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그는 어디선가 그녀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생각이었을 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혹시 창현오빠 아니세요?"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이기는 했으나 모르는 여자인 것 같았는데,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는 거였다. 그가 어물거리자 그녀가 재차 그에게 물었다.
"박창현씨 아니세요? 저 주아에요. 신주아."
그렇다. 차츰 그에게 그 일이, 아니 그녀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신주아. 그녀가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주아야? 네가?"
"왜 그러세요? 제가 어디가 변했다고."
"아냐. 못 알아보겠는데."
"전 창현오빠 금방 알아보겠는데요."
"그럼 미안한 일인데."
"아네요. 신경쓰지 마세요."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여기서 출판 기념회가 있거든요."
"그래? 나도 그것 때문에 왔는데. 정관기씨하고는 어떻게 되는데?"
"제 먼 친척 오빠가 되세요. 저한테는 무척이나 잘 해 주시거든요."
"그래? 나하고는 오래 된 친구사이인데. 세상 참 좁군."
"같이 들어가세요."
"그러지."
연기설은 믿을 만한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는데 우연만이 그 역할을 해 낸다면 세상은 너무나 우연적이다. 전생에 만났던 사람, 전생에 다 못 만난 한이 맺힌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기억을 쌓아가지만, 날이 맑으면 사라져 버리는 물안개처럼 그렇게 만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만남은 끝이 없으리라. 보장할 수 없는 영원에서 몇 천 겁의 시간을 소비하는 만남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이 일생에서 이루어진다면 믿을 수 없다. 지금껏 살아온 생-전생을 포함해서-에서 가졌던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나. 그러나 어쨌거나 남아있는 것은 기억이다. 확·실·한·기·억·이·다·
정말로 오래전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니 놀라웠다. 창현은 사람에게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도 못했고 누군가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지도 못했다. 자신에게 진하게 남는 사람에게 또한 그렇게 남을 수 있다고 창현은 생각하고 있었다. 주아, 그녀를 만난 것은 그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가 졸업반일 때, 그녀는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그는 그림서클에 들어있었는데 졸업할 때가 가까워 와서 서클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서클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할 때 그녀를 처음 보았다.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그저 그런 여자였다. 그 때는 여자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해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같은 서클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클 룸에 갈 일이 생겼다. 너무 오래동안 발길을 끊었던 곳이라 가기가 조금 어색하기도 했으나 그 친구는 4학년인데도 서클에서 잘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만 믿고 가기로 했다. 게다가 방학이라 거기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서클 룸에 도착하니 그 넓은 룸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본 기억은 있었으나 이름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해서 룸 쇼파에 그냥 앉아 있는데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울었던 것 같았다.
"누구세요?"
"네, 전 박창현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 선배신가요?"
"그런데요. 무슨 일이 있어요? 많이 안좋아 보이는데."
"죄송해요. 여기서 약속이 있으신가 본데 제가 나갈께요."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더니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를 보더니 물었다.
"혹시 K선배와 만나실 건가요?"
"그런데 왜 그러지요?"
"아녜요."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가방을 들었다. 창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뭐라고 말하기가 어색해서 가만히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는 깜짝 놀랬다.
"이봐요? 이봐요, 정신차려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병원이라도 가봐야 했다. 창현은 급하게 그녀를 들쳐업었다. 학교 근처에 병원이 있어서 바로 거기로 향했다. 한참을 뛰고 있는데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에요?"
창현은 멈춰서서 그녀를 보았따. 겨우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요? 지금 병원에 가는 중이니까 가만히 있어요."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그냥 내려주세요."
"정말 괜찮겠어요?"
"네."
그녀는 다시 길을 걷더니 또 주저앉았다. 안색이 너무 핼쓱했다. 그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녀는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거기에 반대할 만한 힘도 없는 듯 했다. 그녀를 진찰실로 들여보낸 후 진찰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서클룸에서 기다리고 있을 K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서클룸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K는 아직 안 온건지 왔다가 가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진찰실 앞으로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20분 정도를 기다렸는데 그녀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진찰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의사가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진찰하러 왔던 여자 어디갔습니까?"
