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타이어의 CF로 유명세를 탄 꼬불꼬불한 지안재길. 이 길은 실은 이보다 앞서 국제신문이 주최한 사진전에 처음 출품됨으로써 세간에 알려졌다. 작은 사진은 위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상림, 벽송사 산책로, 벽송사 도인송(왼쪽) 미인송 그리고 보물 제474호 벽송사 삼층석탑. | |
만추 함양은 볼 것이 무궁무진하다. 우선 상림. 함양읍내에 위치한 상림은 함양 사람들의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곳이다. 오죽했으면 생가보다 상림이 더 생각난다고 했을까.
올해 함양의 단풍은 예년보다 늦다. 지금쯤이면 황홀한 낙엽비가 흩날릴 때지만 올핸 단풍까지 감상할 수 있는 호사가 기다린다.
벽송사 역시 아직 단풍이 남아 있다. 도인송과 미인송, 대숲과 단풍이 엮어 내는 조화는 운치있고 아름답다. 나라땅 어디에서 이런 풍광을 볼 수 있을까.
바로 이웃한 서암정사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석굴법당이 숨어 있고 천년고찰 금대암에선 민족의 명산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일순간 사라진다.
함양의 옛 이름은 천령(天嶺). 하늘과 맞닿은 고개라는 뜻이다. 그 만큼 고봉준령이 넘쳐난다. 실제로 남쪽에는 지리산이, 북쪽에는 남덕유가, 서쪽으론 남덕유에서 뻗어내려오는 백두대간이, 동쪽으론 월봉 금원 기백 황석 거망산 등 내로라하는 산들이 포진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산은 함양에서 만추의 낙엽 명소로 상림이 뽑히는데 크게 불만이 없다.
함양읍내에 위치한 상림은 함양IC에서 차로 6분 거리의 평지 숲이다. 지도를 봐도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부산으로 치자면 최고 번화가인 서면이나 남포동에 위치한 것이다. 그것도 총 길이 1.6㎞, 너비 80~200m로 전체 면적이 무려 11만8800㎡(3만6000평)에 이른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 후, 그러니까 1100년 전 조성한 인공활엽수림이다. 당시 함양이 고을을 가로지르던 위천의 잦은 범람으로 물난리를 자주 겪자 최치원은 둑을 쌓아 물길을 돌리고 강둑에 나무를 심어 인공숲을 만들었다. 최치원 애민사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원래 이름은 대관림(大館林). 이 대관림은 이후 대홍수로 둑의 중간 부분이 파괴돼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어졌고 하림엔 마을이 들어서 지금은 숲이 거의 없다.
뭐니뭐니해도 만추 상림의 자랑은 단풍과 낙엽. 졸참 서어 작살 느티나무 등 낙엽활엽수 120여 종, 2만 여 그루가 빚어내는 형형색색의 단풍과 낙엽은 상상을 초월한다. 봄 한철 휘날리는 매화나 벚꽃의 꽃비보다 우수수 흩어지는 낙엽의 감동이 한결 진하게 다가온다. 최근에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희귀한 연리목(連理木)도 발견됐다. 안내판이 서 있다. 이 나무 앞에서 함께 기도하면 부부 간의 금슬이 더욱 두터워지고, 미혼일 경우엔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항상 주변엔 인파들로 북적인다.
숲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대략 1시간.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를 들머리로 산책로를 따라 최북단인 대형 물레방아에서 실개천을 건너 시계방향으로 돌아오면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숲 곳곳에는 이은리석불, 척화비, 고운 선생을 기리는 사운정(思雲亭), 김종직 정여창 등 함양 태생 또는 함양서 선정을 베푼 선비들의 흉상을 모신 역사인물공원, 디딜방아 연자방아 지압보도 등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최근에는 상림 옆의 도로를 폐쇄, 깔끔하게 조경을 새로 해 새 산책로를 조성했다.
내친김에 단풍과 낙엽 구경을 좀 더 하자. 목적지는 벽송사. 한국 선불교의 종가인 벽송사 진입로에는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아직까지 뭇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벽송사로 가는 여정 도중엔 놓쳐선 안 될 볼거리가 아주 많다. 잠시 살펴본다. 함양읍에서 남원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지리산 칠선 백무 오도재'라 적힌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오래 전 함양 사람들이 장터목으로 물물교환을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넘었던 길이다. 속리산 말티고개를 연상시키는 지그재그형의 지안재 정상에는 조그만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대개 여기서 사진촬영을 한다. 흔히 이곳은 얼마 전 한국타이어의 CF로 유명세를 탔지만 실은 이보다 앞서 국제신문이 주최한 사진전에 처음 출품됨으로써 세간에 알려졌다.
여기서 다시 꼬불꼬불한 도로를 재차 달리면 정확히 1년 전 준공된 '지리산 제일문'이 우뚝 서 있는 오도령 정상. 성곽 길이 38.7m, 높이 8m, 너비 7.7m, 문루 81㎡ 규모의 웅장한 '지리산 제일문'은 이제 함양의 랜드마크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지금이야 산청 남원 구례 하동 등지에서도 지리산으로 오를 수 있지만 이는 근래에 와서 생긴 길. 조선시대에는 오직 이 오도재를 통해서만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으로 갈 수 있었다.
