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1994년 8월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를 완결지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 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 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현대문학〉에 단편 〈군식구〉·〈전도 剪刀〉·〈불신시대〉·〈영주와 고양이〉·〈반딧불〉·〈벽지 僻地〉·〈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단편을 쓰다가 1959년 〈표류도〉(현대문학, 1959. 2~10)를 발표한 뒤로는 주로 장편을 썼으며,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내면서 작가로서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의 후기에서 〈암흑시대〉가 〈불신시대〉를 잇는 작품임을 암시했는데, 두 작품은 여주인공의 형편이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 체험과 심적 변화 등의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불신시대〉가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한 반면에 〈암흑시대〉는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원들의 횡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어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6·25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각종 소설 유형을 종합해놓은 듯하다.
전쟁소설, 이데올로기 소설, 지식인 소설, 빨치산 소설 등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주인공 '하기훈'을 중심으로 그와 석산(石山) 선생, 그와 장덕산 사이의 이념갈등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볼 경우 이데올로기 소설에 가깝고, 제2부만 따로 보면 빨치산 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의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장편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波市〉의 주요인물도 여성이다.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이 나오는 반면에 〈파시〉에는 6·25전쟁 직후에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과 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私小說)이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하소설로서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배경으로 했으나 역사소설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또 이 작품은 몇몇 제한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평사리'와 '간도'의 주민들 전체를 다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곧 작가의 시점이나 화법이 자유롭고 선악관에 의해 인물이나 상황 및 사건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로이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소설집으로 〈표류도〉(1959)·〈김약국의 딸들〉(1962)·〈가을에 온 여인〉(1963)·〈파시〉(1965)·〈박경리단편선〉(1976)·〈박경리문학전집〉(1979)·〈토지〉(1989) 등이 있다.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출처: 백과사전>
소설가 박경리, '월간중앙' 인터뷰
-한국역사에서 지식인은 정치인보다 더 해악적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진주여고 졸업. 평화신문·서울신문·경향신문 기자.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계산>으로 등단.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 <파시> <시장과 전장> 등 장편소설 발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토지> 집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2월호)에서 오피니언리더 100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백남준에 이어 박경리를 꼽았다. 생존자 중에서는 1위다. 여간해서는 매스컴의 인터뷰에 나서지 않던 박경리 선생도 이번만큼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1987년 경남 하동의 한가운데서 시작해 간도와 일본을 거쳐 8·15 광복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 원고지 3만1,200장 분량으로 근세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엮어낸 이 소설로 그는 한국문학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1955년 등단한 이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온 박경리 선생은 여간해서는 매스컴 인터뷰에 나서지 않는다. 낯가림이 심한 탓이다. 이번 인터뷰 역시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과거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으로 향하며 내내 궁금했다. 좀처럼 세상 출입을 않는 노(老)작가가 흔쾌히 인터뷰에 응한 이유가-.
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토지문화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40분. 토지문화관 측은 관장실로 안내하며 약속 시간에 맞춰 박경리 선생이 내려오실 것이라고 했다. 관장실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느니 토지문화관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선생의 자택 앞에서 노(老)작가를 맞이하기로 했다.
2시 정각, 선생이 자택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진분홍 외투와 스카프로 단아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부축 없이는 혼자 현관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오는 선생에게 다가가 관장실이 아닌 자택에서 인터뷰하자고 말을 건넸다. 한참을 망설이던 선생은 ‘거실 한쪽 귀퉁이에서만’을 조건으로 기자와 사진기자를 자택으로 들였다.
몇 년 전 자택에서 촬영한 모 방송국 인터뷰가 나간 뒤 훔쳐갈 것도 없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자택에서는 일절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망설인 이유를 설명했다. 자택 거실에 들어선 선생은 “간수를 잘 못해 고향에서 가져온 생선을 먹고 체해 한 달간 고생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기도”
- 그렇잖아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체하지 않았어도 건강할 수 없는 나이지.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 오래 살았고.”
- 10년 이상은 더 사셔야죠. 텃밭을 직접 가꾸신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텃밭을 가꾸시나요? “지금은 겨울이라 안 하지. 겨울이 아니어도 이제 체력이 달려 일 못해요. 사람들이 나 대신 해.”
- 그러면 책을 읽으며 소일하시겠군요? “아이고. 그런 것도 못해요. 아파서. 토지문화관 일 말고는 별다른 일 안 하고 지내요. 사람이 활력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활력이 없으니까. 또 문화관 일도 바쁘고.”
- 토지문화관 일을 직접 보시나 봐요? “그럼요. 결재도 다 제가 하죠. 반찬도 다 만들어 내가고.”
- 반찬을요? 매일 반찬을 내간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럼요.(웃음)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을 해야 하니 작은 일은 아니죠. 하다못해 된장·고추장·젓갈을 담그는 것도…. 하루에 반찬 두어 가지씩 하죠.”
- 지난해부터 가족에 관한 글을 새로 쓰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전이 있습니까?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요? “쓰고는 있지만, 젊을 때처럼 야망이 없어요. 이제는 빨리 완성해 사람들한테 평가를 받겠다거나 하는 욕망도 없고. 그러니 서서히 하고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굉장히 순수한 것이고.”
- 많이 쓰셨나요? “바쁘게는 못해요. 어떤 때는 흥미가 있다가도, 어떤 때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회의에도 빠지기도 하고…. 인생 자체가 늘 그렇지 않나요? 결론이 없잖아요? 결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강대강 간다고 해도 되돌아보면 제대로 온 것 같지도 않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과 사가 전부 모호한 것이지.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나비야 청산 가자> 의욕이 앞서 아쉬워”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자 선생은 슬며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요즘도 담배를 많이 피우시느냐는 물음에 “거의 안 피우는데 말할 때는 답답해 조금 피운다”고 했다.