"진찰 끝나고 간지가 한참 되었는데. 보호자 아니십니까? 왜 같이 안 가셨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병명이 뭐였습니까?"
"축하합니다. 임신했던데요. 임신 중에 나타나는 빈혈증세였어요. 철분섭취를 좀 많이 해야 할 겁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창현은 어이가 없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 여자는 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신입생이 어쩌다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나오던 그에게 K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신입생이었다. 그에게 일의 실마리가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그는 성급하게 단정짓지는 않기로 했다. 일단 창현은 그들을 지켜 보기로 했다. K는 한참 그녀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녀를 다독이며 K가 근처 커피숖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창현은 오늘은 그만 두기로 했다. 여전히 의문이 남았으나 그것은 나중에 K를 조용히 만나서 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의 속에 짚이는 것이 거의 진실인 것은 그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창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K와 그 여자를 생각하니 갑갑하기만 했다. 그는 애써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려 했다. K는 결코 그럴 친구가 아넨ㄷ. 이런 생각에 안절부절해 했다. K의 집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말씀뿐이었다. 오늘은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다. 창현은 심란함을 느끼닥 문득 피식 웃었다. 그것은 단지 K의 문제일 뿐인데 자기가 너무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K가 저지를 일이든 아니든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가 잘못된 듯 해서 창현은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고 있을 무렵,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K가 들어왔다고 전화가 왔다.
"미안해, 오늘 약속 못 지켜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랬어."
"그건 그렇다 치고 너한테 물어볼게 좀 있다. 나한테 해명할 일이 있어."
"뭔데?"
"우리 서클에 신입생있잖아, 왜 그 긴머리에 눈 좀 크고 뿔테안경 쓴 아이."
"아, 주아. 너도 인사했잖아. 그 애가 왜?"
"짜식 시치미 떼지 마. 오늘 룸에서 걔를 봤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데리고 갔었어. 그런데 이 애가 거기서 사라진 거야. 나가봤더니 너랑 이야기하고 있더군. 무슨 사이야?"
"별 사이 아니야. 그저 좀 친한 선후배야."
"제대로 얘기해 봐. 너 무슨 문제 있지?"
"사실은……. 그래, 내가 너한테 못할 얘기가 어디 있겠냐. 사실은 걔가 임신했대."
"그건 알고 있어. 오늘 병원에서 의사한테 들었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 아인지 알아?"
"아냐. 나도 몰라. 오늘 너 만나러 가는데 주아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마구 울어대는 거야. 그래서 근처 커피숖으로 데리고 가서 얘기를 했더니 그 얘길 하더군. 누구 아이인지는 모르겠어."
"다행이구나. 난 또 네 아이가 아닌가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얘가 누굴 난봉꾼으로 아나. 난 은이 있잖아, 은이."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나저나 그 주안가 하는 애는 어쩐다고 그러데?"
"모르겠어. 걔가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하거든. 거기까지 데려다주고 오긴 했는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문제다. 문제야. 이걸 어쩌니? 게다가 우리 서클아이인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일단 내일 가 보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갈래?"
"그래. 그럴께. 그럼 내일 수업이 없으니까 9시에 서클룸에서 보자."
"그래, 내일 보자."
창현은 일단 안심했다. 다행이었다. K가 그런 놈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아라는 애가 걱정되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큰일인 것이다. 막막하게 집에 찾아가본다고는 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였다. 아무튼 오늘 걱정은 하나 덜었으나 더 큰 걱정거리 하나를 떠맡은 셈이었다. 그것도 자청해서. 창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다 7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어제 새벽 4시 정도에 잔 것 같은데 정신은 말짱했다. 서둘러 챙기고 학교로 갔다. K는 이미 와 있었다. 둘이서 별 말 없이 주아의 집까지 걸었다. 빽빽한 주택가에 한 허름한 집 2층이 주아의 집이었다. 집이 낡기는 했으나 꽤 넓은 것 같았다. 1층은 아담한 마당으로 둘러싸여 평화로워 보였다. K는 말없이 벨을 눌렀다. 아무 응답이 없자 몇 번을 더 눌렀다. 1층 안집에서 사람이 하나 나왔다.
