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방 있음. 남향. 기름보일러."
전세 광고지를 동네 여기 저기 붙이고 돌아온 아주머니는 텅 빈 시어머니
의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반닫이며 경대, 서랍장들은 그들이 자리했던 흔적만
남겨 둔 채 주인을 따라 둘째 아들네로 가 버렸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주머니는 문단속을 하고 집 뒤 금불사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보름. 한달에 두 번, 절에서 하는 자원봉사가 있는 날입니다.
"아이구, 보살님 오셨네."
공양주 할머니가 아주머니를 보더니 반갑게 달려 나왔습니다.
"네. 잘 계셨죠? 그간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스님께 말씀 들었어요. 시어머니가 작은 집으로 가셨다면서요? 얼마나 섭
섭해요 그래?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아는 법인데."
"네, 좀 그러네요.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작은 집 동서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주머니의 머리 속에는 간밤의 일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당신 그러는 거 아니야. 어머니가 가신 걸 자꾸 제수씨 탓으로 돌리는데
사실은 당신 때문이잖아. 우리 애 다 키우고 나니까 어머니가 필요 없고
귀찮아진 거지. 아니야? 아니면 아니라고 어디 한 번 속 시원히 말해 봐."
밤늦게 술이 취해 들어온 남편은 텅 빈 할머니방의 손잡이를 닳도록 쓰다
듬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요.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결혼하고 장장 15년이에요, 15년.
나도 이젠 남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친구들 모임에 나가도 어머니
걱정, 친정에 가도 어머니 생각. 요즘 나같이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 줄
알아요? 그리고 뭐 둘째는 자식이 아니랍디까? 굳이 장남만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냐구요?"
어머니를 떠나보낸 허전함에 목 놓아 우는 아저씨 앞에서 아주머니도 그동
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두었던 말을 마음껏 내뱉았습니다.
"살림이나 넉넉하면 또 몰라요. 당신 회사도 힘들고 우리 정우도 중학생이
라 학원비에 과외비가 만만치 않게 드는데 어머니까지 모시니 나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구요. 동서네는 안팎으로 버니까 어머니 용돈도 충분히 드
릴 거고 어머니 역시 아직은 건강하셔서 그 집 돌배기 정수도 잘 봐 주
실테니 서로 좋잖아요? 그래요. 솔직히 동서에게 어머니 모시고 가라고
한 것도 사실이고 어머니 가시던 날 속 시원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됐어
요?"
싸움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아들 정우 때문에 간신히 끝이 났지만 아저
씨는 아침도 거른 채 말도 없이 직장으로 가 버렸습니다.
"보살님은 복 받을 거예요. 산 조상을 15년씩이나 잘 모셨다고 소문이 파
다하더군요. 요즘 같은 세상에 흔치 않은 일이죠. 나무관세음 보살."
공양주 할머니는 아주머니를 향해 공손히 합장을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공연히 겸연쩍어져서 함께 합장을 하고는 부처님이 계신 법당으로 들어갔습
니다. 빙그레 웃으시며 잔잔한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처님과 눈
이 마주치자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온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부처님, 저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저도 그간 할 만큼 했어요. 아시잖아
요? 어머니 맹장 수술하셨을 때도 제가 간호해 드렸죠, 철 바뀌면 옷 사 드
리고 보약도 지어 드렸어요. 또 밥 때마다 입에 맞는 음식 해 드리느라 손
가락엔 관절염이 다 생겼다구요.'
아주머니는 자신의 잘한 점만 줄줄이 떠올려 염불처럼 외며 법당 안을 청
소하였습니다. 바닥을 쓸고 연꽃좌대를 닦고, 부처님의 발이며 손도 땀을 흘
려 닦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앙금처럼 남아 있는 찜찜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 같았습니다.
촛대에 앉은 먼지 한 톨조차 말끔히 털어내자 법당 안은 어느새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흐뭇한 마음이 되어 법당을 나오려는데 기다란 염주를 목에
건 낯선 보살 한 분이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까부터 쭉 봐 왔습니다만 보살님은 불심이 참 깊으신 분인가 봅니다. 그
러지 않고서야 법당을 그리 열심히 쓸고 닦을 수 없겠지요. 특히 부처님
의 손발을 닦아 드리는 정성스런 그 모습에서 오랜 세월 어른을 모신 사람
들만이 가지는 공손한 태도를 보았답니다."
느닷없는 그 칭찬 앞에서 아주머니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내 보살님의 태도가 하도 예뻐서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여기 이건 연꽃
목걸이입니다. 이 작은 병 속에 연꽃 가루와 향이 들어 있는데 이걸 목에
걸고 있으면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이 곧 평안해진답니다. 어른 모시고
살다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요? 그럴 때마다 이
목걸이가 큰 힘이 되어 줄 겁니다."
보살님은 자신의 바랑에서 꺼낸 분홍빛 연꽃 목걸이를 아주머니에게 건네
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것을 선뜻 받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따라 집을 떠나던 날 아들의 차 속에서 눈물을 찍어내던 시어머니의 모습과
그런 시어머니를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가 머뭇거리자 낯선 보살은 아주머니의 손을 살며시 이끌어 연꽃
목걸이를 쥐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데 못 뵈던 분 같은데 실례지만 성함이…?"
"연화보살이라고 합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뵙게 되겠지요. 그럼 안녕히 가
십시오."
아주머니가 채 인사를 하기도 전에 연화보살은 절 마당을 지나 일주문 아
래 계단으로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집으로 온 아주머니는 마당가에 색색의 꽃으로 내려앉은 봄을 바라보며 거
실에 누웠습니다. 할머니가 안 계신 집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한
편으론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누리는 자유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큰 대
자로 누웠다가 목소리 높여 소리도 지르고 다시 엎드려 잡지를 뒤적이던 아
주머니는 화려하게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보석광고를 보자 지갑 속에 넣
어 둔 연꽃 목걸이가 떠올랐습니다.