- 2003년 <토지>탈고 후 9년 만에 의욕적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3회로 중단하신 <나비야 청산 가자>를 지난해 미완의 상태로 엮어 내셨습니다. 작가들이 미완성 소설을 책으로 묶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나비야 청산 가자>는 영원히 접으신 것인가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내가 그것을 쓰면서 혈압이 굉장히 올랐어. 이제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해. 소설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해요. 복합적인 것이죠. 직물로 치면 단순히 그냥 짜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서론, 본론, 결론의 모양이 다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이제 머리가 당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혈압이 오르고.”
-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중간에 끊겨 너무 아쉽습니다. “나도 그래요. <토지>의 후속처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내가 욕심이 너무 컸어. 후속이라도 단순히 후속이 아니라, <토지>가 한민족의 전반적 이야기를 다뤘다면 <나비야 청산 가자>는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어내 그려 보려고 했거든. 그게 방대한 것이지. 또, 사회 구조상 건드리기가 너무 어렵게 돼 있어.”
- 미쳐 못 쓰신 부분에는 어떤 내용을 담고자 하셨나요? “해방 이후 지식인사회를 제대로 다뤄 보고 싶었지. 한국의 지식인사회는 다른 나라와 사정이 다르거든.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갈라서서 전쟁을 경험했고, 또 정치적 배경에 따라 탄생한 지식인도 가지각색이지. 반체제 운동도 있었고, 또 그 실패를 눈 앞에서 보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해방 후 우리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확립하지 못 했어. 박해까지는 아니지만 시대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명확하지 않은 모습을 취했고. 반대로 이념에 치우쳤던 사람들은 또 지나치게 명확해서 소위 공산주의 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완강함이 있었지. 거기서 나오는 피해가 또 있고…. 이런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했지.”
-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 그렇게 취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여건, 즉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의사를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지. 진실을 말하지 못할 상황이….”
- 그런 이야기를 <나비야 청산 가자>에서 어떤 인물을 통해 보여주실 계획이셨나요? “인물 몇몇이 끌고 나가는 상황은 아니고, 많은 지식인이 끌고 나가는 것이지. 몇 사람의 비극적 생애가 소설의 일부분은 성립하겠지만, 강력하게 끌고 나가는 것은 아니고. 또 사건을 연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지금까지 쓴 것은 초입의 아주 일부분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내가 건드리기 힘들지. 치고 들어간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왔을 거야. 나는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커요. 흔히 정치인이 나쁘다고 하는데 나는 정치인보다 지식인을 더 부정적으로 보거든. ‘따다다’ 총 쏘고 싸우는 전쟁보다 더 치열한 것이 물 밑 지식인들의 의식싸움이야. 그런데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갈라서서 이데올로기 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지식인의 분열적 요소도 문제지만, 차라리 그것은 선명해서 나아요. 이런 선명한 지식인보다 회색 지식인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문제지.”
-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식된 오늘날에도 그렇다고 보시나요? “그럼요. 왜냐하면, 사회주의니 민족주의니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회색적 요소거든. 사회가 흘러가고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데도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쩔 수 없는 방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냐, 목숨을 건 진실이냐의 문제로 나눠 볼 수도 있지. 그런데 목숨을 건 진실이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 (지식인) 스스로도 그 길을 택하려 하지 않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역사적으로 봐도 어쩌다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와 사회를 구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고 거의 지식인들은 기회적인 사람들 아닌가 싶어요. 공산주의만 해도 결과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기보다 그네들을 이용한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했잖아요?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은) 똑같이 피해만 받았죠. 그런 뜻에서 영원히 혁명은 없는 것이지. 반체제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에 한 번은 학생 지도자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기에 ‘너희가 스스로 권위주위를 없애기 위해 나왔는데, 너희가 또 권위주의가 되고 있지 않으냐? 그러면 혁명은 언제 있을 것이냐’고 한마디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소위 좌파 정권이 집권했지만, 절대로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거든. 오히려 강화했죠. 결국 지식인이 그때그때 따라서 외치는 것도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것이죠. 그래서 10년도 못 가 무너진 것이고. 그래서 또 바꿔 보는 것인데, 그것도 봐야 알죠. 시간이 가면서 어떻게 변할런가.”
- 그렇다면 오늘날 지식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날 진정한 지식인이 있나요? 없어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극도로 기술화한 지식만 있지. 진리에 대한 애정이나 정열 같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 정치인들도 정치를 통해 자기 이상을 구현하기보다 출세 또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획득하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추세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잔재이고요.”
“10년 좌파 정권 통해 국민 비판의 눈 키워”
- 2008년은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셈인데, 대한민국의 지난 60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나는 우리가 크게 세 가지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고 봐요. 첫째가 6·25전쟁이에요. 6·25전쟁 당시 사회주의와 소위 민족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머리가 터지게 싸우는 현장을 목도했거든요. 거기에서는 일단 흑과 백이 정해지면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용납이 안 돼요. 뭐 사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흑이냐 백이냐 하는 것으로만 다투는 것이지. 그 결과 전쟁이라는 비참함 속에서 무지한 국민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죠. 그 참상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죠. 두 번째로 우리 국민은 이승만 박사의 독재 하에서 일어난 4·19와 그 다음 일어난 5·16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지난 10년 좌파 정권이 나타남으로써 국민이 비판할 눈을 갖추게 됐죠. 이것이 지난 6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고생하고 또 몸으로 겪고 하면서 얻은 하나의 판단이자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 지난 10년 좌파 정권을 통해 국민이 비판할 눈을 갖추게 됐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정치라는 가장 불순한 것이 부각된 것이라고, 가장 큰 잘못이었다고 생각해요. 정치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합리화하는 상황을 국민한테 강요했죠. 국민이 그에 대해 반항한 것이고요. 어느 지도자든 표밭만 생각했거든요. 여기에서 표가 얼마나 나오느냐만 생각해서는 (정치가) 제대로 될 수 없죠. 그런 것을 국민이 깨달았어요. 현실적으로 볼 때 오늘날에는 국민이 앞서가고 정치가들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요. 환경문제만 봐도 그렇죠.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 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을 전부 알 수 있거든요.”
