡아 매어두지 못하여 파선되어 군인이 빠져죽게 한 등의 일을 아뢰니, 형조에 명하여 신유선을 율에 의하여 논죄하게 하고, 호조(戶曹)에 명하였다.
“무지(無知)한 백성이 혹은 물가에 살다가 만일 폭우가 있어 물이 넘치면 빠져 죽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고루 자세히 방문하여 오는 봄에 옮겨두도록 하라.”
8월 25일(무신)
공조에서 금은(金銀)을 거두는 계책을 올렸다. “……. 1. 안동·김해(金海)·태천(泰川)·수안(遂安)·안변(安邊)·정선(旌善)은 기타의 공(貢)을 감하고 해마다 그 액수를 정할 것. …….”
9월 2일(갑인)
사헌부(司憲府)에서 명하여 전 지춘천군사(知春川郡事) 이속(李續)을 전옥(典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임금이 점치는 자[卜者] 판수[盲人] 지화(池和)에게 정해년(丁亥年) 이전에 출생한 남자의 팔자(八字)*를 구하여 추산(推算)하여 아뢰라고 명하였었다. 지화(池和)가 이속(李續)의 집에 가서 이속의 아들의 팔자를 물으니, 이속이, “무슨 까닭으로 묻는가?” 하였다.
지화가, “이것은 왕명을 받은 것이다.” 하니, 이속이 말하였다. “길례(吉禮)가 이미 끝났는데, 또 궁주(宮主)가 있는가? 만일 권궁주(權宮主)의 딸이 결혼한다면 나의 자식이 있지마는, 만일 궁인(宮人)의 딸이라면 내 자식은 죽었다. 나는 이렇게 연혼(連婚)하고 싶지는 않다.” 지화가 이속의 말을 아뢰니, 임금이 “이속의 가문(家門)이 본래 바르지 못하다. 나도 연혼(連婚)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속의 말이 심히 불공하다.” 하고, 이에 옥에 가두고 물었다.
이보다 앞서 이속의 매부 하형(河逈)의 딸은 김화현감(金化縣監) 유복중(柳復中)의 아내인데, 5촌숙(五寸叔) 김사문(金士文)과 사통하였기 때문에 가문이 바르지 못하다는 분부가 있는 것이다. 이속의 위인이 거만하고 탐하고 포학하여 모든 언사와 거동이 남의 미움을 받았다.
* 팔자(八字) : 출생(出生)한 년(年)․월(月)․일(日)․시(時)에 해당되는 간지(干支) 여덟 글자. 이것으로 사람의 화(禍)․복(福)․생(生)․사(死)를 판단함.
9월 2일(갑인)
사헌부에서 아뢰어서 회양부사 김사문(金士文)을 잡아 와서 국문하였다. 처음에 김사문이 최질(衰絰) 중(中)에 있었는데, 갑오년(甲午年) 경신일(庚申日)에 이속의 집에 가서 이속 및 유복중(柳復中)과 더불어 밤에 마시고, 또 유복중의 아내 하씨(河氏)와 함께 윷놀이를 하였다. 새벽이 되어 김사문이 이속에게 이르기를. ‘유복중이가 나를 꾸짖어 「내 아내를 간음하였다」고 한다’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속이 마침 잡혀 갇혔으므로 헌사(憲司)에서 이속에게 뜬말로 묻기를, “네 가문에 불미한 일이 있는데, 아는가? 모르는가? 다 말하라.” 하니, 이속이, “불미한 일이란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다만 김사문이 유복중(柳復中)의 아내를 사통한 것뿐이다.” 하였다. 이에 헌사(憲司)에서 김사문의 죄를 청하기를, “일이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데에 관계되니, 직첩을 거두고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5일(정묘)
정부(政府)·육조(六曹)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의 행할 만한 사건을 의논하였다. “……. 1. 경원(慶源)으로부터 용성(龍城)에 이르는 각 참(站)은 전에 의하여 배치하고, 참리(站吏)는 전 회양(淮陽)·옹구(雍丘)·시원(時原)·부가(富家) 등 4참(站)의 아전을 그대로 두고, 청주(淸州) 이북 각 참(站)의 아전을 알맞게 제하여 내어 입거(入居)시킬 것. …….”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에게 명하여, 원주 각림사에 갔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황고(皇考)·황비(皇妣)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화엄경(華嚴經)을 만들었는데, 이때에 각림사가 완성되매 이 경(經)을 보내고, 또 유창에게 내향(內香)*과 소(疏)를 주어 법회(法會)를 베풀어 낙성(落成)하였다.
