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전공상 산엘 많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 山寺에서 신세를 질때도 적지 않아서 자연히 스님들과 사귀며 불도에 대한 귀동량을 많이 했다.
佛敎에 대한 많은 의문점이 있었지만 어려운 불교 문헌을 읽으며 해답을 얻으려 노력하진 않았다.
그러나 불도의 목표가 되는 해탈이나 열반(Nirvana)의 개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즉 해탈을 통해서 열반에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데 해탈이란 妄執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누구나 修道를 통해 쉽게 해탈을 경험해서 열반에 들어가는게 아니란다.
어떤이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영겁이 걸리고 어떤이는 간단히 찰라의 순간에 도달한단다.
찰라란 눈깜박 하는 사이이고 영겁은 태산의 바위위에 천년에 한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한번씩 스치고 지나 가면서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지는 시간이란다. 이런 불교의 비유적 표현들은 나를 상당히 매료시키는 개념들에 속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용어에 외형상 매우 가까운 기독교적 개념은 바로 회심(Conversion) 이고 열반에 해당하는 기독교적 개념은 영생이라고 할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도가 죽으면 천국에 갔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스님이 돌아 가시면 열반에 들어 가셨다 또는 입적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두 종교간의 외형상의 유사한 목표 때문에 종교는 다 같은것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똑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일부 종교인들은 종교 통합운동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불교의 해탈은 修道를 통한 것이며 기독교의 회심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
사실상 더욱 깊이 들어 갈수록 두 종교간의 목표와 진리의 차이는 점점 멀어져 간다.
한편 사회적 관점이나 도덕적 관점에서 본다면 두 종교의 목표가 별 차이가 없으며 모두 건설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를 추구하고 기독교에서는 큰사랑(Agape)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들 목표가 달성될때 사회는 진정 평화로워 질수 있다. 아니 달성은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추구만 해주어도 좋다.
그러한 대전제하에 요즘 종교계를 둘러보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좌경화된 이념적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정치와 정부 정책들에 일일히 간섭하려 드는 세속적 종교 지도자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무척 의심스럽다. 종교적 동기와 신념이 순수해야할 지도자들이 자기의 전공분야는 외면한채 종교적 지도력을 빙자해서 따르는 신도들을 혹세무민 하고 충동질이나 하는 인간들에게서 과연 해탈이니 열반이니 회심 또는 거듭남이란 "기본적 진리"의 개념이 그들 심중에 털끝만치라도 존재하기나 할것인가 ?
이런 사이비 종교인들을 지도자라고 따라다니는 신도들이 불쌍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