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리 날물치를 지나자 멀리 동악산 아래 고즈넉한 장기면 소재지가 들어온다. 찰방하게 물이 든 논에서 어린 모들이 뿌리를 내리고 산딸기 익어가는 밭마다 초여름 햇살이 쏟아진다. 뇌록()을 찾아가는 길, 옛날 궁궐이나 절의 건축물 단청을 칠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가칠의 재료였다는 뇌록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지녔을까?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등의 내전 공사기록지인 의궤(義軌)마다 장기현의 뇌록을 채굴해 조달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다. 유독 뇌성산의 뇌록이 나라의 명에 의해 진공(進貢)품으로 채굴된 이유는 무엇일까?
뇌록이 어찌 생겼습니까? 장기면 충효관에서 만난 금락두(71세) 선생께 여쭌 첫마디였다. 선생은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푸른색과 녹색이 묘하게 섞인 그것은 얼핏 돌멩이 같아 보였으나 아주 고운 흙이 굳어서 생긴 덩어리였다. 장기면 영암리에서 모포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에서 보이는 모포리(칠전) 뒷산인 뇌성산에서 구했다는 뇌록, 나는 그 자그마한 것의 발자취를 더듬어 긴 여행을 떠난다.
장기면 방산이 고향인 선생이 뇌록을 만나게 된 것은 고향 장기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80년대 무렵이었다. 당시 경북교육청에서 지역에 있는 자료들을 찾아 공부를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는 우연히 들었던 뇌록을 수소문 하던 중 놀랍게도 제자 중에 그것을 아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날을 잡아 모포리, 학계리 인근에 사는 남학생들을 데리고 현장 답사에 나섰다. 소 먹이러 산으로 들로 다니던 녀석들이라 길이 따로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산을 오르더니 제법 익숙한 솜씨로 땅을 파고 뒤졌다. 그리고 뇌록을 찾아냈다.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으나 어른들로부터 `뇌록` 또는 `매새` 라고 들었으며 뇌록을 채굴하는 곳을 `매사구디이` 혹은 `쉰구디이` 라고 부르고 있었다. 선생은 돌과 돌 사이의 흙 (매:매흙의 준말)이 끼인 것 같은 광물 (새:광석속에 금분이 끼어있는 잔 알갱이)이라는 의미에서 `매새`라 부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쉰구디이` 라는 말의 뜻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채굴 장소는 두 군데가 있었는데 우측 편은 깊이가 30~40미터 가량으로 패여 그 아래 조그만 소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좌편 돌무더기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터는 반대편 쪽 산 밑으로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엇비스듬 파내린 굴이 보였다. 세월이 흐른 탓에 온통 잔돌로 채워져 있어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폭은 약 7~8미터 정도로 넓었다. 파내려가면서 퍼올린 불룩한 흙무더기는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솟은 것 같았다. 그 위에 누군가는 묘를 써 놓았을 정도였다.
선생은 정녕 이것이 뇌록이 맞는지도 궁금했고 뇌록을 팠던 구덩이를 가리키는 이름 또한 궁금해 마을로 내려와 이일우씨를 찾아갔다. 그는 뇌록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뇌록 채굴 작업의 과정은 들을 수 없었다. 채굴 작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으며 필요할 때만 외부로부터 동원되어 오곤 했다. 어느날, 그것을 파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수런수런 전해졌다. 궁금한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 굴을 파던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시신 또한 볼 수 없었다. 다만 입구에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인 초배기만이 50개 놓여 있었는데 적어도 쉰 명은 무너진 구덩이에 갇혀 죽었을 것이라 여기고 그 후로 그 곳을 `쉰구디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뇌록지는 명주실을 두 줄로 겹쳐 돌을 매달아 넣으면 서너 꾸러미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제법 많은 물이 고여 있어 소 먹이던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뛰어 들어 헤엄을 치기도 했는데 매우 차가웠으므로 입술이 파랗게 물들어 금방 뛰쳐나오곤 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장사꾼들이 동네를 찾아와 뇌록을 수소문하며 구하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뇌록이 막연히 색칠정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뇌록터에 올라가 손으로 괭이로 캐서 모아 놓으면 장사꾼들이 와서 돈을 치르고 사갔다. 마을에 다녀 온 후 선생의 뇌록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기록이나 문헌을 달리 구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세월이 또 흘렀다.
1996년 1월24일, 경기대학교 고건축학 전공인 김동욱 교수와 일행 두 명이 물어물어 뇌록을 찾아 왔다. 그들은 문헌을 통해 뇌록이 유일하게 포항의 장기면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확인하기 위해 닿은 것이다. 한겨울의 오후 서너 시는 어둠이 급속히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달려 온 그들은 무엇보다 현장이 궁금했으므로 선생과 동행해 뇌성산으로 갔다. 예전보다 길은 더욱 험했다. 방목하는 염소들을 위해 울타리를 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그곳은 수북한 염소똥과 잡풀만이 무성했다. 15~20분 쯤 올랐을까? 현장에 닿았을 때 일행들이 놀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두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으론 연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한 번 그곳을 찾은 뒤 채취한 약간의 뇌록을 들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통의 편지와 뇌록을 분석해 색깔을 낸 견본을 하나 보내왔다.
.....(前略)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 뇌성산에서 채취한 약간의 뇌록 시편을 가지고 가루로 빻아 옛날 장인들이 하듯이 아교를 섞어 칠을 해 본 결과 아주 만족할만한 색깔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뇌록가루 약간과 시험적으로 해 본 칠을 재료로 해서 문화체육부 산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김동현 실장님을 찾아가 그간의 과정과 뇌성산의 현황이라든가 뇌록의 칠등을 보여준 결과 대단히 큰 관심과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뇌성산에서 채취한 뇌록이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사용하는 단청의 본래 색깔을 만들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