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光海) 제주에 유배오다
광해는 1575년(선조8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서자이긴 했으나 영특했다고 한다. 하루는 선조가 여러 왕자를 불러 놓고 '반찬 가운데 무엇이 제일이냐?'고 물었다. 왕자들은 저마다 음식재료를 입에 올리는데 광해군은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물은 왕에게 광해는 '소금이 아니면 100가지 맛을 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남다른 영민함을 보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신성군이 사망하고 의주로 피신해야 할 처지가 되자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봉하고 권섭국사(權攝國事) 지위를 내려 분조(分朝/반으로 나눠 임시로 세운 조정) 다스리게 했다. 광해군은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평안도 강원도 등을 돌고,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 경상지역까지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격려하며 군사를 모으는 등, 나라를 부분적으로 잘 다스렸다.
왜란이 종료되고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아들여 1606년 영창대군을 얻었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인 남인의 지지를 받은 광해군의 지위는 흔들림 없었다.
선조는 병상에서 후계 결정을 미루다가 임종에 다다라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승하한 당일 1608년 음력 2월2일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안정을 위해 피폐해진 토지 생산성의 회복과 함께 도탄에 빠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경기도 지역에 한해서 최초로 대동법을 실시하여 토지조사와 호적정리가 이뤄져 국가 세수를 확보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광해군1619년(광해11년)에 명,청 교체기의 주변 강국 정세 변화에 따른 위기가 찾아왔다. 후금의 압박 때문에 위기를 느낀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파견하면서 전쟁 상황을 보고 후금의 승전기미가 보이면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밀지를 내렸다.
전쟁이 후금에 유리하게 되어가자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하며 '왕의 밀지를 전하며 '후금과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왕의 밀지를 전달했고 그 후 조정 대신들은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고 아우성이었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을 편들면서 일본과도 국교를 재개하며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상감행실 등이 재간행과 국조보감 선조실록 편찬과 무주 적산산성을 축조하는 등, 궁궐 신축과 중건 불타버린 종묘 중건, 창덕궁 중건, 창경궁 중수,인경궁과 자수궁 신축은 물론 성벽 수리, 무기 수리와 제조 등,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第)의 폐륜적인 국왕이라는 죄목과 함께 전통적인 명나라와 신의를 저버린 외교까지 평가절하고 폐위 사유로 작용했다.
1613년 영창대군이 죽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출신 7인이 은 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일으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고 강화부사를 시켜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능양군(후에 인조)의 아우 능창군마져 강화도 교동에 보냈다가 살해했다.
1617년에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정홍익, 김덕함 등이 반대의사를 밝히자 귀향보냈다. 결국 1618년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하였다. 폐모살제로 불리는 광해군의 행태는 서인과 남인 등, 일파에게 반정의 뜻을 세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광해는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로 이배(강화로 유배시켰다가 제주로 이송했다고 하여 이배라는 말을 씀)될 때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궂은 비바람 성문 앞을 흩뿌리고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음산한 기운에 백척이나 솟은 누각
滄海怒濤來薄幕 창해노도래박막/성난 바다 파도 속에 날은 어스름한데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추색대청추/푸른 산 슬픈 빛은 가을 빛을 닮았구나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고향 가고픈 마음 풀보기도 지겨운데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먼 객지에서 소스라쳐 꿈을 깬다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煙波江上臥孤舟 연파강상와고주/연기 깔린 강 물결 위 외딴 배에 누웠구나'라는 내용의 칠언 율시를 읊기도 했다고 하며 배의 사방을 막아 밖을 내다 보지 못하게 하여 오랜 항해 끝에 1637년(인조15년) 6월16일 도착한 곳이 제주 동쪽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에 당도했다. 마침 어등포에 마중나온 제주 목사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배안에서 자기편인 즐 알았던 이들이 모두 적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말)이라는 사기에 나온 글을 모르시겠습니까? 라는 비아냥 섞인 말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등포에서 하루를 묵은 후 제주목으로 옮겨 망경루 서쪽에 마련된 위리안치소에서 격리 유폐하고 바깥 출입도 하지 못하게 자물쇠
까지 채웠다고 한다.
