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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
나귀, 평화와 겸손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 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_요 12:12-15
복음서를 읽는 성도들에게 가장 극적인 영적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는 장면은 공생애 마지막 해에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시는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 (Triumphant Entey)일 것에다. 환호하는 무 리에 둘러싸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열광적인 팬들에 둘러싸인 아이돌 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그야말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드디어 예수님 이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뒤엎고 이스라엘의 왕이요 영광스런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이상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왕의 입성이라면 으레 말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것이다. 나귀 새끼는 건장한 성인인 예수님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걷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열화와 같은 무리의 환호를 받으며 처음으로 메시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화끈하게 드러내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즉 메시아로서 멋진 백마를 타지않고 왜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일까?
나귀, 평화와 겸손의 상징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이 노새를 타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나귀를 탄 왕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근동 문서 중 하나인 아카드 문서에 왕이 나귀를 탄 모습이 나타나긴 하지만,이 경우도 ‘왕의 등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귀를 탄 왕의 모습은 왕의 위풍과 위세보다는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로볼 수 있다.
‘말’이 전쟁과 교만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유대인들의 문화적 상징에사 말과 나귀는 정확히 대조를 이루는 동물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정확히 이룬 것인데 스가랴는 나귀와 겸손을 정확히 연결시키고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
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군사적인 영웅은 말 또는 병거를 타고 오지만 온순한 민간 관리는 나귀를 타고 들어왔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군림하고 착취하며 허세나 부라는 세상 왕들의 등극식에는 말이 어울릴는지 모르지만, 겸손히 낮아져 섬기며 희생하는 메시아의 등극식에는 나귀가 어울리는 것이다.
나귀와 구유, 그리고 순종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 7
처음으로 구유가 상징으로서 등장한 것음 이사야서다. 나귀는 자신의 구유에서만 먹이를 먹는데, 그런 면에서 구유는 ‘순종’을 상징하는 도구로 의미가 확대된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유의 상징성을 알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저자 누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마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며 ‘정통성 있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드터내기 원했던 반면,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구유’라는 말을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_눅 2:7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
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_눅 2:12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_눅 2:16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동일한 사건을 3회 이상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완전함’과 ‘계속성’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는 것도 모두 ‘3회’와 관련된 고대 근동 문헌의 표현기법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세 번이라는 횟수나 수학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를 기록한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3회 기록함으로써 그의 계속된 부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세 번이나 ‘구유’와 결부시켜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 땅에 아기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계속’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신 메시아의 일생에 대한 웅장한 묘사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오해.
‘구유=순종’이라는 성서시대 유대인들의 상징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며 두 가지 오해를 하기 쉽다.
첫째,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모습을 낮고 천하고 불쌍하고 연민을 자아내는 모습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님이 천하디천한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는 왠지 불쌍하고 가슴 뭉클한 겸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상서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환경을 이해한다면 전하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바위를 파서 만돈 동굴에서 거주했는데 이런 동굴 집은 겨울철(우기)에는 적절한 난방이, 여름철(건기)에는 시원한 냉방 효과가 있었다. 지금도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햄 언덕의 가장자리에는 24개의 동굴 집이 있다.
겨울이 되면 가축들은 동굴 집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거거했다. 이 때에는 보통 바깥에 두던 구유도 동굴 집 안으로 옮겨 놓는다. 사람들의 주거 공간은 바닥이 한 턱 정도 높아 가축들의 공간과 구별되었다. 겨울철에 태어나신 것이 분명한 예수님은 베들레햄의 동굴 집 안 구유에 누우셨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구유가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으로 연상되겠지만 성서시대에는 사람들아 주거 공간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좁은 동굴 집 안에서 한 턱 정도 바닥의 높이가 차이 나는 곳에서 가축과 사람들이 함께 뒹굴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를 말구유, 즉 마구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면서 많은 경우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설명하는데 만약 유대인들이 그런 설명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누가복음 2장에는 어디에도 ‘말구유’나 ‘마구간’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순종’을 상징하는 ‘구유’가 세 번 등장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이 구유가 이사야 1장 3절에 기초해서 당연히 "나귀’ 구유임을 안다. 지중해에 접한 평야 지대에서나 요긴한 말은 해발 900m 산지에 위치한 베들레헴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산지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나귀가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는데, 이처럼 지형적 배경만 보아도 나귀 구유가 맞음을 알수 있다.
탄생하신 후 나귀 구유에 누인 예수님은 마지막에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 부분에서 말과 나귀에 대한 유대인들의 상징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은 군림하고 정복하고 착취하는 세상적인 왕을, 나귀는 겸손하게 섬기고 순종하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말’구유에서 태어나 마지막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메시아와 이미지에서 전혀 연속성이 없다. 예수님은 처음에도 나귀, 마지막 순간에도 나귀, 즉 일생을 ‘순종과 겸손’으로 사산분이다.
최고의 운송수단
나귀는 발목이 강해 잘 넘어지지 않고 울퉁불퉁한 산지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잘 걷는다. 나귀는 지구력 면에서는 말보다 더 강하다. 나귀는 75kg의 짐을 너끈히 싣고 나를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산지에서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다.
220ℓ를 나타내는 부피 단위인 ‘호멜’(הומר)은 나귀인 ‘하모르’(המור)에서 온 단어다. 호멜은 나귀 한 마리가 지고 갈 수 있는 짐의 양을 가리킨다. 항상 물건과 사람을 싣고 나르는 나귀의 모습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_민 22:3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 4:20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_창 45:23
나귀는 무거운 짐을 너끈히 싣고 나르는 최고의 운송수단이다.
