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의 첫발
졸업장을 받는 즉시 자동으로 사회에 나왔고 백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다닐 때는 상동광업소에서 사내 직업훈련소를 운영하여 고졸 이상 학력이 있는 자를 공채로 선발해서 1년간 교육을 실시한 후 직원으로 채용했는데 우리가 졸업할 때부터 직업훈련소 제도를 운영하지 않았다.
공고, 상고 등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가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면 비교적 규모가 큰 상장기업에 취업이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고등학교 3학년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들었는데 이는 우리와 같은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생이 들어갈 수 있는 기업체가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졌다. 친척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을 알아봐 주신다고 하셔서 이력서를 몇 장씩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일자리 정보를 찾기 위해 신문을 구독하는 친구네 집에 들러 친구 아버지가 보시고 모아둔 신문에서 ”채용공고“를 이 잡듯이 찾아서 채용요강을 읽어보면 대부분 군필자와 상고, 공고 등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을 채용대상자로 하고 있어서 군 미필에 인문계 고졸 출신을 채용코자 하는 회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백수는 항상 바쁘고 오라는 데가 없어도 갈 곳은 많다고 하던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졸업 후 몇 개월간은 갈 데도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계속 집에만 붙어 있었다.
방에 누워서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탁탁 막히고 거친 세상을 헤치고 나갈려니 자신도 없고 겁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집안 경제가 어려운데 장남인 내가 마냥 맥을 놓고 패잔병처럼 축 처져 있을 수가 없어서 ”자존심은 훗날 잘 살면 찾기로 하고, 지금부터 돈벌이가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 고 다짐 했다.
제일 먼저 돈벌이를 시도한 것은 ”담배장사“이었다.
상동지역은 해발 650m를 오르내리는 살기 좋은 고도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매우 춥다. 눈이 많이 오면 열차가 들어오는 석항과 상동간의 유일한 연결선인 좁은 비포장도로가 적설로 인하여 며칠간 차량 운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교통이 두절되면 생필품의 유입이 되지 않아서 제설 작업 완료시 까지 불편을 겪지만 가장 불편을 겪는 사람들은 애연가들이다.
담배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담배인삼공사 영월지점에서 담뱃가게에 공급하는데 담배가 공급되기 전날쯤 폭설이 와서 며칠 동안 담배 공급이 끊기면 상동에 담뱃값은 금값이 된다.
담뱃가게의 담배가 거의 판매된 상태에서 폭설로 담배 공급이 끊겼으니 교통이 뚫릴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유일하게 담배를 살 수 있는 곳은 비교적 큰 술집과, 다방, 이발소 등이다.
그곳에서는 폭설에 대비하여 담배를 넉넉하게 사두었다가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어 담배 공급이 되지 않을 때 담배에 이익을 많이 붙여 파는데 아무에게나 파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자기의 영업과 관련하여 현명(?)한 방법으로 판다.
애연가들 중에서 ”골초“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담배를 사기 위하여 담배를 파는 술집과 다방에 술과 커피를 마시러 간다. 이발할 때가 급하지 않아도 이발을 하러 간다.
그러면 그곳에서 쉽게 담배를 몇 갑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을 잘 아는 친구가 담배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틀간 폭설로 전날 밤부터 교통이 두절 되었다는 정보를 버스터미널에 전화하여 확인한 후 친구와 후배 두 명과 함께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서 박심리재를 넘어 열차가 들어오는 고한읍에 까지 가서 차용해서 가지고 간 돈을 모두 담배를 사서 짊어지고 돌아오니 저녁때가 되었다.
담배는 많은 이익을 붙여서 순식간에 술집과 다방에 다 팔았고 담배를 구입하기 위하여 차용한 돈도 즉시 변제하였으며 우리들도 용돈을 넉넉하게 손에 쥘 수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첫 근로소득(?)이었다.
”노가다“를 하러 갔다.
”막일“ 또는 ”막일꾼“을 흔히 ”노가다“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말로 토방(土方. 도카타)라고 한다. 그 말이 우리나라에서 ”노가다“로 변형된 말이니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우리들의 입에 붙어서 애석하게 표준어처럼 통용되고 있다.
어느 날 여네골 입구 신단양촌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광업소 안에 ”노가다“ 일거리가 있는데 거기에서 사람을 쓴다고 가보자고 해서 작업복을 입고 현장 사무실로 갔다.
공사 현장은 선광 건물과 화공 건물 사이의 넓은 공간을 연결해서 공장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는 곳이다.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간단한 인적사항을 물어보고 하루 일당은 얼마를 줄 테니 일을 하겠냐고 묻기에 하겠다고 하니 우리를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지붕에 덮을 슬레이트를 등에 지고 가설 사다리를 타고 화공 지붕까지 올라가서 지붕 곳곳에 내려놓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숨에 올라가는데 나는 한번은 쉬고 올라가야 했다. 육체노동은 안 해봐서 허리와 어깨가 아프고 무척 힘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슬레이트를 두 장씩 등에 지고 나르는데 나는 한 장을 등에 지고 날랐다.
일을 시작한지 2시간가량 되어서 현장 감독이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일을 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니 불안하고 몸도 왜소하여 제대로 일을 못할 것 같으니 하루 일당의 반을 줄 테니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현장 사무실에서 일당의 반품을 받고 나오려는 데 허리에 목수 공구를 차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목공 일에 일손이 부족하니 내 밑에서 며칠간 일을 하겠냐? 고 묻기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즉시 목수 데모도를 했는데 조금 전에 하던 일에 비하면 힘도 안 들고 편하고 아주 좋았다.
