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선 동작역에서 2호선 방배역까지의 길동무길
2014년3월14일 동작역 1번 출구 앞 헤밍웨이 길에서 시작하여
가는 길은 1969, 1970,1971년 등 내 발길이 수없이 닫던 곳은 어디론지 사라져
간 곳이 없고 기억으로만 남은 추억을 반추(反芻)하노라니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다시는 맞이할 수 없음에 한으로만 남습니다.
노신사가 장춘단공원에서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고목(古木)을 쓸어안고
울었다는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가요인의 노랫말보다 더 애처롭게 느껴지는
그 곳엔 성년나이를 갓 넘은 나의 청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꿈을 키웠던 아! 반포동~~
지금의 반포동(盤浦洞)은 강쪽으로 튀어나온 반포동 끝자락에서 국립현충원
정문을 직선으로 보면 강 중간에 서래섬이 있었는데 1970년 이른 봄부터 일제
육발이 덤푸트럭 백여대를 동원하여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삼한강교 서쪽 잠원동
이른바 잠실벌의 백사장 모래를 실어다가 한강이 타원형처럼 움푹 패어들어간
서래마을 앞에서부터 매립을 하기 시작하여 두 달정도 지난 즈음에 반포동
끝자락에서 가운데 있던 서래섬을 연결하여 현충원 정문 길건너 앞까지 매립을
하고나니 여의도 면적보다 더 큰 신도시 택지가 조성이 되어 그 이 후로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의 서울시에 강남개발제안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반포동과 동부이촌동을
연결하는 하저터널이 포함된 일간 신문지상에 보도된 서울시의 청사진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 땐 한남대교 서쪽에서 공항동까지 영등포구 관할이었는데 지금은 열개의
구로 분구가되어 45년동안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지금 서울의 모습은 그 때는
상상(像想)도 못했던 결과입니다. 대한민국 전국이 그렇듯이 십년지기 선배님들과
우리세대가 월남에서 독일에서 열사(熱紗)의 땅 중동에서 목숨을 걸고 흘린
피땀으로 이뤄낸 결과임을 자부(自負)합니다.
위와 같은 사연들을 음미(吟味)하면서 헤밍웨이길, 누에다리, 몽마르뜨공원,
서리풀공원을 걷다보니 어느듯 뒤풀이 장소가 있는 방배동이었는데 방배동
얘기를 안하고 넘길수는 없군요. 내 생활근거지였던 이수교를 중심으로 동남쪽 방향
으로는 그 때 편물기로 쉐터짜는 실로 유명했던 505 아리랑모사 공장인 동광기업
공장앞으로 가다보면 말쭉거리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가다보면 사당동 남성동
남태령이고 길 옆으로는 습지같은 갈대밭이 있고 예술인마을 남성동에서 보면
갈대밭 개천변 건너에 낮은 산동네가 바로 지금의 방배동인데 1969년 여름 그 때는
강원도 산악지대에 큰비가 오거나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올 때는 관악산의 빗물과
불어난 한강물의 유입(流入)으로 갈대밭이 4m 깊이의 물바다로 변해서 요금이
입석이10원 좌석이 15원인 버스가 끊겨 주로 사당동 사람들이 한강자갈체취선에서
자갈을 받아 노를 저어 실어나르던 작은 철선을 동원하여 사당동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을 실어나르는데 나도 새벽에 일어나서 강물이 불어 작업을 중단한
회사에서 자갈운반선을 빌려 노를 저어가서 사당동 대림여인숙 건물앞에 배를
대어 30여명이 타면 운임을 십원씩(그 때는 지폐였음)받고 이수교로 건네주는데
벌이가 쏠쏠해서 재미가 나더라구요.그런데 대형사고가 터진겁니다.
승선정원이 10명인 모타보트가 여인숙 앞에 대니까 내가 먼저가서 태우고
있는 손님들이 노젓는 배보다 배이상 빠르다며 우르르 모타보트로 몰려가서
타고가다 키 큰 미루나무가 여러그루 있는 중간 쯤에서 정원초가인데다 운전
미숙으로 나무에 부딧쳐 배가 뒤집혀서 17명 모두 익사사고가 나니 출근시간에
김현옥 서울시장이 청사로 가지 않고 그리로 바로와서 시찰을 하더니 곧바로
중장비와 차량을 동원해서 이수교와 사당동 사이에 낮은 산을 허물면서
묘지 주인에겐 묘지를 옮기라고 엄명(嚴命)하는 소동을 빚으면서까지
이수교 사당동간 찻길을 3m이상 높이고나니 그 주변 백원짜리 땅값이 삼만원
까지 급등을 해서 땅주인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날 내 배를 타고가려다
모타보트에 옮겨 탄 죽은 사람들 중에는 4남매가 모두 은행원인데 수시로
전하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어떤 시민들은 너무나 안타까워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고 4남매의 어머니는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갔고 나도 목격했던 아버지는 이수교 근처의 질컥거리는 맨 땅에 다리 뻗고
앉아서 내자식 살려내라고 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통곡하는 마음이었답니다.
라디오 뉴스에 "장남 박종선씨 등 4남매"가 동시에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보니
나와 종씨이고 같은 학렬여서 정말 안타깝더라구요. 그 뒤로 나는
노량진 경찰서에 증인으로 불려다니곤 했답니다. 쓸데 없는 얘기
해서 미안합니다...
2014-03-14=작성자 청해명파
↓동작대교 노을카페에서 바라 본 현충원, 흑석동일부 한강의 풍경











↓ 동작대교 위의 노을카페와 동작대교







↓동작역 1번 출구 앞 헤밍웨이길로 들어서고 있다.
































낙화유수(落花流水)
노래 / 이미자
낙화유수 1974 이미자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서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람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 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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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강산 락화류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2.이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어린 봄나루에서
행복의 물새우는 포구로가자
3.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14-03-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