"주아학생 찾아오셨어요?"
"예. 학교 선밴데요."
"지금 아픈가봐요. 병원게 가 보라니까 그냥 있겠다고 하도 고집을 피워서. 학생들이 들어가서 좀 달래봐요."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더니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밖에 서 있는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니 꼭꼭 잠긴 현관문이 보였다.
"주아학생, 주아학생. 손님이 왔어요. 문 좀 열어봐요."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부스스한 얼굴로 주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창현과 K를 보더니 일순 긴장하는 것이었다.
"왠일이세요. 여기까지 다 오시고."
"주아 괜찮은지 보려고. 안 좋으면 병원에 좀 가보지 그래."
"아녜요. 전 괜찮아요. 그나 저나 좀 들어오세요. 차라도 끓여 드릴께요."
"그래요 학생들. 난 가볼 테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인사하는 주아의 모습은 안쓰러워보였다. K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자 창현도 쑥스러운 듯이 뒤따라 들어갔다. 방은 깨끗한 편이었다. 거기엔 웬만한 살림은 다 있었다. 대학생 한 명이 쓰기에는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주아는 커피메이커에 커피를 넣으며 말했다.
"K오빠. 와 줘서 고마워요."
"나만 고맙니. 창현이가 더 고맙지."
"저 오빠 성함이 창현이에요?"
"응, 박창현"
"맞아. 그 때 들었었는데. 고마워요. 오빠."
K와 창현은 그날 그렇게 앉아있다가 갔다. 그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주아가 그럭저럭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창현도 K도 어느정도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많이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는 문명의 발달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발달은 곧 툅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어떤 문제에서나 반대급부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 중에 가장 많은 논란이 지나간 것이 낙태이다. 임신은 필연적인 성관계의 결과이고 낙태란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해당했다. 그러나 우연적인 성관계가 증가함으로써 수많은 정자와 조금뿐인 난자의 결합은 많은 수정을 통해 림보로 가는 아이들을 생산해 내었다. 그것들은 겸자로 끄집어내어져 영문도 모르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것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보지 못한 아이들보다 훨씬 불행하다. 그것들은 의사에게 살인의 죄책감까지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성욕이 있는한 낙태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림보의 인구밀도도 증가하여 발디딜 곳이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까운 미래, 혹은 먼 미래가 될 것이다.
창현의 머리속에 그가 알았던 주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기념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으나 창현은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주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 뒤에도 주아의 집에 한 번 찾아갔었다. K에게는 알리지 않고였다. 그녀의 집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예전의 그 아주머니가 나와서 물어보았다.
"주아 안에 있습니까?"
"아니, 주아 집 옮긴지 꽤 오래 되었는데. 학생들한테 안 일라 주었나 보지? 내가 주소라도 가르쳐 드릴까?"
"아닙니다. 주아한테 물어보죠 뭐. 학교에서 보는데요. 그럼 안녕히 게세요."
왜 갔는지는 지금의 그도 알기 힘든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주아란 여자는 창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 때 몇 번 보고는 본 적이 없는데 주아의 모습은 창현에게 계속 남아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남자들의 주의를 끌 만큼 주아는 미인이었다. 시원한 이마로는 부드럽게 보이는 머리칼이 몇가닥 흩날리고 서글서글한 눈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웃음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주아는 사랑하고픈 여자는 아니었다. 창현이나 K나 주아를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다만 주아를 가끔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그런 것이었다. 결국 그래서 창현은 주아의 환상을 아직껏 가지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한참 옛 생각에 빠져 있는데 주아가 창현의 어깨를 건드렸다.
"창현오빠. 저랑 저녁이나 같이 안 하실래요?"
"그러지. 주아를 보니까 너무 반가운데 어떻게 해야 하나 했어 .둘이 저녁이나 먹자구."
"아뇨. 둘이 말고요. 곧 제 친구가 나올 거예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같이 했으면 해요."
"내가 불편할 거야 없지. 그럼 같이 기다리지. 뭐."