* 내향(內香) : 전향(傳香)할 때 임금이 내려 주던 궁내의 향(香).
9월 18일(경오)
명하여 평강 등지의 강무(講武)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처음에 찬성(贊成) 이원(李原)과 병조판서(兵曹判書) 김한로(金漢老) 등이 강무할 때의 구군(驅軍)의 수를 의논하여 아뢰니, 임금이, “내가 상왕을 모시고 강무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원(李原)이, “만일 이미 상왕께 여쭈었으면 마땅히 받들어 행하여야 합니다.” 하고, 김한로(金漢老)는,
“상왕께서 오래 깊은 궁중에 계셨는데, 여러 날 초지(草地)에 계시게 되면 체기(體氣)가 편안하지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말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 마땅히 상왕을 받들어 행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김한로 등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상왕의 몸으로 염려를 한 것은 실지 말이 아니고, 우리들의 뜻은 다만 역마(驛馬)의 폐단 때문이다. 비록 1백 필을 더하더라도, 또한 여유가 있지 않고, 기타 지응(支應)하는 등의 일이 또한 걱정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10월 16일(무술)
강원도 도관찰사 이백지(李伯持)의 사인(使人)이 와서 궁시(弓矢)·마필(馬匹)·강아지[狗兒]를 바치었다.
10월 24일(병오)
사죄(死罪)를 처결(處決)하는 법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 하지(下旨)하였다.
“생살(生殺) 여탈(予奪)은 인군의 큰 권세여서 인신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 이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李孟畛)에게 명하여, 가서 원주목사 권우(權遇)에게 말하기를, ‘민무휼을 잘 지켜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만일 자진(自盡)하고자 하거든 또한 금하지 말라’하였는데, 권우가 이맹진의 전교(傳敎)하는 말을 잘못 듣고 두번이나 사람을 시켜 강제로 자진하게 하였다. …….”
12월 9일(경인)
이교(李皎)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김상려(金尙旅)를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이담(李湛)을 우군총제(右軍摠制)로, 홍여방(洪汝方)을 강원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12월 20일(신축)
영평현령(永平縣令) 민열(閔閱)·안협현감(安峽縣監) 김순(金純)·포천현감(抱川縣監) 송포(宋褒) 등을 파직하였으니, 손(損)과 실(實)이 맞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太宗 十八年(戊戌:1418年)
1월 13일(갑자)
참부(站夫)*에서 더 정(定)하였다. 전 광주 교수관(廣州敎授官) 피자휴(皮子休) 등이 진언(陳言)하였다.
“수참(水站)의 민호(民戶)를 더 정하여 선군(船軍)의 예에 의하여 좌령(左領)․우령(右領)으로 나누소서.” 병조에서 교지(敎旨)를 받고 의정부(議政府)·제조(諸曹)와 의논하여 아뢰었다.
“수참(水站)이 있는 곳인 각 고을의 군적(軍籍)을 상고하니, 충청도 충주(忠州)가 27명이요, 강원도 원주(原州)가 57명이요, 경기 천녕(川寧)이 80명, 양근(楊根)이 72명, 광주(廣州)가 75명, 과천(果川)이 46명, 금천(衿川)이 52명이어서, 도합 409명입니다. 우도(右道)의 수참(水站)은 조수(潮水)로 배가 가므로 역역(力役)이 가볍고 편하나, 좌도(左道) 가운데 과천(果川)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忠州) 금천참(金遷站)에 이르기까지의 6참(六站)은 조전(漕轉)이 자못 많고, 또 왜객인(倭客人)이 왕래하여 사무가 많고 무거우니, 위의 각 참(站) 수부(水夫)는 전의 수가 각각 20명이니, 이제 매 참(讒)에다 정군(正軍) 10명을 더 정하고 각각 봉족(奉足) 2명을 주어서, 1령(領)마다 15명으로 좌령(左領)․우령(右領)을 나누어 입번(立番)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참부(站夫) : 수참(水站)에서 일하던 수부(水夫)나 역참(驛站)에서 일하던 역부(驛夫)를 말함.