인터뷰가 길어지자 선생은 한 문장을 끝낼 때마다 한 번씩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타 들어가는 담배는 끊어질 줄 몰랐다.
-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어떻게 보시나요? 낙관적입니까, 비관적입니까? “나는 세계적으로는 비관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비관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각보다 인간이라는 자각을 해야 해요.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마찬가지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구가 굉장히 큰 것 같지만, 우주 속의 지구는 아주 작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는 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즉각 알 수 있잖아요? 이 작아지는 지구에서 분열이 생기면 그만큼 위험도 커집니다. 그렇잖아도 지구가 작아졌는데, 이것이 또 몇 조각으로 갈리면 살 수 있겠어요? 특히, 이제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나는 누가 고향이 어디이니 무슨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마다 ‘작가는 여하한 경우에도 세계인의 한 사람이다. 어떤 지역의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요. 언제든 우리는 인간인 것이죠. 너와 나를 강력하게 갈라 놓으면 거기에는 어떤 진실도 없어져요. 지구가 작아지고 가까워진 오늘날 자본주의다 뭐다 해서 돈싸움을 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죠.”
선생은 화제를 지식인에서 근래 관심을 쏟고 있는 생명과 환경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 청계천 살리기가 토지문화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계천을 살리자는 조그마한 모임이 있었어요. 그 모임 세미나를 토지문화관에서 두어 번 했죠. 그때만 해도 이것이 될지, 된다면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나 가능할지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정보를 이명박 씨가 잡은 것이죠. 운수가 좋았죠.”
- 선생님께서 처음 청계천 살리기를 시작하셨을 때 생각했던 청계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서울시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을 반대했어요. 국가 차원에서 몇 조 원 내서 아주 본격적으로, 근본적으로 하라고 했죠. 그런데 정부에서는 관심이 없었지. 그러니까 이명박 씨로서는 할 수 없잖아요? 3,500억 원 정도 가지고 그 이상 뭘 어떻게 해.”
- 지금의 결과에 그럭저럭 만족하신다는 뜻인가요? “에휴. 만족하겠어요?(웃음) 만족할 수 없지. 그래도 그 정도라도 해서 결과적으로는 생태계가 살아났으니 좋기는 한데,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비교하면 규모로 볼 때는 몇 분의 일밖에 안 돼. 그것이 어려운 점도 있어요. 내가 생각했던 청계천 복원은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는데, 지금 서 있는 빌딩을 없앨 수는 없잖아.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두고두고 해야 할 일이야. 자연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잖아? 인간과 세월과 자연이 합쳐져야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단시일에 되는 것도 아니고…. 인내를 갖고 길게 내다봐야 해요.”
청계천 복원운동 토지문화관에서 태동
- 청계천 살리기에 앞장섰던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대운하 건설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생태계가 훼손된다면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대운하 건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잘 모르겠고, 또 그것이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것이니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물류를 위한 운하라면 절대 반대해요. 우리 국토가 결딴나고 만신창이가 돼요. 그러나 나는 물길은 원해요. 세계에서 물전쟁이 시작되고 있거든요. 석유는 고갈돼도 인간이 살 수 있지만, 물이 고갈되면 생명은 다 죽습니다. 우리나라도 길게 보고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물 저장을 위한 물길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지금은 비가 오면 물을 그냥 흘려 보내잖아요? 물을 흐르게 하면서 저장하는 것이 댐에 가두는 것보다 생태적인 방법이고요. 또 강처럼 물이 흐를 수 있는 물길을 만들면 생태계도 복원할 수 있어요. 조그만 청계천으로도 서울의 기온이 달라지고 공기오염 정도가 달라졌다고 하잖아요? 또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물길을 만들면 그것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계적 관광 추세가 특이한 볼거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 좋은 데를 찾아 가는 것이잖아요?”
한국을 대표해 세계에 알리고 싶은 문인 1위로 꼽히는 작가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6·25전쟁 와중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키우며 살던 그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4년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그의 자전적 작품. <시장과 전장>에 등장하는 황해도 연백의 연안여고 선생 ‘남지영’의 모델이 바로 박경리 선생 자신이고, ‘차기석’의 모델은 1·4후퇴 때 실종된 선생의 남편이다.
1969년 대표작이 된 <토지> 1부 연재를 시작한 선생은 그 후 25년간 세상과의 차단 속에서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
- <월간중앙>이 건국 60주년을 맞아 오피니언리더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로 꼽히셨습니다. 오피니언리더들이 왜 선생님을 꼽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상징적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 자체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생존보다 강한 것은 없거든요. 이데올로기도 원래는 생존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60년 동안 이데올로기가 생존을 무시했어요. 나는 이데올로기든 경제든 사회·정치제도든 그 어떤 것도 생존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봐요.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나는 문학지상주의를 반대해요. 문학도 풀지 못한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자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죠. 문학을 위해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있기 때문에 문학이 있는 것입니다.”