사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속은 거북스러웠다. 생판 모르는 주아의 친구와 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도 그랬지만 그것보다도 주아와 둘이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는 못마땅했다. 하지만 오늘은 주아를 만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친구가 안 나오네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10여분을 기다리다가 찌뿌둥한 말투로 내뱉은 그녀의 말이었다. 그 때 창현에게 떠오른 것은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주아의 모습이었다.
누구든지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비록 그것이 잠시 잠깐 나타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아는 창현이 졸업하기 전에 홀연히 창연에게 나타난 적이 있었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작은 선물을 들고서. 창연의 앞에서 배시시 웃다가는 불쑥 자기를 데리고 놀러 가 달라는 말을 했다.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창현이 사정이 생겨서 30분쯤 늦게 되었다. 안절부절 일을 마치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허탈한 마음과 혹시 하는 마음에 약속장소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주아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가늘게 부는 바람에 그녀의 조금 긴 머리칼이 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가요."
창현은 흘린 듯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근처에 세워둔 자기차로 가더니 나를 태웠다. 주아가 차가 있다는 사실도 조금은 의아한 일이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빠 차예요. 오늘 하루만 빌린 거예요. 오빠가 운전하실래요?"
"아내. 네가 해."
주아의 집은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는데 아버지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주아의 운전솜씨는 프로급이었다. 1시간이나 달렸을까. 주아는 어느 마을 앞에 차를 세우더니 내렸다. 얼른 따라 내렸더니 별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서 상당히 들어가니 자그마한 호수가 하나 보였는데 그 곁에 또 아담한 집이 한 채 있었다. 첫눈에 그것이 누군가의 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호화스럽거나 고급스럽다기보다는 동화속의 집같이 예쁘게 보였다. 주아는 그 집 앞까지 가서 창현에게 말했다.
"여기 아버지가 집필하시는 곳이에요."
"그래? 어떤 글을 쓰시는데?"
"소설을 쓰세요. 비록 아직까지 책은 한 권도 안 나왔지만, 신춘문예에는 한 번 당선되신 적이 있으세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출판 권유를 해도 꼭 거절하시더라고요."
주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아늑하게 생겼다. 여기저기 나무로 인테리어한 것이 돋보였고 편해 보이는 의자가 몇 개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한켠에 화장실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의 공간이었다. 구석에는 싱글사이즈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면은 모두 책으로 도배한 듯이 책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주아는 페치카에 불을 붙이더니 의자 두 개를 그 앞으로 끌어다 놓고는 나를 앉혔다. 그리고 주방으로 보이는 쪽으로 들어가더니 토스트 몇 쪽과 우유를 가지고 왔다.
"오빠 배 고프시죠?"
"응, 조금, 잘 먹을께."
한참을 먹고 있는데 뭔가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하니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적어서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주아가 그를 불렀다.
"오빠. 내가 왜 이런 곳에 오빠를 데려온 것 같아요?"
"글쎄. 사실 나도 좀 의아했어. 나랑 너랑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고, 그 때 그 일 때문에 그랬다는 것도 좀 이상하고. 난 아직 뭔지 모르겠어.
"
"오빤 너무 둔한 것 같아. 난 오빠를 좋아한단 말예요."
창현은 당황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창현이 주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주아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창현을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일, 오빠가 알고 있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그건……. 그래요.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난 오빠를 좋아해요. 그것 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더니 울기 시작했다. 남자의 마음은 여자의 눈물에 약해지는 법이었다. 창현은 주아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녀는 창현의 가슴에 파고들며 어린아이 처럼 울어댔다. 그런 속에서 창현은 그녀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에 취할 수 있었다.