”운이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고추 밭에 넘어진다! 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나는 고추 밭에 넘어진 과부처럼 운이 좋았다.
난생 처음 ”노가다“판에 갔고 거기서 일을 못해서 2시간 만에 쫓겨났다가 즉시 기사회생을 한 것이다.
목수 데모도를 하는 기간에는 목수 아저씨가 시키지 않았어도 일찍 출근해서 공구와 자재를 꺼내 놓고 퇴근 시에는 공구와 중요한 자재를 확인하여 창고에 넣고 창고 주변의 어지럽게 널브러진 목재를 정리하고 갔다.
목수 데모도를 한 달 가깝게 하고 일이 끝났는데 목수 아저씨가 임금을 주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 주면서 그날 오라고 하기에 임금을 주는 날 박카스 한 박스를 사가지고 현장 사무실에 가서 사무실 직원에게 한 병 씩 돌렸다.
그 당시는 만 원짜리 고액권이 나오기 직전인데 목수 아저씨는 두툼한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박 군“이 잘 도와줘서 일을 잘 끝냈다”고 칭찬하시며 ”하루 품삯을 추가로 봉투에 더 넣었다“고 하셨다.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에 도움이 될 많은 돈을 벌은 것이다
이렇게 내 인생의 사회의 첫발(?)은 ”대한중석 상동광업소 화공공장 확장 공사“ 현장에서 목수 데모도를 하면서 초라하게 시작하였고, 목공 작업 끝남과 동시에 백수로 되돌아 왔다
◼ 서울 생활
졸업을 하면 직장을 구해 준다고 하시던 친척들에게 이력서를 보낸 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친척집에 올라가서 얼굴을 매일 마주하면 신경을 더 써 주실 것 같아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과 의정부에는 이모, 외삼촌, 4촌 6촌형님 등 여러 친척들이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친척들은 나를 위하여 백방으로 직장을 구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군 미필의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을 채용하려는 회사는 찾기 힘들다고 하셨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었다.
한번은 친척의 친구 분이 운영하는 규모가 큰 귀금속 가게가 신촌에 있는데 그곳에서 용돈 정도만 받고 귀금속 세공을 몇 년 배우다가 기술이 좋아지면 월급을 많이 준다고 하는데 거기에 갈 의향이 있냐고 하시기에 손재간이 없어서 못도 제대로 못 박는데 정교한 금속 세공을 배운다고 한들 그 일을 능히 해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하여 일자리를 구하셨는데 거부하기 힘들어서 일단 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귀금속 판매장과 세공장을 같이 운영하는데 세공장은 매우 협소한 곳으로 두 명이 금과 은 등 귀금속을 갈아내고 용접을 하는데 용접할 때 나오는 연기가 배출이 되지 않아서 잠시 있는데도 역겹고 거부감이 났다. 함께 같이 갔던 친척도 현장을 보더니 나에게 이곳에 취직하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오면 나는 금방 귀향하지 않았다.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감안하여 식솔을 하나라도 줄여 보자는 생각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견문도 넓힐 겸 친척집에 번갈아 가며 열흘 정도 씩 머물다가 한 달 반쯤 지나면 귀향을 하고 또다시 고향에서 몇 개월 있다가 상경하는 등 친척집에 머물기를 반복했다.
친척들은 내가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셨고 귀향할 때는 차비는 물론 동생들 교육비도 가끔 챙겨 주셨다. 어머님은 ”너의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친척들의 어려움을 보살핀 덕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이라고 하셨다.
서울에 머물면서 친구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종로 2가 음악다방이나 호프집에 들리기도 하고 우이동 빨랫골에 놀러 가기도 하고 서울 외곽 지역에서 전투경찰 복무를 하는 친구 면회를 가기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친구를 만날 때
대학교 다니는 친구가 교복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면 무척 부러웠다.
고향에서 친구네 집에서 책이나 빌려 보면서 몇 개월 보내고 있는데 친척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으니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신단양촌 사는 친구의 형님 댁은 작은 도서관처럼 여러 종류의 책이 많았다. 그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좋은 책을 많이 빌려 보았다. 그 당시 읽은 책이 20여년후 회사에서 승진할 때 큰 도움이 된 일이 있었다)
친척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니 월남전에 장교로 참전한 후 복귀하여 원주 군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전역한 나보다 열 살이나 연장자인 6촌 형님의 아들이 서대문구 망원동에서 십여 명이 근무하는 작은 공장을 일정 기간 동안 인수하여 운영하려고 하는데 나에게 그 공장에서 자재 구매와 제품의 입출고 업무를 보라고 하였다.
그 공장은 각종 사탕과 과자류를 만드는 제과공장으로 규모에 비하여 거래하는 곳이 많아서 매출액은 많았지만 내가 맡은 일은 단순 업무이고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직원들과 자주 소통하며 일을 즐기면서 해나가고 있는데 여름철이 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사탕과 과자를 낱개로 포장한 제품이 기온이 올라가자 포장지가 모두 사탕과 과자에 달라붙어서 상품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거래처에서 반품이 몰려들어 왔고, 회사 신용 순식간에 추락하고 여타 제품의 매출도 떨어져서 부득이 생산을 중단했다.
그 원인은 몇 십 년 만에 너무나 일찍 찾아 온 불볕더위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하여 공장 운영 계약을 파기 했는데 계약 내용이 인수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손해를 거의 보지 않은 것 같았다.
계약 파기의 결과로 나는 귀향했고 나의 신분은 백수로 원위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