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죤.웨슬리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창세기강해 #50-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강해 (50)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6:1-4)
인간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법이다. 그 법은 헌법과 민법 상법 형법 등의 6법과 각 법마다 시행령과 시행세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정이 세밀해질수록 상호 모순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최종적인 심사와 판단의 기준은 헌법이다.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된 성경도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이나 해석이 까다로워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헌법처럼 성경해석의 절대적 기준이 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어떻게 이끌며, 죄에 찌든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사랑과 공의가 기준이다. 한 단어로 하면 하나님의 성품이다.
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과 결혼했다는 진술에 대해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인지 신학자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의 딸은 2절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있기에 외모만 중시하는 자다. 또 하나님과 대조하여 사람이라는 표현을 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고 세상향락에 물든 죄인의 딸이라는 데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선 많은 의견이 있지만 크게 세 가지만 살펴보자.
타락한 천사와 인간 여성
먼저 고대 왕들은 스스로 신이라 칭했다. 구약성경에도 귀족이나 왕족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문구가 있다. 그래서 유대 랍비는 귀족의 아들이 천민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 신분으로 절대 차별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틀린 해석이다.
둘째는 타락한 천사가 인간 여성과 성적관계를 가져 네피림이라는 거인 종족이 출생했다는 의견이다. 이 또한 구약성경에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한 예가 있는데다 4절과 연관해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영적 존재로 육체가 없고 특별히 성별로 나뉘지 않는다. 성(性)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가 후손을 번식해야할 필요 때문에 주신 것이다. 죽지 않는 천사에게 성은 의미가 없다. 인간과 성관계는 아예 불가능하다.
물론 성경에는 천사가 인간의 몸을 입고, 특별히 남자의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남성우위 인식에 맞춘 것이다. 또 가정이나 사회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영적 지도자로 남성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한 것이지 천사가 인간남성과 같을 수 있다는 뜻은 전혀 없다.
만약 영적존재인 천사가 인간 여성과 성적관계를 맺어 후손이 생긴다면 신학적으로 큰 오류가 발생한다.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의미가 치명적으로 감소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아기 예수가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은 메시아가 인간의 몸을 입기 위한 도구요 통로였을 뿐이다. 성적 관계는 아예 없었다.
성육신은 흠이 없이 순전하고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 바쳐지기 위한 필연적 조치였다.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딱 한 번만 있었던 일이다. 영적존재인 천사가 인간여성에게 후손을 낳게 하는 성육신과 유사한 출생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성경전체에 첫째가며 가장 중요한 주제인 예수 십자가 구속에 비추면 틀린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아벨과 셋으로 이어지는 경건한 계열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창4:26)의 후손으로 오늘날로 치면 신자다.
구약성경에는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 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내가 말하길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이라 하였으니”(시82:6)를 들 수 있다. 이는 재판장을 존칭으로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울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종들 중에 재판장의 역할과 책임이 가장 크다는 뜻이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나 그와 유사한 신비한 족속으로 제한시킬 이유는 없다.
본문 해석의 결정적 키
많은 신자들이 모든 성경 말씀에 아주 경건하고 심오한 의미만 있는 줄 알고 지레 겁을 먹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단순하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과 내용으로 말씀하셨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는 측면은 있어도 결코 모순 상충되지 않는다.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으로 여겨지면 벌써 이미 잘못된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의 결혼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딸과 사람의 아들의 결혼에 관해선 침묵하고 있다. 그럼 그 둘은 결혼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결혼했다면 또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봐야 하지 않는가? 당시는 남성 우위 사회인데 사람의 아들의 결혼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다니 그 자체로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로 해석하려면 하나님의 딸도 천사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여성 천사가 등장한 적이 없지 않는가? 결론은 간단하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고 하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을 추적해야만 한다.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 열쇠는, 거의 모든 성경해석에도 그러하듯이, 앞뒤의 문맥 안에 숨겨져 있다. 본문에 이어서 노아 홍수의 심판을 예고하고(5-8절), 9절 이하에선 본격적으로 홍수심판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 심판의 원인을 밝히는 내용임이 자명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심판에 인간의 신분과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일한 죄인이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타락한 천사였다면 어쨌든 심판의 원인이 사탄에게 반이 돌아가고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 책임의 반이 줄어든다.
아담이 원죄로 타락할 때도 사탄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기원과 경로였을 뿐이다. 타락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속된다. 인간이 선과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100%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음에도 적극적, 능동적, 고의적으로 거역했기 때문이다. 본문에 이어진 5절에선 명시적으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고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했다고 심판이 전부 인간의 탓임을 밝혀 놓았다.