- 무려 25년간 <토지> 집필에 매달리셨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 <토지>는 무엇인가요? “나는 설명을 부여하고 싶지 않지만, 토지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에요. 강 같이 흐르는…. 그런 측면에서 <토지>는 인물이 더 많이 나와도 괜찮았어요. 나는 몇 명이 나왔는지 사실 기억도 못해. 세어 보지도 않았고. 그런데 조사해 본 사람들이 600명이다, 700명이다 하는 것이죠. 조금 유례가 없는 일이겠죠?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이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것은 주어진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죠. 내가 가장 큰 뜻을 두었던 것은 ‘토지’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는 흔히 토지라고 하면 관념상 토지문서를 생각해요. 토지문서는 다시 말하면 소유를 위한 서류거든요. 인간이 유목생활을 하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살게 되면서 소위 자본주의가 시작됩니다. 사유재산이 시작되는 것이죠. 즉, 토지는 인간의 욕망이 실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죠.”
- 600여 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주갑이!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지. 무심히 시작한 인물인데,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고. 길상이는 처음부터 욕심이 많았던 인물인데, 욕심을 부려서 그런지 실패했고.”
- 선생님께서 애초 만들고 싶었던 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요? “좀더 강렬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약해요. 반듯하기는 한데 인간적 느낌이랄까 이런 것이 약해.”
- 선생님을 닮은 인물은 없나요? “없어. 나 닮은 사람도 없고, 등장인물 중 누구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해서 쓴 사람은 없어요. 사람들은 서희를 나라고 하는데, 서희의 어떤 요소 중 나를 닮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조금씩 내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지, 그것이 서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야.”
▶텍스트
이데올로기·문학은 생존을 능가하지 못해
- 서희의 어떤 부분이 선생님과 비슷하다고 보시는데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일 뿐이지, 쓰면서 그런 것을 생각하지는 않으니 나는 모르겠어. 쓸 때는 인물의 성격 하나만 추구했으니까. 나랑 닮은 사람 없어요.”
- 소설을 끝내 놓고 간도를 방문하신 것으로 압니다. 한 번도 밟아 보신 적이 없는 용정촌을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습니까? “그게 나도 참 불가사의해. 완전 생짜는 아니고, 기후 관계나 지리 등에서 용정 사정을 상세히 적은 자료를 참고하기는 했지. 그렇지만, 결국은 작가의 상상력이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하동도 한 번도 안 가 보고 썼는데, 다 쓰고 보니 하동에도 진짜 그런 집이 있다고 하더라고. 연못도 있다고 하고.”
-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상상력으로만 쓰신 것인가요? “몰랐죠. 전혀 모르고, 가 보지도 않고 썼죠. 용정도 마찬가지고. 그게 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하하하…. 설명이 안 되는 것이지.”
박경리 선생은 문학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토지> 이야기가 나오자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 혹시 천재이신가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소설가 중에는 굉장히 실증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다 가 보고, 조사해 보고 하면서 글을 쓰는…. 나는 그러라면 못 써요. 나는 상상력이 없는 글은 생각할 수 없거든.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내 상상을 가지고 치고 올라와야지. 이것 치우고, 저것 치우고…. 나는 그렇게는 못해. 내 방식은 그래. 나는 여행도 거의 안 했어요. 앉아서 머리 속에서 하는 것이지.”
- 선생님의 상상력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이죠? 해외여행은커녕 서울 나들이도 거의 안 하시고 원주에만 틀어박혀 지내시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까 상상력이지.(웃음) 많은 독서가 밑거름이 됐겠죠. 다리 하나만 묘사하려고 해도 독서를 통해 내 머리 속에 저장된 다리 양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글을 쓸 때 그 중에서 택일하는 것이지. 무에서 유가 있을 수는 없거든. 결국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끊임없는 독서 같아. 쌓여 있는 독서의 양에 따라 상상력이 자유로울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지.”
- 여고 시절 엄청난 독서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독서광이었지.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대로 다 읽었으니까. 누구한테 하루 동안만 빌린 책 세 권을 다 보려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 독서 범위도 굉장히 광범했지. 하다못해 천문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천문학 책도 찾아봤으니까. 세계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게는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읽은 것이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것 같아.”
- 그렇게 읽으신 책 가운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을 만한 책이 있습니까? “누구 것이 좋다 이런 것은 없고, 다만 내가 조금 영향을 받았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있죠. 도스토옙스키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집념이 아주 넌더리가 나 이가 갈릴 정도로 집념이 가득 찬 사람이거든. 나는 그를 어떤 면에서는 좋아하기는커녕 혐오하기까지 하는데도 그 사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또 영향은 안 받지만 좋아하는 작가에는 <그대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를 쓴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가 있어요.”
- 국내 작가 중에는 영향을 받았다거나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없나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요. 거의 읽은 것이 없거든요.”
- 일부러 안 읽으셨나요? “해방될 때까지는 한글을 몰랐어요. 일제 강점기 때 한글을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첨예한 시대를 살았지.”
- 그럼 한글을 처음 배우신 것이 언제인가요? “학교에서 배운 적은 없어요. 여고 시절 <신천지>라는 잡지를 읽기는 읽었는데, 그것도 접속사만 한글이고 나머지는 다 한자였으니까 읽었던 것이지.”
- 한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럼 해방 이후인가요? “그렇죠.”
- <토지>에 쓰인 수많은 토속적 단어와 표현을 생각하면 한글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읽기 시작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완전히 생짜죠. 어디 책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주변에서 가져온 것이거든. 내가 한글로 글을 쓴 것이 거의 서른 살이 다 돼서입니다. 그런데 글자란 것은 하나의 중계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사실 자체는 아니거든요. 내가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일본어와 한글은 별 차이가 없었어요. 굳이 도움이 됐던 것을 찾자면, 내가 시골 태생이라는 것, 그것도 이순신이 나온 통영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 또 민란이 수도 없이 일어난 진주에서 공부했다는 것이지. 이 두 도시가 다 반골이고, 일본에 저항했던 곳이거든. 그 영향이 굉장히 크죠.”