결론내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가을 쓸쓸한 거리를 혼자서 걷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나 많은 사람이 그 거리를 혼자서 걷는다. 옛 추억을 생각하기에 낙옆깔린 거리처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사랑을 하더라도 거기에 투정하지 말라. 사랑은 그것을 소유하는자의 것이다.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빼앗길 수가 없다. 다만 그 소유에 욕심을 가지기 때문에 누군가를 영원-영원은 대단히 위험한 단어이다. 삶을 살면 살수록 영원은 위험한 단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히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사랑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것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지냈다. 주아는 울다가 잠이 들었고 창현은 그런 주아를 침대에 눞히고 자기는 페치카 앞에서 밤을 지샜다. 도대체 생각해야 할 일은 왜이리도 많은 것인지. 아직 자기에게 큰 부피를 차지하는 존재는 아직 없지만 주아가 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몰랐지만 주아는 그에게 벅찬 존재였던 것이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도 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아침, 호수 주위라 하얀 물안개가 가득 차 오는 아침에 창현은 주아의 깊이 잠든 모습을 별장 안에 두고 나왔다. 그녀의 입술에 처음으로 자국을 내고는 쓸쓸히 그곳을 나왔다. 물안개는 마을 어귀까지 가득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주아를 찾이 않았다. 주아도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오빤 아까부터 뭘 그리 깊이 생각하세요?"
"아냐. 별 거 아냐."
"참. 여전하시네요. 오빠도. 친구 먼저 갔나 봐요. 그냥 가죠."
"그래.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너 차 없지?"
"그 땐 아빠 차였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자 내 차로 가자."
"네."
"아, 잠깐만. 전화 좀 걸고 올께."
"그러세요."
그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주아를 집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내한테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아내는 손님을 데리고 온다는 창현의 말에 좀 일찍 말해주지 그랬냐면서 조금 신경질을 내더니 얼른 오라고 했다. 지극히 평범한 아내. 이젠 습관처럼 대해지는 아내에게 그는 조금의 짜증과 함께 미안함을 느꼈다. 다시 돌아와서 주아를 차에 태우고 집을고 향했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글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데."
"참, 오빠도. 애들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가르쳐 주세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집으로. 마누라 음식 솜씨가 일품이거든."
"결혼하셨어요?"
"응. 애도 둘 있어."
"그러세요."
그 뒤로 주아의 말이 뜸해졌다. 자연히 창현도 말이 없어졌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젊은 여자 손님을 데리고 갔으니 당여한 일이었다. 아내는 창현을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물어보았다.
"누구예요?"
"대학 후배야. 오늘 출판 기념회 갔다가 만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할까 하고 데려왔어."
"당신도 참 큰일이예요. 어쩌자고 집에 데려와요. 집에를."
"아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자 밥이나 차려 주라고. 손님 기다리는데."
"정말 당신도 못말려."
아내는 투덜거리며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그는 주아를 집까지 다시 태워다 주었다. 창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희안한 재회였고 또 한번의 이별이었다. 다시 주아를 잊어야 했고 잊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몇 년이 훌쩍 흘렀다.
인간의 운명이란 믿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에는 그것이 더욱이나 들어맞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젯저녁,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간 친구가 내일엔 차가운 시체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연인을 집 앞까지 바래다 주어도 그 연인은 집 앞에서 끌려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안주하며 살아갈 수 없고 항상 다급한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 서로에게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자기 살기에 바빠서 서로를 느끼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모두가 소외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란 사랑하기도 어렵고 사랑받기도 어려운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서야 우리는 서로에게 아쉬움을 느끼나 그 때는 이미 늦다. 잃을 때가 되어야 사랑하는 것은 왜일까. 왜…….
창현이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가족이 모두 탔었는데 창현과 작은애만 살고 큰애와 아내는 죽고 말았다. 작은애도 병원에 입원한 채로 있었다. 의사들 말로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였다. 창현은 몇군데 타박상을 입었을 뿐, 말짱하였다. 그러나 심한 절망감에 빠져 창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작은애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작은애도 한 달 가량을 버티다가는 죽어 버렸다. 모든 것이 공허해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장에는 장기휴가를 내 놓았는데 거의 사표나 마찬가지였다. 매일이다시피 그는 술을 마셨고 진창으로 취해 다녔다. 옆에서 누군가 그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죄책감까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보살펴 줄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주아로부터 편지가 날아온 것은.
'창현 오빠에게
여기는 예의 그 별장이예요.
저는 지금은 여기서 살고 있어요.
오빠에게 그 전부터 편지 쓸려고 했는데 잊고 있었어요.