악한 천사는 사탄이 영계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지상으로 쫓겨내려 올 때에 함께 동조하며 쫓겨 온 부하들이다. 사탄과 그 부하들의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하여 인류역사를 결말지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그 전에는 인간을 계속해서 미혹 조종 농간할 수 있는 공중권세를 부리도록 묵인되어 있는 상황이다. 악한 천사의 후손들이 심판받는다면 이런 성경전체에 일관된 하나님의 뜻 즉, 성경의 헌법에 위배된다.
본문 3절 전반을 다시 보라. 나의 신(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음으로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이와 정반대의 내용이지만 동일한 형식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기억하겠는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당신의 생기(하나님의 신)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창2:7) 하나님과 교통을 하던 생령의 사람이 이제 그분의 생기가 빠져 나가고 육체만 남은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3절 후반에는 그들의 날이 120년이 되었다고 한다. 노아 홍수 후의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1-4절까지 전부가 사람에 관한 기술이다. 초자연적 결혼이 원인 내지 근거가 되어 사람을 심판한다면 그 자체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이 심판할 대상은 종말 때까진 인간이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역으로 말해 그분이 구원하여 영원히 교제할 대상도 인간이라는 뜻이지 않는가?
무자비하게(?) 심판하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해서 타락하게 되었는가? 여성의 아름다움 즉 외모만 보고 선택했다. 이브가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생각되어서 즉, 겉모양만 보고 타락했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사람 됨됨이를 외모로만 판단하고 차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했는가?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1절) 생활이 윤택해져 여유가 생겼다. 모든 이들이 형통과 쾌락만 추구했다. 삶이 풍족해졌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사탄을 쫓았다.
본문에는 더 엄청난 의미가 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문법적으로 따져서 주어가 복수니까 결혼할 대상 즉, 목적어도 복수로 수를 일치시킨 것만이 아니다. 그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만 표현해도 된다. 구태여 ‘모든’을 붙일 필요 없다. ‘모든’을 붙인 것은 라멕이 남의 아내의 외모만 보고 무력으로 빼앗았듯이 마음에 들면 무조건 아내로 취했다는 것이다.
성적 도덕적 문란이 극도에 이르렀다. 인간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는 법은 완전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직 재력과 무력으로만 세상사가 좌지우지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노아 홍수 기사를 접하는 신자들은 노아 한 가족만 빼고 몽땅 심판하다니 하나님이 너무 무자비한 분이 아닌가라는 인상 내지 의심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 비추면 목사와 장로들마저 혼외정사를 넘어서 첩을 두었다. 거기다 마음에 드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직분과 권세를 악용해서 남의 처를 빼앗기도 했다는 것이다. 침례 요한을 죽인 헤롯안티파스의 작태가 일반인은 물론 신자 사이에 성행했던 것이다. 그럼 과연 하나님과 인간 중에 어느 쪽이 더 심한가? 오죽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까지 한탄했다고 성경이 선포하겠는가?
인간 타락의 실상
본문에 초자연적 신비와 심오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판단한 것을 자기 자존심을 높이고 욕정을 채우고 자기를 자랑하는 방향으로만 적용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와 동일한 양상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자 하나님이 징계했다. 그들이 회개하여 징계가 그치고 평안과 여유를 되찾자 또 다시 타락하여 심판이 반복되었던 사사 시대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소견에 옳은 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요컨대 인간은 풍족해지면 죄에 더 탐닉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류역사상 최고로 문명이 발달한 시기다. 어지간한 서민도 옛날 귀족 왕족보다 더 호사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교회출석률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겉으로는 인권, 자유, 평등, 화합, 사랑 같은 고상한 가치를 내세우면서 지금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남녀 화장실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이 발달된 증거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 완악하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치사하고 교묘한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지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와 상극의 길로 치닫고 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는 불신세상은 사탄의 미혹을 받아 이끄는 대로 끌려갈 것이다. 사탄의 유일한 목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아니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식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양껏 준다.
그보다 더 간편하고 강력한 수단이 사탄에게 또 있다. 인간이 최고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인류공동체는 지금 인권이 최고의 덕목이 되어 있다. 각 개인별로는 자기 느끼는 대로 소원대로 마음껏 사는 것이 이 짧은 한 번뿐인 인생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그래서 “cool”이며 인생의 모토는 “튀어야 잘 살 수 있다.”이다.
인간의 유일한 두 주관자
지금 불신자를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잠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생령이었던 사람이 육체만 남은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이지 않는가? 신자들마저 삶이 풍족해지자 하나님은 외면하고 죄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저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발 이 문제와 고난 하나만 해결해주면 하나님께 정말 목숨 걸고 충성 헌신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문제에 묶여 도무지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사역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와 돈 걱정만 없어지면 정말로 하나님 보란 듯이 하나님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제 어려운 형편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막상 그 문제를 해결받으면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정말로 충성할 것 같은가? 아니다. “그 동안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어디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온 뒤에 새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From Tomorrow 뒷전이다.