해방 때까지 한글 몰라
- 통영이 고향인데 왜 원주에 정착하셨나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으시고요? “딸 때문이었죠. 내가 서울에서 손주를 기르다 딸이 원주 시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지. 남편(김지하)도 없이 시집살이하는 딸 아이의 울타리가 돼 주려고 내려온 것이지. 그랬던 것이 애들은 전부 (원주를) 떠나고 나만 남은 것이야.”
선생의 사위는 <오적>의 시인 김지하다. 그러나 선생은 애써 사위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려 했다.
- 따님과 손주들은 자주 내려오나요? “자주 못 와요. 요즘 생활이 다 그렇잖아요. 나도 원하지 않고. 여기 일들 많은데, 오면 도와주기는커녕 더 힘들어.”
- 김지하 선생의 율려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유. 나는 율려니 그런 거 몰라요. 그거 내가…. 당장 밖에 나가면 손에 잡히는 것이 푸른 색, 푸른 생명인데 여기에 자꾸 말을 만들어 붙이고는, 그게 사상이다 진리다 하는 것이 다 지식인의 폐단이지. 철학은 다 자연에 있어요. 지식인의 결함이 뭔지 알아요? 간단명료한 진리에 자꾸 덧붙이는 것이야. 쓸데없는 것 붙이고, 또 붙이는 것이지. 그러면서 진리와 자꾸 멀어져 가는 거예요.”
사위인 김지하 선생 이름만 나오면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 세상 나들이를 도통 안 하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글은 요즘 젊은 작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을 보여주시는데요. 세상에 대한 정보는 무엇을 통해 얻으시는지요? “통로는 역시 자연뿐이지. 인간의 입을 통해 오는 것은 모두 덧붙여지고 왜곡돼 있어요. 그러나 자연은 바로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요.”
- 인터넷은 이용하시나요? “그런 것 안 해요. 나는 컴퓨터를 안 써요. 내가 없는 것이 세 가지인데, 우선 컴퓨터가 없고 신용카드가 없고 또 휴대폰이 없어요. 나는 완전히 원시적으로 살아요. 필요를 못 느껴요.”
- 텔레비전은 보세요? “잘 안 봐요. 가끔 틀어도 내게 크게 득이 되는 것이 없어.”
- 신문은요? “신문도 큰 제목만 읽지. 그런데 그게 새로운 것이 없어요. 뭐, 내가 앞서가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뒤에 따라오더라고.”
- 그러면 주로 책을 읽으시나요? “책도 잘 안 읽어. 첫째는 내가 눈이 안 보이니 읽을 수가 없고, 둘째는 책에도 새로운 정보는 없어요. 내가 볼 때는….”
- 매년 한국작가 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사로 거론되고는 합니다. “인간의 허영으로 봐서 안 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인간은 다 허영이 있으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무 거기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상은 주는 것이지 받으려고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거든. 주면 그때야 감사하게 받을 수도 있고, 나는 안 받겠다고 할 수도 있고…. 그것은 자유지. 그런데 주기도 전에 추천받으려고 운동하는 것은 보기가 참 역겹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품으로나 작품으로나 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겸손해야 해. 내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지. 내 작품이 대단하니 받겠다고 쫓아다니는 것은 추해. 그러면 나라 체면도 깎여. 선비들은 상을 받겠다고 아우성치지 않았거든. 노벨상을 받아서 대접받기보다, 그런 국민으로서 품성을 지키는 것이 내 생각에는 더 의미 있는 것 같아.”
-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문명국가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처음에는 엉성하다가도 올라가다 보면 세련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요즘 세계적 추세가 영화나 연극을 두고 문화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은 문화가 아니거든요. 문화란 사회 전반이 갖는 의식이에요. 삶의 질을 가장 좌우하는 것이 문화죠. 그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 문명이고요. 지금은 문명이 문화를 지배하는 형태로 가고 있어. 심각한 문제지. 문화가 문명을 지배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해. 대중적 의식이 변화해야지.”
애초 건강이 안 좋아 1시간 이상은 앉아 있지 못한다고 했던 박경리 선생은 “머리가 아프니 이제 그만하자”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문장 중간중간의 마른기침은 점점 잦아졌다.
- 한국의 문학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문학이 상품이 돼 있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공공연히 (문학을) 상품으로 생각하는데….”
- 자본주의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자본주의 시대라지만, 문학은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거든. 그렇지 않아요? 문학이 그릇 찍어내든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 그런데 다들 그렇게 생각해. 문학이란 정신과 의식의 반영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물질의 반영인 상품과 동질에 설 수 있겠어요? 문학을 상품이라고 한다면, 결국 귀결되는 것은 종이에 인쇄된 활자뿐이지. 하지만 벌레가 기어가다 장애물에 걸리면 방향을 돌리듯 인간의 사상과 생각, 가치관도 가다 부딪히면 돌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아. 인생에 결론이 없듯 문학도 결론이 없어. 끊임없이 돌고 돌아 영원히 가는 것이 문학의 숙명이지.”
문명이 문화를 지배하는 시대
- 문학은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인간이 로봇이 되지 않는 이상 문학은 존재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춤이나 희곡·영화 등 사회 예술의 전 분야가 문학이라는 지지대 없이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문학이라는 지지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절대로 문학이 없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인간이 전부 기계화하면 문학도 없어질지도….”
