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서 원전에는 유난히 현재 시제가 많이 사용되어 있다. 정황상 과거 시제를 써야 할 곳에도 현재 시제가 사용된다. 영어의 킹제임스 역은 영어 문법상 거칠게 보여도 이 시제를 원전에 충실하게 그대로 옮겼다. 이는 주님의 오심이 영원한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을 문법 자체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이스어에는 '아오리스트'라는 독특한 시제가 있다. '아오리스트'라는 이름은 '경계나 한계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이 시제는 보통은 과거로 쓰이지만, 문장 안에서 시간개념을 배제한 채 쓰일 수 있다. 신약 성서가 무시간성(timelessness)의 동사를 지닌 언어로 쓰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의 오심과 영광화라는 사건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히브리어 동사 또한 무시간성을 지닌다. 이는 영어로 온전하게 옮길 수 없는 특성이다. 히브리어의 무시간성에 대해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내적 의미에는 시간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원전의 언어 자체도 무시간성을 선호하는데, 그 언어에는 때로 하나의 동사 형태가 그 어떤 시제든 상관 없이 나타낼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그 언어의 특성으로 해서 시간을 초월한 내적인 것의 믿을 수 없이 많은 지층들이 문자적 의미에 보다 분명하게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천비 618)
히브리어 동사의 유동성을 나타내는 또다른 예는 창세기 3장 22절이다. 남자와 여자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주님은 "보라 이 사람은 선악을 아는 우리 중 하나와 같[았]다(히브리 원전: hên hâ’âdâm hâyâh ke’achad mimmennû)"라고 말씀하신다. 새교회 저서 <천국의 비밀들>298항에는 이 구절의 hayah(= to be: 과거도 되고 현재도 됨)가 과거형(라틴어 fui)으로 해석되어, "사람은 선악을 아는 우리 중 하나와 같았다(was)"라고 번역되어있다. 이는 사람이 주님의 뜻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로 선택했을 때, 하나님의 형상, 즉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천상적 성품을 잃었다는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항을 제외한 저서 다른 곳에서는 이 똑같은 창세기 3장 22절을 "사람은 선악을 아는 우리 중 하나와 같다(is)"라고 현재형(라틴어 est)으로 해석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잃은 뒤에도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석이다. (결혼애 132:4)
이처럼 히브리어 동사는 하나의 시제에 현재와 과거 두 개념이 동시에 포함되는데, 라틴어나 영어로 번역할 때는 과거나 현재 중 어느 한 시제를 택해서 옮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일반적 성서 역본들에서처럼 창세기의 이 구절을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has become) "라고 옮기는 것은 새교회 가르침이 지지할 수 없는 해석이다. 그렇게 번역하면 천비 298에서 풀어주고 있는 영적 의미와 정반대가 되어버리며, 그것은 오히려 창세기의 뱀이 하는 거짓 주장("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로써, 성서를 천국교리에 근거해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켐튼 프로젝트 안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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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이 사랑과 지혜를 (그 근원이 하나님이신데도) 자기 안에 들어있는 자기 것으로 의식하게 되는 기제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모양을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132:4)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하는 생각은 자기 것이고 자기가 느끼는 감정도 자기 것이라는 의식만큼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특성이기 때문에 결코 거두어가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능력만 있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의식 작용은 없다면,
받아들인 것이 행복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자아라는 의식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이 자아 의식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갖는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나로 있는 자다(I am that I am)"라고 스스로 정의하셨는데, 그것을 현대 용어로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아의식', 또는 '자기 정체성'이 아닌가. 동물에게는 자기 정체성이 없다. 우주 만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 그것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양(模樣, 유사성)'이라 한다.
성서의 '형상과 모양'은 아무 이유 없이 수사적으로 반복된 동의어가 아니라 이처럼 깊은 영의가 숨어 있다.
첫댓글 '나는 나로 있는 자'라는 말씀의 개념.
a. 하나님이 스스로 정의하심.
b. 자아의식. 자기정체성.
c. 하나님의 특성.
d. 하나님의 모양(유사성).
형상과 모양의 영의.
a. 하나님의 형상 :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능력.
b. 하나님의 모양 : 근원이 하나님이신데도 사랑과 지혜를 자기것으로 의식하게 되는 기제.
상실 여부.
a. 형상 : 잃을 수 있다.
b. 모양 : 잃을 수 없다.(거두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