1월 13일(갑자)
유사눌(柳思訥)이 또 보고하였다. “병조(兵曹)에서 봉교(奉敎)하여 행이(行移)한 것 안에 이번 봄에 도절제사로 하여금 경원(慶源)에 들어가서 동정성자(東井城子)의 터를 수리하게 할 일을 신이 삼가 편의한 일의 조건을 갖추어 아룁니다. 1. 도절제사(都節制使)가 경원(慶源)에 들어갈 때 군마(軍馬)의 수가 적으면 다만 약(弱)하게 보일 뿐이요. 수를 많이 영솔(領率)하면 저들이 의심하는 생각을 잘못 내어서 반드시 소동이 있을 것이니, 경원병마사(慶源兵馬使)가 단기(單騎)로서 바로 들어가 그 성(城) 터를 헤아리고, 도내의 각 고을의 군인과 부근 강원도 군인을 가지고 성대(城臺) 1척(尺)마다 아무 고을[某州] 군인이 몇 명이라고 거짓으로 군인의 액수(額數)를 써서 붙인 기둥을 세워 다시 설치(設置)할 의사를 보이고, 도절제사로 하여금 들어가지 말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21일(임신)
채방부사(採訪副使)를 나누어 보내었으니, 평안도에는 호군(護軍) 백환(白環)을, 강원도에는 전 부사(副使) 윤흥의(尹興義)를 보냈다.
1월 25일(병자)
강원도 도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와서 매[鷹子] 1련(連)을 바쳤다.
2월 6일(정해)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김자지(金自知)·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홍여방(洪汝方)이 전(箋)을 받들고 몸소 스스로 진위(陳慰)*하니, 두 사람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진위(陳慰) : 신하가 임금에게 위로를 드림.
2월 23일(갑진)
강원도 도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상서(上書)하여 최천명(崔天命)·송저(宋儲) 등의 죄를 청하였는데, 글은 이러하였다. “……. 도내의 횡성·선암(扇巖) 등지는 산이 깊고 땅이 메말라서 짐승들이 번식하고 초목(草木)이 거칠고 무성하여 참으로 사냥할 땅이라 이르겠습니다. 일찌기 강무(講武)할 장소로 정하였으나, 지난 해 봄에 전하께서 함께 같이 즐기는 어지심과 더러운 것을 감싸 주는 아량으로 상소(常所)를 혁파하여 없애고 사람들에게 나무를 베고 전지(田地)로 경작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신(人臣)의 마음이 있는 자는 이러한 명령이 있다고 하여 갑자기 자기의 사전(私田)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교지(敎旨)를 내린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전 호군(護軍) 최천명(崔天命) 등 10여 인이 즉시 들어가 가옥(家屋)을 지은 것이 모두 10여 호(戶)였는데, 현감(縣監) 송저(宋儲)는 또한 좌시(坐視)하여 아무렇지 않게 여겼으니,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분수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불경(不敬)함이 심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송저를 그 직(職)에서 파면하였고, 집을 지은 자도 또한 율(律)에 의하여 벌을 차등있게 논하였지만, 그러나 이것으로써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송저 등을 국문(鞫問)하게 하여서 후래(後來)를 징계하소서.”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최천명 등은 죄를 논하고, 송저는 다시 거론하지 말라.”
3월 10일(경신)
강원도 회양 등지의 채방부사(採訪副使) 윤흥의(尹興義)가 금(金) 137냥 중 4전(錢)을 바치고, 황해도 채방판관(採訪判官) 김귀룡(金貴龍)이 금 7냥 중 5전을 바치고, 평안도 채방부사(採訪副使) 백환(白環)이 금 1근(斤) 8냥 중 5전과 지재연(地滓鉛) 117근을 바치니, 모두 공조(工曹)에 내렸다.
3월 20일(경오)
각 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현량(賢良)을 찾아 내어 이름을 자세히 써서 아뢰게 하니, 강원도에서는 40인이고, 경상도에서는 51인이고, 전라도에서는 86인이고, 충청도에서는 8인이고, 평안도에서는 12인이고, 함길도에서는 20인이고, 경기에서는 50인이고, 황해도에서는 2인이었다.