지금 사람이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왔을 때에 다르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정말로 인정하기는 싫어도 사람을 주도하는 힘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과 돈을 앞장세운 사탄 둘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순간적으로 사탄의 편으로 떨어지게 된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7:23,24에서 어떻게 실토했는가? 내 지체 속에서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표현이다. 자기가 죄의 노예가 되어 묶여 있는 모습을 자기 스스로 보고 있다. 빤히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곤고한 자요 사망의 몸이라고 한탄했다.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이 예수 믿기 전인지 사도가 된 후인지 신학적으로 이론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믿은 후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저도 그 의견을 지지한다.)
바울도 그랬으니 우리쯤은 괜찮다고 묻어가자는 뜻이 아니다. 그랬던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세 번 태장으로 한 번 돌에 맞았고 세 번 파선했다. 죽음 직전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충성했다. 역사상 최고의 믿음으로 기독교를 반석 위에 올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종이 되었다.
바울과 우리의 차이
그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가 갑자기 슈퍼히어로가 되었는가? 순간적으로 거룩해지고 그 믿음이 너무 굳건해서 절대 요동치지 않았는가? 아니다. 그와 우리의 차이는 딱 하나다. 그는 끝까지 사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에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추구했던 재물, 권력, 명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최고로 여겼다.
그가 곤고한 자라고 고백했듯이 분명히 현실에 불편을 느끼고 육체의 고통이 극심해서 믿음이 떨어지고 감정적으로 요동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죄의 법에 사로잡혔다고 했으니 죄에도 빠졌다. 그러나 스스로 사망의 몸이라고 했으니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자기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점만은 절감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십자가만 붙들었다.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사탄에게 자동적으로 떨어진다고 해서 실망만 할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신자에겐 아주 큰 위로이자 권능이 된다. 거꾸로 사탄만 외면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양껏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란 멜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the Christ) 영화에서 보았던 그 처참한 채찍질이다. 한 번만 맞아도 죽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맨 처음 맞을 때는 틀림없이 고통을 이기는 것도 문제지만 제발 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죽지 않았고 또 몸의 상처도 회복되었다.
두 번 세 번 맞을 때도 비슷한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지 않았다. 바울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정말로 그 매 맞는 자리에 주님이 함께해서 그분이 자기를 꽉 붙들어 주었구나 철두철미 확신했을 것 아닌가? 어쩌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맞을 때는 기쁨으로 그 매를 감당했을 것이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 그 일로 오히려 그리스도 복음이 증거만 된다면 아무 여한이 없고 행복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저의 개인적 추측이 아니다. 로마지하 감옥에서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두고도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범사에 즉,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불신자에겐 말도 안 되는 충고다. 그는 실제로 고난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체험했기에 진심으로 당당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의 진리로 기록된 것이다.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교만하게 여겨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의 연약한 성도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법에 묶여 있던 자가 예수님의 복음으로 그 인생이 뒤집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그런 변화가 제가 전한 복음이 씨앗이 되고 싹이 틈으로써 가능했음을 아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다. 심지어 그런 변화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옆에서 증인만 되어도 엄청 기쁘다. 현실에서 제 개인적으로 겪는 손해나 고통의 수십 수백 배의 기쁨이 넘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방 멸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게 여겨지고 전혀 눈도 깜박 않게 된다.
여러분들더러 모두 거창하게 선교사 목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현재 어떤 문제와 고통을 겪고 있던 하나님과 실제로 끝까지 씨름하여서 고난 중에도 그분의 은혜를 체험하여 기쁨을 누려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정말로 절대적 진리인지, 그래서 내 전부를 생명까지 걸 만한 가치가 있는지 실제로 확신을 얻어 보라는 것이다.
한번 뿐인 짧은 인생 자기 뜻대로 사는 것 중요하다. 정말로 즐겁고 신나게 살아야 한다. 신자는 더더욱 그럴 자격이 있고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신다. 그러나 한번 뿐인 인생이니까 더더욱 자신의 전부를 걸만한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럴 수 없다면 얼마나 낭비인가? 신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꼭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며 겪는 고난이 아니라도 된다. 단순히 불쌍한 이웃을, 아니 가족이라도 순전하게 사랑해보라. 그때에 느끼는 기쁨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사랑도 못하겠다면 차라리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보라. 얼마나 그 삶이 곤고하고 자신이 사망의 몸인지 절감이라도 해보라. 그분께 당장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일수록 더욱 빨리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란 이젠 죄도 마음 놓고 지을 수 없는, 쉽게 말해 사탄이 절대로 건드리고 넘어뜨릴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은 가장 큰 특권인 것이다.
5/1/2016 박 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