주로 산지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귀는 소와 함께 가장 친근한 동물이었다. 안식일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데 이때 소와 나귀가 가축의 대표로 등장한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 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숨을 돌리리라 一출 23:12
동물을 학대하고 괴롭히지 말 것을 명령하는 율법에서도 농사용으로 사용되는 소와 운송용으로 사용되는 나귀가 등장한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_신 22:10
고집 세고 어리석음
현대 히브리어에서 ‘나귀 같은 사람’은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으며 어리석은 사람’을 의미한다. 충성되고 우직한 나귀는 때로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나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말씀에서 처음 나타난다.
• 베들렘헴 예수탄생교회에 있는 성 제롬 동상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4-5
탈무드는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나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데 자신과 여정을 함께했던 두 사환은 나귀와 함께 그곳에 남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지 못한다. 모리아 산은 장차 성전이 세워질 장소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처럼 ‘천상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정도의 영감이 없는 두 사환은 어리것은 나귀와 함께 그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짓고 일생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한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340-420년)이 있다. 제롬이 번역한 ‘불가타’(Vulgata) 성경은 가톨릭에서 최고의 권위가 있는 성경이다. 제롬이 성경을 번역할 당시에는 하브라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역’(Septuagint)이 최고의 권위가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제롬을 놀렸는데 제롬은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두 발 가진 당나귀다”라고 맞받아쳤다. 하나밖에 모르는 ‘꽉 막힌’ 나귀와 같다는 것이다.
욥가에도 나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_욥 11:12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것을 풀었느냐 _욥 39:5
솔로몬은 왜 다윗의 노새를 타고 왕위에 올랐을까?
노새, 왕실 전용 탈 것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나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픈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왕상 1:38-39
다윗의 인생은 밧세바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밧세바를 범하기 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의 편이 되시며 가는 곳마다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셨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형통한 ‘최고의 삶’이었다. 하지만 밧세바를 범한 후 다윗의 인생은 바람 잘날 없는 고통과 번민의 세월이었다.
다윗의 노새를 탄 솔로몬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죄의 결과물들이 다윗을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고 첫째 아들 암논은 이복누아 다말을 범하여 동생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인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여 패역무도한 반역을 저질렀고 요압 장군에 의해 죽었다.
암논, 압살롬이 제거되자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도니야의 반란에는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가담했는데, 다윗은 심중에 일찌감치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얻은 열 번째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정해 놓고 있었다.
아도니야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나단 선자자는 이를 다윗에게 알렸고 다윗은 자신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우고 급히 왕위 등극식을 치렀다. 아도니야는 다윗이 나이 들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을 이용해 스스로 왕임을 선포했지만, 곧 솔로몬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다윗의 ‘노새’를 탔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탄 다윗의 노새는 아도니야에게 기운 백성의 민심을 순식간에 솔로몬 쪽으로 돌리는 결정타였다. 그러면 ‘노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왕실 전용 탈것
노새는 말과 함께 왕위 등극식에서 자주 애용되던 동물이었다. 고대 근동 문서 중 하나인 마리 문서(Mari Letters)에는 왕 짐리-림(Zteri-Lim) 에게 말보다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는 것이 왕의 위엄에 걸맞다고 제안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는 사울과 다윗으로 사작되는데, 초기 왕국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말보다 노새가 더 일반적이었고 가격도 노새가 두세 배 더 비쌌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노새가 일반적이면 가격이 더 쌀 것 같지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시장의 원칙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지 않았다.
초기 왕국시대에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 말을 터부시했기 때문에 말이 흔하지도 않았고 가격도 쌌다. 하지만 후기 왕국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스라엘에도 말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초기 왕국시대부터 노새는 왕이 타기에 걸맞은 짐승으로 여겨졌다. 이는 노새가 암컷 말과 수컷 나귀를 교배하여 탄생한 종자답게 말과 나귀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노새는 한마디로 ‘힘과 정력’을 상징했다. 히브리어로 노새는 ‘페레드’(פרד)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람어 어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접싸게 도망가다’(flee)를 의미한다.
노새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이스라엘 산지, 경사진 비탈 등을 넘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다녔으며, 몸이 튼튼하고 거친 먹이만으로도 잘 견뎠다. 그런 면에서 노새는 왕실의 전용 탈것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노새는 암컷 말과 수컷 나귀를 교배하여 탄생한 ‘잡종’이기 때문에 번식력이 없는 단점이 있다. 모세의 율법은 ‘교배’를 금하고 있지만 왕국시대에 노새는 외부에서 수입되어 왕실을 위한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켜
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_레 19:19
모세의 율법에서 금한 교배를 통해 탄생한 종자이면서 왕실의 전용 탈것으로 사용되는 아이러니 때문인지 랍비 느헤미야는 노새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노새는 비록 잡종이지만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안식일 전야(금요일)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이 창조 마지막 날인 금요일에 창조된 것을 볼 때 랍비 느헤미야가 노새에게 특별한 영광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새는 힘과 정력을 상징하지만 지혜와는 거리가 먼 동물이다. 그런 면에서 시편에 나오는 노새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힘을 주로 쓰는 사람은 머리를 쓰는 데 약한 면을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노새는 힘이 세지만 무지한 동물로 묘사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자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_시 32:9
압살롬의 최후와 노새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압살롬은 자신의 왕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압살롬의 악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데 성경 기자는 압살롬의 최후를 묘사하면서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을 복합적으로 사용했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
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
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삼하 18:9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압살롬의 긴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걸린 우스꽝스런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사살 사무엘서 기자는 이 본문을 통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압살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첫째, 왕실의 전용 탈것인 노새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일어선 압살롬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 떠나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노새의 행동을 통해 압살롬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셨다.
둘째,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
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_신2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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