- 그렇다면 이메일이나 블로그처럼 가벼운 글쓰기가 대세인 오늘날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에요.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죠. 모호한 구실이거나…. 문학은 결론이 없습니다. 암중모색이에요. 나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결론 내리는 사람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아무 결론 내릴 것이 없어. 한치 앞의 자기 불행도 모르는 것이 인간인데.”
- 마지막으로, 후배 문인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아휴~. 저들 알아서 할 일이지, 당부한다고 뭐가 되겠어요?”
1시간 반이 넘게 이야기를 잇던 선생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마지막 기력을 뱉어내듯 한 문장 한 문장을 힘겹게 이어 나가는 선생에게 더 이상 질문한다는 것이 죄송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생은 이제 정말 그만하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선생은 “다리가 불편해 일어나 인사하지도 못한다”며 미안해 했다.
<자료제공: mckim41님>
'토지' 내 용
<사진: 토지의 무대인 하동군 평사리>
제1부>
구한말인 1897년 무렵,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에는 5대째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만석꾼 최 참판 댁을 중심으로 농민들인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최씨가의 유일한 혈육인 어린 서희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할머니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하녀 봉순이를 동무하며 자라고 있고, 머슴으로 들어온 구천이는 무언가 많은 고뇌와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구천이는, 최 참판 댁의 정신적 지주인 윤씨 부인이 청상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훗날 동학당 접주가 되어 사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게 된 아들 '환'이다. 아버지를 따라 동학당에 참가했던 환은 몸을 숨기기 위해 구천이란 가명으로 최 참판 댁에 찾아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이복형인 최치수의 부인 별당 아씨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별당 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자의식이 강하고 냉정한 최치수는 어머니를 감싸고 도는 비밀을 알기 위해 몸부림친다. 또한 재종형 조준구와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성적 무능력자가 된다. 그는 조준구가 구해 준 총으로 구천과 별당 아씨를 찾기 위해 지리산을 헤맨다. 별당 아씨는 환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환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로 돌아간다.
자신의 신분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하녀 귀녀는 최 참판 댁의 씨를 얻으려 최치수에게 접근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김평산과 음모를 꾸며 칠성이와 강 포수에게 몸을 허락하여 씨를 받는다. 최치수가 성불구자임을 모르는 귀녀는 강 포수의 출현으로 일이 틀어지자 김평산으로 하여금 최치수를 살해하게 하고 자기 몸의 씨를 내세워 집안의 대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에 의혹을 가진 윤씨 부인은 침모 봉순네의 귀띔으로 귀녀의 자백을 받아 내고, 김평산과 칠성은 함께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자살하고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한편 최 참판 댁의 소작인 용이는 무당의 딸 월선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항상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질투심이 많은 아내 강청댁의 행패로 월선이는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용이는 강청댁과의 성적 관계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는 마을로 다시 돌아온 임이네를 돌봐 주다 관계를 맺고 홍이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최 참판 댁에 조준구가 부인 홍씨와 꼽추 아들 병수를 데리고 찾아든다. 김평산에게 최치수의 살해를 은연중 시사했던 그는 최 참판 댁 재산을 노린다. 그러던 중 마을을 휩쓴 호열자와 흉년으로 윤씨 부인과 김 서방, 봉순네 등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조준구 일가는 최 참판 댁을 차지하고 마음껏 세력을 휘두른다.
고아 신세가 된 윤씨 부인의 손녀 서희는 타고난 총명함과 함께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인 그녀는 집안을 지키기 위해 조준구 일가와 맞서 나간다. 그러나 서희를 돌보던 수동이 죽고, 러일 전쟁이 터지고 을사 조약이 체결되는 등 상황은 더욱 조준구에게 이롭게 돌아간다. 조준구의 행패에 불만이 쌓인 마을 사람들은 목수 윤보를 선봉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최 참판 댁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재물을 탈취하고 조준구 내외를 죽이려 하지만 찾아 내지 못한다.
그 틈에 서희는 부친인 최치수를 모시던 종인 길상으로 하여금 토지 문서를 찾게 하여 일시 힘을 회복하지만, 조준구 내외를 죽이는 데에 실패한 그들은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서희는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겨 준 재물을 지니고 이들과 함께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떠난다.
<제2부>
간도에 정착한 서희는 가문을 되찾으려는 일념을 불태우며 윤씨 부인이 남긴 재물을 자본으로 길상과 공 노인의 도움을 얻어 두류(豆類)와 토지 거래에 성공하여 거부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인 이동진의 군자금 요청을 거부하고 친일적인 운흥사 공사에는 기부금을 내는 등 공공연한 친일 행위도 불사한다. 그녀는 이동진의 아들 상현을 사모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이미 결혼한 상현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길상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는다.
길상은 서희와 결혼하기 전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만났던 옥이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는 가문에 대한 서희의 무서운 집념과 완전히 허물 수 없었던 신분의 벽 때문에 고독을 느끼지만, 환의 출현으로 그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
환은 별당 아씨가 죽은 후 윤봉, 윤도집, 지삼만, 송관수,. 판술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한다. 방법론상의 견해 차이로 윤도집, 지삼만 등과 대립하며 간도로 건너간 그는 길상을 만나고 이동진, 권필응 등과도 만난다.
서희와 길상의 결혼으로 충격을 받은 상현은 서울로 동아와 서의돈, 임명빈, 황태수 등과 사귀며 일본으로 유학도 한다. 그러나 그는 길상에 대한 패배감, 아버지 이동진과 가족에 대한 죄책감, 스스로의 무력감 때문에 정신적 방황을 계속한다.