4월 1일(신사)
금(金)이 나는 곳을 고(告)한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채방부사(採訪副使) 윤흥의(尹興義)가 아뢰기를,
“춘천에서 금이 나는 곳은 회양호장(淮陽戶長) 박현룡(朴玄龍)의 고(告)한 바이요, 낭천에서 금(金)이 나는 곳은 현인(縣人) 전 낭장(郎將) 김용검(金龍儉)의 고한 바이요, 금성에서 금이 나는 곳은 현령(縣令) 고습(高襲)의 고한 바이요, 평강에서 금이 나는 곳은 현감(縣監) 박서(朴曙)의 고한 바입니다. 윗 항목의 사람들을 포상(褒賞)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소서.”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은(銀)은 역역(力役)이 배가 많으나 그 이익과 수량은 적은데, 금은 그 이익이 조금 많다. 금으로써 은을 대신하여 공납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그러나, 장차 무슨 말로 대신하고자 하겠는가? 포상(褒賞)하는 일을 정부·육조에 내려서 의논하여 거듭 아뢰어라.”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박현룡은 그 신역(身役)을 면제하고, 김용검은 관직으로 상을 주고, 박서·고습은 그 진고(陳告)한 곳을 취련(吹煉)하여 시험한 뒤에 가자(加資)*하여 포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가자(加資) : 품계를 올리던 일.
5월 7일(병진)
강원도 도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사직(辭職)하였다. 홍여방이 어미의 병(病)으로 사직하니, 남금(南琴)으로 대신시켰다.
5월 12일(신유)
각 도의 진선(進膳)*을 정지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제 이처럼 더운 때는 역로(驛路)에 폐단이 있을 것이다. 경기·황해도·강원도 외에 그 나머지 각 도에서는 각 전(殿)에 매달 예에 의하여 진선(進膳)하는 것과 별선(別膳)하는 것을 우선 정지하게 하라.”
* 진선(進膳) : 각 도에서 서울의 각 전(殿)에 매달마다 바치던 물선(物膳).
5월 23일(임신)
사헌부에서 상소(上疏)하기를, “강원도 도관찰사 남금(南琴)은 성질과 행동이 잔혹(殘酷)하고, 김정준(金廷雋)은 소행이 거칠고 음란하니, 모두 감사(監司)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순량(循良)한 사람으로써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6월 14일(계사)
재인(梓人)* 오덕해(吳德海)를 강원도에 보내어 선군(船軍) 600명을 거느리고 원주·영월·인제 등지에서 나무를 베었으니, 장차 창덕궁(昌德宮)을 수즙(修葺)하려는 때문이었다.
* 재인(梓人) : 목수의 우두머리.
6월 22일(신축)
교지(敎旨)를 내렸다. 교지는 이러하였다.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제(禔)를 강화(江華)에 두도록 청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를, ‘강화는 바로 전조(前朝)의 말년에 사람들이 도망하여 숨던 땅이니, 상서(祥瑞)롭지 못할 것 같다.’하였기 때문에 춘천(春川)에 안치(安置)하고자 하였다. 이제 이에 번연(飜然)히 이를 생각하니, 이러한 계책은 통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조정(朝廷)으로 말한다면 태조(太祖)가 전조(前朝)를 뒤엎고 수창궁(壽昌宮)에 입거(入居)하였고, 중국(中國)으로 말한다면 금릉(金陵;남경)에서 거의 흥망(興亡)을 겪고 금일(今日)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논한다면 길흉(吉凶) 존망(存亡)이 어찌 토지(土地)에 달렸겠느냐? 내가 장차 가을을 기다려 강화에 집을 기공(起工)하여 제(禔)로 하여금 거주시켜, 왕래하는 사람을 끊도록 하여 목숨을 보전(保全)하겠다. 경 등은 그리 알라.” 그러나,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7월 2일(경술)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최사강(崔士康)·헌납(獻納) 권맹손(權孟孫)·정언(正言) 정재(鄭載) 등이 진언하기를, “경상감사(慶尙監司) 우균(禹均)·강원감사(江原監司) 남금(南琴)은 본래 혹리(酷吏)라 칭하므로 감사의 직임(職任)에 적합하지 않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
○ 사헌집의(司憲執義) 허규(許揆)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 또 강원도 감사 남금(南琴)은 오리(汚吏)의 하(下)에서 등용하였으니, 한갖 부서기회(簿書期會)하고 편첩(便捷)하게 응대(應對)하는 데 능하고, 그 관홍(寬弘)하고 자애(慈愛)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경박(輕薄)하고 강팍(剛愎)하여 거조(擧措)에 적의(適宜)함을 잃으니, 한 지방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모두 파출(罷黜)하여 생민(生民)들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남금(南琴)은 처음에 침장고(沈藏庫)에서 천거하였고, 우균(禹均)은 대신(大臣)이 천거하였다. 또 사람이 허물을 뉘우쳐서 스스로 새롭게 되면 천거하여 쓰는 것은 옛날 제왕들의 사람을 임용하던 법이다. 두 사람이 거의 개과(改過)하였으므로, 임용한 것이다.” 하니, 지평(持平) 최종리(崔宗理)가 두 사람이 감사(監司)를 맡아서 정사(政事)의 실책한 것을 두루 진달하자, 임금이 말하였다.
