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하숙집에서.... | ||
하지만 처음 가보는 유학생의 입장으로서는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기에 내 희망 사항을 밝힐 처지도 되지를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다가 유화원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외국에 처음 나가는 자녀를 둔 학부모 입장에서는 방임된 가정보다는 오히려 자녀들을 잘 감시해 줄 수있는 목사님댁을 선호하는 편이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호주는 수강료가 월요일부터 시작하여 주급으로 따지며 하숙비도 마찬가지이기에 나는 한국에서 토요일에 출발하여 일요일 아침에 도착하는 비행편을 잡았고 비행편도 항공료가 비싼 국적기 보다는 싱가폴을 경유하는 싱가폴 비행편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52세의 늦은 나이에 영어연수를 떠나는지라 그래도 무언가 시드니에서 만날 영어 선생과 새로 사귈 친구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남대문 시장에 둘러 한국에 기념이 될만한 기념품으로 주로 신랑, 신부 결혼 장면 모습이나 농춘 모습, 탈바가지 등의 액자형 미니어쳐 10개를 개당 6,000원씩을 주고 샀다.
유화원을 통하여 들은 정보로는 나말고 제대후 복학을 앞두고 호주 영어 연수를 가는 학생이 둘 있다고 하였는데 마침 김포공항에 당도하여 보니 지방대를 다니고 있는 이 군이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왔었는데 인사를 나눈 그들 부부는 둘다 나보다 두어살 적은 편이었다.
서울 잠실에 살고 있다는 그들 부부는 처음으로 외국을 혼자 떠나 보내는 아들을 몹시 걱정을 하면서 나에게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창겨 줄것을 신신당부 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들에게는 나를 부모처럼 잘 따르라는 별도의 귀뜸을 잊지 않는다.
김포공항에서 싱가폴 공항까지 비행시간이 7시간이 걸렸고 싱가폴 공항에서 10시간을 대기한 후에 다시 싱가폴에서 시드니까지 9시간을 비행하여 가야만 했다. 사실 국적기를 타고 가면 한국에서 시드니까지 10시간이만 갈 수있었으나 나에게는 남는게 시간이었고 비행기 값도 국적기보다는 10여만원이나 싼 관계로 이런 여행 일정을 잡았으며 다행히 싱가폴 관광청에서는 싱가폴 공항에서 6시간 이상 대기하고 있는 승객에 대하여는 싱가폴을 선전 겸해서 2시간의 싱가폴 시내관광을 무료로 해주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싱가폴 시내관광을 신청하고 나니 30여분후 리무진 버스가 공항 환승지까지 들어 와 30여명이 탑승을 하였는데 인디언(인도계) 여성이 가이드로서 시내 관광을 하면서 싱가폴내 유명 빌딩들을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틈틈히 버스에서 내려 사진도 찍을 수있게 해주었으며 시내 관광 도중 무료로 30분간 페리호를 타고 시내 유람을 시켜 주기도 했다.
싱가폴(新加波) 시내관광을 마치고도 여러 시간을 대기후에 다시 시드니행 밤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이 군은 자신의 부모님이 잠실에 7층 빌딩을 가지고 있다며 은근히 자신의 집이 부자 임을 뻐기듯 자랑하기에 나는 약간 얄미운 마음이 들어 그 빌딩 전세금 모두 빼주고 나면 그리 큰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 군의 속을 살짝 긁어 주었다.
일요일 아침 시드니 공항에 당도하니 픽업할 한국 사람이 나와 우리를 시드니 크로이돈(Crydon)에 있는 목사님댁 하숙집으로 인도하여 주었다. 그 곳에는 이미 3일전에 먼저 당도한 성균관대를 복학할 대학생 김 군이 우리를 맞이 하여 주었다.
이 곳 목사님 부부는 나와 동갑내기로 무엇보다도 이들이 호주에 이민 오시기전 나와 동향인 부천 연고권으로 나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셨다. 김 군과 이 군에게는 방 하나를 함께 쓰게 하고는 나에게는 독방을 따로 내주셨다.