한편 서희 일행과 헤어지고 기생이 된 봉순은 기화라고 이름을 바꾸고 천부적인 미모와 소리로 유명해진다. 그녀는 간도로 건너가 서희, 길상, 고향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지만 외로움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월선, 임이네, 홍이와 함께 용정에 정착한 용이는 월선과 함께 잠시 국밥집을 한다. 그러나 그는 임이네의 돈에 대한 욕심에 못 견뎌하고, 자신이 장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그는 홍이를 월선의 곁에 남겨 두고, 임이네와 함께 영팔이가 정착한 퉁포슬에서 청인의 소작인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겨울에는 벌목꾼으로 일한다.
임이네는 월선 몰래 가로챈 많은 돈을 용정의 큰 불로 잃게 되지만 탐욕은 갈수록 심해진다. 월선은 용이가 떠난 후 홍이와 함께 살지만 암으로 한많은 일생을 마친다.
김평산의 아들 기복은 김두수로 이름을 바꾸고 간도 땅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한다. 그는 달아난 금녀를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대신 길상을 짝사랑하던 공 노인의 양딸 송애를 농락한다. 달아난 금녀는 독립 운동을 하던 장인걸의 도움을 얻어, 귀화한 한국인 쎄르란 심의 집에 은거하며 차츰 삶의 안정을 찾게 된다.
귀녀의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던 강 포수는 그 아들에게 두메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가 성장하자 송장환에게 교육을 부탁한다. 조준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는 송관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조준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인으로 가장하여 그의 집에 잠입한다.
서희는 공 노인을 내세워, 광산에 투자하여 큰 실패를 본 조준구에게 접근하여 빼앗긴 재산과 토지 문서를 되찾는다. 그녀는 월선의 장례식 후 영팔이네와 용이네를 귀향시키고, 독립 운동을 위해 환과 함께 떠나 버린 길상과 헤어져 두 아들(환국, 윤국)과 유모, 안자와 함께 그리던 귀향길에 오른다.
<제3부>
귀향 후 진주에 정착한 서희는 조준구와 만나 5천 원에 평사리의 본가를 되찾는다. 서희는 완전히 복수를 달성하지만,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리면서 두 아들을 보살피며 진주에서 살아간다.
용이는 임이네의 탐욕에도 무심해진 채 평사리 서희의 본가를 지키며 안정된 말년을 보낸다. 월선의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간도의 벗들과도 헤어진 홍이는 생모 임이네의 탐욕에 대한 증오와 자학으로 비뚤어진다. 그는 사랑하는 장이의 몸을 겁탈하지만, 의병의 혐의를 받고 잡혀갔다 온 후 마음을 잡고 운전 기술을 배워 김 훈장의 손녀 보연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과 결혼한 장이와의 불륜의 현장이 발각되어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는 용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오랫동안 계획해 오던 간도행을 준비한다.
윤도집과 운봉의 죽음으로 동학의 세력은 와해되고 지삼만은 청일교의 교주가 되어 많은 신도와 돈을 모으게 된다. 중국에서 귀국한 환은 지삼만의 밀고로 일경에 잡히지만 조직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지삼만 역시 심복인 지 서방에게 살해당한다.
김두수는 마침내 중국 여인으로 가장한 금녀를 붙잡고, 그녀를 통해 독립군의 정보를 빼내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금녀는 침묵으로 맞선다. 그 후 그녀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한다. 한편, 김두수는 관수의 주선으로 독립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간도로 간 동생 한복과 해후한다.
길상은 서의돈과 함께 계명희 사건에 연루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한다. 이에 서희는 서울을 왕래하면서 길상의 뒷바라지에 힘쓴다. 환국은 아버지 길상을 매우 존경하며, 그의 자질을 이어받아 그림에 소질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 서희의 뜻을 따라 와세다 대학 법과를 지원한다.
상현은 일본 유학 후 서울에서 기화를 모델로 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무력감 때문에 방황한다. 임명빈의 누이 명희는 상현에 대한 사랑이 거부되자 조용하의 후처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시동생 찬하에 대한 남편의 질투와 외도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하던 기화는 상현을 사랑하나 그에게서 끝내 버림받고 상현의 딸 양현을 낳는다. 아버지 이동진의 죽음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갈등을 겪던 상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중국행을 감행한다. 홀로 양현을 키우던 기화는 아편쟁이가 되어 서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지만, 상현과의 관계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희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기화는 그녀를 사모하던 정석의 설득으로 다시 평사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석이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가정 파탄이 일자 그것이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섬진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기화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은 상현은 긴 방황을 청산하고 소설을 써, 그 고료를 양현을 위해 써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명희에게 보낸다. 명희는 양현을 양딸로 데려가길 원하지만 서희는 이를 거부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양현을 키운다.
<제4부>
김환이 죽고 길상이 수감된 후, 관수와 강쇠 등은 만주, 조선에 걸쳐 인망을 엮는 데 힘쓴다. 관수의 아들 영광은 강혜숙과 편지를 교류하는 중 신분이 탄로나고 퇴학까지 당하자 가출한다. 이것이 한이 된 관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독립 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길상의 출옥 후를 생각하며 관수는 서울 출신의 소지감을 운동에 끌어들이고, 지감은 그를 통해 지리산의 강쇠, 해도사를 알게 된다.
청년기의 환국과 윤국은 3·1운동 후 학생 운동이 연이어 일어나는 가운데, 자신들의 풍족한 처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으로 인해 방황과 고민이 깊어가고, 윤국은 가두 시위에 참가하여 감옥살이를 하고 무기 정학 처분을 받는다. 서희는 아들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집안의 재산을 부담스러워하는 두 아들을 보며 공허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점점 황폐해져 가는 명희에게 조용하는 동생 조찬하와의 불륜을 이유로 이혼을 선언한다. 항복을 받아 낼 것을 의도했던 조용하였지만 명희는 순순히 이혼에 응하겠다며 자진해서 떠나 버리고, 조용하는 분노에 몸을 떤다.