광해군은 1641년 음력 7월 초하루 67세의 비운의 생을 마감했고 그 소식을 들은 제주 목사 이시방이 예를 갖춰 염습에 임했다고 한다.1641년 7월27일 빈소를 관덕정으로 옮겨 왕의 승하시에 치르는 대제를 지내고 제주 삼읍(지금의 제주시, 표선면 성읍, 대정읍)을 돌아 음력8월18일 제주를 출발 9월10일 남양주 진건읍 산소에 도착 10월4일 장례를 치렀다.
제주에서는
'칠월 초하루 날이여 칠월 초하루 날이여
대왕 어붕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 오람서라'라는 광해우(光海雨)라는 민요가 불렸다고 한다.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
김만일은 1550년(명종5년) 경주김씨 김검룡의 7세손으로 정의현에서 태어났으며 서귀포 남원읍 의귀리에서 말산업을 이끌었다.
김검룡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 1등 공신 김인찬의 아들로서 태종이 제주도의 마정조직을 개편할 때 제주에 감목관으로 파견, 행정을 총괄하는 도지관으로 봉해져 태종 3년 준마 6마리를 조정에 바쳤다고 한다.
세종 때에 이르러 제주 국영 목마장의 체계를 갖추었는데 제주사람 고득종이 세종에게 제주의 목장 국영화와 10개 목구 설치를 건의하여 한라산200-400m 중산간 넓은 평원에 10개의 목구로 나누고 10소장을 설치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1594년(선조27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전마 공출을 요구 받자 500필은 바쳤고 1620년(광해군12년)에 다시 말 500필을 바쳐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총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런 상황을 광해군 일기에서는 '벼슬을 제수했는데 일처리가 안되어 광해군이 왜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했는데 안되었는가? 빨리 처리하라고 명령하니 비서실에서 '김만일은 섬에 사는 한 백성에 불과하니 말을 아무리 많이 헌상했으면 값을 쳐주면 되는데 벼슬로 보답합니까 여론이 무섭습니다'며 명령을 회수하소서 라고 답하지 광해군은 '너무 번거롭게 하지말라'고 했고 임명 받은 지 몇일 만에 김만일은 가버렸다. 김만일은 그 후 계속 말을 헌상했고 그의 아들 대명에게 수령을 제수했고, 아들 대성을 단상에 오르게 했고, 손자를 무겸 선전관에 제수 했고, 손자 금려를 변장에 제수했다.
1627년(인조5년)에 500필의 군마를 바친 공으로 1628년(인조6년)에 종1품인 숭정대부(지금의 장관이나 부총리) 헌마공신이라는 직위를 제수 받아 제주 출신으로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김만일 타계 후에도 아들 김대길과 사손 김여가 말 200필을 헌납했고 1658년(효종9년)에 김대길에게 산마감목관직을 제수 받았고 대대로 세습되어 1895년(고종25)년 감목관직이 폐지 될때까지 83명이 세습했다.
김만일은 제주도에서 개인적으로 제주육성마 목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많은 말울 소유한 부자였다. 많은 말을 헌상한 인연으로 김만일이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총관'이란 관직에 오르게 되어 광해군과 김만일의 만남이 있었을 것이고 광해군에게 좋은 이미지가 있어 관직을 제수 할때 대신들의 반대가 컸으나 임명했다는 것만 봐도 김만일과 광해군의 친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오기 5년 전에 헌마공신 김만일은 세상을 떠나 다시 역사적 만남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김만일은 제주마 육성에 힘썼는데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지금의 제주시, 표선면 성읍, 대정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빼앗아 가므로 종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일부러 말의 눈에 상처를 만들어 봉사를 만들거나 병신을 만들어 종마를 보존 육성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김만일은 제주에 유배온 이익을 사위로 맞았으며 1615년(광해군7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여 죽게한 일과 인목대비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에 유배온 간옹 이익과 한 가족을 이룸으로써 중앙과 인적 교류를 통해 위세가 커졌다고 한다.