언제 한 번 들려 주세요.
여긴 아직도 아침 물안개가 아름다워요.
주아
무슨 생각이었는지 창현은 바로 거기로 떠났다. 그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진한 애수가 밀려들었다. 상처한 이후로 이렇게 맑은 기분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벌써 육개월이 지나고 있는데도 창현은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집안으로 들어서며 창현은 웬지 어색함을 느꼈다. 한낮에 그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마을 뒷편에 있는 산을 잠깐 올랐다가 저녁때쯤 되어서 들어갔는데 아무리 주아를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이었다. 문을 살짝 열어보았더니 집 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조금씩 낡아있을 뿐.
한쪽 침대에 주아가 누워 있었다. 예전의 그 날 같았다. 아직 페치카를 쓰기에는 이른 계절이었지만 비가 온 후로 기온이 떨어져서 주아는 페치카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누워 있는 주아의 모습은 심상치가 않았다. 에전의 주아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는 조용히 주아에게 다가갔다. 주아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핼쓱했다. 갑자기 뇌리를 스친 생각때문에 그는 주아를 흔들었다.
"누구세요?"
희미하게 눈을 뜬 주아가 말을 하자 창현은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할 말을 잊고 있자 주아가 또 물었다.
"누구세요?"
"나야. 나. 창현이."
"오빠?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냥 왔어. 너 보고 싶어서."
"고마워요. 오빠. 와 줘서."
"너 몸은 괜찮은 거니?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오빠 오셨으니까 뭐라도 드려야 하는데. 잠깐만요."
주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방 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창현에게는 에전의 그 일이 생생하게 다시 생각났다.
의사가 이번에는 축하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준 말은 주아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거였다. 별로 놀라야 할 일도 아니었다. 진찰을 마치고 그는 그녀를 부축하고 다시 그 별장으로 돌아갔다.
"오빠. 미안해요. 전 꼭 아플 때만 오빠를 찾게 되는군요."
"아냐. 괜찮아. 미안할 건 없어."
"저도 제 병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서 사는 거구요. 제가 오빠한테 괜히 편지를 썼군요."
"아냐. 잘 한 거야."
"저를 동정하진 마세요. 저를 사랑해주세요."
"그래. 주아. 널 사랑해줄께."
창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주아도 그렇게 자신의 처지도 그렇고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새 주아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내일이면 주아의 어머니가 오신다고 한다. 그럼 좀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창현도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예의 그 물안개가 집에도 조금씩 새어들고 있었다. 주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코 밑에 대어보았다. 가늘게 쉬는 그녀의 숨이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그녀에게 두 번째의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조용히 물안개를 헤치고 별장을 빠져 나왔다.
길을 찾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없다면, 그래 그게 없다면 사람의 생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깝다. 환상일지라도 빛을 찾아야 한다. 감성으로 찾는 길에는 확실성이 없는 대신 화려하다. 이성으로 찾아낸 길은 대부분 확률에 자신을 가지고 시작한다. 길이 안 보일 때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떠나야 한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그러나 오랜시간동안 혼자로의 여행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해로운 일이다.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떠남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절제.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죽음이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을 지우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살아가기 위해선 때론 망각도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망각시킬 필요는 없다. 그건 시간이 준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서서 괴로워하기보다는 길을 걸어야 자신을 구할 수 있다. 그것은 최상의 약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사랑하라.
창현은 자신을 믿을 수 있었다. 모든 것에서 헤어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겐 없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줄 거라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는 아내도, 죽어버린 두아이도, 그리고 그냥 떠나온 주아도 잊기로 했다. 새벽달은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나트륨 등의 따뜻한 주황색이 그리워졌다. 자동차 시동을 걸자 따뜻한 자동차의 입김이 차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볍게 기아를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론가 떠나는 길. 생각은 있어도 좋았으나, 잠시 버려두기로 했다. 시간이 생각을 찾아서 치료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무겁게 깔린 안개를 헤치고 그의 차는 슬금슬금 앞으로 나갔다.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가 없는 아침이었다. 안개 사이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픈 가슴은 천천히 적셔야 하기 때문에, 가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