아주머니는 얼른 그것을 꺼내어 목에 걸어 보았습니다. 줄의 끝에 표주박모
양으로 매달린 손톱만한 병 속에서 향긋한 연꽃 향기가 솔솔 뿜어져 나왔습
니다. 마치 초록이 짙은 숲속을 걷는 듯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
아졌습니다. 무거웠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흥얼흥얼 노래가 자신도 몰
래 입술을 열고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나가보니 자기 또래는 됨직한 중년의 남녀와 할
머니 한 분이 내 놓은 시어머니의 방을 보러 왔습니다.
"방이 깨끗하고 아담한 게 어머니 혼자 쓰시기엔 안성맞춤이네요. 저희 집
도 요 근처입니다만 어머니께서 저희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한사코 혼자
나와 사시겠다기에… 그간 아주머니께서 시어머니를 잘 모셨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더 안심이 됩니다. 마음에 쏙 드니 당
장 계약을 하도록 하지요. 어머니도 괜찮으시지요?"
눈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들은 할머니를 향해 활짝 웃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딘가에서 본 듯 매우 눈에 익었습니다. 할머니도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흡족해 하셨습니다.
"방은 따뜻해요. 햇볕도 잘 들고 습기 안 차고."
아주머니는 작은 집 동서가 하도 어머니랑 살겠다고 보채서 시어머니가 가
시게 됐다는 거며 집안 형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방을 세놓게
되었다는 등의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손님들에게 두서없이 들려주었습니다.
전세금을 당장에 다 치른 할머니의 아들은
"가서 어머니의 짐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집이 가까우니 금방 올 겁니
다."
하고는 할머니만 남겨 둔 채 아내와 함께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1시간이 지
나고 2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고 한밤중이 되어도 곧 오마던 그는 그림자
조차 비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연락처는 잘 알아 놨겠지?"
남편의 성화가 아니더라도 아주머니는 속이 타서 몇 번이고 계약서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있지도 않은 엉터리 전
화번호였습니다. 게다가 더더욱 기가 찬 것은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엄마, 배고파 밥 줘."
낮에 아들과 함께 왔을 때는 멀쩡하던 할머니가 아기처럼 변해서 아주머니
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밥 타령을 해대었습니다.
"할머니! 제발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아드님 댁 생각 안 나세요? 도대체 어
디 사셨냐구요?"
"나 그런 거 몰라. 배고파 어서 밥 줘!"
할머니는 밤새도록 밥 달라, 놀아 달라 떼를 쓰더니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드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시어머니의 그늘에서 간신히 벗어났는데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치매 노인을 떠맡게 되다니요. 정말 땅을 치고 통곡이라
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시달려 녹초가 되었던 아주머니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자리
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들과 남편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마루에는 할
머니만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한사코 밥을 달라던 어젯밤과는 사뭇 다르
게 옷매무새도 단정하고 머리도 예쁘게 빗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할머니 성함이며 사시던 곳 생각나세
요?"
아주머니는 조심스레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럼, 생각나지. 누굴 바보로 알아? 내 이름은 김순자고 내 아들 이름은
박정우야. 내 나이 올해 일흔이고 우리 아들은 마흔 다섯이지. 우리 집은
충렬사 근처 백조아파트 옆 빨간 벽돌집이야."
할머니의 말을 듣던 아주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
머니의 성함, 아들의 이름, 사는 곳의 주소와 아들과의 나이 차이까지 모두
가 자기와 똑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코 옆에 난 콩알만한 점도
자신의 것과 꼭 닮았습니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활짝 웃던 중년 남자의 모습
이 어째서 눈에 익었던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아주머니는 새파랗게 질려서 할머니의 양 팔을 잡아 흔들며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물처럼 흐물흐물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엄마, 왜 그래요? 뭘 말하라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교에서 돌아 온 아들이 놀란 토끼처럼 호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너, 못 봤니? 할머니 말이야."
"할머니라구요? 할머닌 지금 작은 집에 계시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엄마
도 아빠랑 나처럼 할머니 보고 싶으신 모양이다."
자신과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아주머니는 머리끝이
쭈뼛 서도록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래, 할머니 다시 모셔와야겠다. 가족이란 미우나 고우나 함께 모여 살
아야 해. 정우야, 어서 나가서 길거리에 붙여둔 전세광고지 다 떼 오너라."
아주머니는 당장 수화기를 들어 시어머니께 일요일에 모시러 가겠다는 전
화를 드렸습니다. 그리곤 서둘러 금불사로 갔습니다.
서편으로 지는 해를 비스듬히 안고 있는 절 마당에는 비질을 하시는 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님은 아주머니를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합장을
하셨습니다.
"보살님께서 늦은 시각에 웬일이세요?"
"스님, 저… 여쭈어 볼 게 있어서요. 혹시… 연화보살이라고 아세요?"
"왜요? 보살님도 그 분을 만나셨나요? 간혹 저희 절에 오시는 신도님들 중
에 그 분에 대해 묻는 분이 계시더군요. 하지만 저희 절에는 그런 분은 안
계신답니다. 그러나 전해들은 말로는 그 보살님께서는 우리네 중생이 갖고
있는 온갖 나쁜 생각들을 쫓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평온하고 바른 마음이
깃들게 해 주신다더군요. 모르지요. 우리 부처님이 혼자 저리 앉아 계신 게
심심하여 그 보살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건 아닌지. 허허허."
스님의 웃음소리는 조금씩 내리는 어둠을 따라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법당 안의 부처님도 연꽃 목걸이를 건네며 자비롭게 미소 짓던 연화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계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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