“두 사람은 재상(宰相)이다. 재상을 존중한 후에 임금을 존중하는 것이니, 이런 작은 과실로 파출(罷黜)할 수는 없다.”
7월 8일(병진)
정사(政事)하여, 심온(沈溫)을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정역(鄭易)을 이조판서로, 최이(崔▦)를 호조판서로, 조말생(趙末生)을 이조참판으로, 강상인(姜尙仁)을 병조참판으로, 탁신(卓愼)을 예조참판으로, 이지실(李之實)을 중군 총제(中軍摠制)로, 우박(禹▦)을 순승부윤(順承府尹)으로, 이춘생(李春生)을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이명덕(李明德)을 지신사(知申事)로, 신상(申商)을 경상도 도관찰사로, 이정간(李貞幹)을 강원도 도관찰사로, 강희중(姜淮仲)을 경기 도관찰사 겸 개성부유후(開城副留後)로 삼았다.
7월 17일(을축)
대부(隊副) 한언(韓彦)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한언이 고하기를, “총제(摠制) 문효종(文孝宗)과 자부(姊夫) 강원도 관찰사 이정간(李貞幹)이 사사로이 병마(兵馬))를 모아서 난(亂)을 꾀하였다.”
하고, 이정간의 집 계집종 개괄(開刮)을 증인으로 삼았다. ……. 한언이 과연 무고하였다고 자백하니, 이정간과 문효종의 갇힌 것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에서 조율(昭律)하니, 한언이 사죄(死罪)를 무고(誣告)하였으나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장(杖) 100대와 유(流) 삼천리(里)에, 도역(徒役) 3년을 더하는 형에 해당하였다.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이와 같은 무고(誣告)와 반역(叛逆)은 죽음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상녕(金尙寧)을 이천에 보내어 전 전서(典書) 이원실(李原實)을 잡아 오니, 대개 한언의 공사(供辭)에서, ‘이원실과 재신(宰臣) 문달한(文達漢)이 노비를 다툰 때문에 나에게 이런 말을 일러 주었다’고 인용하였던 까닭인데, 문달한은 문효종의 아비였다.
7월 19일(정묘)
임금이 이명덕(李明德)에게 이르기를, “나의 풍질(風疾)이 약이(藥餌)의 효험이 없으니, 온천(溫泉)에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는 것이 비록 의서(醫書)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 장차 이천 온천에 가서 목욕하여 시험하려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명덕이 “비록 의서(醫書)에는 보이지 않으나, 목욕을 하여 병을 고친 자가 있으니, 청컨대 시험해 보소서.” 하였다. 이천사람 박은림(朴殷林)을 불러서 산천과 도로의 형태를 물었다.
8월 6일(계미)
박신(朴信)이 아뢰기를, “인정전(仁政殿)을 개조하는 재목(材木)이 모두 500장(章)인데, 500장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안의 50장은 세자전(世子殿)을 수리할 때에 이미 사용한 경우이겠습니까? 그 밖의 잡목(雜木)은 강원도에 쌓아 놓았으니, 이제 큰 물을 당하여 흘러 내리게 할 수 있으나, 한갖 선군(船軍)만으로는 힘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민력(民力)을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였다.
“전날 이미 민력(民力)을 사용하였는데, 이제 사방에 좋은 일은 없고 매양 흉년 소문만 들리니, 차마 민력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일찌기 이럴 줄을 알았더라면 헐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윤첨(尹瞻)이 본궁(本宮)의 종을 시켜 재목 1백여장을 준비하였으니, 진실로 만약 부족하거든 우선 이 나무를 사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