4월 초의 가을 날씨라 비교적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편이었고 집은 단층으로 이미 70여년이 지난 헌 건물인지라 단열재가 들어 가지 않은 관계로 비교적 추운 편이었다. 목사님은 침대에 솜 이불을 내주시면서 이 곳에서는 솜틀집이 없으니 솜 이불 위에 앉거나 뒹굴지 말아 줄 것을 특별히 당부하셨다.
김 군이 우리 보다 3일 먼저 시드니에 왔다고 지형을 익힌 곳을 이곳저곳으로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안내를 자청한다. 이 곳 목사님은 해방 신학을 하신 분으로 믿음 생활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우셨고 당신이 운영하는 교회는 없고 단지 남의 교회에서 간간히 설교할 기회를 갖는다고 하셨다.
목사님은 부천에서 주로 철거민을 위한 대변자및 밑바닥 생활을 하며 헐벗는 빈민자들를 위한 정부와의 투쟁을 주로 많이 하셨고 이 곳에서는 주로 하숙생을 치면서 생활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하숙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거리였었고 목사님 댁은 약 300평 대지에 앞 뒷마당이 커서 가끔 뒷마당에 시설된 곳에서 바베큐를 해먹곤 했었다.
끼니 때마다 육식에 크게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일요일은 원래 하숙생이 나가서 외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모님의 원론적인 말이 우리에게 거슬렸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 탓인지 1개월이 지난 후에 두 복학생들이 하숙집을 옮기겠다고 한다.
나는 짧은 기간에 또따른 하숙집을 경험할 호기회라 목사님댁에 저에게 잘 해주셨지만 아무래도 애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며 옮길 뜻을 내비치니 목사님 댁에서는 특별히 나를 배려해 주었건만 나마져 둥지를 떠남에 몹시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당시는 우리 나라가 IMF의 어려운 시기라 호주의 하숙집 비용도 20% 정도 많이 내렸고 예전보다 어려운 경제 속에서 다시 하숙생을 기다려야 하니 그들도 고민을 좀 했을 것이다.
사온 선물은 일부를 목사님 댁에 드리고 학교 선생및 내가 망에 드는 여학생들에게 주었는데 끝가지 줄까 말까 고민을 했던 학생은 26세의 아끼꼬라는 예쁜 일본 여학생으로 혹시 내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학교 생황를 한지 한 3주가 지난 후에 내 선물을 주기로 결심을 햇었는데 그 이유로는 순진하고 예쁘기만 한 이 여학생이 중국계 인도네시아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였다.
두번째로 옮긴 하숙집은 한국인들이 10명 이상이 모여 있는 곳이었는데 영어연수 하숙생은 우리 셋 뿐이었고 모두들 건축일을 하는 노동자들이었었다. 그렇다 보니 고기, 과일등 먹는 것은 흔하였고 밤 12시에 들어 와도 언제든지 식탁주변에는 항시 마음 놓고 먹을 수있는 음식이 준비 되어 있었으며 정말 내 집보다도 더 편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었다.
우리 학생들 3명은 큰 방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딴 방을 사용할 때는 몰랐었는데 이 군이 어찌나 화통을 삶아 먹은 양 코를 골아 대는지 밤잠에 들기전이 고통의 연속이 되었다.
IMF로 관광 비자로 들어 온 노동자분들이 호주에서 불법으로 일을 하면서 품삯을 내려 놓고 있었고 또한 기존에 이 곳에서 노동으로 벌어 먹고 살던 분들과의 마찰로 인한 한국 노동자들간의 불법 노동 신고 등으로 당시 한국민들간의 민심이 흉흉해졌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의 노동자들은 당시 한국에서의 인기 드라마인 거지 왕초 김 춘삼씨의 일대기인 '왕초'를 한국 텔레비죤에서 방영후 한국에서 비디오로 녹화된 테이프를 이틀후에 시드니 한국 매점에서 빌려다 거실에 주욱 앉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었다.
