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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다락골은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해발 791m 오서산 바로 밑에 위치해 있고"땀의 순교자" 최양업신부와 그의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 새터성지
최경환 성인, 최양업 신부 생가터
위치: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51-1
성지 입구까지 (3km) 도보 순례하며 묵주 기도를 바치다.
새터 성지를 지나 다락골 줄무덤 성지 입구에 다 다랐다..............
지형이 다락 같이 생겼다 하여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 해서
다래골로 불렸다 한다.
대성당 입구 전경 ................. 저멀리 성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것 같다.
오기선(요셉) 신부는 회고록 ' 곡예사 같은 인생' 에서 줄무덤에 대해 두가지로
증언한다.
대성당 입구.......................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사람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했던 최영천 노인등을
만나 직접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 오신부가 직접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대성당 입구................ 성모님 상
또하나는 1960년대에 공주에 살던 손 아오스딩 노인이
"청양 고개 넘어에 숱한 치명자 들의 묘가 있느니라 " 하며 공주 감옥뒤 황새바위
에서 약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 당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 넘어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발가락이 문드러 졌다고 증언하였다.
줄무덤 가는길.......................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의 순교자들의 묘가 여러줄로 있다.
하지만 이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
한 감시을 뚫고 훔쳐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구전을 통해 전해진다.
십자가의 길에서.......................
혹자는 공주에서 또는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도 있다.
십자가의 길에서.................. 제 1처
신해 박해때 부터 이어온 복음화의 씨앗은 이곳 다락골에 신앙촌의 결실을 맺었다.
십자가의 길에서.......................제2처
그러나 병인박해시절 이 교우촌 마저 발각되어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을 다
잡아가고 방화와 약탈을 감행하였다.
십자가의 길에서..............
이때 끌려가던 어린이가 울며 보채니 엄마가 ........
"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단다" 라고 말하며 달래었다한다.
십자가의 길에서.....................
이렇게 잡혀간 교우들이 홍주 (홍성) 와 공주 감영 에서 치명 당했으며, 가족과
친척들이 야음을 틈타 시체를 몰래 훔쳐 50여리 길을 산길로 업어다 황급히 줄을
지어 가족끼리 시신을 매장하였다.
제 1 줄무덤..............14기
제 2줄 무덤.....................10기
시신을 한 봉분속에 줄줄히 묻었다 해서 " 줄무덤" 이라고 부른다.
제 2 줄무덤..............10기
제 3 줄무덤..................13기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최경환 성인 생가터는 다락골 줄무덤으로 들어가는 길 못미쳐 1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1805년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난 곳이다
최경환 성인의 부친인 최인주는 12살때 어머니 경주 이씨를 모시고 1791년 진산
사태로 시작된 신해 박해를 피해 이곳 '샛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 성인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때 부터 천주교를 믿어
오던 집안이라 어려서 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 루드비코 ) 의 후손인 이성례와 결혼하여 최양업 신부를 낳았다.
최양업 신부님의 초상화
그래서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 이 멜라니아를 고모로 둔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로
인하여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는 진외 6촌 간이 된다.
청양 다락골에서 삼대째 신앙을 지켜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 마카오로 떠난뒤 고발을 빙자한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유랑길을 나선다.
수리산에 안장된 최경환 성인 묘
1839년에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최경환성인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체포되어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
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성체 조배실 문앞에 계시는 성모님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하길
"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
주께 바쳤다.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년)
우리나라 제 2대 방임사제.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결국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작
하여 성공하였는데, 사목 활동 12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하였다.
우리 후손들은 초대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정신을 2대 최양업 신부에
게서는 땀의 순교정신을 배울 수 있다.
後期
미사중.................... 신부님 강론 (11시 30분)
미사중................. 영성체
예수님..... 저희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체 조배실........................
무명 순교자 상................. 죽음과 부활
성당 내벽에 형상된 14처...............
제단 위에 계시는 팔이 없으신 예수님 상........................
제가 예수님 팔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성지 입구.............. 화성정류장.
일기예보에 남부지방에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간밤에 혹시나 해서 인터넷으로 남부지방 날씨를 지역별로 검색을 하였지만
비올확률이 더 많았다. 그것도 돌풍을 동반한 그런 비가 온단다.
그래서 우비에 모자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영등포에서 익산행 첫열차를 탔다
(첫차 05:53분 ) 보령 터미널에 08시 20분에 도착하였다.
청양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30분 간격) 화성읍에서 하차하였다.(30분 소요)
찌푸린 하늘에 빗방울이 간간히 뿌리기 시작했다. 비가 더 오면 우비를 입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고 성지순례하기 딱 좋은 가을날씨였다.
저멀리 누런 벼이삭 속에 허수아비가 춤을 추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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