일본 여인과 결혼한 조찬하는 일본에서 오가다란 일본인과 사귀게 되는데, 오가다는 명희의 제자인 유인실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코스모폴리탄이다. 조찬하는 그와의 대화에서 일본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을 구명해 보려고 애쓴다.
가출한 명희를 불러들인 조용하는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명희의 마음을 되돌리려 애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산장에 가두고 능욕한다. 모욕감에 자살을 기도하다 살아난 명희는 여욕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하고, 결국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조찬하는 유인실과 오가다와 함께 시골 학교의 명희를 찾아가지만 초라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고. 그녀 역시 모멸감에 괴로워한다.
한편, 길상은 어느 새 중요해진 자신의 위치를 종종 낯설어하고, 가족의 사랑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최씨 집안에서 꽃 같은 존재인 양현이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연스레 알아 나가기를 바란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오가다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던 유인실은 오가다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것'을 바치고, 결국 그로 인해 아이를 얻게 된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일본에서 아이를 낳아 조찬하에게 부탁하고, 독립 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송장환을 찾아가고 그를 통해 윤광오를 만나게 되고, 찬하는 고민 끝에 아이를 자식처럼 기른다.
인실이 떠난 후 상실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오가다는 만주에 와 떠돌아 다니다 토건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여행을 하던 중 하얼빈에서 우연히 인실의 자취를 발견한다.
<제5부>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점점 장기전에 빠지며 열강에 외면당하고, 인적·물적 자원이 고갈되어 간다. 호열자로 인해 죽은 아버지 관수의 유해를 모시고 진주를 찾은 영광은, 강에 빠져 자살한 어머니 기화를 생각하며 그 강에 꽃을 던지는 양현을 보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백정의 자손과 기생의 딸로서 비슷한 슬픔을 나눈 두 사람은, 영광이 만주로 도피하면서 헤어지게 된다. 양현을 이 부사 댁에 입적시켜 둘째 아들 윤국의 배필로 삼으려한 서희는, 양현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이가 멀어진다. 상심한 윤국은 학병에 끌려가 소식이 없다. 의전을 졸업하고 인천에 취직한 양현은, 점차 정세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서희에게 이끌려 다시 귀향한다. 가산을 탕진하고 꼽추 아들 병수에게 얹혀 사는 조준구는, 중풍에 걸려 누워 지내면서 갖은 행악을 부리다 죽는다.
계명회 사건 이후 출옥한 길상은 도솔암에서 관음 보살의 탱화 제작을 결심하고, 화려함과 함께 삶의 본질인 외로움과 슬픔이 잘 어우러진 걸작을 남긴다. 보연의 금붙이 밀매 사건으로 진주로 송환된 홍이는, 이를 계기로 불편했던 김두수와의 관계를 끝내고, 하얼빈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조직의 일을 계속한다. 여행 중에 하얼빈에 들러 우연히 인실을 본 조찬하는 인실로 하여금 오가다에게 아들의 존재를 알릴 것을 종용한다. 찬하의 아들 쇼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 오가다는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찬하에게 감사한다. 인실과의 계속된 만남을 간절히 바라는 오가다에게 인실은 일본이 망하는 날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홍이의 아이들인 상의와 상근은 진주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중학교에 다니나, 전쟁으로 수업은 거의 하지 못하고, 남학생들은 군사 훈련을, 여학생들은 간호 훈련을 주로 받는다. 상의는 완고하고 심술궂은 사카모도 선생과의 대립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나, 무사히 졸업하게 되고, 졸업 후에 홍이가 있는 만주로 갈 계획을 세운다.
이상현은 윤광오, 수앵 부부가 마련해 준 집에서 석이와 함께 기거하며 약간의 활동도 하나 때로 주정도 한다. 민족주의의 강한 유대감이 점차 바래져 가고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 가는 때에, 강 포수가 내력을 숨기고 기른 귀녀의 아들 강두메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자라나, 상현 같은 인물은 차후에 도태해야 할 반동분자로 생각한다.
조용하가 자살한 후 그의 재산을 상당히 상속받은 임명희가 희사한 돈 오천원의 사용처를 의논하는 중, 산(山)의 조직을 독립 후에 사회주의 운동 조직으로 키울 야심을 가지고 입산한 과격한 사회주의자 이범호와 산 사람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며, 산 사람들은 이범호를 경계한다.
일본의 히로시마에 신형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으로 조선에서의 피폭을 걱정하는 가운데, 서희는 길상이 사상범 예비 검거령에 의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서울로 식구 모두 올라갈 것을 결심한다. 상심해 있는 서희의 식욕을 위해 장에 가던 양현은 드디어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출처: 신지식/콩쥐와팥쥐>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성재봉/섬진강/악양들)
<사진출처: 지훈산악회/ 카페지기>
차대감님의 방문객들에게 자세한 설명과 어울러지는 덕담!
꼭! 예전에 최참판이 하인들을 불러 놓코는..
한해의 만석군의 농사일을 의논하는 대목 같습니다. ㅎㅎ 튼튼한~ 대들보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이 나무들은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 바쳐 줍니다.
모든것이 기둥이 실해야 합니다.집에서도 가장이 그렇듯이요.
항상 노력! 할려구.. 합니다. ㅎㅎ 황토 흙으로 빚은 흙벽.. 돌과 나무로 만든.. 한옥 초갓집... 참! 운치가 있습니다. 저곳에서.. 지금이라도 토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금방이라도 나올것 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