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상과 장인
글-德田 이응철(수필가)
장인은 교통사고 날 염려가 전혀 없다. 혈압도 걱정이 없다. 열이 오르면 종합병원으로 옮기라고 연락이 답지한다. 며칠간 입원을 하고 열이 떨어지면 다시 요양원으로 원위치 한다. 애인을 폭행하는 주폭한데 다가서서 말리다가 복부를 걷어채어 장 파열로 노상에서 사망할 확률은 없고, 고엽처럼 생이 쓰고 고독하다고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릴 수도 전혀 없다. 철저한 영양식단으로 영양결핍이란 말은 뒷전이요, 하절기라 강에 들어가 다슬기를 줍다가 익사할 이유도 전혀 없다.
재산이라고는 아내가 살고 있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니 자식들 재산 다툼으로 흉기를 휘두를 아무런 이유도 없고, 국내 11명이 사망한 주범 진드기에 습격을 받은 최근의 이슈도 해당이 없고, 막다른 골목에서 돈 가방을 강탈 당하고 목숨을 앗길 염려 또한 없다.
평안북도 희천이 고향인 장인어르신은 한국동란 때 남하해 늘 고향을 그리시다가 올해 구순을 막 넘기셨다. 매주 월요일 가요무대 시간에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는 꿈에 본 내 고향이 나오면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장인어른이시다.
아버님은 2년 전 노인 장기 요양 2급 자격을 획득해 이곳 춘천 시립요양원에 입소하시면서 온 식구들 대면을 크게 원치 않으셨다. 장모님이 어쩌다 방문하시면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 아니라, 딸만 오면 된다고 흡족해 하신다.
고령이신 장인은 항상 미소가 넘쳐 수녀님과 직원들은 그래서 항상 스마일 할아버지라 부르신다. 92세-. 졸수(卒壽) 또는 구순(九旬)을 넘기셨다. 장인어른은 불혹 중반에 서릿발 같은 풍이 옥죄어 눈 내리고 낙엽이 흩날려도 빗자루 한번 들지 못하고 최소한의 몸짓으로 집안에서 강물처럼 밀려오셨으니 그 생이 오죽하셨을까?
종일 어르신은 로댕의 작품 여섯 명의 칼레의 시민상을 닮아 가시며 하루를 서산에 힘겹게 밀어 넣곤 하셨다. 이런 생애에 불안과 공포 그리고 체념 속에서 꺼져가던 불꽃을 지핀 것은 시립 양로원 입소에서부터이다.
보기만 해도 고결한 수녀님들이 헌신적인 봉사로 맡은 시설이다. 지극히 청결한 요양원 구석구석, 다양한 프로그램 속에서 2년간 몸담은 장인어른은 어느새 본향에 당도하신 표정이다. 미소 지으며 일체 부족함이 없으시다.
천수를 누릴 곳이다. 며칠 전이었다. 저녁으로 갑자기 혈압이 높아 전화가 왔다. 속히 종합병원으로 옮겨 진단을 받으라는 엄명이다. 지체 없이 입원하고 일주일 후 다시 요양원 식구로 합류하니 애당초 사망이란 싹수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안전한 처소다.
후일담이지만 이런 요양원 생활에 진입하면서 당신의 애장품들을 급기야 정리하라는 생뚱맞은 유언을 했단다. 우산, 약간의 금붙이, 전용 T. V 등-. 일가친척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행여 마지막이 아닌가. 했지만 기우였다. 헤어질 때 모두는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담고 돌아갔다. 통일 되면 간다는 희천이 바로 여기임을 낙점 찍으신 것이다.
넘실대는 녹음방초 안마산 치마폭에 안긴 장인은 천수를 누리시리라. 이곳은 노인 천국이다. 천사가 되어 날개를 단 원생이 올해 단 한명도 없단다. 영혼을 맑게 해주는 수녀님들과 직원들이 거칠게 달려온 고령의 마라톤 주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신다.
어제 면회 갔을 때였다. 잇몸을 드러내시며 환히 미소 짓는 수녀님께서 바투 다가서 뜬금없이 날린 제안에 필을 받았다. 노인들께 사인펜을 들어 소중한 추억의 보고를 서슴없이 한 줄 보석처럼 쏟아놓을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초대하고 싶다고-. 놀랐다. 어쩜 주자의 결승 한계선에서 다시 뛸 수 있는 계속성을 이리도 끊질기게부여하는 그 눈빛이 더없이 숭고하였다.
이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수녀님의 야심찬 사업이 눈길을 끈다. 건강, 재활, 문화, 상담, 여가 종교, 효(孝)프로그램들이 너울성 파도처럼 물결쳐 온다. 상시 전시 또한 새롭다. 노인 분들이 정성껏 그린 크레파스화와 종이접기는 분명 신선의 손길이다. 나이 들면 아이들처럼 순수로 돌아감을 작품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항상 비단을 직조하시 듯 새로운 프로그램을 잉태하신다. 수녀님이 계시는 이곳은 무한 생명의 리필이다. 영육 간에 무릉도원이다. 사망이란 여린 싹수가 콘크리트 바닥처럼 견고해 뚫고 나올 수가 없다. 수녀님의 미소와 옥양목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 꺼져가는 생명들은 다시 용트림한다.
자식들의 배려로 이곳에 온 원생들은 삼시 세 때 더운 진지 드시고, 프로그램에 따라 운동하고 신앙으로 영혼을 달래신다. 최근 인기를 독차지하던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란 말도 이곳에서만은 발부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우두커니 석고상처럼 앉아 졸고 있는 독거노인들의 명(命)이 위태롭다. 이런 국가 시설에 수용된 미수와 구순의 혼미한 저들에게 현대과학이 죽을 기회조차 막아서고 있다. 길게 엿가락처럼 생명만 늘이는 것만을 최상으로 삼는다면 과연 그것이 대수일까? 반면 살아있는 자들의 또 다른 황폐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그들은 식물인간을 닮아가는 만년의 삶속에서 한껏 효의 기회를 부여함에 역기능은 없는가 돌아본다. 자식마저 칠순이 넘어 구순의 부친과 함께 요양하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혼미한 정신속에서 하루하루 생명만 연장함이 과연 최상일까! 사회 복지 정책을 돌아 볼 시점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따라온 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