동계 정온(1569-1641)
정온은 1569년(선조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1614년(광해군6년)에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비판했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사 1614년8월 제주 대정현에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관직에 회의를 느낀 정온은 말년에 고향에 은거 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간옹 이익(1579-1624)
이익은 1579년(선조12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으며 1618년(광해군10년)에 인목대비 폐모사건을 비판하다 광해군의 미움을 사 1618년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중이던 1619년(광해군11년)에 김만일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인제를 낳았고 유배가 풀려 제주를 떠나면서 아들 이익이 국당공파 시조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제주 목사 이원진이 이익에게 '동몽교관'이란 벼슬을 내려 관아에 부속된 학교에서 관직에 있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 중 뛰어난 영재들을 가르치게 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 되었다.
제주 인재로는 고홍진 김진용(호는 명도암) 등이 있다.
선조와 광해군의 소금이야기 장면
임진왜란때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분조의 활약상 장면
양위(讓位)를 하겠다는 선조에게 광해군이 석고대죄를 하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
대동법(大同法) 시행 기념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후, 1623년 강원도, 1651년 충청도, 1658년 전라도 해읍, 1662년 전라도 산군, 1666년 함경도, 1678년 경상도, 1708년 황해도, 전국적으로 실싷사는 데 10년이 걸렸으며 제주도는 실시되지 않았다.
임진왜란때 나라에 말을 바침 김만일이 광해군 때에거 말을 바쳐 종2품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1637년 제주로 이배되어 어등포에 도착하는 장면
어등포에서 하루밤을 보낸 후 제주 성안으로 이동하는 장면
광해군 유배지(제주시 중앙로 82)
1641년 음,7월1일 제주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
제주목사 이시방이 염을 하는 장면
서봉 이시방 초상화(1594-1660)
관덕정으로 빈소를 옮겨 대제를 지내고 제주 삼읍(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돌은 장면
광해군과 부인 문화 유씨 묘(경기 남양주 진건읍 사릉로 264번길 140-66
광해군 묘 앞면
뒷면
헌마공신 김만일 영정
말의 신(神)에 해당하는 별자리인 방성(房星)이 비치는 땅에서 탄생하는 준마의 고장 제주를 표현
김만일 헌마공신은 1550년(명종5년) 7월 14일 남원읍 의귀리에서 태어나 혼례를 치를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김만일 헌마공신을 처가에서 말 한 마리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라 안의 좋은 말은 모두 김만일이 기른 것'이라고 했다
김만일은 임진왜란으로 어려울 때 직접 한양으로 말을 끌고 가서 나라에 말을 바쳤다
선조는 많은 말을 바친 김만일에게 중추부 소속의 종2품 지중추부사 관직을 내렸다
1618년 김만일은 아들들과 함께 점마관에 끌려가 봉변을 댕했고 이 소식을 들은 관해군은 점마관을 파직시켰다
1620년(관해군2년) 71세의 김만일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말의 절반인 500마리의 말을 직접 이끌고 한양으로 가서 바치고 제주 수령들의 가렴주구를 폭로했다
광해군은 김만일을 정2품의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하고 헌마공신이라고 했다
김만일의 후손들은 무려 230년 동안 산마감목관직을 세습하였다. 큰 흉년으로 굶주릴 때 재산을 내놓아 구제하는 등 나누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으며 그의 고손인 김남헌은 곡식 1,340여 섬을 제공하여 1726년(영조2년) 왕으로부터 옷 한 벌을 하사 받기도 했다
동계고택(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1길 13)
동계선생유허비(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내)
오현단(동계 정온을 비롯하여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다(제주시 이도1동)
출처: '광해 제주에 유배오다' 기획전(2019.8.20-11.20) 도록에서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