한국의 경제 불안정에 정다운 가족과 떨어져 나와 노동으로 벌은 외화를 한국으로 부치고 있는 이들은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고 무었이었겠는가. 이 군과 김 군등은 대학생이었지만 영어 기초(Foundation) 반이었고 나는 고급(Intermediate; 당시 Advanced반은 창설 안됨)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자격지심였는지는 알 길이 없겟으나 당시 24세였던 이들은 가끔씩 뭉쳐 나를 자신들의 동료마냥 취급해 도전적 언사를 해오기 일쑤였는데 내가 별무반응을 보이자 인지라 급기야는 김 군, 이 군이 서로 간극을 보이면서 서로 주먹질까지 벌이는 바람에 이들을 뜯어 말리는데도 애를 쓰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서로 모르던 이들이 해외에서 만나 서로 우정을 쌓기도 바쁠텐데 채 두 달도 안되어 외국에서의 싸움질이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사 이들도 한국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누가 이를 말릴 수있었으랴. 이 곳에서의 재호주 한인회장을 뽑을 때도 부정, 부패, 축첩 등을 서로 비난하면서 선거전을 시장 바닥마냥 난전으로 치룬다고 하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며 또한 이 곳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서는 소위 요새 말로 이 곳이 강남 땅인지라 한인들이 너도나도 집을 사들이는 바람에 이 곳의 집 값이 많이 올라 갔었다고 하니 우리의 버릇은 남을 줄 수없는 모양이다.
젊은 이들과 한 방에서 셋이 기거하는 것도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서로 불편하고 코 고는 바람에 밤잠을 설치는 것도 참기 괴로운 나머지 나는 비록 체류기간이 한달밖에 남지 않앗지만 좀더 깨끗하고 아늑한 단독 하숙방으로 옮겨 보기로 하고 하숙집을 나가겠다고 하니 역시 이 집 하숙집 아주머니가 섭섭해하기에 나는 자주 들릴 것을 약속하고 다시 둥지를 버우드(Burwood)지역으로 새로 옮겼다.
새로 이사를 한 곳은 젊은 부부가 사는 곳이었는데 남편은 30세로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고 여자는 28세로 면세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아주머니가 해외 연수차 이 곳에 와 있는 동안 남편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혼으로 당시 아기는 갖고 있지 않았었다.
이 집 시어머니는 나와 한 동갑으로 내가 이 곳으로 이사를 오기전 지역인 스트라스필드에 살고 있으며 집안이 비교적 부유하다고 했는데 이 집 의학도는 맥주를 좋아해 항시 냉장고에 캔맥주를 재워 놓고 심심하면 나에게 캔맥주를 공짜로 안겨 주어서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공짜로 많이도 얻어 먹었다.
내가 맥주를 냉장고에 리필을 시켜주려 해도 이들 부부가 너무고 극력 만류하는 바람에 할 수없이 귀국전에 이들에게 맥주로 한 턱을 쏘아 주었다.
이 집 남편분은 바둑을 특히 좋아 하여 대학생 때 한국기원 2급 자격증을 땄던 내 실력으로는 그의 스승격으로 그와 가끔씩 수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비교적 이 곳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었고 내 학교 생활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있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How to report to your boss.'란 테마(theme)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그 의학도에게 영문 수정을 받은 후에 OHP(overhead projector) 필름을 떠서 무사히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귀국 길에 오를 수있었다.
사실 나는 3개월 동안 하숙집뿐이 아니고 병원, 한의원, 운전 면허 시험장, 등 내가 가볼 수있는 곳은 샅샅히 뒤지면 다녔기에 2003년 아내를 위하여 두번 째 시드니 패키지 여행 길에 올랐을 때에는 가이드가 시드니에서 6년을 산 자기보다도 시드니에 대하여 더 잘 안다면서 자기는 아무래도 나때문에 가이드 생활을 접어야겠다면서 엄살을 떨어야만 했던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