'지리산 제일문' 바로 옆에는 산신각이 눈에 띈다. 신재효가 정리한 가루지기전에 따르면 오도령 정상에 위치한 이 산신각이 변강쇠와 옹녀가 세상을 떠돌다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함양군은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달 오도령 정상 주차장 주변에 변강쇠 옹녀 조각작품과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노래한 지리산 시비를 산책로와 함께 조성해 놓았다. 남녀 성기 모양으로 얼핏 보기에도 민망한 장승 108개와 솟대 33개 그리고 정여창 '지리산', 김일손 '두류산' 등 시비 15점이 전시돼 있다. 오도령에서 마천 쪽으로 가다 보면 지리산 조망공원을 만난다. 전망대 구실을 하는 지득정(智得亭)에 올라서면 총 길이 25.5㎞의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어지는 여정. 일순간 '칠선계곡 벽송사 서암'이라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 선교를 겸수한 108명의 대종장을 배출,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 불리는 벽송사는 한때 '벽송사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내려올 정도로 우리나라 선불교의 큰 획을 그었다. 한국전쟁 땐 지리산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돼 국군에 의해 방화되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절로 이어지는 진입로에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태 노랗고 빨간 단풍이 유난히 화려하게 빛을 발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목장승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비구니 선방인 벽송선원 뒤로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우선 시선을 빼앗는다. 왼쪽이 도인송(道人松)이고 오른쪽이 미인송(美人松)이다. 미인송 머리 위에는 솔잎이 떨어져 나간 가지가 마치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보물인 벽송사 삼층석탑과 한 화면에 잡히는 도인송과 미인송은 절경을 이룬다. 사람으로 치자면 선남선녀에 비유될 정도로 시원하기 그지없다. 혹자는 도인송 쪽으로 기운 미인송이 도인송을 유혹하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이웃한 서암정사도 빠뜨리지 말자. 한국 현대미술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석굴법당 때문이다. 석굴법당인 극락전에는 바닥을 제외한 벽과 천정에 아미타여래불과 지장보살이 조각돼 있다. 11년 간 불국토를 꿈구며 일군 주지 원응 스님과 홍덕희라는 석공의 불력이 이룬 결실이다.
지리산 전망대 금대암과 전나무
의탄교를 건너 다시 24번 국도로 돌아와 이번엔 '마천면, 남원' 쪽으로 향한다. 노란 은행나무잎이 도로변에 흩날린다. 그 유명한 부석사 진입로의 노란 은행나무가 전혀 부럽지 않다.
도로에서 2.5㎞ 정도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간다. 지리산 조망공원과 마찬가지로 주차장 끄트머리에 지리산 조망안내판이 서 있다. 봉우리 이름이 표시된 사진과 함께. 이 조망 하나만으로 금대암은 산꾼들에겐 필수 코스. 흔히 오도령의 '지리산 제일문'에서 출발, 삼봉산과 금대산을 거쳐 금대암으로 하산하는 이 코스는 지리산 조망산행지의 으뜸으로 손꼽힌다. 놓쳐선 안 될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다. 500년 된 전나무다. 경내 입구 대나무 난간에 둘러싸인 쉼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한 화면에 잡히는 늘푸른 나무이다. 성종 때의 문인 유호인의 시 '잘 있느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옛 같구나'에 나오는 바로 그 소나무과의 전나무가 바로 이 전나무 일 듯싶다.
외팔이 아저씨가 운영하는 '지리산 소문난 짜장' | |
함양은 독특한 맛집도 많다. 우선 지리산 흑돼지가 유명하다. 마천면 소재지에 두 곳 있다. 월산식육식당(055-962-5025)과 경남식육식당(055-962-5037). 둘 모두 집은 허름하지만 맛 하나는 끝내준다. 일교차가 심한 데다 청정수를 먹고 자라 육질이 아주 단단하고 한눈에 봐도 육질이 선홍색으로 싱싱하다. 1인분 7000원.
상림 인근의 늘봄가든(055-962-6996)은 오곡밥 정식 전문이다. 찹쌀 조 수수 흑미 등 오곡밥에 더덕 등 20여 가지의 반찬 그리고 된장찌개 꼬리곰탕 등이 한 상 가득 나온다. 한약재와 된장 등을 첨가해 독특한 맛을 내는 사태수육이 특히 별미다. 7000원. 역시 상림 인근 하늘바람(055-962-8700)은 상림 옆의 연밭에서 수확한 연(蓮)으로 만든 수제비 세트가 일품이다. 연근은 들깨 북어포 등으로 국물맛을 내고 연잎은 갈아서 반죽에 섞어 연둣빛을 낸다. 버섯 감자 등 각종 야채가 들어가 고소하면서도 맛있다. 연근조림 연근양갱 연잎차가 한 세트로 나온다. 7000원.
얼큰한 국밥을 원한다면 군청 인근 삼일탕 맞은편의 쇠고기 국밥 전문 대성식당(055-963-2089)을 찾아보자. 토란줄기를 듬뿍 넣어 국물이 한층 시원하고 담백하다.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마천면 소재지에 위치한 외팔이 아저씨 강상길(64) 씨가 운영하는 '지리산 소문난 짜장'(055-963-3799)이 곧 문을 닫는단다. 가게의 일부가 소방도로 부지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외팔로 자장을 볶고 면을 삶는 그는 '나의 프로인생은 끝나지 않았다'(국제신문 출판)를 썼으며 이를 계기로 모 방송의 '이것이 인생이다'에 출연해 전국적인 관심을 끈 의지의 한국인. 지리산을 찾는 전국의 산꾼들의